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걸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송말삼걸(宋末三傑)
張世傑 | 장세걸
'''

'''이름'''
장세걸(張世傑)
'''생몰'''
? ~ 1279년
'''주군'''
송도종
송공종
송단종
송소제
'''국적'''
남송(南宋)
1. 소개
2. 생애
2.1. 임안에서 애산까지
3. 결론
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소개


장세걸은 탁주(涿州) 범양(范陽) 출신 인물로, 문천상, 육수부와 함께 '''남송 3충신'''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문천상이 망국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절의를, 육수부가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을 몸소 증명했고, 장세걸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2. 생애



2.1. 임안에서 애산까지


장세걸은 문천상, 육수부와는 달리 군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소교(小校)에서 시작해 도통(都統)직까지 승진하였으며, 임안이 원나라의 공격에 위기에 빠지자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임안으로 들어가 유수용(劉帥勇) 등과 함께 초산(焦山)에서 방어전을 펼첬으나 패했다.
임안이 위기에 빠지자 장세걸은 문천상과 함께 임안 내에서의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지만 승상 진의중(陳宜中)이 이를 말렸다. 이후 문천상은 임안으로 쇄도해오는 몽골군과 교섭을 시도했다가 억류당했다.
결국 임안이 몽골군에 의해 위기에 빠지자 송공제는 항복하였다. 그러나 육수부를 필두로 하는 일부 대신들은 익왕(益王) 조하(趙昰), 광왕(廣王) 조병(趙昺)과 함께 복주로 피신하였으며, 장세걸 또한 이에 합류했다. 이후 육수부, 진의중, 장세걸은 논의 끝에 두 황족 중 나이가 많았던 송단종을 옹립하고 계속 저항하기로 한다. 북쪽으로 끌려가던 문천상 또한 탈출 후 이에 합류, 추밀사직을 수여받고 저항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결국 복주 또한 몽골군에게 함락당했으며, 이에 절망에 빠진 진의중은 이탈하였다. 그러나 육수부와 장세걸은 포기하지 않고 남쪽 광주까지 조정 대신과 황제, 황족을 이끌고 피신하여 오늘날의 홍콩 근처의 어떤 섬에서 조정을 꾸렸다. 이곳에서 송단종은 병이 들어 사망하였지만 두 대신은 송소제를 옹립하여 남송의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2.2. 애산 전투


쿠빌라이 칸은 남쪽 끝에 세워진 작은 망명 정부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그들이 곧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남송인들의 저항의 구심점이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쿠빌라이는 장홍범(張弘範)[1]을 원수로, 이항(李恒)을 부원수로 삼아 2만에 달하는 정예군을 남하시켰다. 장홍범은 먼저 외곽에서 게릴라전으로 방어선을 유지하던 문천상을 오파령 전투에서 격파, 포로로 잡고 이후 광주의 남송 조정을 압박하였다. 결국 1279년 2월, 당시 남송의 방어전을 지휘했던 장세걸은 애산항으로 이동, 이곳에서 배수진을 친다는 각오로 '''섬에 있던 황궁과 거처를 모두 태우고 모든 병력을 배 위에 올렸다.''' 그리고 배들을 모조리 묶었다. 물론 배에 진흙을 발라서 불이 쉽게 안 붙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미 당시 몽골군은 강력한 해군력까지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
이후 장세걸은 최후의 남송군을 이끌고 해상에서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장홍범은 처음에는 화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애산에서 밖으로 나가는데 필요한 해로와 육로를 모두 봉쇄하고 굶기기에 들어갔다. 남송군은 보급이 끊겨 매우 굶주렸으나 장홍범은 쉽게 남송군을 격파할 수 없었다.
이런 대치는 이항의 합류로 끝났다. 이항이 합류하자 장홍범은 군을 재정비한 후 네갈래로 갈라 남송군을 사방에서 협격하였다. 이에 장세걸은 대세가 기운 것을 깨닫고 정예병을 중군에 집중시켰으며 육수부송소제를 데려오게 하였다. 최후의 돌파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육수부와 송소제에게는 남송군 뿐만 아니라 원의 군대도 접근하고 있었고, 이에 육수부와 송 소제는 바다로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세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밤이 올때까지 방어전을 지휘하다 야음을 틈타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다.''' 이후 장세걸은 해릉산까지 나아가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태풍에 의해 익사하고 말았다.[3][4] 이때 장홍범의 진영에서 포로로 잡혀 남송 마지막 군대의 괴멸을 지켜봐야만 했던 문천상의 심경은 어땠을까...

3. 결론


문천상이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의를 지켰고, 육수부가 나라의 마지막과 그 운명을 같이했다면, 장세걸은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저항을 멈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송 3충신 중 하나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산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4.1. 징기스칸 4


징기스칸 4에서는 전투력이 '''84'''에 기병적성이 A이다. 또한 이벤트의 능력치 상승까지 포함한다면 전투력은 '''89'''이다. 그야말로 문천상, 여문환과 같이 남송의 희망이다. 나머지 능력치는 50대이다.

[1] 장세걸과는 친척 지간으로 장세걸에게 여러 번 항복 권유를 했지만 장세걸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2] 유목 민족인 몽골군이 어떻게? 라고 의문이 들 수 있지만 답은 간단하다. 바로 '''송나라 투항병들을 모조리 끌어들인 것.'''[3] 이는 열전의 기록이고 본기에서는 스스로 물에 빠져 자결했다고 기록되어있다.[4] 이 때 진(陳)씨 성을 가진 장세걸 휘하의 한 병사가 기적적으로 고향으로 생환하여 외손자를 여럿 보았는데, 그 중 막내가 주(朱)씨 성에 아명을 중팔(重八)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