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왕

 


1. 개요
2. 내용



1. 개요


중국에서 일본의 통치자에게 책봉을 할 때 부여했던 왕호.

2. 내용


일본이 자국을 지칭하는 말로 일본을 쓴 것은 7세기 전후의 일이지만 전통적으로는 위노국(委奴國)이나 위(委)에 사람인 변을 붙인 왜노국(倭奴國) 등으로 지칭하였고 한나라 때 하사한 금인에도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는 명문이 확인되고 있다. 보통은 줄여서 왜국(倭國)이라고 하였고 책봉할 때에도 왜왕(倭王)이란 책봉호를 사용하였다. 당나라 이후 조공책봉 질서에서 벗어나면서 왜국이나 왜왕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일본이 대내외적으로 표방한 일본이라는 명칭이 주가 되게 된다.
보통 천황이 일본국왕에 책봉되지만 실권자가 책봉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이다. 명나라로부터 감합 무역을 허가받고 일본국왕에 책봉되어 쇼군의 권위가 천황을 뛰어넘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반도와 달리 일본은 섬나라라는 특성으로 인해 한반도 국가들보다 사대에 무관심했지만 그들도 무역 등의 실리적 이유를 위해 스스로 일본국왕에 책봉해달라고 요청힌 것이다.
국학의 성행으로 천황을 떠받드는 존황사상과 국수주의가 퍼져나가면서 메이지 시대 이후로는 일본국왕 칭호를 스스로 받은 것에 대해 사대주의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일본국왕 칭호를 받은 요시미츠도 "천황을 능멸했다", 외세에 굴종했다 등의 악평을 받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조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자신 3대의 목상이 참수되어 길바닥에 효수되었다.
재밌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칭송을 받았는데 에도시대 유학자, 병법가들에 의해 강화회담을 파탄냈다고 알려졌고 '천황을 능멸했다는' 에도 막부의 대적이란 이미지 덕분이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도 임진왜란 중 강화회담을 하면서 일본국왕에 임명되고 관복, 도장, 칙유문을 받았다.[1] 현재까지도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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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가 명나라에서 받은 일본국왕 곤룡포. 현재 교토박물관 소장중.
[1] 심지어 임진왜란일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감합무역의 재개라는 설이 있으며 실제로도 도요토미가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도 감합무역의 재개인데 감합무역은 기본적으로 책봉국-조공국 관계의 사고가 깔려 있으며 당연히 중국이 책봉국이고 그 외 다른 나라들이 조공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