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오세창
吳世昌'''

'''출생'''
1864년 8월 6일
조선 한성부 돈의동
'''사망'''
1953년 4월 16일
대한민국 대구직할시 중구 대봉동
'''묘소'''
망우역사문화공원
'''국적'''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본관'''
해주 오씨
'''호'''
위창(葦滄)
'''자'''
중명(重明)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3. 서예활동
2.4. 해방 후 경력
3. 여담
4.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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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예가, 언론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오세창은 1864년 8월 6일 한성부 돈의동에서 조선 말 역관이자 개화 사상가인 오경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같은 역관 출신인 이상적에게 한어(漢語)와 서화, 금석학을 배웠으며, 대표적인 북학파인 박제가의 학문을 공부했다. 또한 베이징에 10여 차례 드나들면서 청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고 조선이 자주적 개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화 운동을 벌였다. 오세창은 이러한 부친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부친과 함께 개화파로 활동한 유대치(劉大致)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다.
1879년 16살의 나이로 역과(譯科)에 합격하고 이듬해 사역원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오세창은 1883년 박문국 주사로 차출되어 <한성순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 박문국이 폐지되자 다시 역관으로 돌아갔으며, 이듬해에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 통역을 맡았다. 이후 1886년 박문국이 재설치되고 한성순보가 한성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간행되자, 한성주보의 기자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었을 때, 그는 낭청(郎廳)을 지냈다. 그리고 1895년 1월에는 정3품으로 승진하여 공무아문(工務衛門) 참의(參議)에 올랐다. 관제 개정 이후에는 농상공부 참서관(參書官)을 거쳐 다시 우정국(郵政國) 통신국장에 임명되었다.
1896년 1월 단발령에 응해 상투를 자른 그는 아관파천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관직에서 물러났고, 1897년 9월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도쿄로 가서 동경상업학교 한어 교사로서 1년간 근무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서 서울에서 독립협회에 가담해 간사원으로서 활동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칩거하며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2년 유길준이 일본사관학교 출신 장교들과 함께 정부 전복을 꾀하며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자 최린, 유동근 등과 함께 이에 가담했다가 조직이 탄로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 인해 조국에서 역적으로 낙인찍힌 그는 일본 정부의 보호 아래 은거했다가 역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동학 제3대 교주 손병희, 관료 출신의 양한묵, 무관 출신의 권동진과 의기투합했다.
1904년, 오세창은 도쿄에서 손병희, 양한묵 등의 권고에 따라 동학에 입교했다. 이후 손병희가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을 때 함께 했으며, 1906년 1월 5일 손병희를 따라 조선으로 귀국한 뒤 1906년 2월 10일 천도교 교수(敎授)로 임명되었다. 이후 중앙총부 이문관장(理文觀長), 현기관장(玄機觀長) 등을 맡아 천도교의 조직과 제도 및 교리 근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한성순보> 기자 경력을 살려서 1906년 6월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했다. 이후 1907년 11월 대한자강회 출신 인사들과 함께 대한협회를 창립해 부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만세보>가 창간 1년만에 폐간되자 대한협회 기관지로 <대한민보>를 창간해 다시 사장을 맡았다.
그는 이 외에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평의원, 재일유학생 단체인 대한학회 후원단체인 대한학회 찬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각종 계몽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1908년부터 대한협회가 협회보를 발행하기 시작했을 때 제 4호에 "청년제군에게 고한다"라는 글을 실어 칭년들에게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을지문덕, 윤관, 이순신을 자처할 것이며, 글씨는 한석봉, 그림은 정겸재(鄭謙齋)를 자처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언론을 탄압하면서 대한민보와 협회보는 더이상 활동하지 못했고 한일병합 후 폐간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오세창은 칩거하고 서화에 전념했다. 그는 김가진, 안중식(安中植), 이도영 등과 함께 서화포(書畵鋪) 개설에 참여하였으며, 1911년 서화미술회가 개설되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또 1918년 6월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2.2. 3.1 운동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세계평화 수립의 원칙'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 중 그가 제창한 원칙인 민족자결주의는 전 세계 약소국들로부터 큰 관심을 이끌었다. 오세창은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을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뒤 조선인들도 민족자결 의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고 일본으로 가서 일본 정부에 행정자치 청원운동을 벌이려 했다. 그러다 1919년 초 최린을 통해 송계백 등 재일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과 협의해 자치권 청원 대신 독립 청원 방식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1919년 1월 중순, 손병희는 박영효를 찾아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국민대회 청원서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영효는 총독부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면서 거부했다. 이에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청원 방식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이 시기 오세창은 2월 25일경 인천에서 발행되던 <조선신문>에 실린 '피비와 같이(血雨)'라는 기사를 보고 2.8독립선언 소식을 알게 됐다. 그는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 홍기조, 홍병기, 김완규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해 찬성을 얻어냈다.
이후 오세창은 권동진의 집에서 모든 민족대표가 모이기로 했고, 민족대표로는 천도교 15인, 기독교 15인, 불교 2인으로 총 32인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2월 27일 밤 신석구 목사가 참여하면서 총 인원은 33명이 되었다. 오세창은 거사 기획에서부터 실무 전반에 이르기까지 두루 참여하였다. 권동진으로부터 선언서 원고를 받아 베끼기도 하고 이종일에게 서명자 변동 상황을 알려줘 바로잡기도 하였다. 2월 27일에는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재동에 소재한 김상규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 등 최종 확인 작업을 했다. 그는 이밖에도 독립선언서 인쇄용지 보급 등 인쇄 작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3월 1일 오후2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오세창은 일제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그는 검사로부터 "민족 자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미국 대통령이 제창하고 있는 것은 입만으로 하는 것이고, 강화회의에서 조선을 독립시켜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검사가 다시 물었다.

"민족자결이란 것은 병합 또는 정복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를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또는 직접 전란에 관계가 있는 나라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오세창이 답했다.

"그것은 전란에 관계된 나라에 대해서는 실행되고, 그 밖의 나라에 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검사가 그렇다면 어째서 손병희의 집에서 회합한 뒤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하게 된 것이냐고 묻자, 오세창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 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고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세창은 "일한병합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한병합 당시에는 조선민족이 일본민족과 나란히 까지는 않더라도 가깝게 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병합 후 10년간의 상황을 보면 조선민족은 점점 뒤떨어져가므로 독립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병합 당시에는 반대는 아니었다."

이에 검사가 물었다.

"그러면 피고는 총독정치에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

오세창이 답했다.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에게 좀 더 자유를 주고, 평등한 대우를 해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에 검사가 "그러면 그것의 개선을 요구하면 족할 것이고 독립선언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데 어떤가."라고 묻자, 오세창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독립선언에 참여하게 된 것은 방금 말한 바와 같은 사정인데, 다만 총독부에 개선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요구가 허용될 것 같지 않고, 독립선언을 하면 자연히 요구를 들어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재판장이 오세창에게 "앞으로 조선 독립운동을 그만두지 않을 생각인가?"라고 묻자, 오세창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선언서에 이름을 냈으므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초부터 성공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역사에 그것을 남기고 조선민족을 위하여 기염을 토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금후 그런 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후 경성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이승훈, 권동진 등과 함께 그물 짜는 일을 했으며, 검은 콩밥에 멸치와 감자를 넣은 국을 먹었다. 1921년 12월 22일 최린, 권동진, 이종일, 한용운, 김창준, 함태영과 함께 출옥했다.

2.3. 서예활동


오세창은 출옥 후 정치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대신 서예활동과 고서화 수집에 몰두했다. 당시 돈의동에 있던 그의 집은 골동품과 황성신문 등 고신문으로 넘쳐났다. 그는 명필로 불렸는데 특히 전서(篆書)를 잘 썼다. 3.1혁명 1년 전인 1918년 6월에 조직된 서화협회 조직에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창덕궁 비원(秘苑) 중수공사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서예는 물론 주택설계, 감리 등 만능예술가로 불렸다고 한다.
1922년 6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렸다. 오세창은 서화협회의 권고로 작품을 출품했다. 그는 전서 부문에서 1등 없는 2등을 수상했다. <매일신보> 1922년 6월 1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는 전람회 구경을 왔다가 그의 작품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또한 오세창은 골동품과 서화를 수집해 일본에 헐값으로 팔려나가는 걸 막고자 노력했으며, 작품들을 작가별로 분류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해 1928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출간했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고서화 인명사전이었다. 최남선동아일보에 쓴 서평에서 "암해(闇海)의 두광(斗光)", 즉 '어두운 바다의 북극성'이라고 극찬했다.
근역서화징은 신라시대의 솔거에서부터 책 출간 직전에 세상을 떠난 정대유까지 화가 392명, 서가 576명, 서화가 149명의 작품과 생애에 관한 원문과 그 출전이 수록되었다. 오세창은 이외에도 한국의 명필 1,100명의 작품을 모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명화 251점을 모은 <근역화휘(槿域畵彙)>, 그리고 우리나라 문인·화가 830여 명의 성명·자호(字號)·별호 등을 새긴 인장의 인영(印影) 3,930여 점을 묶어 <근역인수(槿域印藪)>을 펴냈다.
한편 1920년대 들어 천도교 내부에서 보수파와 혁신파 간의 노선 투쟁이 심각해지자, 그는 보수파에 가담했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교주제가 아닌 종리사(宗理師) 합의제의 집단지도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오세창 등 보수파는 종리사 선거에서 전원 당선돼 교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혁신파는 교단을 이탈했다. 이후 보수파가 장악한 천도교 내부에서 또다시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었고, 오세창은 권동진, 이종린 등과 함게 구파를 주도했다. 그 후 대다수 인사들은 친일로 돌아섰지만, 그는 서예에만 종사할 뿐 끝까지 친일 활동을 하지 않았다.

2.4. 해방 후 경력


8.15 해방 후, 82세의 고령이 된 오세창은 건국준비위원회 위원과 인민공화국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건준과 인민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탈퇴한 뒤 인촌 김성수 등이 주도하는 한국민주당에 가담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주도의 정치세력화를 꿈꾸며 신한민족당을 결성해 부당수를 맡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거부했고, 각종 국민대회에서 개회사나 축사를 하고 김구, 나인협 등 애국지사들의 장례식에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한편 1945년 11월 22일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명칭을 변경되고 발행을 재개했을 때 초대 사장에 추대되었지만 19일 만에 명예사장으로 물러났다.
6.25 전쟁 발발 후 대구로 피난간 그는 그곳에서 병을 얻어 1953년 4월 16일 사망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국회의원들은 세비의 1할을 갹출하여 조의금으로 전달했다. 그의 유해는 서울특별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오세창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3. 여담


  • 오세창은 예술에 조예가 깊어서 특히 서예가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위창체, 오세창체)를 창안하는 등 한국 현대 서예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 89세의 나이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이승만 못지 않게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몸소 체험한 인물임에도[1] 근현대사 교과서의 매 단원에서 심심치 않게 언급되는 이승만에 비해 오경석의 차남, 만세보 사장 경력, 3.1 운동 참여 등으로만 언급되는지라 존재감이 덜한 편. 여담으로 오세창은 이승만과 달리 과거(역과)에 합격했으며. 이승만과는 해방 후 결성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4. 관련 항목


[1] 고종 1년에 출생했으며 아버지가 개화 사상가 1세대에 해당되는 인물인지라 김옥균 등의 개화파 2세대와도 가깝게 지냈으며, 만년에는 6.25 전쟁까지 경험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휴전 직전에 고향인 서울(당시 조선 한성부)이 아닌, 피난지 대구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