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원칙
1. 배경
慈悲의 原則 / Principle of charity
논리학의 기본 원칙 중 하나로 신뢰의 원칙과는 다르다.
논리학에서 '타당한 논증'이란, 모든 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반드시 참이어야 하는 논증을 일컫는다.[1] 그래서 논증의 타당/부당 여부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 명제 각각을 기호로 표기하고 명제들 간 논리적 관계만을 다루는 '기호 논리학'이 고안되었다. 그런데, 실제 논증을 기호로 번역할 때[2] 여러 가지 번역이 나올 수가 있다. 그리고 이들 여러 가지 번역 중, 그 번역 자체의 형태로 보아서 앞의 정의대로 '타당'한 것은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기호 논리학에서는 논증의 '가볍기'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명제를 최대한 작은 덩이로 분석해서 기호화하는 것이 가장 '매끄러운' 논증이며, 논증이 타당하다고 하려면 가장 매끄럽지 않은 번역에서라도 그 명제가 타당하면 되지만, 논증이 부당하다고 하려면 그 논증의 가장 매끄러운 번역에서도 그 논증이 부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은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야기는 논증에서 굳이 귀찮게 일일이 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기호 논리학을 이용해서 논증의 타당성을 분석하려면, 상대방이 자기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해서 생략했을 여러 가지 명제들을 분석자가 직접 보충해 주어야 한다. 이 과정이 다 끝나고서도 여전히 부당해야 그 논증이 부당한 논증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말하는 원칙이 바로 ''''자비의 원칙''''이다.
제논의 역설로 유명한 엘레아의 제논(Zēnōn)은 어떤 문제를 제시하고 상대방이 반증하지 못하면 그 문제는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법을 즐겨 썼는데, 논리학을 제대로 배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상당히 위험하고 오만한 태도이다.''' 논리에 반증을 못 한다는 게 반드시 그 논리가 옳은 거라는 건 아니라는 진리를 생각해 보자. 굳이 김광수 교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 나오는 수준의 증명으로 밝혀주자면, 상대방이 자신의 논리에 '즉시' 반박할 수 없다는 것과 '언제까지나' 반박할 수 없다는 건 전혀 다른 사건이고, '상대방이' 자신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것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박할 수 없다는 건 또 다른 사건이다. 애초에, 자기 자신이 자신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다고 옳다고 확신할 수 없듯이, 상대방이 반박하지 못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우기면 안된다.[3][4]
굳이 수학적인 예시(?)를 들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가 제안한 논의 $$D$$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합을 $$A$$라고 하자.(내가 이 집합의 원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D$$에 참여한 각각의 사람들 $$n$$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원소로 하는 집합을 $$S_{n}$$({$$x$$│$$x$$는 $$n$$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다.})이라 할 때, 그 모든 집합의 합집합 $$\underset{n\in A}{\bigcup}S_{n}$$을 얻을 수 있다. 이 합집합의 원소들 중 $$D$$의 주제와 관련 있는 지식들을 원소로 가지는 집합을 $$K$$라고 하자.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총체가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므로, 논의에 참여한 사람들 각각의 지식들의 집합 $$S_{n}$$의 원소들은 시시각각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집합들의 합집합 $$\underset{n\in A}{\bigcup}S_{n}$$의 원소와 $$D$$와 관련 있는 지식들의 집합 $$K$$의 원소가 변한다는 것은 당연하다.($$K$$는 $$\underset{n\in A}{\bigcup}S_{n}$$의 부분집합이니까)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에 논의에 참여했던 사람이 빠져나갈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이 논의에 끼어 들 수도 있으므로, 그에 의해서도 합집합 $$\underset{n\in A}{\bigcup}S_{n}$$와 논의 집합 $$K$$의 원소들은 시시각각 변하게 된다.
이것은 토론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최대한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논쟁에 임했다면 이렇게 말릴 일도 없다. 사실 언어의 한계상 상대에게 악의를 품고 말꼬리를 잡으려면 성인 군자의 말도 얼마든지 트집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일단 한 번은 상대의 의도를 최대한 선의를 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선의의 원칙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비의 원칙은 또한 상대방의 논증을 반박하려는 목적에 따라 전략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 타인의 논증이 최대한 타당성과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논증을 보완한 다음, 해당 논증을 반박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자비의 원칙은 상대방의 주장을 비판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는 전제들(명시적이지 않은 전제들까지)을 최대한 검토하도록 만든다. 만약 이 비판이 성공적이라면 상대방의 논증은 완벽하게 무력화되고, 상대방 본인 입장에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그 주장에 대한 비판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학술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물론 교양이 있는 모든 이들이 자비의 원칙을 준수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다수의 학술적인 토론들은 종종 심심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시작되는 편이다. 하지만, 자비의 원칙을 적용하는 전략이 종료되는 시점, 다시 말해서 발제자나 논평자의 논증 구조가 분명해지는 시점부터는 피가 튀는 살벌한 논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철학자 콰인은 번역의 불확정성 논제와 관련해서 자비의 원칙을 처방으로 언급하기도 하는데, 그 구체적인 사용 방식은 다르지만 그 이면에 놓인 이념은 같다. 콰인의 제자인 데이빗슨 역시 해석자(청자)가 발화자의 문장을 해석하는데 자비의 원칙이 필요하다는 점을 받아 들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콰인이 다른 언어들 사이의 번역에 자비의 원칙을 도입한 것과는 달리 데이빗슨은 번역을 할 때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언어와 발화자의 언어가 동일하더라도 자비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 주의점
자비의 원칙을 적용할 땐, 상대방도 최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최대한 타당한 논증 구조로 논증을 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논증을 분석한다. 자신에게는 굳이 언급을 해야 할 정도로 낯선 명제라고 해도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굳이 언급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당연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흔한 오개념 중 하나로, 자비의 원칙이 '무죄추정의 원칙'과 비슷하게 '주장의 반증 가능 여부가 알쏭달쏭하다면, 상대방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해석하는'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자비의 원칙에 대한 틀린 이해이다. 실제 논리학에서 말하는 자비의 원칙은, 저 위에서 말했듯이 '해당 논증이 지금 상태에서 가장 매끄러운 구조로 분석되어 있지 않다면 '''가능한 한 가장 매끄러운 구조로 분석될 때까지 상대방이 빼먹은 단계를 매끄럽게 보충해 줘라''''는 것이지, '알쏭달쏭하다면 상대방을 위해' 같은 원칙이 절대 아니다. 실제로 시중에 풀려 있는 웬만한 논리학 서적에는 '''자비의 원칙 개념이 기호 논리학 단원의 논증의 번역 부분에 실려 있다.'''
물론 이 자비의 원칙도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2.1. 적용할 가치가 있는 것에만 적용한다.
대표적인 예로 영구기관, 천동설과 같은 이미 논리적으로 파기된 주장이 그러하다.
가끔씩은 논증 자체가 형편없어서 분석자가 숨은 전제를 열심히 보충해 줘도 절대 옳지 않게 될 논증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논증엔 자비의 원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한 논증의 결론이 정당화되는 정도는 그 전제들 중 가장 정당하지 못한 것이 정당화되는 정도보다 높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논증의 구조상 그 위치에 꼭 있어야 하는 전제가 틀렸을 경우에는 굳이 자비의 원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
2.2. 원래 주장의 내용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자비의 원칙의 한계는, 분석자가 보충하는 숨은 전제가 원래의 주장의 성질을 바꾸지 않는 데까지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은 밤에 잠을 못 자면 귀신이 씌기 때문에 밤에는 꼭 잠을 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고 해 보자. 이 주장에 대해서 '잠을 안 자면 뇌신경과 신체에 무리가 간다.', '다음날 생활에 지장이 온다.', '어릴 때 잠을 못 자면 성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같은 전제를 덧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앞선 주장은 애가 잠을 안 자면 귀신이 씐다는 것이었지,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서 아이의 수면권을 보장하자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 따라서 논리학에서 '부당한 추론'이란, 모든 전제가 참이어도 결론이 거짓일 수 있는 논증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전제가 참일 때 결론이 반드시 거짓이 되는 논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부당한 논증'과 '틀린 논증'이 의미가 다른 이유.[2] 실제로 기호 논리학에서 자연언어의 명제를 기호로 옮기는 것을 '번역'이라고 부른다.[3] 이를 논리학에서는 '옹호의 실패를 절대화하는 오류'라고 한다. (Van Eemeren & R. Grootendorst (1987), p. 291.) [4] 만약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면, 자신의 주장($$P$$)과 상대방의 주장($$Q$$)의 선언($$P \vee Q $$)이 참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즉, 나의 주장이 옳거나 상대방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 다음에 상대방의 주장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바로 따라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쟁점들의 대부분은 배중률이 성립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특히 논쟁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있어서 쟁점들이 정돈되어 있지 않은 경우),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내 주장이 옳다는 것을 직접 입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