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원
1. 개요
金命元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응순, 호는 주은, 시호는 충익, 본관은 경주이다. 최고위 경력은 좌의정.
임란 이전에는 권신 이량을 형 김경원과 함께 탄핵하다가 파직된 경력도 있을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정여립의 난으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마무리지은 명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요 군사 요충지의 지방관을 섭렵하고 니탕개의 난과 이어지는 여진족과의 대규모 무력 충돌 과정에서 뛰어난 군사 행정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와중에는 도원수직을 맡았으나, 전투에는 서툴렀던데다 임란 초기 도원수직의 제한된 권한까지 곁들어져 이전의 명성에 상당히 누가 되는 행동거지를 보였다. 부연하자면 도원수가 군에 있어서 포괄적인 총지휘권을 부여받은 건 권율이 올라선 직후이다. 김명원 시절에는 김명원보다 관직 경력이 높은 전직 정승들이 주변에 너무 많아[1][2] 제대로 명령이 먹혀들지 않았고, 그 결과 제한된 권한만을 행사했다. 실제로 비변사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니 왜 이렇게 부하 장수들 통제를 못 해?!'''였다. 사관 평도 '사람됨이 너무 유순해서 장수감은 아니었더라'였고.
그러나 평양성 전투때 전통적으로 가난한 지역으로 여겨진 평북 지역에서 다시 2만여에 달하는 군사를 양성했고, 한양 탈환쯤에 경기도 일대에서 일제 징발을 통해 수천의 병력을 재차 끌어모으는데 성공하는 등 군사 행정에선 매우 탁월했다.
2. 명종 시절
승지 김만균의 아들이자 이황의 문인으로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했다.[3] 이후 홍문관 교리로 임명된 형 김경원과 함께 홍문관 저작으로 임명, 다음해에 홍문관 박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 이량을 탄핵했다가 찍혀서 '몸가짐이 바르지 않고 여색을 탐하고 술을 즐긴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곧 복귀.[4] 홍문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와 관련된 요직을 역임하였다.
3. 임란 이전
1568년 함경도 순무 어사에 임명되었고, 1569년 종성 부사가 되었다. 이후 동래 부사, 충청 감사, 의주 목사, 평안도 병마 절도사, 전라 감사 등 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외직을 돌아다녔다. 이러한 관직 경력을 통해 김명원은 '무재(武才)가 있는 데다 변방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만약에 사변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순찰사(巡察使)를 겸직시키면 매우 편리할 것'[5] 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또한 전라 감사직을 맡을 당시 자신의 후임으로 심의겸을 추천했는데 이 일로 인해 동인으로 여겨지면서 탄핵되기도 하였으나 병조 참판으로 그 자리를 유지했다.
1583년 니탕개의 난을 시작으로 함경도 지역 여진족과 지속적이고 대규모의 군사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김명원을 함경도 관찰사로 파견(1584년)하였고, 김명원은 이 자리에서 병력 동원, 물자 공급, 백성 원호 등 군사 행정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좌참찬(左參贊) 겸 도순찰사(都巡察使)직으로 올라가 사실상 북변의 군사 행정 및 감찰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으며 유력한 중신이자 군사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직을 거친 후 중앙으로 복귀하여 1587년 좌참찬으로 의금부지사직을 겸하고, 1588년에는 형조 판서직을 역임. 1589년 정여립의 난으로 인한 기축 옥사를 수습하여 정국을 안정화시키고 그 공으로 평난 공신 3등에 책록되고 경림군에 봉해진다.
4. 임진왜란 시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었고, 4월 29일에 도원수직에 오른다.[6] . 이는 시기로 볼 때 전방으로 나간 이일과 신립의 뒤를 받치는 군사 행정을 수행하고 최고 사령관 격인 도제찰사 류성룡을 서포트하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원수직에 임명되기 하루 전인 4월 28일에 탄금대 전투가 일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한발 늦은 인사였다. 탄금대 전투 소식이 들려온 후 조정은 파천 준비에 들어가고, 또한 패전 소식이 한성에 퍼지면서 공황 상태에 빠져 군사들까지 대거 탈영하기 시작했던 것. 다음 방어선 구축이 임진강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김명원은 한양에 주둔하면서 한강 유역의 방어선을 지키고 적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맡는다.[7]
문제는, 이때 김명원의 병력은 1천여 명, 밀려오는 적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군(총원 2만 2천 8백여 명), 또한 남한강을 도하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도 다른 길로 접근해 오고 있었단 거다(총원 1만 8천 7백여 명). 거기다 김명원 다음가는 지휘권을 지닌 이양원은 임란 바로 직전까지 우의정을 역임할 정도의 거물로, 관직 경력으로 따지면 3정승 직을 한번도 맡은 적이 없었던 김명원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사람이어서 김명원이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하기도 힘들었다. 그냥 답이 없다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라 시간벌이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결국 접근한 일본군 몇몇이 한성 남쪽 언덕에서 한강을 도하하려는 시늉을 보이자 군을 물리려다가 군이 붕괴, 간신히 병력을 추스려 임진강으로 향한다.
김명원의 흑역사라면 흑역사일 수 있는 신각 사건의 문제는 이 철수 과정에서 발생한다. 조선 측이 작정하고 구축한 방어선은 임진강이었는데, 이곳으로 도착한 것은 김명원이 이끄는 군대 뿐이었고 이양원과 신각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양원과 신각은 경기도 양주로 철수해 군을 수습했는데, 하필이면 파천 과정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경기도 지역의 소식이 잠시 두절된 상태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장계도 안올라왔다. 패전을 거듭한 이일도 장계를 꾸준히 올렸고, 충무공은 심지어 장계만이 아니라 파천한 임금이 먹고지낼 식량과 물품까지 올려보냈는데...
결국 임진강으로 철수한 김명원은 자신과 연락이 두절된 신각에 대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라는 장계를 올려버렸고,[8] 임진강 유역과 가까운 개성의 조정에서는 이를 받고는 '''적전 도주'''로 판단하고 신각을 참하라는 명령을 선전관에게 들려 경기도로 파견한다. 그리고, 나중에야 경기도에서 올라온 소식은 해유령 근처에서 신각이 수습한 병력으로 적을 격파했다는 승전보였고, 선조는 급하게 다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된 뒤였다. 사실 신각은 부원수였으므로 유도대장 이양원이 아니라 도원수 김명원의 통제를 받는게 당연했고, 김명원에게 별도의 보고도 없이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간건 잘못한 일이 맞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지는 와중에 휘하 부원수가 말도없이 사라져서 다음 집결지인 임진강에 나타나지도 않았으니 김명원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어쨌든 김명원은 이후 8도 도원수로 승진해 1만 5천의 병력으로 임진강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 근데 문제가... 비변사에서 '아니 한성이 함락됐는데 김명원 저거 가만히 앉아서 수비만 하네요. 부원수라는 신각도 통제 못하고[9] 뭐하나요 저거. '''한응인에게 독자 지휘권을 주고 공격을 맡겨서''' 나가 싸우라 하세요.'라고 건의하면서 지휘권이 분열되어 버리고, 결국 그 결과 5월 17일 저녁에 야습을 시도했던 한응인이 유인책에 빠져 적을 추적했다가 일본군의 계략에 빠져 군이 붕괴하자 거기에 김명원이 지휘하던 부대까지 휩쓸리면서 참패. 김명원은 공격에 반대했으나 결국 지휘권이 없었기에 설득에 실패하여 여기서 다시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윤두수, 이원익과 함께 평양성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다시 윤두수와 함께 야습을 걸었다가 역습에 패배. 이때 대동강의 도하 요충지까지 알려주는 실수를 해 버리면서 결국 평양성도 내어주고 철수한다.[10] 이후 이원익과 협력하여 흩어졌던 군사를 다시 모아서 순안에 주둔하여 재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일본군은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다. 애초에 전력차가 컸기에 평양성 함락을 예상하고 순안에 본영을 설치할 것을 예상했다고 한다.
순안에 주둔할 적에 평북의 지형이 험해서 더이상 일본군이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실제로 그의 예상대로 되자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후 평북에서 1만의 군대를 양성하는 등 조선군 재건에 노력하였다.
1593년 명나라 원병이 1차로 파견(부총병 조승훈과 3천여 명)되어 평양성 탈환을 시도하나 실패(2차 평양성 전투)하자 조선 측에서는 '중국 군대만 기다릴 순 없잖아? 우리 힘으로 탈환해 보자고' 하는 생각에 그동안 재건한 2만여 병력을 평양성으로 움직여 탈환을 시도했고, 여기서도 최종적인 지휘권을 잡았으나(3차 평양성 전투) 다시 실패.
행주대첩으로 권율이 주목받게 되자 선조는 도원수를 김명원에서 권율로 교체하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벽제관 전투 이후 명의 강화 교섭 시도에 대하여 조선 정부의 반대 입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도체찰사 류성룡과 도원수 김명원에 대한 불만, 그리고 뛰어난 전적을 올린 권율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권율이 경기 지역의 지형지물과 군사 정세를 모릅니다. 함부로 바꿨다가 혼란스러워지면 좀 문제니까 일단은 놔두죠."하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결국 도원수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의병의 절제권을 부여받게 된다. 이후에 비변사에서 '류성룡은 놔두고 김명원만 권율로 바꿉시다'는 건의를 하기도 하였으나 거부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군사 행정과 작전 구상에 노력하였으며, 평양성 함락 이후에 경기 지역과 한양 탈환을 위한 병력 배치와 행정은 김명원, 류성룡, 이항복이 작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장수들이 그의 군사적 식견을 높게 평가하여 자문을 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이 부산으로 철수한 후에도 교체 논의는 지속되었고, 6월에 권율은 김명원을 대신해 도원수가 된다.
이후에는 호조 판서, 예조 판서, 형조 판서, 공조 판서를 역임했다.
5. 정유재란과 이후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병조 판서로 유도 대장을 겸했고, 이후 형조 판서로 옮겨간다. 병조 판서를 이어받은 이항복과는 당파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인지 정유재란 시기에 둘은 같이 묶여서 관직을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칠천량 해전 패배 이후 이순신을 통제사로 복귀시키도록 건의한 당사자도 김명원과 이항복이었다. 이항복이 영의정으로 올라갈 적에는 우의정으로 김명원을 천거하기도 하였다. 이후 좌의정으로 보직 이동하였다.
이순신을 탄핵할 때 정탁, 이원익과 함께 중립을 지킨 몇 안되는 중신이었다.[11] 당시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던 선조를 향해 이순신의 친구이자 그를 천거한 류성룡까지 선조의 분노에 눈치를 보며 이순신 탄핵에 찬성했던 상황이었고, 남인, 북인 할 거 없이 동조하고 언관들조차 건수잡았다고 신나서 실컷 물어 뜯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소신을 그대로 보여준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순신 건에 대해서 중립을 지킨 까닭이 신각 일을 반면교사 삼았기에 그랬다는 해석도 있다.
여튼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이항복과 더불어 이순신의 복직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때 선조는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암묵적으로 재가는 했으나 차마 자신의 입으로 하기는 민망하고 화가 났는지 일어나 나가버렸다.
1601년에는 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나 다음해에 병으로 사망했다.
6. 평가
김명원은 행정 업무를 맡을 때마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군사와 물자를 확보하고 체제를 정비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평양성 함락을 예측하고 신속히 순안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고니시군의 북상을 방지하는 전략적 안목도 보여주었다.
문제는 후방에서 이토록 탁월한 사람을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전방으로 내몰 당시의 전황. 천상 문관이었던 그는 장수를 통제하고 군을 지휘하는 데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모두가 권율처럼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문관에게 떡하고 야전지휘를 맡겨 전선에 세워버리니 지휘는 지휘대로 문제고 성격도 안맞아서 위아래 모두 힘들어졌다. 도원수 재직 시기에 비변사에서 종종 올라온 탄핵 사유는 '김명원은 성격이 유순해서 장수 통제를 못한다'였다. 즉 거친 무관들을 통솔할 과단성이나 뚝심 등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김명원은 애매한 위치에 끼어서 동네북처럼 비난을 들어야 했다. 조정에서는 제대로 공격도 안한다고 까고 장수 통제도 못한다고 깠으며, 김명원 본인은 임란 이전까지 정승을 지내지 못했는데 그 휘하에는 정승직을 경험할 정도로 격이 높은 장수들이 많아서 그런지 부하들도 명령을 잘 들으려 하지 않아서 고생이 많았다. 오늘날에는 또 신각 사건의 악역으로 낙인찍혀 부당하게 까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공황 상태에 빠져 도주한 지휘관이 셀 수 없이 넘쳐났던 정황 + 장계를 제때 올리지 않은 신각 측의 실책 + 예상 못한 대규모 외침과 전면 패주 속에 강경론이 득세하던 조정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교육용 만화책인 맹꽁이 서당에서도 취급이 좋지 않아 간접적으로 까였다. 후퇴한 뒤 신각에 대해 '''엄하게 벌할 것을''' 조정에 장계 올릴 때 '''이래야 도망친 내 체면이 좀 서지!''' 이 한마디를 말풍선에 넣어버리는 바람에... 맹꽁이 서당 자체가 역사 자료가 많이 부족하던 시절에 그려졌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 오해가 발생한 것.
임란 초기 조선측의 군 인사를 보면 실전 지휘는 도순변사 신립, 순변사 이일같은 무장들이 맡고 이를 총괄하는 역할은 도원수가 아니라 도제찰사인 류성룡이 맡으며, 도원수인 김명원은 류성룡을 돕고 신립, 이일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던 걸로 보이나 신립과 이일이 모두 단기간에 참패하며 도원수였던 김명원이 얼떨결에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최전선으로 내몰렸던 것이 문제로 여겨진다.[12]
신각 처형 사건의 도화선으로 오인되어 인터넷에선 부당하게 원균 급으로 까인다. 상주 전투와 탄금대 전투에서 죽다 살아난 이일도 장계는 바로바로 보내서 조정이 긴급히 파천논의를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각이 너무 허술하게 처신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는데 어쨌든 공세우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 질타를 안하고 대신 김명원만 물고 늘어지고 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김명원과 신각의 일을 서술하며 신각의 죽음은 안타깝게 여겼지만(신각에게 90살 넘은 노모가 있어서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게 여겼다는 내용이 있다) 김명원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1] 1품급 산직을 가진 부원군, 군들이 넘쳐났...(...)[2] 이를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 비유해 본다면, 육군 지상작전사령관과 해/공군작전사령관 및 해병대사령관은 대장인데, 이들을 지휘하며 작전권을 행사해야 하는 합동참모의장이 중장이라서 전혀 군령권이 발동이 안되는 상황이다.(...)[3] 이때 이 집안 전체가 과거에 여러차례 장원 급제해서 '장원 집안(壯元家)'이라고 불렸다고.[4] 아마도 곧 이량이 몰락했는 듯하다. 실제로 명종도 이량을 권신으로 키운게 윤원형 견제였는데 이량도 윤원형 못지않는 짓을 저질러서 명종이 쫓아냈다.[5] 선조 실록 16년 3월 4일자 기사[6] 유도대장 이양원, 부원수 신각[7] 본래는 류성룡이 지휘권을 잡아야 했으나 이항복의 건의로 류성룡은 조정과 함께 철수.[8] 도원수로서 모든 상황에 대해 조정에 보고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9] 신각이 참형을 당한 것은 임진강 전투 이후이다(임진강 전투가 일어난 바로 그날에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신각 그거 명령 불복종 혐의로 군법대로 (처형)하겠습니다'는 건의를 하고 있다. 선조 실록 25년 5월 18일 참조). 즉 임진강 전투 당시 김명원이 신각을 죽인 일로 군심을 잃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사실 왜곡의 극치.'''[10] 무슨 소리냐면 어느날 밤에 김명원이 "밤이라 야습하기 좋을겁니다."해서 밤에 몰래 강을 건너와 야습을 해서 정말 성공했다. 문제는 그제야 정신차린 일본군이 마구 공격했고 병사들은 너나없이 도망치다가 '''대동강의 얕은 부분'''을 통해 강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떤 말 탄 사람이 도망치는걸 보고 누군가 "김명원이 도망친다!"라고 외쳤고 그 결과 평양성이 함락되었다.[11] 이원익과 김명원은 일단 지켜보자는 중립파였고, 정탁은 그 유명한 신구차를 올리며 이순신에게 죄가 있을 순 있으나 전쟁터에서 장수를 죽인다면 손해만 볼 것이라며 적극 변호했다.[12] 이 분업화가 잘 이루어진 좋은 경우가 이괄의 난이다. 명목상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장만이 후방에서 선전과 보급, 행정에 힘쓰고, 야전에서는 무관 정충신과 남이흥이 이괄의 반군과 직접 맞서 싸웠다. 물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