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설
天動說 | Geocentrism(지구중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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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움직이지 않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그 주변을 태양과 달, 그리고 당시까지 발견되었던 5개의 행성이 돈다는 설. 지구 중심설이라고도 불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그럴듯한 주장을 비롯하여 중화권 등 다른 문명에서도 흔히 나타날 정도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천문학의 주류이던 학설. 물론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폐기되었다.
2. 천동설의 발전 과정
근대적인 천문학이 연구되기 전까지는 천동설이 더 설득력 있는 이론이었다.
먼저 '자신이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나, 누구나 하늘만 보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는 태양이 '사실은 고정되어 있다'[1] 는 것을 고대인들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동설이 받아들여진 지금도 일출과 일몰처럼 해가 움직이는 것으로 표현하고 한국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도 있었으니, 여긴 그대로인데 저것들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관측자가 운동의 중심을 자신으로 두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2]
플라톤에 의해 동심원 모델이 등장하였고 에우독소스가 플라톤의 모델을 상당부분 개량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동심원 모델이 확립되었다. 2세기 경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집대성하여 '알마게스트'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심원 모델과 주전원(epicycle) 모델, 이심점 모델을 이용하여 동심원 모델이 갖고 있는 오류들을 수정하였다. 즉, 궤도의 중심 자체가 지구 주위를 감싼 가상의 원(deferent)을 따라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성의 궤도에서 행성만 쏙 빼놓은 셈. 이러한 방법은 비록 여러 개의 주전원을 사용하는 등 복잡하긴 하지만 겉보기 운동을 매우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3]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식 주전원 이론을 적용한 아래의 동영상처럼 말이다.
당시 천동설은 금성과 화성 등의 불규칙한 위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복잡한 궤도를 그려냈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당시까지 관측된 천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민중과 학계 모두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였지만, 우주 구조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은 양극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 집중했던 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우주의 구조를 수학적 모델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인들이 그냥 '내가 땅에 발 딛고 가만히 있으니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하늘이 움직이겠지'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이미 저런 주전원 궤도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천문 관측 자료가 축적되어 있었고, 지동설에 대한 이론이 아리스타르코스에 의해 제기된 바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지동설을 검토할 가치가 있는 가설로 간주했다.
그러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이론에서는 천동설이 이미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게다가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에서, 역학의 보조는 필수 불가결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은 역학 체계는, 무거운 것, 불순한 것은 우주의 중심으로 가라앉고, 가벼운 것, 순수한 것은 우주의 바깥으로 떠 있는 형태였다. 물보다 흙이 불순하기 때문에 땅이 되는 것이고, 물보다 공기가 순수하기 때문에 공기가 위에 뜨는 것이며, 공기의 바깥, 즉 우주에는 에테르라는 물질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천체들은 에테르로 이뤄진 특수한 존재이며, 지상의 불순한 존재들과는 다른 역학 법칙이 적용된다고 믿었다. 저런 괴상한 주전원 궤도가 가능하다고 믿어진 것은 그런 맥락에 있다. 반면 이런 역학 체계에서는 지동설이 낄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역작 《알마게스트》는 9세기에 이븐 후나인 등의 학자들에 의해 수차례 번역되었다.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점성술을 '신의 뜻을 알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천문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안한 궤도와 이슬람 학자들이 관찰한 값에 차이가 있자, 대안이 될 수 있는 여러 모델에 대한 가설도 이슬람권에서 이미 제기되었다. 후대의 코페르니쿠스 역시 지동설 주장에 이슬람권의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중세 성기 동안에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중세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3. 지동설의 등장과 천동설 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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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모델로 설명한 '''금성'''의 궤도.
천동설에 대비되는 지동설은 기원전 2세기 아리스타르코스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주요 가설 중 하나로 취급되었으나(대표적 사례가 아르키메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개념이 널리퍼지면서 한동안 사장되어 있다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천문학자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는 금성의 위상 변화 등 기존 천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지동설은 다시 위기에 빠졌다. 초기 지동설의 형태는 천동설보다도 '''번잡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주전원을 27개 썼지만 코페르니쿠스는 46개를 썼다. 주요한 원인은 코페르니쿠스가 원운동 말고 다른 걸 생각하지 못한 탓. 지동설 역시 초창기에는 관념적인 모형 만들기에 가까운 면이 있어서 천체의 운동은 '당연히' 완벽한 원이겠거니 생각했었기에 나온 한계였다.
그래도 지동설에는 프톨레마이오스식 천동설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천동설을 유지하면서도 그런 천체 현상을 설명 못 하는 게 아니었다. 티코 브라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개선해 자기식 천동설을 내놓았는데, 이 천동설은 '달만 빼고 모든 행성이 태양 주변을 돈다, 하지만 달과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이론이었다. 그리고 이건 코페르니쿠스식 지동설보다 '''정확했다'''. 브라헤가 지동설을 검토해보긴 했으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당시까지는 가장 정확한 관측 데이터에 따르면 '지구가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연주시차의 값이 0이면 천동설이 옳은 것이고, 0보다 크면 지동설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브라헤가 잰 연주시차는 0이었고, 따라서 천동설은 유지되었다. 실제로는 연주 시차는 0보다 크지만 그 값이 너무 작아서 당시 기술로는 0으로 나왔던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 왔으면 '왜 다른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데 지구만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라는 질문과 '상대성 원리에 비춰 태양이 가만있고 지구만 움직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는 의문이 생기기에 지동설로 이행하기 위한 밑바탕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케플러도 티코 브라헤의 태양중심 우주관과 타원 가설이 없었다면 케플러 법칙과 지동설을 증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지동설이 본격적으로 역전한 것은 요하네스 케플러의 시대였다. 케플러는 행성들의 원 운동이 보여주는 완전한 세계관에 이상을 갖고 티코 브라헤의 아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이후에 티코 브라헤의 비협조로 얻지 못하던 관측 자료를 들어 연구하다보니 예측되었던 것과 8분[4] 의 각 차이가 있었고, 여기에 케플러는 매우 좌절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에 나선 끝에 1618년에 '''케플러의 법칙'''을 정립했다. 케플러의 법칙은 지동설을 기초로 행성의 '''타원''' 운동(이는 기존의 '완전한 원 운동'의 관념을 뒤엎는 혁신이었다.)을 분석하여 내놓은 3개의 가설이었다.
하지만 천동설이 완전히 폐기되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작 뉴턴의 역학 덕분이었다. 상기했듯 당대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기반의 역학에서는 '우주의 천체들이 지구랑 똑같이 움직인다는 증거 있어?' 라고 계속 딴지를 걸었다. 사실 갈릴레이와 케플러의 지동설은 단순히 천문학 분야의 싸움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을 기반으로 성립한 모든 자연철학을 뒤집어야하는 거대한 싸움이었고, 이들의 싸움은 어찌보면 무모한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요하네스 케플러 역시 역학에서는 별다른 말을 안 했고 그냥 '수학적으로 아름다우니까' 라는 매우 관념적인 주장만 반복했다. 때문에 케플러의 모델은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가설로 간주되었으나 아직 '법칙'으로까지 여겨지진 못했다.
아이작 뉴턴 항목에서도 자세히 설명하지만, 뉴턴의 역학을 통해 '지상의 역학'은 물론 (당시 관측 가능한) '모든 우주의 역학'이 동일함을 설명할 수 있게 되어서 천동설이 드디어 폐기된다. 이 공로로 뉴턴은 당대부터 이미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인간이 결국 온 세상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광행차가 1674년 로버트 후크에 의해 처음 관측되고 1729년 제임스 브래들리가 해석하며 천동설에 관뚜껑을 덮었고 1838년 프레드리히 베셀이 연주시차를 확인하면서 관뚜껑에 못을 박아버렸다.
사족으로, 유리 가가린 등 우주인들이 지구 밖으로 나가본 것으로 지동설을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곤 착각하진 말자. 인간이 직접 가본 우주인 지구-달 사이 궤도에서는 지상에 있는 인간이 관측하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천구를 그릴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지구의 자전은 충분히 관측할 수 있는데 이는 달에서만 봐도 보인다. 태양과 지구의 각도가 유지되면서 지구가 자전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 따라서 낮과 밤이 태양의 이동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고 이게 바로 지동설이다.
3.1. 동양
한편 동양에서 전통적인 천동설의 붕괴는 상당히 늦었다. 조선의 경우, 김석문, 이익, 박지원, 홍대용 등의 학자들은 지동설과 천동설에 대한 논의를 접하긴 했으나, 보다 현실에 가까웠던 지구 구형설과 지전설의 입증에 집중하여 사실상 천동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전과 공전의 체계를 완전히 정리하여 수용한 것은 1857년 최한기의 '지구전요'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사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문제는 우주론적으로도 그다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하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묵자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묵자의 주장을 지칭한 표현들 중 하나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대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묵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단순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지구가 둥글고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논점 자체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4. 현대의 오해
4.1. 기독교 교리와의 관계
- 같이 보기: 갈릴레오 갈릴레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 관련 기사, 관련기사(영),
- 참고문헌 : <관찰과 표현의 과학사>(김명호 저), <중세 3 : 1200~1400>(움베르토 에코 저), <중세 4 : 1400~1500>(움베르토 에코 저), 관련 문헌(영)
중세 말~르네상스 시기의 자연철학, 신학은 현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과 종교의 관계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자연철학이 과학의 조상으로 간주되긴하나, 당시의 자연철학은 말 그대로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을 보는 관점이었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과 전혀 다르게 관념론적, 목적론적 성격이 짙었고 세계를 기계적으로 파악해서 분석하지도 않았다. 상기했듯 천동설도 그랬고, 지동설 역시 그런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심지어 갈릴레이 당시에는 과학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나[9] , 갈릴레이 사건을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후대 사람들은 임의적으로 자연철학이라는 단어를 과학이라 번역해서 맥락을 호도하고 있다.
또한 종교의 성격 역시 당시에는 세속적 권력기관이기도 했고, 단순한 종교 단체를 넘어서 교육, 복지, 학문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 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현대의 교회와 같은 선상에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당시 종교계가 학계를 포함하고 사회를 대표하고 있었기에 '기존 사회의 대표자'로서 가톨릭 교회 측이 지지한 기존 학설과 막 일어난 신생 학설 간의 대결이었던 것이, 후대의 중세와 종교 까기에 골몰한 계몽주의 시대 학자들에 의해 과학 vs 종교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연출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천동설은 원래부터 틀려먹은 학설이었고 다 종교 탓'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 덕분에 당대에 실제로 갈릴레오와 치열하게 대립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일단 천동설 혹은 지동설이 가톨릭 교회에서 '교리' 차원의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성격의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교회는 당대에 이미 성경이 자연과학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일례로 중세 초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노부터가 '첫 장부터 빛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태양이 생겼다는 얼토당토 않는 소리가 쓰여 있다'고 했다. 이런 전통은 갑자기 나온 것도 아니고 1~3세기부터 그리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논쟁하면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일례로 레위기에서는 메뚜기의 다리를 4개(...)라고 서술해놓기도 했다.[10]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글귀를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주 초기부터 관두고, 무언가 상징적인 해석으로 보며 그런 논쟁을 피했다. 이 때문에 지동설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단적으로, 지동설을 당대에 발굴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부터가 본직은 성직자로서 주교까지 오른 사람이다. 천문학은 학위가 있거나 정식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리 상 주교는 그 자체로 교회로서의 독립적인 모든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즉, 주교급 성직자 눈에도 지동설이 딱히 교리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고 보였단 것이다. 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주변에 알려졌을 때 그의 주변인들은 출판을 권유했다. 지동설이 책으로 저술되는 데에는 꽤나 지체가 있긴 했지만 교회에게 탄압받을까 두려워해서 늦추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간했을 때에는 교황의 비서가 그 책을 교황에게 소개하기도 했으며 쇤베르크 추기경이 지동설을 자세히 가르쳐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레고리력을 만들 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이용해 역법을 계산하는 등, 그의 이론은 유용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즉 가톨릭 교회는 그의 우주관이 기독교 교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실무적으로 유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로, 자연철학 사조도 살펴보면,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은 당대 자연철학의 대표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당대 기하학과 수학을 대표한 신플라톤주의의 대립이라는 성격이 두드러진다. 당시 자연철학과 기하학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천문학을 '천상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며 고귀한 학문으로 간주했다. 반면 기하학은 지상의 운동 법칙만을 다루는 학문으로 천한 것으로 여겼다. '''지동설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발전한 수학-기하학 방법론을 이용해서 우주의 운동법칙을 설명하려고 한 것인데, 자연철학자들에게는 이것이 영역 침범으로 간주되었다.''' 갈릴레이를 싫어한 많은 자연철학 교수들은 갈릴레오를 '수학 교수가 빽으로 자연철학 학위 따서 설치고 다닌다'고 비난했다.
또한 갈릴레오가 '신플라톤주의에 의한 우주 설명'의 일환으로써 목성의 위성을 관찰한 것도, 그의 적대자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보여주자 그런 거 관찰 안 된다며(...) 갈릴레이의 이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또, 위에서 보듯이 천동설의 최종형태를 만든 사람은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다. 지동설이 당시 혁명적인 이론으로서 과학계의 주류였고 종교가 조직적으로 과학을 탄압하는 상황이었다면, 수많은 과학자들이 갈릴레이에게 동조하고 교회는 그들을 전부 탄압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갈릴레이의 적대자들은 순전히 종교인들이 아닌 당대의 과학자들도 다수 존재했다. 즉 당시에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은 통설에서 생각하듯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서 설명될 일이 아니라 아직 과학으로 변화하지 못한 두 철학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수학적 방법론에 의지하는 근대 과학은 이 천동설-지동설 논란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정밀한 새 천문관측 자료를 통해서 새 이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 즉 '신은 아름다운 도형인 원형으로 우주를 창조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통해서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를 보면 태양을 하느님에 비유하고, 지구를 인간에 비유해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에 의지해야 하는 인간'으로 지동설을 비유했다. 당장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모델에서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형이어서 관측값과 약간 오류가 있었는데, 이것은 '원은 아름답고 완벽한 도형'이라는 신플라톤주의적 관념에서 도출한 결과였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모델을 수정해서 타원궤도의 모델을 만들었으나, 갈릴레이는 케플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 역시 신플라톤주의의 관념을 고집했기 때문인 듯하다.
셋째로,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한 천문학과 점성술은 분리가 전혀 안 되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천문학을 그냥 점성술로 부르거나 같은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요하네스 케플러조차도 이름을 날린 계기는 점성술의 예언이 몇번 맞아 떨어진 덕분이었다. 천체들의 움직임이 인간 개인이나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과 관련이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신실한 가톨릭 신학자들 중 일부가 이 때문에 천문학-점성술을 비방하기도 했다. 고대에는 행성을 곧 그리스로마신화의 신과 동일시했고, 점성술에는 그 흔적이 짙게 남았다.
중세에 부활한 천문학-점성술은 행성과 고대의 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지워졌으나 결정론적인 관념이 문제가 되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믿는데, 별의 움직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다는 의미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주로 이슬람에서 발전하여 유입된 것이었는데, 이슬람교는 가톨릭과는 정반대로 신의 절대성과 전지전능을 강조하기 때문에 천문학-점성술의 결정론적인, 즉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신의 의지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견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럽으로 수입된 천문학-점성술은 결정론적 사유가 매우 짙게 깔려 있었다. 물론 서구나 이슬람이나 천체의 움직임이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어쨌건, 유럽에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천문학은 가톨릭 교회와는 '천체의 움직임은 물리적 사건에는 영향을 미치나, 인간의 영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서로 타협을 봤다.
이 불안정한 타협과 갈등들은 가톨릭 교회와 신플라톤주의의 야합으로 국면이 바뀌었다. 가톨릭 성직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다. 별의 움직임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비해서, 별의 움직임은 신이 설계한 기계장치라는 철학적 사유가 담긴 지동설은 가톨릭 일부 신학자들 입장에서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갈릴레오의 지동설도 갈릴레오가 논쟁을 지나치게 키우기 전까지는 오히려 가톨릭 교회에게 지지를 받았다. 갈릴레이는 지동설 관련으로 재판을 이미 두번이나 받았으나 두번 다 무혐의로 풀려났다. 다만 이 과정에서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갈릴레오에게 "타당한 논증 없이는 더는 지동설이 유일한 진리임을 주장하지 말아라." 하고 권고했다. 그는 "지동설이 '참된 논증'을 통해 입증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고 주장하여 기존 성직자들과 뜻을 같이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른 천동설을 주장한 학자 중에는 결정론적인 해석을 하는 바람에 화형된 학자(체코 다스콜리Cecco d'Ascoli, 1327년 사망)가 존재하는 것에 비하면,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이런 대응은 유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갈릴레오의 요청으로 지동설을 가설의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을 허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도 4년 뒤인 1620년 금서에서 해체된다. 다만 교황청이 지동설을 가설 차원으로 다루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을 현재적으로 유지되는 학설(천동설)과 비교하여 해당 학설을 더 견고화하는 용도에서의 '가설' 차원으로서 다루는 것을 허용한 것일 뿐, 성경에 근거하여 신중한 재해석을 요구하는 등 이를 정설로까지 발전시킬 의사가 없었음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톨릭 교회의 행동을 권고가 아닌 탄압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상기하였듯 천동설이건 지동설이건 교회 입장에서는 교리 차원에서 왈가왈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교회는 천동설을 교리로 여기지 않았으나, 지동설 역시 교리로 여기지 않았다. 일부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를 이교도라며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 중에서도 당시의 '최첨단 선진 학문'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용한 사람은 충분히 많았다. 일부 신학자들이 천동설을 포함한 천문학-점성술을 비난한 이유는 그것에서 이어지는 결정론적 사유 때문이지, 교회에게 있어서 땅이 움직이느냐, 하늘이 움직이느냐는 본질적인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저 달력을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적인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 원칙이 천동설에게 그랬듯이 지동설에도 적용되었던 것뿐이다. 땅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가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그런 논쟁 속에서 갈릴레이의 친구인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1623년 우르바노 8세 교황으로 즉위하자 갈릴레이는 그에게 천동설과 지동설을 균형 있게 다루라는 조건 하에 '지동설을 가설 차원에서 논의하는 책을 발간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고, 그리하여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1630년에 출간하게 된다. 그 책은 3명의 등장인물이 4일간 대화를 나누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갈릴레이는 특히 밀물과 썰물을 지구 공전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해서[11] 가장 중요하게 다뤘다. 그러나 교회 검열로 조석 현상에 관한 내용은 빠졌다. 해당 부분에 교황을 모욕했다고 간주되는 서술이 들어있었기 때문[12] 이다. 하지만 "두 이론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하고 서문을 쓰고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지동설을 지지했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심플리치오(직역하면 '단순이', 의역하면 '바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그들을 조롱조로 대했으며, 심지어 바보로 묘사된 심플리치오가 교황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사실에 교황과 신학자들은 격분했고 천동설 지지자와 교회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이 성경 내용에 저촉된다는 혐의, 그리고 1616년 교황과 했던 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혐의로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 다시 회부되어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다시는 관련된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난다. 사실 종교에 의한 탄압이란 프레임 때문에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 재판을 무시무시한 위협 같은 것으로 상상하게 되지만, 재판 과정에서 갈릴레이는 위협이나 심문은 커녕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하인까지 대동하며 잘 대접 받았고, 고문과 화형으로 끔살 당하는 것이 빈번했던 당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다시는 관련 주장 안하겠습니다' 선언 한 마디로 땡치고 풀려난 것은 매우 유한 판결이었다. 시대적 맥락을 생각하면 교황청의 갈릴레이 재판은 논란을 몰고 다니는 학자를 보호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혼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에 가까운 정도였다. 이 때 갈릴레이가 재판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전설이 생겨났으나, 해당 발언은 후대에 갈릴레이를 종교에 맞선 과학의 순교자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후대에 덧붙인 말로, 실제 발언이 아니다. 상세는 해당 항목 참조.
결국 갈릴레이의 재판은 종교-과학의 논쟁보다는 논쟁을 즐긴 학자가 반대파를 지나치게 모욕하고 다니는 등 처신을 잘못하다가 벌어진 일의 성격이 짙다. 특히 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을 하다가 화형된 천동설자는 화형된 사건, 반대로 천체의 운동과 지상의 사건이 무관하다고 주장한 갈릴레이는 살아남은 것을 비교하면 교회가 무엇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갈릴레이 사건이 종교-과학의 논쟁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것은 그 반대파 학자 중 하나가 하필 교회의 높으신 분이었다는 점 하나 때문인 것이다. 상기했듯 당시에는 교회가 '기존 사회 전체' 그 자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초부터 교리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사실 더 단순하게도,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따른 당대의 다른 이탈리아 과학자들, 그리고 갈릴레이의 제자들 역시 딱히 지동설과 관련한 무언가로 재판을 받거나 탄압을 받은 적이 없다. 갈릴레이 재판 이후 갈릴레이가 공식적으로 지동설을 부인했음에도, 갈릴레이의 주변 종교인들 중 상당 수는 여전히 지동설을 지지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천동설-지동설의 대립을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시대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오류를 범한다. 현대에도 과학자로써 정체성과 종교신자로써 정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믿음과는 별개로 학문에서는 학자로써 발언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갈릴레오 재판도 비슷한 사례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 간 대립이었는데 그 배경이 시대적 상황 상 종교재판정이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5. 여담
- 21세기에도 종교적, 개인적 이유로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13] 좀 많이 믿기는 힘들겠지만 외국에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자칭 학회 또한 존재한다. 당연히 학계는 물론 종교계에서조차 인정을 전혀 못 받고 있다.
- 조선시대에는 홍대용, 김석문 등이 지동설을 주장하였지만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사상적인 것과 관련이 없어서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 둘 다 선교사들을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자체적인 관측으로 이를 터득한 사례는 되지 못했다.
- 비주류 유사과학자들이나 음모론자들 중에 현재 정설이 틀렸고 자신들이 옳다면서 천동설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
- 오망성 문양은 천동설 체계에서 금성의 궤도를 기호화한 것이다.
6. 관련 문서
[1] 물론, 사실은 태양도 은하의 중심부를 축으로 공전하고 있으나, 적어도 태양계 모델에서는 고정되어 있는 셈이다.[2] 지동설이 기정사실화된 현대까지도 중, 고등학교 수준의 천문학에서는 별과 관련한 교육 때 태양계를 중심에 놓고 별자리들이 움직이는 모델로 가르친다. 다만 그 우주관은 옛날의 우주관과는 판이하다. 옛날에는 우주의 중심은 반드시 지구여야 했다고 여겼다면, 지금은 '그냥 아무 데나 중심으로 잡아도 되니까 지구로 잡아도 뭐 어때?' 정도[3] 수학적으로는 복잡한 궤도를 푸리에 해석을 통해서 분석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각 주전원은 푸리에 급수의 항 하나에 해당된다. 단지 프톨레마이오스 시기에는 아직 무한급수와 허수, 자연로그의 밑의 개념(즉, $$e^{in\pi x}= \cos\left(n\pi x\right) + i \sin\left(n\pi x\right)$$)이 없었으므로 사람의 손으로는 정확한 궤도를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이다.[4] 원을 360도라고 할때 그 도(degree)의 또 60분의 1이 '1분'이다. 8분을 도로 환산하면 고작 '''0.133도'''. 당시 브라헤의 관측은 정밀하기로 유명했다.[5] 고대 로마의 신학자 오리게네스의 주장.[6] 서로마 제국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노의 주장.[7] 베네치아의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 주교.[8]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주장.[9] 18세기에 들어서야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단어가 자연 과학(natural science)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10] 유대교 랍비의 해설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메뚜기의 뛰어오르기 위한 긴 뒷다리를 날개라고 생각해서 나머지 작은 다리 4개만 다리로 센 것이라고 한다.[11] 현대에는 조석 현상이 달의 인력으로 일어난다고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에서는 점성술적 관념 때문에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반면 갈릴레이의 지동설 체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을 부인하느라 '먼 거리에서 별에 의해 가해지는 신비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밀물 썰물은 달과 무관하다고 판단하고 지구의 공전과 관련지었다. 결과적으로는 천동설 측이 이 부분은 맞은 셈인데, 더 중요한 것은 당시의 천동설 지동설 논쟁이 별의 움직임이 지상에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느냐로 싸운 관념론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이다.[12] 교황이 지동설을 반박했을 때 발언한 말과 똑같은 문장을 심플리치오가 한다.[13] 이중에서도 지구 평면설을 주장하는 평평한 지구 학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