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전투

 

1. 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진 전투
2. 6.25 전쟁 중기에 벌어진 전투


1. 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진 전투



'''임진강 전투
臨津江戰鬪'''

'''시기'''
1592년 6월 27일 (음력 5월 18일)
'''장소'''
조선 임진강
'''원인'''
한양 함락이후, 조선의 반격 작전.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김명원'''
'''한응인'''
이일
이양원
유극량
신할†[1]
<^|1>'''가토 기요마사'''
킷카와 히로이에[2]
'''병력'''
13,000 명
22,800 명
'''피해'''
불명
최소 수 백명
'''결과'''
조선의 임진강 방어선 붕괴.
'''영향'''
선조, 평양 포기 및 몽진 단행.
신립탄금대 전투에서 허무하게 패배하면서 한양이 풍전등화가 되자 조선 조정은 파천하게 된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1만 3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임진강에 방어선을 펼치게 된다.
한편 일본군은 한성 점령 후 일단 정지하면서 이후 전략을 논의했다. 그 결과 우키타 히데이에는 그대로 서울에 머무르면서 전군을 총지휘하고,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으로 가기로 하였다.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로 가서 1군을 후원하고,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방면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4군 사령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는 강원도로 가서 2군을 후원하기로 하였다.
이후 선발대로 북상하던 가토 기요마사는 5월 10일 경. 임진강에 주둔한 조선군을 보고 진격을 멈추게 된다. 가토 측 강변에는 조선군이 사전에 정리를 해버렸기에 강을 건널 수 있는 배가 없었고 뗏목을 만들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다 강물이 불어 물살도 급했기 때문에 시간을 끌면서 서로 대치하게된다.[3]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받은 조선 조정은 왜군들이 공세종말점을 넘어 머뭇거리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선조에게 반격의 때가 왔노라고 건의를 했고, 선조는 임진강 전선 지휘관들에게 '왜 속히 진격하지 않는가?' 라고 책망조의 어명을 잇달아 내려보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한응인이 명나라에서 돌아왔고, 이원익이 뽑아 보낸 강변[4] 군사들도 막 도착하고 있었다. 이에 비변사에서 '아니 김명원 쟤는 왜 한성을 잃었는데 공격 안하고 가만히 있죠? 장수들도 말을 안 듣네요. 한응인에게 독자 지휘권 맡겨서 공격 보냅시다!'[5]하는 건의를 선조가 받아들이고 한응인에게 일찍이 없었던 제도체찰사(諸道體察使)라는 직위까지 만들어주면서 조선 육군의 마지막 병력이자 정예 병력인 강변 군사들의 지휘를 맡겼다. 이로 인해 '''지휘권이 둘로 쪼개져 버렸다.'''[6] 비변사에서 한응인을 밀었던 이유는 그가 무슨 뛰어난 장수여서가 아니라 단지 김명원보다 젊으니 더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이라 여겨서다. 애당초 한응인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다.[7]
이리하여 어명의 영향으로 조선군이 돌격준비를 하는 와중 전황변화가 일어났다. 일본군이 진을 치우고 철수하기 시작했다.[8] 그 전까지 퇴각할 기미도 없었고 일본군 진영에 어떤 이상한 일도 일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짓 후퇴가 아닌가 의심되는 상황이었고 도원수 김명원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미 어명 때문에 돌격 작전에 시동이 걸린 마당에 전황 변화까지 일어나니 '''각 부대 간에는 돌격 작전에 서로 경쟁까지 하는 지경이 되었다.''' 김명원은 이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9]
이 와중에 한응인은 자신이 거느린 강변 군사들에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와중에 한응인의 사고가 터졌다. 강변군 수뇌진은 일본군의 동태가 수상하니 출전 연기를 요청했는데, 한응인은 오히려 이들의 목을 벤 것.(...)[10][11] 그리고 유극량 등의 반대[12]에도 불구하고 신할 등은 임진강을 건너 일본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한다. 그 결과, 신할, 유극량이 이끄는 조선군이 강을 건너가 남아있던 것으로 보이는 소수의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내 산 뒤에 숨어있던 가토군이 튀어나오면서 조선군을 공격, 전멸시키고 신할, 유극량은 전사한다. 강 너머에서 이 광경을 본 조선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박충간[13]의 도주를 시작으로 군 전체가 붕괴하였다.[14] 그리고 가토는 조선군이 타고 온 배로 강을 건너오기 시작했고 결국 김명원과 한응인도 도망치면서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다.
이 전투는 지휘 계통의 문제로 조직력이 엉망인 조선군의 문제점과 정보 분석이 엉망이었던 조선 조정의 판단 미스가 겹쳐 일어난 패배였다. 조선 조정도 이런 점 때문에 김명원, 한응인 등을 처벌할 명분을 잃어 결국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못했다.[15] 그리고 임진강 방어선까지 내주며 방어 능력을 상실한 조선 조정은 계속 북으로 도망쳐 의주까지 몰리게 된다.

2. 6.25 전쟁 중기에 벌어진 전투



[1] 탄금대에서 패사한 신립의 동생[2] 킷카와 가문의 문서나, 모리 가문의 문서에 따르면 가토가 아닌 킷카와 히로이에가 이 전투를 이끌었다고 한다.[3] 일본군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군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진군하다보니 중장비 같은건 보유할 수 없었고, 중장비가 없는 마당에 자체 보유한 선박같은게 있을리가 없었고, 뗏목을 만들어도 수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실어나르는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후 평양성 전투가 벌어질 때도 대동강 때문에 발이 묶였고, 공성 병기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서 뜬끔없이 강화 협상을 요청했을 정도였다.[4] 압록강의 강계, 초산, 벽동, 창성 지역을 말한다.[5] 비변사가 아뢰기를,“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요즘 처사가 매우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경성이 함락된 지 이미 오래인데 진격할 마음은 없고 오로지 물러앉아 나루터를 지키는 일을 상책으로 삼고 있으므로 사기(事機)를 잃은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또 부원수 신각(申恪)이 제마음대로 도피했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했으니 그 나머지 일을 가히 알수 있습니다. 수어사(守禦使) 신길(申硈)은 조정이 이미 사태를 보아서 바로 진격하라고 명했음에고 불구하고 군병을 빼앗아 계속 묶어두고 영세한 적을 습격하지 않음으로써 적세를 날마다 치성하게 만드니 회복할 날이 없습니다. 신들은 우려를 이기지 못하여 늘 체직시키려고 했지만 적과 대치하고 있는 이 마당에 장수를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서 그대로 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응인(韓應寅)이 이미 대군을 모두 거느리고 갔으니 '''사태에 대응하여 진격하는 일을 한응인이 임의대로 처리하게 하고''', 임진(臨津)·두기(豆只)·낙하 등처의 강 연안 위아래를 지키는 일은 김명원이 맡아서 방어하게 하되, 사태의 진전을 봐서 이러한 명령에 집착되지 말고 시기를 정하여 진격, 적을 섬멸할 것을 두 곳의 대장(大將)에게 하유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 선조 실록 25년 5월 6일.[6] 결국 이 명령 때문에 후술할 한응인이 강변 수뇌진의 목을 벨 때도, 자신 휘하의 신할과 권징이 돌격을 하는데도 김명원이 부당하는 것을 알지만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7] 여담으로 한응인은 왜란 도중에 모친상을 당하자 그대로 사직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이와중에 농사를 지었는데 모와 잡초를 구별못해 모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잡초를 키웠다는 야사가 전해내려온다. 이런 야사를 보건데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한응인이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다[8] 하루는 왜적이 강 언덕에 지은 여막을 불태우고 장막을 헐어치우고 군기를 거두어 싣고 물러나 도망가는 모양을 보이며 우리 군사들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신할은 평소 행동이 가볍고 날카로우나 꾀가 없어서 왜적이 정말로 도망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강을 건너 뒤쫓아 가서 짓밟아버리려 하였다. 경기감사 권징도 신할과 합세하였기 때문에 김명원은 이를 금할 수가 없었다. - 징비록[9] 위에서 보듯 애초에 '''지휘권이 둘로 갈린 것 자체가 빨리 공격하라는 이유에서였다.''' [10] 이날 한응인도 또한 임진강에 이르러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하려고 했다. 한응인이 거느린 군사들은 강변의 장군들로서 북쪽 오랑캐와 가까이 있어 싸우고 진 치는 형세를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한응인에게 말하기를, "군사들이 먼 곳에서 오느라고 피로한데다가 아직껏 밥도 먹지 못하였고, 기계도 정비하지 않았으며, 뒤따라오는 군사들 또한 다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또 왜적이 물러가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사오니 원컨대 조금 쉬었다가 내일 적군의 형세를 보아서 나아가 싸우도록 하십시다"고 건의하였다. '''한응인은 군사들이 머뭇거린다고 하여 몇 사람을 베어 죽였다.''' - 징비록[11] 강변에서 임진강까지는 먼 거리다. 게다가 당시는 농사철이라 논밭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므로 좁은 길을 따라서 왔으며, 청천강 같은 큰 강이나 실개천을 만나서는 소단위 병력으로 건넜을 것이다. 이 와중에 뒤처진 부대가 있었을 것이며, 이쯤되면 병력들이 크게 지쳐있으며 밥도 못먹었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부대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모두 도착해서 피로를 씻고 지형과 나름대로의 전투 편제를 갖춰야하기 때문에 이런 건의를 한것이다. 즉 정당한 건의다. 하지만 한응인은 오히려 참수로 대답했다(...)[12] 별장 유극량은 나이도 많고 군사에도 익숙하였으므로 결코 가볍게 진격해서는 안된다고 극력 말하자 신할이 그를 베려고 하였다. 그러자 유극량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군사가 되어 싸움에 따라다녔으니 어찌 죽음을 피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나라 일을 그르칠까 염려해서입니다."라고 말하고 화를 내며 나와서는 자기에게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강을 건너갔다. - 징비록[13] 애초에 이 사람은 정여립 사건 때 공신이 되고 선조의 총애를 받아 벼락 출세를 한 사람이다. 임진강 당시 도망병을 잡는 검찰사였는데, 본인이 먼저 도망간 것(...)[14] 김명원과 한응인은 강 북쪽에 있으면서 이것을 바라보고 그만 기운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상산군 박충간이 마침 군중에 있다가 말을 타고 먼저 달아났는데, 여러 사람이 바라보고는 그가 김명원인줄 알고 모두 다 부르짖기를 "도원수가 달아난다!"고 하니 강여울을 지키던 군사들은 그 소리에 응하여 다 흩어졌다. - 징비록[15] 애초에 공격하라고 독촉했던게 선조 자신이다(...) 한응인이 사고를 저질렀고, 조선 조정의 대신들도 이를 지적했으나, 한응인은 선조의 어명에 충실했을 따름이라 그대로 묻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