인천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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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이씨'''
}}}
'''관향'''
인천광역시
'''비조'''
김수로 (金首露)
'''시조'''
이허겸 (李許謙)
'''집성촌'''
충청북도 영동군
충청북도 보은군
충청남도 청양군
전라남도 보성군
전라남도 장흥군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경상남도 함안군
경상남도 합천군
'''인구'''
83,996명(2015년)[1]
'''링크'''
인천이씨대종회
1. 개요
4. 역사
5. 항렬표
6. 분파
7. 출신 인물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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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재 인천광역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김해 김씨 계열 성씨다.
이름처럼 시조 묘소가 인천광역시에 있다. 고려 초기에는 인천이 '인주(仁州)'로 불렸고, 고려 말기인 공양왕 초기에 경원부(慶原府)로 승격되었기에 옛날에는 '인주', '경원' 이씨라고 불렸다.[2] 그래서 가끔 본 위키나 다른 문서에 인주 혹은 경원 이씨라 적혀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인천 이씨와 같은 본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려 시대때 약 80년간 대대적으로 10여 명의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기도 하며, 고려 충선왕 이후의 재상지종 15 가문 중 하나이다.
현재는 대구광역시[3]경상남도[4], 전라남도쪽에 비교적 많이 사는 편이다.

2. 시조


시조는 고려 현종상서좌복야를 지낸 이허겸(李許謙)이다.[5] 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척연(戚緣)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 중추적 인물은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이다. 그의 딸 셋이 모두 문종의 왕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고 최고 직위인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그의 맏딸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소생들인 순종·선종·숙종이 차례대로 왕위를 이었고, 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도 인예태후의 소생이다.

3. 분가


분가로는 조선초 유명한 무신인 이징옥의 양산 이씨[6]가 있으며, 이징옥의 형인 이징석은 양산 이씨 가계를 이어갔으나 역모사건후 이징옥의 막내아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후 순조 때 다시 나온뒤로 그 후손은 인천 이씨로 다시 편입되었다.[7] 인천 이씨 대종회 일부에서 주장하기로는 흥양 이씨와 함안 이씨도 인천 이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하나, 명백한 근거는 없다. # 흥양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면 인천 이씨도 경주 이씨에서 분적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흥양이씨와 경주이씨 간의 관계, 흥양이씨와 인천(인주)이씨 간의 관계). 함안 이씨는 인천 이씨에서 분적했다는 사실을 연대적 오류를 들며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천 이씨와 함안 이씨에 공통으로 나오는 이방실 장군은 여주 이씨 경주파(진사공파)[8] 5세로 이름이 거꾸로 나온 실방(實芳)으로 적혀 있다.

4. 역사



4.1. 고려시대 이전


인천 이씨는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로 전한다. 수로왕의 장남은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아 김씨가 되고, 차남과 삼남은 어머니 허황옥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 이씨는 허씨에서 갈린 분적종(分籍宗)이다. 허황옥의 23세손 허기(許奇)가 신라 경덕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는데, 때마침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고(755년) 이때 현종을 호위한 공으로 황제와 같은 성인 이씨를 사성받았다. 당시 그는 이씨와 허씨를 합쳐 '이허'를 성씨로 사용하였는데, 그의 10세손 '''이허겸(李許謙)'''이 바로 인천 이씨의 시조이다.[9] 이허겸은 고려 현종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에 올랐고, 소성현(邵城縣)에 식읍(食邑) 1천 5백호를 하사받았는데, 그곳이 현재의 인천이며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태인 허씨 족보(1918)[10]에는 위와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 태인 허씨의 시조는 수로왕보주태후의 30세손 허사문(許士文)인데, 그는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장남 허즙(許楫)과 차남 허도(許棹)를 낳았다. 형인 허즙은 태인 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는 고려 왕조에 의해 '이'라는 성씨와 '허겸'이라는 이름을 내려받고 소성백에 봉해졌으며, 이로 인해 인천 이씨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4.2. 고려시대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날마다 수 만근의 고기가 썩어갔다."'''

.

.

.

('''이자겸'''의)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으며''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자기의 물건에 실어 나르니..''

- 고려사 일부 발췌 [11]

고려전기에 대를 이어 세력을 점차적으로 키운 문벌 귀족중에서도 최고 권력을 가진 가문이 바로 '''인천 이씨'''였다. 고려 시대 당시에 인천 이씨 가문과 대적할 수 있는 집안이 없었을 정도. 유일하게 하나 있다면 왕실일 정도로 한 때에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집안이였다.
이 성씨의 시조인 이허겸부터 고려 초기의 권세가로 세력을 떨쳤고, 아들인 이자연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의 증손자 이자의계림공 왕희와 대립하다가 암살당하면서 한동안 위기를 맞았지만, 또 다른 증손인 '''이자겸'''이 가문의 수장이 된 후 권세가 극에 달했다. 이에 이자겸은 자기 스스로 국공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었고, 심지어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칭했을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 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자겸이 꾸준히 자기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들이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고려 최고의 외척 문벌귀족 세력이던 인천 이씨는 조선시대 때는 문과 급제자가 아홉 명이 있었다.[12] 고려 문종의 부인이 인천 이씨이며, 조선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파평 윤씨의 어머니가 인천 이씨이다.
이 집안에서 본격적으로 왕과 사돈관계를 맺기 시작한 이자연[13]은 당시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도 아니고, 과거 문과로 시험쳐서 관직에 들어서 최고위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오른 실력파 인재였다.
기타 주요 인물로는 고려 무신 집권기 초기의 문학자로 파한집 등을 저술한 한림원학사를 지낸 이인로, 고려말~ 조선초에 형조판서, 대사헌, 참찬의정부사를 지낸 공도공 이문화 등이 있다. 이문화는 세조정희왕후의 외조부다.

4.3. 현재


고려 시대에 비하면 2015년 기준 전국 인구 조사에서 전국에 약 83,855명이 사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과거 화려하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적은 숫자. 이씨 성 치고는 드물게 알려진 지역 출신 인물이 많지 않다.
아마도 고려중기(이자의, 이자겸)부터 조선초기(이징옥)에 걸쳐 본가나 방계에 걸쳐 여러차례 역모사건에 휘말린 결과로 가세가 크게 위축된 것이 원인으로 파악된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 과거 급제자가 통털어 9명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문이 쇠락하였다.
시조인 이허겸의 묘려(墓閭)인 원인재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2동에 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위치한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수인선 원인재역이 여기서 이름을 땄다.

5. 항렬표


인천 이씨는 현재 각파가 통합된 대동 항렬표를 쓰고 있다.
'''31세'''
○상 | ○희
'''32세'''
병○ | 근○
'''33세'''
○희 | ○욱
'''34세'''
재○ | 준○
'''35세'''
○하 | ○은
'''36세'''
현○ | 련○
'''37세'''
○수 | ○태
'''38세'''
동○ | 병○
'''39세'''
○연 | ○휴
'''40세'''
중○ | 재○
'''41세'''
○진 | ○수
'''42세'''
호○ | 기○
'''43세'''
○식 | ○주
'''44세'''
찬○ | 병○
'''45세'''
○균 | ○규
'''46세'''
광○ | 정○
'''47세'''
○호 | ○옥
'''48세'''
연○ | 윤○
'''49세'''
○림 | ○동
'''50세'''
현○ | 경○

6. 분파


  • 시중공파 (侍中公派): 시조의 8세 이작신(李作臣)
  • 공도공파 (恭度公派): 이문화(李文和)
  • 쌍명재파 (雙明齋派): 시조의 7세 이인노(李仁老)
  • 충강공파 (忠剛公派): 이징옥(李澄玉)
  • 태암공파 (苔巖公派): 이용범

7. 출신 인물



8. 같이보기


  • 인천광역시
  • 고려시대
  • 문벌귀족
  • 이자겸의 난
  • 안동 김씨 - 고려시대에 경원 이씨 문벌귀족이 있었다면 조선시대에 대응되는 척족은 안동 김씨가 있다. 이자연은 정조의 충신 김조순에 비견되는 명망과 훌륭한 인품을 가진 문종의 충신이었으나, 후손들이 국정 농단한 것까지 똑같다.[14]
[1] 인천 이씨 83,855명 + 인주 이씨 141명[2] 본관 이칭은 경원 이씨(慶源 李氏) → 인주 이씨(仁州 李氏) → 인천 이씨(仁川 李氏) 순으로 바뀌었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인주, 경원이다.[3]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과 동서변지구에 인천 이씨 집성촌이 있었다. 현재 동서변동은 택지지구로 개발되었고, 연경동은 개발 준비 단계라 거진 초토화 됐으나, 여전히 주변에는 인천 이씨가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있다.[4] 경상남도 창녕군의 가항리 인근에 시중공파를 중심으로 한 인천 이씨 집성촌이 있다. 또한 창원시 진해를 중심으로 공도공파 후손들이 꽤 있다.의령군에도 인천 이씨 집성촌이 모여있다.[5] 고려 때 현종의 장인이 된 김은부의 장인이기도 하다.[6] 양산 이씨도 한자가 다른 두 가문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梁山으로 쓰는 가문이 있고, 陽山으로 쓰는 가문이 있다. 후자인 경우는 공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며, 양산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을 가리킨다.[7] 인천이씨대동보 1982년판에는 나타나지 않고, 2009년판에 충강공파의 이름으로 등장한다.[8]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 선생이 속한 계파로, 그는 경주파 11세이다.[9] 기(奇) - 검(儉) - ○ - ○ - 파(波) - ○ - 귀(貴) - ○ - 준(浚) - 겸(謙). 인천 이씨 대동보(1982, 열람 시 로그인 필요)[10] 열람 시 로그인 필요[11] 당시 고려 시대인천 이씨의 권력을 알 수 있는 부분. 이자겸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권력을 악용한 부정부패로 당시 백성들은 큰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갔다.[12] 대과 급제자를 말하는 것임, 진사시, 생원시는 예외.[13] 이자겸의 조부. 사실 이자연 이전엔 왕과 직접적으로 사돈관계를 맺지 않았다. 굳이 기원을 찾자면 이허겸이 현종의 왕비들 중 3명의 아버지인 김은부의 장인이긴 하지만.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과 결혼시켰는데, 이 중 장녀가 인예태후다.[14] 비슷한예로 해주 최씨풍양 조씨에 비유할수 있다. 1위 가문인 인천 이씨와 안동 김씨가 무너지자 1위로 등극한 가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