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토쿠 덴노
1. 개요
일본의 제16대 천황. 당시의 태자였던 이복동생 우지노와키이라쓰코 황자와 서로 천황의 자리를 양보했지만 나중에 태자가 자살한 까닭에 천황의 지위에 올랐다. 오사카의 다카쓰 궁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오사카 일대에 하천과 제방 공사, 둔창의 설치 등 많은 토목공사를 실시하는가 하면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 세금 면제를 하도록 해 성군으로 추앙받았다. 일본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 다이센 고분이 바로 그의 능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2. 행적
닌토쿠 덴노는 '인덕(仁德)'이라는 이름 그대로 ‘어질고 덕이 있는 천황’으로 전승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저녁 무렵 밥을 지을 때가 되어서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지켜본 닌토쿠 덴노는 백성의 곤궁함을 알고 3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조치를 취해 백성들로부터 성제 · 성군이라고 칭송되었다. 또한 나니와의 인공하천 공사, 간규 지역의 대규모 도랑 공사, 만다 지역의 제방 건설과 둔창의 설치, 요코미 제방의 축조 등 오사카 평야의 대대적인 개발과 농업발전에 관련된 많은 전승을 남기고 있다.
한편으로, 닌토쿠 덴노에게는 성군의 이미지 이외에도 또 다른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오토리 황녀에 대한 구혼이 이와노히메노미코토 황후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고, 황후의 심한 질투로 인해 고민하는 등의 인간적인 모습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닌토쿠 덴노와 관련된 성군 · 성제 전설은 허구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거대한 고분을 조영한 전제군주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 닌토쿠 천황을 왜5왕 가운데 찬(讚) 왕 또는 진(珍) 왕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으며, '''닌토쿠 왕조'''의 개조(開祖)로 보는 설, 오진 덴노와 닌토쿠 덴노를 동일 인물로 보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6]
3. 실존성
그의 시호는 26대 케이타이 덴노의 시호와 마찬가지로 고유의 시호이며, 전해지는 여러 내용들로 보아 실존인물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오사카 지역과 관련된 여러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그의 능이 오사카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볼 때 오사카 일대 출신으로 추측된다.
4. 다이센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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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부 사카이 시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큰 고분인 다이센 고분은 닌토쿠 덴노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닌토쿠 덴노의 부인인 이와노히메 황후의 무덤은 나라 시의 사키 정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고분의 특징은 열쇠구멍 모양을 하고 있으며 물로 채워진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천황의 무덤은 황실과 관련된 업무를 관할하는 궁내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궁내청에 따르면 천황의 무덤은 단순히 역사적인 유물이 묻힌 장소가 아니라 신성한 종교적 장소이다. 궁내청은 각각의 무덤들을 조상들의 영혼을 위한 성역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다이센 고분이 닌토쿠 덴노의 고분이 아니라는 추측도 있다.
2020년 12월 기준 다이센 고분의 모습. 고분 내부로는 입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공원길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5. 기타
금관가야와 고대 야마토 왕권의 관계를 추적한 최인호의 소설 <<제4의 제국>>에서도 인덕릉이 등장한다. 최인호에 따르면 해당 무덤은 메이지 시대인 1872년 9월 7일에 불어닥친 폭풍우로 봉분 토사가 붕괴되어 묻혀 있었던 석관이며 부장된 유물들이 바깥으로 노출되었으며, 그때 궁내청 소속의 화가가 사카이 현령의 명을 받아 당시 노출된 석관과 출토된 유물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나온 유물 중에는 갑주나 무기는 물론 페르시아산 유리잔도 있었다는 듯. 나온 유물들은 조사 뒤에 다시 원래 봉분 안에 넣었는데, 그 와중에 환두대도, 삼환령, 칠자경 등의 유출된 유물들이 4점 있어서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오카쿠라라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지금은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해당 유물들의 사진은 사카이 박물관에 걸려있으며 '전(傳) 인덕릉 출토품'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고 한다.
또 '인덕의 조야릉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석관의 개석(蓋石)이 사카이 만도코로(政所) 정원의 답석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에도 시대의 아라이 하쿠세키의 전집 기록을 제시하며, 이전에 무덤은 한 번 도굴당했던 적이 있으며 범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추정했다.[7]
6. 가족관계
- 황후 : 이와노히메노미코토(磐之媛命) - 342년 쿠마노에 놀러간 사이 닌토쿠 덴노가 야타노히메미코(矢田皇女)를 입궁시킨 일에 격노해 천황과 별거해 버리고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별거까지 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황후치고는 드물게 질투심이 강한 부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 황후 : 야타노히메미코(矢田王女) - 오진 덴노와 미야누시야카히메 사이의 왕녀로 이와노히메노미코토 황후가 죽은 뒤 황후가 되었다고 한다. 즉 오호사자키와는 형제다.
- 비 : 히무카노카미나가히메(日向髪長媛)
- 오오쿠사카노미코(大草香王子, ?~454)
- 쿠사카노하타비노히메미코(草香幡梭王女) - 유랴쿠 덴노의 황후
- 비 : 우지노와키이라츠메(宇遅之若郎女) - 오진 덴노의 딸로 오호사자키와 형제다.
- 비 : 쿠로히메(黒日売)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휘(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고사기[4] 일본서기 [5] 만엽집[6] 정설로는 닌토쿠 천황의 세금 면제로 살림이 펴 기뻐한 백성들이 천황이 죽고 그의 능을 조성할 때, 앞장서서 각자가 많은 흙을 가지고 달려와 능에 뿌려 오늘날의 대고분이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7] 소설에서는 1684년 사카이에서 발간된 가장 오래된 지리지라는 <계감(堺鑑)>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따금 이 능에 들러서 대규모의 사냥을 하였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과 다회(茶會)를 베풀었다."라는 기록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