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예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임예환
林禮煥'''

'''출생'''
1865년 7월 19일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용산리 임촌[1]#
'''사망'''
1948년 5월 17일 (향년 84세)
'''묘소'''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용산리 선영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국적'''
조선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
'''본관'''
평택 임씨#
'''도호'''
연암(淵菴)
'''종교'''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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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손병희의 측근
2.2. 3.1 운동
2.3. 이후의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손병희의 측근


<동학천도교인명사전>과 3.1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따르면, 임예환은 1865년 7월 19일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용산리 임촌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24세 때 동학에 입도해 접주, 수접주, 대접주를 역임했다. 이후 관서 지방의 신도 수가 크게 늘자 자연스럽게 동학의 거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1895년 동학 농민 혁명에 참가해 교장, 교수, 교령을 지냈다.
1898년 4월 5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었다. 최시형은 혹세무민을 일삼고 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그해 7월 2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대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1901년 3월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경비 문제로 가지 못하게 되자 일본에 체류했다. 그는 동학 교인들의 자제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신문명을 베우게 할 계획을 세웠다. 1902년, 손병희는 1차로 24명을 전국에서 선발해 교토의 부립 제1중학교 등지에 입학시켰고 1904년에는 다시 40명을 수학하게 했다. 이때 임예환, 홍기조, 홍병기 등이 이 일을 도왔다.
1904년 4월, 손병희는 동학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불러들었다. 이때 일본으로 간 이들은 임예환, 문학수, 이겸수, 나용환, 나인협, 홍기조 등이었다. 손병희는 이들에게 민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개화 운동을 벌이라고 지시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임예환은 동지들과 함께 민회를 조직하고 명칭을 대동회라고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정부가 동학이 재림했다고 여겨 탄압을 가하자 진보회로 개칭했다. 임예환, 나용환 등 관서지역 동학 지도자들은 그해 9월 1일 평양에서 진보회 민회를 개최했다. 나용환의 회고에 따르면, 8월 20일에 평양 개회에 참석한 이들은 2만 명에 달했으며, 그 자리에서 흑의를 입고 단발한 사람도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손병희는 이러한 개화운동을 집행해 동학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진보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용구는 정부의 탄압이 가해지자 이를 회피하기 위해 1904년 12월 진보회를 송병준일진회와 통합시켰다. 이후 일진회는 1905년 11월 4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해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에 민심은 격분했고, 동학은 매국 종교단체라는 비난을 받았다. 임예환 등은 급히 일본으로 가서 악화된 국내 여론을 수습하기 위해 손병희와 대책을 논의했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1906년 1월 교단을 정비한 뒤 그해 9월 이용구 등 62명의 일진회 무리를 출교시켰고 교인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임예환은 1906년 3월 6일 25대교구 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07년 5월 21일에 그간의 포교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2등 은장포증(銀章褒證)을 받고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임명되었다. 정주순독은 휘하의 교구장, 교령, 봉교 이하 교인의 진퇴출척(進退黜陟)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해 12월 10일, 임예환은 정주교사(定住敎師)에, 1909년 5월 6일에는 종문직접(宗門直接)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평남 중화군에서 포교활동에 전념했다.

2.2. 3.1 운동


1910년대 들어 천도교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민중시위 운동을 추진했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이종일이었다. 이종일의 회고록인 <묵암비망록>에 따르면, 임예환은 이종일의 지시로 이종훈과 함께 농어민을 포섭하여 민중운동을 시도했다고 한다. 당시 농어민들은 일제의 가혹한 경제수탈로 배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12년 1월 이종훈과 임에환은 농어민 피해실태 현장조사를 벌였다. 이종훈은 경기도 근처의 농민을, 임예환은 서해안 일대의 어민을 맡았다. 예상대로 농민 중 80%가 배일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어민은 60% 이상이 배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종일, 임예환, 이종훈은 이를 토대로 보성사 사원 60여 명과 함께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추진했다. 집회일은 7월 15일로 정했지만 그 전날에 종로경찰서에게 발각되어 서류 일체를 압수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집회의 성격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단순한 생활개선운동이라고 둘러대 화를 모면했다. 이후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붕어하자, 한반도 전역에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을 퍼져 민중들의 반일 감정이 치솟았다. 이에 천도교 측은 독립선언 계획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2월 25일, 임예환은 천도교 중앙총부에 들렀다가 권동진오세창을 만났다. 그는 이들로부터 "조선을 독립국으로 하려고 선언서를 발표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예전부터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며 적극 동조했다. 2월 27일 오후 5시경, 임예환은 재동 김상규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 홍기조, 나인협 등과 함께 참석해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했다. 그 자리에서 최린은 선언서 발표를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점검모임이 열렸다. 후에 그가 형사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임예환은 무슨 일인지 그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밤 10시가 지나서 뒤늦게 손병희의 집에 도착한 임예환은 나용환한테 선언서 발표장소가 파고다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뀐 사실을 전해들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예정대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 직후 그들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남상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전원 연행되었다. 임예환은 이어진 심문 및 재판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 필요성과 독립의지를 피력했다.

문: 그대는 (조선이) 독립국이 안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는가.

답: 조선은 원래 독립국이었으므로 독립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기타 의견은 없었다.

문: 어째서 이태왕(李太王. 고종) 전하 장의를 눈앞에 두고 이런 일을 하였는가.

답: 조선을 독립하려고 한 것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기 기회에 하려고 하였다.

1919년 3월 1일 경무총감부 신문조서

문: 피고는 언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

답: 일한병합 무렵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4~5년 전부터 한층 더 그 생각이 깊어졌었다.

문: 조선은 정치가 어지러워서 도저히 나라를 다스려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병합되었던 것이 아닌가.

답: 이전의 조선인은 유치하였기 때문에 정치가 어지러웠다. 일한병합 후에는 이전보다 조금 잘 나라가 다스려졌지만, 독립하면 한층 더 잘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문: 그러면 피고는 총독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품고 있었던 것인가.

답: 그런 것은 아니고, 아무런 불평도 없다.

문: 조선이 독립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생각이었는가.

답: 그것은 독립국이 되어서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 등의 일은 염두에도 없다가 이번에 상경하여 孫秉熙에게서 그 계획을 듣고, 가담하도록 권유되었기 때문에 가입한 것이 아닌가.

답: 결코 그렇지 않다.

문: 어떤 생각으로 이 기회에 조선독립운동을 하기로 했는가.

답: 그것은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이란 것을 제창하고, 각국은 그 취지에 의하여 독립한다는 것이 신문에 나와 있었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에 독립을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문: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 일반 인민은 그것에 찬동하고,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일본정부가 각성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가.

답: 그렇다. 그 선언서를 배포하면 각지에서는 다소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폭동이 일어나면 일본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 피고는 이번 기도를 한 이상은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답: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문: 피고가 체포되면 피고의 가족에 대해서 천도교에서 뒤를 돌보아 주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그런 일은 없다.

1919년 3월 1일 경성지방법원 재판기록

임예환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녁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경성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노역으로 그물뜨기를 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1920년 도사, 1921년 공선관장에 선임되었고,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2.3. 이후의 경력


임예환은 출옥 후 2달간 휴식한 뒤 1922년 1월 7일 공선관장(共宣觀長)에 선임되었다. 열흘 뒤 1월 17일에는 종리원 종법사와 황해도구(區) 순회 임무를 맡았다. 이 무렵 천도교는 교리 및 조직 개편을 놓고 구파, 신파로 나뉘어 갈등이 첨예했다. 이때 임예환은 중립을 취하면서 양측의 갈등을 조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천도교는 끝내 분열되었고, 임예환은 구파가 중심이 된 천도교에 잔류했다. 1925년 10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임예환의 근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그때 천도교 도사로 계시던 임예환 선생은 지금은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용산리에서 사위를 데리고 농사를 짓고 지방교회 순시를 하며 남은 세상을 보내시는데 늙으신 몸에 호미를 들고 밭고랑에 허리를 구부릴 때 철없는 아이들인들 무심히 볼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나 소작농이시라니 가을이 또 다시 와 곡식은 익었으되 62년 동안 살아오시는 동안에 조선의 수확은 무엇인가 하고 긴 탄식을 금치 못한다 합니다.

이후 임예환은 1934년 법정, 1939년 중화군 종리원장, 1940년 중화교구장, 1942년 선도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천도교 포교 사업을 맡았다. 1945년 8.15 해방 이후에도 월남하지 않고 고향인 평안남도 중화군에 머물렀다. 그 후 그가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며 사망일자와 사인도 정확하지 않다.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948년 5월 7일로 기재되었고,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는 '단기 4282년(서기 1949년)', 오재식의 <민족대표33인전>에는 '단기 4282년 을축(乙丑) 4월 병사(病死)'로 기재되었다. 유족들은 임예환이 1948년 5월 17일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이 문서는 유족들의 증언을 존중해 사망일자를 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임예환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평택 임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