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종훈
李鍾勳'''

'''출생'''
1856년 2월 20일
경기도 광주유수부 실촌면
(현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유사리)[1][2]
'''사망'''
1931년 5월 2일 (향년 76세)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별칭'''
자는 진호(振浩)
도호는 정암(正菴)
'''직업'''
독립운동가, 종교인
'''국적'''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
'''본관'''
광주 이씨[3]
'''종교'''
천도교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3. 천도교
2.5. 천도교의 분열
2.6.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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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종훈은 1856년 2월 20일에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유사리(현 광주시 곤지암읍 유사리)에서 아버지 이우재(李禹載)와 어머니 선산 김씨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4] <천도교회월보>의 <천도교 장로 이종훈씨 약력>에 따르면, 이종훈은 온유하고 인자했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즐거움이 있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또한 언행이 일치하고 대인을 대할 때 경솔함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려운 일에 처해도 여유가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줬고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1년 5월 3일자 기사 '33인의 1인'에 따르면, 이종훈은 본래 성정이 강직하여 한 번 굳게 정한 뜻이라면 변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종훈은 어려서부터 글 잘하기로 소문이 났었고, 10살 때부터 14세까지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학문에는 뜻이 없어 공부를 중단하고 7, 8년간 유랑생활을 했다. 21세 때 실촌면 사동능곡의 한 산을 사들여 진철점(眞鐵店)을 경영했지만 4년만에 때려치고 다시 설월리에서 강순심과 함께 수철점(水鐵店)을 동업했지만 3년만에 폐업했다. 이처럼 장사에서 연이어 실패를 맛본 이종훈은 서울로 상경했고, 판윤 이원회(李元會)의 주선으로 해영 별군관에 임명되었지만 곧 적성에 맞지 않아 사직했다.
이후 1886년 7월 인천으로 가서 만석동 북송포리에 선상객주를 맡아 부를 축적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4년 만에 객주 생활을 그만뒀고, 함흥으로 이주한 이종훈은 북청, 정평, 영흥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한동안 금전대차영업(金錢貸借營業)을 했다.

2.2. 동학 농민 혁명


1893년 1월 17일, 이종훈은 동학에 입도했다. 이후 그는 고향인 광주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했고, 뒤이어 지평, 여주, 이천, 충주, 음죽, 안성 등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포교했다. 그는 열성적으로 포교를 수행하면서 동학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엔 손병희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그가 동학의 초대 교주 최제우의 신원운동에 참가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신도로서 참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천도교 장로 이종훈씨 약력>에 따르면, 이종훈은 보은 척왜양창의운동 때 말 두필과 8백냥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후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광주 일대를 관할하던 이종훈은 곧바로 거병을 준비했다. 권병덕은 <갑오동학란>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종훈, 이용구는 각처에 두령을 연락하여 일어나니, 홍병기. 신수집. 임학선은 여주에서, 홍재길. 신재련은 충주에서, 임명준 정경수는 안성에서, 고재당은 양지에서, 이근풍. 전규석. 전일진은 이천에서, 신재연은 양근에서, 김태열. 이재연은 지평에서, 염세환은 광주에서, 이화경. 임순호는 원주에서, 윤면호는 횡성에서, 심상현. 오창섭은 홍천에서 일어나서 모두 충주 황산으로 회집하니 회중이 수십만 인에 달했다.

이종훈은 광주, 여주, 양지, 지평, 이천의 동학농민군을 충주 외서촌 황산에 집결한 동학군과 합류시켰다. 여기에 이용구의 충청도 북서부 일대와 강원도 남서부 지역 동학군도 합세했다. 정부는 황산에 집결한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선유사 정경원을 파견했다. 정경원은 포군 5백여 명을 이끌고 황산에서 1리 떨어진 충주 사창리에 머물렀다. 이에 이종훈은 이용구와 함께 정경원을 만나 담판을 시도했다. 이종훈과 이용구는 "우리는 신민이다. 국사가 급박한 때를 당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 해악을 무찌르는 것은 당연한 의리가 아닌가?"라고 주장했고, 정경원은 이를 수용해 군사를 10리 밖으로 물렸다.
황산에서 10여 일 동안 주둔한 동학군은 보은 장내로 가던 중 보은 장내로 가는 길목에 있던 괴산 관아를 공략하려 했다. 이종훈은 청천에 모여있던 동학군과 연합하여 괴산 관아를 점령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괴산관아를 점령하려는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괴산관아에서 동학 접주 백창수와 우제관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와 식량의 확보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가흥병참부는 10월 2일 하라다 츠네야(原田常八) 소위의 지휘 아래 일본군 27명을 출동시켜 괴산에서 동학군의 동향을 정탐했다. 하지만 별다른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일본군은 동학군이 주둔하고 있던 당동까지 척후병을 보냈다.
이때 읍내에서 15리 떨어져 있는 애재에 머물고 있던 동학군은 일본군과 조우, 전투를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4명의 사상자를 내고 충주로 퇴각했고, 동학군은 100명 또는 2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후 동학군은 괴산 관아를 점령하고 객사를 제외한 모든 건물과 서류를 불태웠으며, 민가 5백여 호 역시 불태웠다. 천도교중앙총부수습위원회가 1962년에 발간한 <천도교사부총서>의 <천도교회사초교>에 따르면, 민가를 불태운 것은 괴산접주 서모가 괴산군민들에게 타살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서접주의 13세 된 아들이 주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동학군은 괴산관아에서 무기와 식량을 확보한 후 청주 청천으로 향해 손천민 등과 합세한 뒤 보은 장내에 도착했다. 보은 장내에 집결한 경기 지역과 호서지역 동학군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대오를 정비했는데, 이종훈은 중군을 맡아 호남 지역 동학군과 연합 정선을 형성하기 위해 논산으로 출발했다. 논산에서 연합 전선을 형성한 동학군은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우금치 일대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와 10여 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그러나 동학군은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에 밀려 대패했다. 이후 동학군은 경천, 논산, 여산, 익산, 전주, 원평, 태인, 고부 백산, 정읍, 장성으로 퇴각했다. 이종훈은 이 퇴각 과정에서 군대를 어떻게든 수습하고자 애썼고 원평과 태인 등지에서 관군과 14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장성에서 전봉준의 호남 지역 동학군과 결별한 호서 지역 동학군은 손병희와 이종훈의 지휘 아래 무주, 임실, 영동 용산, 청산, 보은으로 진군했다. 이종훈이 이끄는 동학군은 영동 용산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청산을 점령했지만, 곧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와 보은 북실에서 맞붙었다가 대패하고 음성 되자니까지 후퇴했다. 음성 되자니에서도 관군에게 패한 동학군은 결국 손병희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종훈은 동학 교주 최시형을 보필했다. 최시형이 1898년 체포되어 서소문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옥바라지를 자처했고, 최시형이 처형된 뒤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광주군 송파에 안장했다. 이종훈은 최시형의 시신 수습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초롱과 우산을 김준식에게 들리고 상여군 두 사람을 데리고 시체를 파내는데 일꾼들은 시체를 손에 대이기가 싫어서 흙 파는 괭이로 떠들추려 한다. ” 아 안돼! 안돼! 아무리 남의 시체이기로 우리들이 돈 받고 하여주는 일인데 그래서는 못쓴다. 너희 두 사람이 하체를 들라. 내 상체를 들 터이니“ 하고 무덤 속에서 시체를 땅위에다 끄집어내어 모셔놓고 본즉 몸에는 아주 못쓰게 된 헌요 한 겹이 감겨 있을 뿐이다.


2.3. 천도교


최시형을 무사히 안장한 이종훈은 1889년 8월 쌀 4두를 마련해 홍천군 수유산에 은거하면서 백일기도에 몰입했다. 이후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04년 손병희가 주도하던 동학 개화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손병희는 관의 체포령을 피해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근대화된 일본의 현실을 목도하고 조선에서 동학을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개편하기로 결심했다. 1904년 2월, 손병희는 이종훈, 박인호, 홍병기 등 40여 명을 일본으로 불러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에 동학교단은 대동회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이후 손병희는 1904년 4월에 박인호와 홍병기를 일본으로 다시 불러 '흑의'를 입고 두발을 자르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그해 7월에 이종훈, 박인호, 홍병기 등은 모화관 산방에 모여 대동회를 중립회로 변경했다. 그러나 중립회가 동학 세력임을 간파한 정부는 탄압을 가했고, 손병희는 회명을 진보회로 개명하게 했다. 동학교인은 전국 각지에서 진보회를 조직하고 흑의 단발을 감행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으로 동학교인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진보회를 이끌던 이용구송병준 등이 조직한 일진회와 통합했다. 이후 일진회의 친일 행위로 인해 동학교단이 친일종교로 지탄을 받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24일 동학을 천도교로 전환했다.
손병희는 천도교로 전환한 뒤 동학교인들이 일진회를 탈퇴하고 천도교로 귀의하기를 권고했다. 이때 이종훈 역시 천도교에 귀의했다. 손병희는 1906년 2월 26일 천도교중앙총부를 조직하고 교단 조직을 정비했다. 이종훈은 천도교중앙총부 조직 당시 도집(都執)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현기사 고문과원, 서응관장, 현기사장, 고문, 천주, 현기사 혜양과원, 성도사, 직무도사장, 대종사장, 장로 등의 주요 원주직을 맡아 종교인으로 활동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친일단체였던 일진회를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 등이 강제 해산되었다. 그나마 활동이 가능한 단체는 종교단체였다. 천도교는 이 점을 이용해 철저한 종교 활동을 보임으로서 일제의 사회단체 해산령을 회피했다. 이후 천도교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였다. 당시 이종훈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적지 않기 때문에 농어민을 포섭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종훈은 20여 일 동안 농민의 피해 상황을 조사했고, 농민의 80%가 배일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우선 경기 지방의 농민을 상대로 시위운동을 일으키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범신생활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비정치성을 띈 신생활운동으로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취지문, 결의문, 행동강령 등을 마련했다. 그러나 개최 전날인 7월 14일 종로 경찰서에게 서류들이 압수되면서 무산되었다. 신생활운동이 무산되자, 이종훈, 이종일 등과 보성사 직원들은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들은 천도교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는 한용운, 백용성, 이능화 등 불교계 인사와 접촉했지만 한용운이 민생안전이 우선이라며 거절하자 천도교 단독으로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 결과 1912년 10월 31일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본부를 보성사에 두었다. 그리고 총재에 손병희를 추대했고, 회장에 이종일이 맡았으며, 부회장에 김홍규, 제1분과위원장에 권동진, 제2분과위원장에 오세창, 제3분과위원장에 이종훈이 선임되었다. 그밖에 보성사 직원에었던 장효근, 신영구와 박준승, 임예환 등이 참여했다.
민족문화수호운동은 일전의 신생활운동이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밀결사의 형태로 천도교단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갔다. 민족문화수호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만주에서 이상룡 등이 조직한 부민단과 같이 발전시킬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 올라오는 교인들을 설득하는 한편 지방조직을 강화시키려 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인해 지방 조직이 뜻대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한편,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는 민족문화수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천도교인을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차적으로 1913년 5월 7일 보성사에서 이종일을 강사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어 1914년 4월 29일 교인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민족문화수호의 의의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종훈은 이 강연회의 강사로 나섰지만 강연 도중 한국인 형사에 대해 제지당했다. 그 후 그는 앞으로 이와 같은 강연회를 개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고,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없애고 철저하게 비밀결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천도교단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독립의 기회가 올 것으로 판단하고 천도구국단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이종훈은 천도구국단의 임원으로는 선임되지 못했지만 간접적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1916년 2월 20일, 이종훈, 이종일, 장효근, 김홍규, 박준승 등은 국제 정세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종일이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구 정객을 앞세워 민중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자, 이종훈이 적극 찬성했다. 또한 김홍규가 한규설과 접촉하겠다고 밝히자, 이종훈은 기독교계의 거두인 이상재를 만나 민중운동을 협의하기로 했다. 그 밖에 신영구는 윤용구, 장효근은 김윤식, 홍병기는 박영효, 이종일은 남정철을 각각 담당하기로 했다. 이종훈은 이상재를 만나 의논한 끝에 천도교가 나선다면 기독교를 동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민중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종일은 김홍규와 함께 손병희를 찾아가 민중운동에 참여해줄 것을 간청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손병희는 자금지원뿐만 아니라 스스로 앞장 설 것을 다짐하였고, 민중운동을 이종훈을 비롯 권동진ㆍ오세창ㆍ최린 등과 협의하여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민중운동은 이종훈, 이종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 그리고 천도구국단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그리고 천도교 내에서 나용환, 김완규, 양한묵 등 동지를 확보해 나갔다.

2.4. 3.1 운동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14개조가 공식화되었으며, 리투아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이 독립하자, 천도교 측은 독립운동을 서두르기로 결정했다. 1918년 5월 5일, 손병희, 이종훈,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일 등은 모임을 갖고 민중운동을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에 따라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대중화는 각계각층의 민중을 동원하는 것, 일원화는 여러 계층의 독립운동 계획을 하나로 대동 통합하는 것, 비폭력화는 동학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최소한의 피해를 막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후 그들은 거사일을 9월 9일로 정했다. 이는 이해 8월 초 일본 본토에서 쌀 소동사건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일제가 이를 수습하는 데 신경을 쓸 때 시위 운동을 전개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이종일과 최남선에게 각각 작성하게 한 뒤 두 선언서를 검토한 끝에 최남선의 독립선정서를 선정했다. 그러나 독립시위운동은 뜻대로 전개되지 못했다. 이는 원로 교섭 지연과 자금 부족, 민중동원이 완비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하자, 이종일은 민중시위의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파악했다. 이는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조선 민중들의 반일 감정이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적으로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민족자결주의 원칙 등으로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도 했다. 이에 천도교는 만세 시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앞서 계획했던 구 관료의 접촉, 기독교계와 불교계, 그리고 학생계와의 연합전선 형성이 차례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이종훈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2월 20일, 권동진의 집에 모인 기독교, 천도교, 불교 계인사들은 민족대표로 천도교 15인, 기독교 15인, 불교 2인 등 32명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천도교는 2월 20일부터 26일까지 1주일 동안 15인 선정을 의논한 끝에 손병희, 이종훈, 홍병기, 권동진, 오세창, 최린, 박준승, 이종일, 김완규,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임예환, 양한묵, 권병덕을 선정했다. 이후 이들은 기독교, 불교 인사들과 함께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집행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종훈은 일본 경찰의 신문과정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문: 본일 회합한 목적은 무엇인가.

답: 조선을 독립할 목적이기 때문에 나도 찬성하고 회합하였다.

문: 독립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조선민족이 자유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독립하려고 하였다.

문: 피고는 어째서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하는가.

답: 그것은 조선민족으로써의 자주독립운동을 해야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 피고는 금후에도 또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선생(손병희)이 그 계획을 계속한다면 가입할 생각이다.

이종훈 신문조서

이후 이종훈은 경성지방법원의 3차례의 신문과 고등법원의 신문을 마친 뒤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그가 출옥하자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인 박인호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원동 자택으로 찾아와 위로했다. 이에 이종훈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2년의 징역을 살았다 하여도 그동안 9달이나 병감에 누웠었고 오늘도 병감에서 나왔으니까 무엇 징역의 참맛은 알지 못하였소. 거저 한울님의 은혜와 선생의 덕택으로 죽은 몸이 살아나온 것만 다행이오.


2.5. 천도교의 분열


3.1 운동 이후, 이종훈은 천도교 개혁과 비밀 결사에 참여했다. 당시 천도교단은 손병희, 최린, 이종훈 등 대부분의 교단지도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신진 지도부가 대체했다. 이들 그룹은 주로 청년들로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존의 천도교 지도부와 신진 지도부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오지영, 최동희 등 신진세력은 자신들을 혁신세력이라고 칭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원로들을 포섭했다. 이종훈은 이들에게 호응했고, 1922년 1월 17일 종법원 종법사 겸 경기도 교구순회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여전히 갈등이 빛어졌고, 1922년 4월 손병희가 가출옥한 뒤 구관제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구파와 신파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교단은 손병희의 뜻에 따라 구관제를 부활했고, 그동안 혁신 세력을 지지했던 원로들도 대부분 구파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종훈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파와 함께 했다. 이로 인해 이종훈은 불온한 문서를 배포하여 교단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홍병기, 오지영, 정계완 등과 함께 1922년 5월 12일 제명되었다. 1개월 후인 6월 13일에 제명이 취소되면서 교적은 다시 회복되었지만 그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손병희가 죽고 교단의 책임자 박인호가 사임하자, 교단은 통합을 모색했다. 구파와 신파 양측은 교인대회를 개최했는데, 이종훈은 신파의 교섭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양측의 교섭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신파는 1922년 12월 말에 천도교연합회를 조직해 천도교와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종훈은 천도교연합회에 참여하지 않고 천도교단에 합류했다. 그는 천도교단의 화합을 위해 '평화 경고식'을 주도해 구팡와 신파 인사들을 참석시켜 그동안의 갈등으로 인해 쌓인 감정을 해소하도록 유도했다.이후 이종훈은 강도사에 선임되어 교리 강구 및 교무 발전을 도모했다.

2.6. 이후의 경력


이종훈은 1923년 5월 28일부터 7월 22일까지 2개월 간 원산 등 북선 일대와 북간도 용정, 국자가, 두도구, 동불사 등지를 순회하면서 교무를 시찰했다. 또한 교단의 갈등의 봉합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경계(敬啓)를 발표할 때 원로교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신파의 최동희가 주도한 비밀결사 고려혁명위원회 고문, 사성위원장을 맡아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후 1926년 4월 5일 만주에서 천도교 신파가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정의부, 형평사와 연대해 무장 투쟁을 시작하자, 이종훈은 이에 참여하기 위해 포교라는 명목으로 만주로 가서 고려혁명당에 가담했다.그러나 고령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못하고 국내와 만주를 왕래하며 정양해야 했다. 그러다가 1931년 5월 2일 만주에서 사망했다. 향년 76세. 그의 시신은 고향에 매장되었다가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종훈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만선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2] #[3] 22세손 종(鍾) 항렬[4] <광주이씨 대동보>·3.1 운동 당시 신문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