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리 전투

 


1. 개요
2. 전개
3. 여담


1. 개요


글로스터 고지 전투 혹은 임진강 전투로도 불린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4월 23일부터 4월 25일 경기도 북부 임진강에서 감악산을 배경으로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셔 대대와 5차 공세를 위해 남하한 중공군 19병단 63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지칭한다. 이곳은 임진강 중류의 남쪽 강가에서 감악산을 끼고 있어 임진강 북안에서 남진할 때 반드시 제압해야 하는 요충지였고 이미 과거부터 고구려신라, 그리고 나당전쟁당나라와의 칠중성 전투 격전지였던 곳이기도 했다.
4월 공세(5차 공세)의 주공 방향으로 서부전선을 선택한 중공군은 유엔군 4개 사단 섬멸과 서울 점령을 목표로 3개 병단을 투입했다. 그 가운데서도 국군 1사단과 영국군 제29여단이 방어하고 있던 파주-연천은 1개 야전군급 부대인 19병단에 더해 북한군 1군단이 배치돼 중공군이 전 전선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누리는 정면이었다. 피아 병력 비율은 1:8에서 1:10에 달했다. 그러나 1사단과 영 29여단은 밀려오는 중공군의 파도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며 인접 전선의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었다. 그 와중에 여단 우전방의 병력이 밀려나며 좌전방을 담당하던 글로스터 연대가 고립됐고, 수 차례에 걸친 구원 시도 역시 중공군의 맹렬한 반격에 밀려 실패로 돌아갔다.
글로스터 대대는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압도적인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3일에 걸친 영웅적인 분투를 벌이나, 연이은 소모전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종국에는 탄약까지 모두 소진되어 더 이상의 전투 지속이 불가능해진다. 최후의 순간 글로스터 대대원들은 분산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미 포위당한 상태라 D중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글로스터 대대의 명예로운 저항은 헛되지 않았다. 대대가 벌어다준 천금 같은 시간으로 유엔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고, 마침내 중공군이 목표로 하던 서울을 지켜냄으로써 4월 공세를 좌절시킨 것이다.

2. 전개


해당 내용은 당시 글로스터셔 1대대장의 부관이었던 앤서니 패러-호클리의 자서전[1]을 토대로 한 것이다.

전투 묘사는 여기서 참조.
중공군의 남하가 한창인 1951년 영국군은 양 옆에 벨기에, 푸에르토리코, 터키, 한국군들을 끼고 임진강 남쪽 산악지대에 참호와 각종 화기들을 배치해 놓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4월 어느날 밤 한 무리[2]의 중공군들의 도하를 시작으로 캐슬(148)[3] 고지를 중심으로 총격전과 수류탄, 백병전이 6시간 동안 난무했고[4] 결국 빼앗긴다. 그럼에도 해당 고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영국군은 결사대를 조직해 고지를 오르며 기관총 진지 파괴 등의 공작을 펼쳤으나 완전 탈환까지는 실패했다.
그 후 감악산을 배경으로 방어전투와 후퇴가 연일 반복되다 포위되어 대대장까지 소총수 역할을 해야 할 정도로 전멸 직전까지 내몰렸다. 급기야 여단장과의 통화에서조차 대놓고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진 알겠습니다. 제가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제 부대는 더 이상 효율적인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 위치를 고수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상황에서 전폭기들과 포격을 벗삼은[5] 최후의 저항을 벌인다. 글로스터 대대가 설마리에서 중공군 공세를 흡수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유엔군 전선은 위기를 넘기고 다시 안정을 되찾았으나, 대대는 탄약을 모두 소진하고 전상자가 속출, 도저히 전투 수행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내몰린다. 여단에서는 필리핀 대대를 동원해 글로스터 대대의 구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글로스터 대대장에게 포위망 탈출이 가능하다면 탈출하고 불가능하다면 투항을 허가한다고 지시한다. 대대장 자신은 부상병들과 함께 잔류할 것을 선언하고 대대에게 철수를 명령해서 대대는 분산철수를 결행하지만 D중대만이 중공군의 허를 찔러 크게 우회하는 경로로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을뿐 다른 대대원들은 철수 도중 포로로 잡혀 정전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6]
이 외에도 설마리 전투를 다룬 서적으로는 "마지막 한 발(To the Last Round)"이 있다.

3. 여담


영국인의 국민성 중 하나인 꼿꼿한 윗입술(Stiff Upper Lips[7])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600여명 규모의 대대로 3만여명에 달하는 중공군을 상대해야하는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대대장인 제임스 칸(James P. Carne) 중령은 미군 장군이 있는 유엔군 사령부에 "Umm.. We're in a bit of sticky situation."(음.. 우리는 '''약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이라고 보고를 한 것. 때문에 영국보다 표현을 직설적이고 과장해 쓰는 미국인이 보았을때 정말 대수롭지 않은 상황이라 보고 후퇴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이 사례는 같은 언어를 쓰되, 다른 문화로 인해 의사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대표적인 유형으로 꼽힌다.
이 전투가 벌어진 장소 근처에는 영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서 마지리로 넘어가는 371번 지방도 옆에 위치하고 있다.
[1] 원제는 The Edge of Sword이고 국내에선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으로 발간되었다. 하지만 전투내용은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그의 포로생활과 탈출시도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2] 작중에선 소대급 (30명)이상이라 적혀있다.[3] 성벽이 있다하여 캐슬고지라 명명되었고 실제고 그곳이 칠중성이었다.[4] 이 때 묘사를 보면 고지 위의 소대 하나를 상대로 100~150명이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5] 공세를 완전히 꺾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6] 여담으로 중공군들에게 끌려가던 도중 두명의 미군 포로들을 총살한 북한군들이 이 행렬을 발견하고 똑같이 죽이려 했는데 동행중인 중공군 장교(로 추정되는 사람)가 막아서 죽음은 모면했다고 한다.[7] 궁지에 몰렸거나 꽤나 난감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호들갑 떨지 않고 도리어 별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