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붕

 



'''임시의정원 제6대 의장
장붕
張鵬
'''
'''출생'''
1877년 9월 15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사망'''
1955년 8월 22일 (77세)
하와이 호놀룰루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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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붕은 1877년 9월 15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에 내부주사(內部主事), 강원도(江原道) 사무관(事務官)을 지냈으나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사직했다. 이후 1911년 장로회에 입교했으며, 1916년에 전도사가 되었다.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린 한성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모임에 기독교 대표로 참석했고, 이승만이 한성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선출되는 과정에 막후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4월 23일 전국 13도 대표가 참석하는 국민대표에 참가하지 못하고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서울을 탈출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6월 상하이에 도착한 장붕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7월 2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 조사 편찬부 위원으로 위촉되어 <한일관계 사료집>을 발간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1920년 3월부터 미국에 있는 이승만 임시 대통령에게 임정 내부의 동향을 편지를 통해 알리기 시작했다.

저는 작년 여름에 이곳에 도착해 처음에는 생소하고 그후에는하는 일이 여의치 못합니다.이곳의 형편은 다소 부족한점이 있으나 통괄해 말하면 진보하고 있는 중이고 무엇이든지 조직적으로 돼가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옵고 그곳의 사 업만 전심(專心)하십시오.

장붕이 보고서에서 가장 신경쓴 것은 당시 이승만과 경쟁 관계에 있던 임정 노동국총판 안창호와 국무총리 이동휘의 동향이었다. 그는 1920년 7월 2일 이승만에게 보고서를 보내면서 안창호가 임정의 3분의 2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면서 대응책을 속히 수립할 것을건의했다.

안군이 상해에 도착한 이래로 일본에 유학한 청년들을 받아들여 결속하고 차장(次長)도 삼으며 인심을 취합하며 국내에서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하는 동시에 자기의 세력도 모으는 모양이며 (중략) 상해 정부는 다 안군의 심복과 평안도인의 장악물이 될 것이요, 최후의 결전할 것은 오직 각하 뿐이오니 각하의 응전책이 어떠하신지요.

하지만 그는 7월 30일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장기적으로는 정세가 낙관적이라고 전망했다.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세 사람은 확실히 각하를 반대할 의향이 없습니다. 각하의 선전사업이 잘 진행되고 공채 모금의 성적이 양호해 장래의 재정전도(財政前途)에 궁핍이 없으면 그 반대하는 것도 과히 겁낼 것은 없습니다.

8월 21일, 장붕은 직접 이동휘를 방문해 대담한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동휘가 말하길) 각하(이승만)는 정신상으로 적대적 위치에 있으니 철두철미 반대하겠다 하며, 상해와 만주, 러시아 지역의 일은 자기가 각료와 협동해 행하고 미주와는 연락하지 않겠다 하며, 안군이 돌아오면 회합하게 지내겠다 합니다.

또한 그는 임정에 참여한 일부 인사들이 독립운동보다 사리사욕을 챙기는 실정을 거론하고 이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표명했다.

상해의 형편은 대소를 막론하고 각각 자기의 세력.명예.당파를 수립하려 노력하고 국가독립사업에 집중하는 자가 부족하오이다.독립사업이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돼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고 독립사업에 유익할 방책이라도 자기의 의사나 자기 당의주장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하니 한심할 뿐입니다.

그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2가지 사항을 건의했는데, 그 중 중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상해에 있는 국무원에 위문서를 자주 발송할 것

제당파를 타파하며 지방열 고취를 엄금할 것

임시정부로 속히 송금할 것

구미위원회와 상해정부가 연락을 갖도록 하고 중대 사건은 서로 협의한 뒤 단행할 것을 서로 약속할 것

국내의 이상재씨와 직접 연락해 국내 인심을 수습할 것

각 단체의 수령을 관대히 대해 그 마음을 획득할 것

그는 이 중에서도 각 파의 분쟁을 상관하지 말고 초연적 태도로 하며 내 편, 네편을 막론하고 공정히 판단하고 당파 분쟁에 참여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광복 후를 대비해 천도교 총수인 손병희에게 친서를 보내 제휴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장붕은 임정의 재정이 매우 열악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했다.

한국의 생활곤란으로 인해 매일 2백~3백명이 만주로 이주하오니 이들을 대상으로 구제채표(救濟彩票)를 발행하되 그 표수는 1백만장 이상으로 하고 매장에 10달러로 하면그 총금액의 수집성적이 양호해 1천만달러 이상이 된다고 가정하면 그 금액의 10분의 1 또는 2는 광고료와 그외 경비로 충당합니다. 금액의 대부분은 한미합작흥업은행(韓美合作興業銀行)을 상해에 설치하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의 금융기관을 만듭니다. 또 이를 이용해 만주의 광활한 미개간지를 매입 하고 국내의 궁민(窮民)을유도해 이주 영농케하면 일거양득이며,미국으로부터 농기구를 구입하고 기사(技士)를 초빙해 대규모로 농업을 경영하면 많은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장붕은 이승만이 몇 만원은 갖고 상해에 와야 임정의 재정난을 해소하고 반대파들을 무마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상해에 왕림(枉臨)하시려면 시기가 조금 이른 듯하고 돈 몇만원은 준비돼야 하겠소이다.재정이 고갈된 정부,생활곤란을 당한각료들,만주에서 무장준비하는 제군단(諸軍團)들,또 동지의 생활비들에 조금이라도 쓸 돈이 있어야만 하겠소이다 .깊이 생각하시고 돈이 준비되거든 통지하시옵소서.

이렇듯 이승만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그는 1920년 12월 5일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즉각 찾아와서 상하이의 정세에 대해 브리핑했다. 이승만이 1921년 6월 상하이로 돌아간 뒤, 그는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 의원, 법개정안 기초특별위원회 위원, 국제연맹회 제출안 기초위원을 역임했고,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사원, 상해대한교민단장을 지냈다. 또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무간사를 역임했으며, 1923년 제6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았다가 1923년 말에 사퇴한 뒤 하와이로 이동했다.
이후 그는 이승만이 선교부장으로 있던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 이사(理事) 및 목사로서 목회 활동을 수행했고, 이승만이 주도하던 동지회(同志會)에 가담했다. 그러나 1940년대 초반 동지회에 탈당서를 제출하고 이승만과 결별했다. 이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말년을 보내다 1955년 8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장붕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