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룡포
1. 개요
임금이 시무복으로 입던 옷. 수나라 이후 고려, 조선, 베트남, 류큐국의 황제, 국왕, 황태자, 왕세자 등이 착용하던 단령 형식으로 된 웃옷이다. 한국인들이 흔히 '군주가 입는 옷'이라 하면 떠올리는 옷이 바로 곤룡포이다.
사실 곤룡포는 군주, 또는 상공(上公)이 입는 용 문양이 들어간 옷을 의미하고 곤복, 곤의, 용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즉, 면류관을 쓸 때 입는 면복도 곤룡포로 부른다는 이야기로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용포들은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입는 옷으로 상복(常服) 또는 익선관과 함께 착용한다고 하여 '익선관복'으로 부르기도 한다.
용은 동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매우 성스러운 동물인데, 제왕은 하늘의 대행자이기 때문에 용으로 비유를 하였다고 한다.[2] 노란색, 또는 붉은색 비단으로 지었고, 황색 단(緞)이나 사(紗)에 붉은색 안을 넣었으며, 가슴, 등, 양어깨에는 보(補)라고 하는 금실로 수놓은 오조룡이나 사조룡을 붙였다고 전한다.[3][4]
2. 한국의 곤룡포
2.1. 고대 ~ 중세 왕조
649년 신라 진덕여왕이 중국식 의관을 채택한 이후 신라~고려 시대 임금들은 단령을 입었다고 전한다.
마찬가지로 발해에서도 단령을 입었던 것 같다. 중국 기록인 책부원귀에는 대력 8년(773년)에 발해의 질자(質子)로 당에 머무르던 대영준(大英俊)이 당대종의 곤룡포를 훔쳤다가 잡혔는데 "'''중국의 문물을 너무 사랑해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라고 대답하자 황제가 풀어주었고 이듬해 발해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를 지향하였기에 태조는 황제만이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쓰는 등 황제의 의복을 착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는 건국 초부터 '''자황포(柘黃袍)'''를 입었다고 하는데[5] 이는 황색 곤복이긴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용보가 붙여져 있는 그런 곤룡포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곤룡포는 명나라 이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문종 12년(1058) 4월 때 문종이 신하에게 군주의 의복 색에 질문하자 신하는 "'''지금 입는 황색과 홍색 의복 말고는 입을 수 있는 의복은 없다.'''" 대답하는 기사가 있다.[6] 의종 대에는 여러 황실 행사에는 자황포(赭黃袍), 연등행사에는 치황의(梔黃衣)를 입는다고 상정한 바가 있다.
고려사 원종 세가(재위 10년 1269년)에 따르면 원종은 임연에 의해 밀려난 뒤 복위 시도를 하며 자줏빛 옷을 입다가 이후 황색 곤복을 입고 신하들에게 하례받으며 복위했다고 한다.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뒤 충렬왕은 몽골의 예를 따라 지황색(芝黃色)의 옷을 입으려 했지만 "딱히 의복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7] 는 말을 듣고 다시 황포를 입었다고 한다[8] .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1450년) 윤 1월 7일의 기록으로 보면
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69년(공민왕 18년)부터 고려왕도 우리에게 익숙한 명나라식 곤룡포를 입게 되었으며, 이것이 조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9]"홍무 2년에는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께서 공민왕(恭愍王) 전(顓)에게 구장 면복(九章 冕服)을 하사하셨고..."
고려사 예지 책태후의에 따르면 공민왕 21년인 1372년 1월에 공민왕이 황포(黃袍)와 원유관(遠遊冠)을 착용하고 어머니를 명덕태후로 올렸다고 한다. 이를 보아 공민왕은 명의 제후식 의복을 착용하는 동시에 고려의 천자식 의복도 같이 입은 듯하다.
조선 숙종 조의 기록에 '고려가 푸른빛을 숭상해 조선 태조도 푸른 곤룡포를 입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기부터 청룡포를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영정이 첨배(瞻拜)한즉 태조 대왕께서 입은 곤의(袞衣) 빛깔이 푸르니, 예복(禮服)이 아닌듯하다. 혹시 국초(國初)에 복색(服色)을, 푸른빛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이르기를, ‘고려(高麗)에서는 푸른 빛을 숭상하였다.’고 하니, 태조조(太祖朝)는 고려와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더러는 푸른 빛으로 곤의(袞衣)를 만들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2.2. 조선 왕조
2.2.1. 왕
곤룡포를 입을 때는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옥대(玉帶)를 매며, 목화(木靴)를 신었다. 여름에는 대홍사(大紅紗) 곤룡포를 주로 입었는데,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는 주로 빨간색이었다.
이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향이 큰데,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1594) 12월 25일 기사를 보면
라고 되어 있어 기본적으로 명나라에서 천자의 곤룡포는 세계의 중심이란 의미에서 황색이었고, 그 제후왕의 곤룡포는 붉은색이었다."《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황제·황태자와 친군왕세자(親郡王世子)는 모두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는데 황제의 곤룡포는 황색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적색인 것으로 되어 있고....... 면복(冕服)은.... 위로부터 세자에 이르기까지 그 제도가 대개는 같고 단지 장수(章數) 및 물색(物色)의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곤룡포 서열에 대해 황색>>넘사벽>>적색>청색 순서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조선왕조에만 통용되는 말이다.[10] 이유는 조선왕조의 임진왜란이후의 왕은 적색, 왕세자는 청색, 중국 왕조의 색상은 황색으로 인해 생긴 문화이고, 실제 명은 용포의 색이 아닌 용보의 용이 오조룡이냐, 사조룡이냐에 따라 나뉘었다.[11] 만력제의 붉은색 곤복용포도 그렇고, 청나라 왕조에서도 옹정제등은 황제가 청색 용포를 입었었다. 당나라 왕조는 나무위키에 나온 어진을 보면 황제에 따라 황색, 청색, 적색, 흑색 등 곤룡포의 색상이 다양하다.
홍룡포를 입기 시작한 것은 세종대왕 26년(1444)부터다. 이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에서 나온 바와 같이 파란색이었는데, 이는 홍무제가 조선과의 기싸움 때문에 이성계에게 고려 왕 대행이라는 뜻을 가진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만 내리고 바라던 조선국왕 책봉을 안 해준 게 발단이다. 조선국왕 책봉은 1401년 건문제가 태종 이방원을 정식으로 책봉한 이후부터였으며, 이후 세종 시대부터[12] 새 왕이 즉위하면 명나라 쪽에서 단령과 단삼團衫[13] 을 내려줬지만 양란 이후 명나라가 쇠퇴하고 조선도 혼란에 빠지면서 알아서 만들어 입게 되었고, 단삼은 원삼으로 바뀌게 된다.
세종 26년(1444) 기사를 보면 구장복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입는 옷(상복常服/일상으로 입는 곤룡포) 및 그에 갖추어야 할 모든 부속 장식품까지 일습을 내린다.
또한 세종 32년(1450) 기사를 보면 사대홍직금곤룡암골타운포(紗大紅織金袞龍暗骨朶雲袍), 나대홍직금곤룡포(羅大紅織金袞龍袍)라는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 홍직(紅織)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즉 붉은 색으로 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붉은색 곤룡포를 입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태조어진을 보면 청색 곤룡포를 입고 있다. 태조 어진 중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초상화도 남아있지만 이것은 후대인 1837년에 모사된 것으로, 헌종이 당시 시대상에 맞게 붉은색 용포로 그리라고 지시한 것에 따른 것이다. 태조가 생전에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근거는 남아있지 않다. 사극 중에서는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가 처음에는 청색 곤룡포를 입다가 나중에 홍룡포를 입는 것으로 설정했다.
한편 왕의 남자에서는 연산군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청색 곤룡포를 입는 것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적 허구이며 실제 연산군은 붉은 색 용포를 착용했다고 본다.
2.2.2. 왕세자
조선 시대 왕세자의 용포는 세종 31년 사조룡을 결정하고 여러차례 세자의 복식을 명에 요청했으나 얻지 못했고, 성종 14년이 되어서야 옷감이 내려왔다고 한다. 중종 17년 때 7월 17일 기사에 이전부터 아청색을 입었다는 대목이 있으나, 고려 때 세자 복식이 이어온 것이란 해석도 있다.
반몉 중국에서 복식을 받아오는 일이 잦아진 선조 때까지는 이전부터 계속 붉은색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은 책봉을 늦게 받아 곤룡포가 아닌 오사모에 흑포를 입게 하였는데, 책봉 뒤에 검은색 또는 아청색[네이비색에 가까운]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세자의 옷색깔이 아청색으로 확실하게 변화된 것은 현종 즉위년(1659) 5월 9일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조사왕(嗣王)이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검정 곤룡포를 입고 규(圭)를 받들고 여차에서 나오자....
- 현종실록
현종은 세자인 후일의 숙종의 의복에 관심이 많아 현종 8년에도 세자의 복식을 논의한 바가 있다. #
세종 대 국조오례의에서 왕이 졸곡 전에 아청단령을 입었음이 기록되었으며, 세자는 초록색을 입다가 성종 대부터 아청단령을 입었다.
조선초기에는 세자는 익선관이 아닌 신하들이 쓰는 연각사모를 착용했다. 세종 8년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그때까지 세자는 조복도 없어 (일)상복으로 사신을 맞았기에, 명나라에서 오량관과 세자 조복을 내려받으켠서 상복도 정하게 된 것이다. "복두(幞頭)·홍포(紅袍)·서대(犀帶)·흑화(黑靴)·상홀로 되어 있었으며, 조신의 1품 공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정언(正言) 안윤덕(安潤德)이 아뢰기를,
"왕세자복(王世子服)은 이제 녹색(綠色)을 채용하였는데, 녹(綠)은 간색(間色)입니다. 조관(朝官)의 공복(公服)도 녹삼(綠衫)이 최하(最下)인데 국저(國儲)의 존귀(尊貴)한 이에게 부정(不正)한 최하(最下)의 색(色)을 입게 하심은 첨시(瞻視)에 어그러짐이 있으니, 청컨대, 흑색(黑色)을 채용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청(鴉靑)이 어찌 반드시 정색(正色)이 되겠느냐? 녹색(綠色)은 그름[非]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안윤덕이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푸른 색으로 지은 옷이여![綠兮衣兮]'라고 하였으니, 옛사람은 녹색(綠色)을 천색(賤色)으로 여겼습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유순(柳洵)은 아뢰기를,
"아청색(鴉靑色)은 비록 고인(古人)이 정색(正色)이라고 이르지 않았더라도 녹색(綠色)보다는 낫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청(鴉靑)으로 고쳐 채용함이 옳겠다."
그러므로 영화 천문에서 사모와 함께 입은 곤룡포는 고증 오류인데, 복두까지 쓴 이상 세자인 것을 구별하기 어려워 입힌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는 홍포가 맞다.
칠장복이 사여된 것은 문종 즉위년인 1450년으로, 이때부터 세자가 용포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사조룡의 양식만 명에 허락 받은 뒤 자체 제작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곤룡포를 처음 착용한 세자는 단종. 이후로 국조오례의에 "익선관은 왕의 것과 같았고, 곤룡포는 흑단(黑緞, 여름에는 黑紗)으로 짓고 포의 전후와 좌우 어깨에 금색의 사조원룡보(四爪圓龍補)를 달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어 적어도 성종 때부터는 익선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2.2.3. 조선 시대의 보
왕의 보는 오조룡(五爪龍), 왕세자의 보는 사조룡(四爪龍), 왕세손의 보는 삼조룡(三爪龍)으로 하였다. 조선시대 보의 크기는 시대마다 다른데, 태조와 세조, 영조의 어진에 그려진 보는 매우 커서 가슴과 복부를 거의 다 덮을 정도이고 금실로 옷감에 직접 수를 놓아 만들었지만(어진 그림을 보고 추정하는 것으로, 수를 놓은게 아니라 금박을 옷에 찍어 만들었다는 학설도 있다), 고종황제의 사진이나 영친왕의 실물 곤룡포 등 조선 말기의 보는 크기가 줄어들어 있고, 보를 별도로 만들어 옷에 부착한 형태로 변경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예복 간소화 정책의 영향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용보에 그려진 용의 형상도 조선태조어진, 세조 어진 초본 등 임진왜란 이전 어진에는 용이 측면을 바라보는 측면상이었으나, 영조 어진, 고종, 영친왕 실물 곤룡포 등 임진왜란 이후 어진에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상으로 변화되었다. 국왕과 왕세자는 둥그런 보를 썻지만 왕세손은 네모난 보인 방보(方補)를 썼다.
2.3. 대한제국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홍룡포는 황태자의 용포가 되었고, 황제는 황룡포를 착용했다.[14]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결혼한 후 귀국해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부부를 배알할 때 입었던 것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홍룡포 실물이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종 황제의 황룡포는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하나 더 남아있다.
3. 중국의 곤룡포
중국에서는 통일왕조를 세운 수문제가 처음 황색으로된 용포인 황룡포를 착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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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황룡포
송나라 황제들은 주로 붉은 색상의 단령을 착용했다.
3.1.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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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명나라 선덕제, 우측은 그의 아들인 정통제의 어진.
원래 명나라의 황룡포도 조선의 홍룡포처럼 몸 앞뒤와 양 어깨에 용보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정통제가 토목보의 변으로 폐위되었다가 천순제로 복위하면서 황제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용보의 갯수도 늘이고 원래 곤복에만 붙이던 12가지 문양[15] 을 곤룡포에도 붙이도록 했다. 그래서 천순제 이후 명나라 황제들의 어진을 보면 곤룡포가 화려하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
명나라 황제 곤룡포 중에는 곤복으로 분류되는 곤룡포가 있다.
명나라 황제 용포의 한 종류로 곤복으로 불린다. 발굴 될 당시, 옷에 제작날짜와 곤복이라는 명칭이 적힌 종이가 부착되거나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면류관을 쓸 때 입는 현색(玄色: 검은색)의 곤복과 구분하기 위해, 옷의 특징인 12개의 용보(龍補: 둥근 용흉배)와 12장 무늬가 들어갔다하여 '12단용(團龍:둥근 용) 12장 곤복'으로도 불린다. 이를 줄여 '12장 곤복'으로도 부르며, 그냥 곤복으로 부를 경우에는 현색 곤복을 곤면[18] 으로 불러 차이를 두기도 한다.
정확한 등장 시점과 구체적인 사용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정통제의 어진에서부터 보이기 때문에 그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제왕의 최고 등급 관복인 곤면(현색 곤복)에 들어가는 12장 무늬가 있어 그와 동등한 최상위의 용포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황제의 곤복 사용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보인다. 성종과 중종 실록[19][20] 의 기사에서는 '명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 황색의 용포'''를 입는다'며 명나라에 다녀왔던 신하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원래 하늘에 제사 지낼 때에는 면류관을 쓰고, 현색의 곤복을 입어야 하는데 황색을 입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때는 정통제 시기가 지난 즉, 12장 곤복이 등장한 이후다. 모든 대신들은 제복(祭服)을 입는 이 엄중한 국가 의례 때 입을 수 있는 황색 용포는 무엇일까? 바로 현색 곤복과 똑같은 12장 문양이 들어가는 12장 곤복 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관련 학계에서는 12장 곤복이 등장하면서 현색 곤복을 일정부분 대체하여 착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어진을 그린다거나 큰 의례 때가 아닌 평시에는 기본적으로 용보가 4개인 용포라던가 직신(直身), 어깨와 가슴에 구름처럼 모양을 낸 운견(雲肩)과 팔쪽의 긴 통수(通袖) 및 용포 아랫단에 가로로 길게 만든 슬란(스란;膝襴,膝欄)무늬에 각각 용 문양을 더한 화려한 옷 등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붉은색과 청색 및 녹색 그리고 황색, 자색 등 다채로운 색감을 썼다. 실제로 만력제가 교육을 받거나, 업무 활동 등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는 회화자료들에서 이러한 용포들을 입고 있으며, 정릉에서도 12장 곤복이 겨우 5착인 것에 비해 다른 용포들은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용보가 4개인 용포(4단용포)를 제외하고, 거기에서 더 늘어나 8개인 용포(8단용포)와 12장 곤복(12단용포) 그리고 운견과 슬란무늬를 화려하게 수놓은 용포 등을 길복(吉服)으로 통칭하여 부르기도 하였다.[21]
3.2.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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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인물은 청(淸) 성조 강희제.
청나라는 자신들의 전통대로 소매가 좁고 기마에 편리한 의복을 사용했지만 황제의 용포에 수놓은 문양 등은 대체로 명나라의 제도와 유사한 편이다.
청나라의 친왕들은 흔히 알려진 검푸른 청나라 관복에서 신료들의 사각형 흉배 대신 용보가 들어간 형태의 곤룡포를 입었다.
4. 일본의 곤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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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의 곤룡포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휴전 교섭 중 명나라에게서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을 때 사여받은 곤룡포들로, 현재 일본 교토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대홍색이고, 조선 국왕의 곤룡포와 비슷한 곤룡포도 있으나 용보 대신 사각형 기린 문양을 금으로 찍은 곤룡포도 있고, 중국식으로 큰 용 그림을 수놓은 곤룡포도 있다.
5. 관련 이야기
세종대왕 시절, 신숙주가 이 곤룡포를 '''이불'''로 사용한 일화가 유명하다. 알다시피 세종이 갸륵히 여겨 덮어준 것이긴 하지만, 신숙주에겐 정신적 벌칙인 셈.[23]
포청천 시리즈 가운데 '이묘환태자' 에피소드의 결말에서, 송인종은 자신이 생모를 돌보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으니 그 죄를 어떻게 벌줘야 하는지 묻고 공손선생이 이에 곤장 수십대에 해당한다고 대답한다. 이에 황제가 스스로 곤장을 맞으려 하자, 공손선생은 곧바로 '황상의 곤룡포는 곧 황상의 옥체와 같으시니 용포의 장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라는 굉장한 꼼수를 말하고 송인종 대신 송인종의 용포가 곤장을 맞게 된다. 이묘환태자는 이 때문에 '타용포'라는 제목을 가지기도 한다.
인조가 백성에게 곤룡포를 하사했다는 민담이 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던 인조는 추위와 피로로 인해 제대로 거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인근에 살던 나무꾼인 서흔남이란 백성이 직접 인조를 업고 피신하였다. 이에 인조는 보답으로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서흔남은 인조가 입고 있는 곤룡포를 입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인조는 곤룡포를 하사했고, 서흔남은 죽을때까지 인조에게 받은 곤룡포를 소중하게 여기며 무덤에 같이 묻혔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서흔남의 무덤 앞을 지날때마다 잠깐 멈추고 절을 해야했다고 전해진다.
5.1. 곤룡포 일회용설
원래 곤룡포는 한 번 입으면 태워버리는 일회용이었다가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가 태우지 말고 그냥 빨아서 다시 입겠다고 한 낭설이 있다. 초기에는 용보를 금실로 옷에 직접 수놓았으나 워낙 영조 어진에서 보듯이 크기도 만만찮고 고가였기 때문에 탈부착식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새 용포에 용보를 교체하는 것.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 부분이 회자되고 부풀려지고 와전되어 아래와 같은 낭설이 자주 게시되고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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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 서술이 명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 조선 제왕#s-2들의 의복에는 시사복인 곤룡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례를 받을 때의 원유관복, 제례 기타 행사시 착용하는 면복까지 크게 보았을 때 총 3가지 착의할 의복이 정하여져 있어 유독 곤룡포에 집착할 이유가 있는진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궁중 전체 왕실종친의 의복을 담당하는 상의원의 침선장, 침선비가 곤룡포 1일 1제작 때문에 바빴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곤룡포 재질상 세탁이 빈번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절용을 원칙으로 삼았던 오례의 취지를 몰각한채 일회용이었다고 추단하고 이를 조선 왕조의 사치로 여기는 것은 역사왜곡이라고 할 것이다.
실록상 영조는 앞서 말한 원유관복을 세탁해 입었으며 정조는 명주, 모시로 옷을 지어입는 걸 선호했다고 한다. 또한 순조의 경우에는 옷이 헤지더라도 수선하여 다시 입었다고 한다.
상기 정조 임금이 곤룡포를 태우지 말 것을 명하였다고 서술하였으나 실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24]
생각건대 정조실록에서 곤룡포에 관한 언급은 21개의 기사에 있는데 아마 그 중 대왕 대비전 행록에서 "금상이 검소하여 곤룡포를 제외하고는 무명옷을 즐겨입고.. 여름철 옷은 자주 빨아서 헤지기 쉬운데 그냥 입었다... (후략)"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역시 제왕을 통틀어 곤룡포 소각에 대한 기사는 없다. 염습할 때도 같이 매장됐던 게 곤룡포, 익선관인데 세간에 오해를 줄까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원래 조선 왕의 의복 중 급이 높은 곤복이나 강사포 등은 면류관 등 세트를 이루는 관과 함께 왕이 바뀔 때마다 명나라에서 사여받는 것이었는데, 세종대에는 예외적으로 곤룡포 3습을 서비스로 같이 보내줘서 세종이 아주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곤룡포가 한 번 입고 소각하는 게 원칙이라면 명나라에서 보내준 귀한 용포도 한 번 입고 태워버렸을지는 의문이다.
6. 기타
2000년대 이후로 결혼식 폐백용 복장이 기존의 문관 관복인 사모, 단령에서 업그레이드되어 몇몇 결혼식 업체에서는 신랑에게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25]
쌉니다 천리마마트에선 사장이 바뀐 후 직원들 제복으로 새로 디자인되어 쓰이고 있다. 작가와 정식 계약되어 팔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판매 중단했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가 양자로 지목했던 이원씨의 곤룡포는 검은색인 흑룡포이다.
2010년대 이후에는 서울의 궁궐 근처에서 한복을 대여해주는 업체들이 늘어났고, 곤룡포 또한 관광객들에게 크게 사랑받고 있다. 특히나 "왕의 복장"이라는 데에서 오는 차별성까지 더해져서 인기가 많다. 또한 결혼식 폐백 의식에서 기존의 관복을 대신해서 입는 경우가 자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