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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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두관은 1900년 3월 1일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해 6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군에 배속되었다. 지청천의 <자유일기>에 따르면, 장두관은 1920년 홍범도 장군의 정일군의 소대장으로 배속되었고 '일구쓰크시 고려혁명군사관학교'에서 지청천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에 맞섰고, 1924년 군자금 모금차 국내에 들어와서 진주 금융조합에 근무하는 박춘성으로 하여금 조합돈을 군자금으로 제공하게 한 뒤 만주로 가져가다가 서울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0년 3월 에는 신간회 중앙위원 겸 진주지회 위원장으로 일했으며, 8.15 해방 후에는 광복청년회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에 입대해 장교로 복무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장두관은 국민방위군 제2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해 통영의 수비를 맡았고 1951년 1월 20일 통영극장에서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했다.# 지청천은 1952년 11월 26일 장두관의 넷째 딸의 결혼식의 주례를 선 뒤 <자유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두관은 6.25 전쟁 종결 후 1954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진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10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두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200명 학생 중 병사 전서 등 희생자가 불소한 중 생존한 장대령은 시종 변절치 않고 사제로 의를 지키고 광복청년회 등 중요 간부로 있었고 금년 49세의 우수 분자인데 배경 관계로 장관(將官)급에 승진치 못하고 수년관 영관으로 노무사단장직에 복무 중인 인물이니라.
[1] 이명으로는 장두남(張斗南)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