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교 덴노
1. 개요
일본의 제19대 천황. 이름은 오아사즈마와쿠고노스쿠네노미코토(雄朝津間稚子宿禰尊).
왜국전에 나오는 왜5왕 중 제(濟)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닌토쿠 덴노의 4남으로 어머니는 카쓰라기노 소쓰히코의 딸인 이와노히메노미코토(磐之媛命)이며, 리추 덴노, 한제이 덴노의 남동생이다.
2. 행적
410년 1월, 형 한제이 천황이 후사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였기에 군신들이 상의해 오아사즈마와쿠고노스쿠네노미코토를 '오키미(大王)'로 추천하였다. 미코토는 병을 이유로 거절하였지만 412년 12월, 오시사카노오나카쓰 공주의 강한 요청으로 즉위하였다.
413년 8월 신라로부터 의사를 초빙해 병을 치료하였다.
415년 9월, 여러 성씨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아스카의 아마카시노오카에서 구가타치(盟神探湯)를 실시하였다.
416년 7월, 다마다노스쿠네(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손자)가 반역을 꾀하자 주살하였다.
418년 12월, 황후의 누이인 소토리 공주를 입궁시키지만, 황후의 미움을 사 후지와라궁(나라현 가시하라 시)에 살게 하였다.
419년 2월, 소토리 공주가 황후의 질투를 이유로 지누궁(오사카부 이즈미사노 시)로 옮겼다.
435년 6월, 키나시노카루 황태자와 여동생 카루노오이라츠메와의 근친상간이 발각되어 카루노오이라츠메를 이요에 유배하였다.
453년 1월 사망해 에가노나가노노키타 능 (恵我長野北陵)에 묻혔으며 이 소식을 들은 신라의 왕이 슬퍼하며 조문을 보냈다고 한다.
3. 기타
26대 케이타이 덴노로부터 이어지는 왕조가 백제와 무척 가까웠더 것과 달리 인교 덴노는 신라와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박제상의 사망년도를 보면 이 사람의 재위시기인 419년으로 되어있다. 이 때문에 신라나 일본 사서에 연도 오류가 있거나, 박제상을 살해한 왜왕이 야마토 정권 세력이 아닌 다른 부족 세력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4]
인교 덴노는 거동이 불평하다는 기록이 있어서, 뇌출혈이나 중풍 같은 성인병에 시달린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한제이 덴노의 동복형제로 기록 되어 있다.
4. 가계
- 황후 : 오시사카노오오나카츠히메(忍坂大中姫) - 왕비 소토오시이라츠히메(衣通郎姫)의 언니
- 장남 : 키나시노카루노미코(木梨軽皇子)[5]
- 장녀 : 나가타노오오이라츠메노미코(名形大娘皇女)
- 차남 : 사카이노쿠로히코노미코(境黒彦皇子, 401 이전~456)
- 3남 : 일본 제20대 안코 천황(安康天皇, 410?~456)
- 차녀 : 카루노오오이라츠메노미코(軽大娘皇女)[6]
- 4남 : 야츠리노시라히코노미코(八釣白彦皇子, 401 이후~456)
- 5남 : 일본 제21대 유랴쿠 천황(雄略天皇, 418~479)
- 3녀 : 타지마노타치바나노오오이라츠메노미코(但馬橘大娘皇女)
- 4녀 : 사카미노히메미코(酒見皇女)
- 왕비 : 소토오시이라츠히메(衣通郎姫) - 황후 오시사카노오오나카츠히메(忍坂大中姫)의 여동생. 키나시노카루 황자와 밀통했다고 한다.
[1] 일본서기.[2] 고사기.[3] 송서[4] 일본은 고대국가의 중앙집권체제가 한민족 계열 국가보다 느렸다.[5] 원래 황태자였으나, 친동생인 카루노오오이라츠메와 정을 통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인교 천황 붕어 후 실각하고 유배를 감. 그 후, 그 뒤를 쫓아온 가루노오오이라쓰메와 함께 자살함. 고대 일본에서는 이복형제/이부형제는 돼도 친형제는 허락되지 않았다.[6] 매우 미인이었다고 한다. 친오빠인 기니시노카루노미코와 정을 통해고, 인교 천황 붕어 후 실각한 기니시노카루노미코는 유배를 갔으나 그 뒤를 쫓아 함께 자살함. 일본서기에 아름다웠다고 서술된 자는 공주 외에 거의 없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