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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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이르러 봉건의식을 벗어나 '신촌정신'을 특별히 강조하는 뜻은 먼저 '정신을 개조'하고 그 다음에 물질의 풍요가 뒤따라야 되기 때문이다."
1. 개요
이종일은 구한말의 관리 및 개화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본관은 성주(星州). 충청도 태안군 북이면(현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1] 에서 이교환(李敎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한문을 배우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이상재, 김윤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1882년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조선 조정으로부터 정3품 위계를 받았다. 이때 일본의 개화된 모습으로부터 감명을 받고 독립신문에 개화의식과 관련한 논설을 기고한다.
1898년에는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1대 회장이 된다. 이 단체는 개화사상을 민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종일은 이후 중추원 의관이라는 고위직도 맡지만 개화로 나라의 힘을 구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판단해 10개월만에 그만두게 된다. 의관직을 그만두자마자 흥화학교를 설립하고, 1905년에는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며 30세 전후의 청년들을 모아 애국단을 조직하는 등 교육과 개화운동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종일은 이승만, 유영석과 함께 순수 한글로 된 제국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의 황성신문은 한문으로 쓰여 있었으나 이종일은 대중들에게 더 쉽게 전파하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에 순수 한글로 쓰였으며,[2] 부녀자 계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신문이 되었다. 그는 물론 대중들을 계몽하기 위해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에도 참여했고, 제국신문은 1910년 폐간할때까지 사장 및 기자를 맡는다.
그는 천도교에 입보하여 천도교와 연계한 독립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급사하고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을 하자 국내의 항일운동 단체들과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이종일은 독립선언일을 2월 28일로 정하고 신문사 경험을 살려 1차로 2만 5천장, 2차로 1만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다. 이를 8명의 동료에게 분배하고, 손녀 이장옥도[3] 이 일을 도운다. 당시의 이장옥의 기록에 따르면 할아버지(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선언서를 베포했느데 증표를 제시해야 선언서를 주었다고 한다.
이종일은 남은 1만장의 선언서를 주요 도시에 배포하려고 했다. 2월 28일 이종일을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이종일은 그 자리에서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러자 일본 경찰 15명과 경찰차 5대가 민족대표가 있던 태화관을 포위해 체포하려 들었고, 한용운이 독립쟁취를 외치자 다같이 독립선언서를 경찰에게 던지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종일은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2년 반만에 가출옥을 하였다.
이종일은 출옥하자마자 다시 한번 만세운동을 준비했으나 일본 경찰에게 인쇄물을 압수당하며 실패한다. 1925년에 순국한다.
만세운동 참여 및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지내고 한글 맞춤법 연구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03~10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