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송)

 


'''남송 제15대 황제'''
'''度宗 景皇帝 | 도종 경황제'''
'''묘호'''
'''도종(度宗)'''
'''시호'''
단문명무경효황제(端文明武景孝皇帝)
'''연호'''
함순(咸淳, 1265년 ~ 1274년)
'''출생'''
1240년 5월 2일
'''사망'''
1274년 8월 12일
'''국적'''
남송(南宋)
'''재위'''
'''남송의 황제'''
1264년 11월 16일 ~ 1274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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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
기(祺)
'''부모'''
양부 이종, 양모 수화성복태후
생부 조여예(趙與芮), 생모 제국부인 황씨
'''황후'''
전황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삶
2.2. 즉위 후
2.2.1. 가사도의 권력 장악
2.2.2. 계속되는 몽골과의 대결
3. 대중매체에서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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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나라의 제15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6대 황제로 공제, 단종, 소제 3형제의 아버지. 묘호는 도종(度宗). 시호는 단문명무경효황제(端文明武景孝皇帝). 휘는 기(祺). 즉위하기 전의 이름은 조맹계(趙孟啟). 아버지는 이종의 동생인 사영왕 조여예, 어머니는 제국 부인 황씨다. 후사가 없는 이종이 조카인 그를 양자로 삼아 조자로 개명시키고 궁으로 데려와 키웠다.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삶


1240년 이종의 친동생인 사영왕 조여예와 제국부인 황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초명은 조맹계였다. 당시 남송 황실은 자손이 많지 않았고 귀했는데 조맹계의 큰아버지인 이종 역시 황후 사씨와의 사이에서 외아들인 기충소왕 조유를 얻었지만 일찍 요절했고 다른 아들도 일찍 사망해 후사가 없었다. 따라서 이종은 유년기의 종실 왕자 중에서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이때 그는 자신과 혈연적으로도 가장 가깝고, 어릴때부터 형제간 우애가 돈독했던 친동생 영왕의 아들, 즉 자신의 어린 친조카 조맹계를 일찍 양자로 삼았다. 양자가 된 조맹계는 큰아버지의 양자가 된 뒤 휘를 조자로 개명하고 궁에서 키워졌다.
영종(寧宗) 때 엄격한 제왕 교육을 받았던 이종은 본인 역시 유학을 권장한 군주답게 후계자 조자를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그러나 조자는 《송사》에서도 기록되었을 정도로 발육 속도가 남들보다 늦어 걸음마를 떼는 속도도 느리고 말도 7살이 되어서야 잘했다. 더해서 천성적으로 몸도 약했고 심각한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으며 이해력도 심하게 떨어졌다. 기록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경계선 지능 혹은 정상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IQ 90 미만으로 사실상 경계선에 있지 않았나 추정.하지만 이종은 좌절이나 포기하지 않고 조자를 다시 조기로 개명시킨 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을 부린 끝에 친조카이자 양자인 조기(조자)를 황태자로 삼았다.
당시 이종의 일가에서 제위를 물려받을 만한 종실 남자가 지적장애자인 조기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이종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이종이 조기의 생부인 친동생 영왕과의 형제애가 상할 것을 염려해 끝까지 고집을 피웠고 그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이종이 그 뜻을 거둘 생각이 없었던 까닭이 컸다. 하지만 이는 표면상 이유일 뿐이고, 처음 반대 의견을 냈던 대신들이 “다시 후계자를 찾느라 법석을 떠느니 허수아비가 될 게 확실한 그를 즉위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한 이유도 있었다. 그후 40여년간 집권한 이종이 죽고 황태자 조기가 즉위했다.

2.2. 즉위 후



2.2.1. 가사도의 권력 장악


도종은 즉위한 이후 대신들의 예상대로 제대로 된 황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젊은 도종은 사치향락에 빠진 채 재상 가사도[1]에게 실권을 맡겼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사도를 깊이 신임했다. 가사도에게 먼저 떠난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일화가 있을 정도로 꼭두각시 황제였다. 또 그는 매일같이 가사도에게 정중하고 공손히 예를 갖추고 여러 신하들 앞에서도 인사를 할때마다 “사상님(재상선생님)”이라고 존칭을 스스로 올렸다. 따라서 가사도는 도종 재위 기간 내내 안정적으로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는 도종은 재위 기간 내내 가사도의 꼭두각시 황제였고, 정치에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자타공인 ‘재상 어르신’ 가사도는 재상부터 태사까지 남송 전권을 장악하다시피 하면서 독재체제를 완성했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이들을 배제시키거나 견제했다. 또 여문환 등 커지고 있던 지방 군벌 세력들을 중앙과 격리시켰고 문천상과 같은 인물들을 요직에서 밀어냈다. 이런 까닭에 가사도는 오늘날 남송을 망친 간신의 전형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전횡을 일삼았던 가사도는 당시 화폐개혁, 공전법과 같은 개혁안을 내고 전시 체제 아래에서 긴축정책을 취하는 등 정치수완이 좋아 의외로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2.2.2. 계속되는 몽골과의 대결


도종 재위 기간은 나름 가사도가 안정적으로 국정을 장악한 상황임에도 외부적으로는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이 무렵, 북쪽에서는 쿠빌라이 칸이 내란을 진압한 후 남송을 침공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쿠빌라이는 참모들과 남송에서 항복한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전의 실수를 되집어보고 과거의 전방위적인 남송 공격을 수정했다. 그는 몽골군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화력을 남송의 요충지이자 대몽골 최전선 핵심인 양양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양양성은 몽골군의 포위공격을 무려 5년 동안이나 버텼고 가사도가 이끄는 조정에서도 양양성을 구원하고자 끈질지게 지원군, 물자보급 등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몽골군의 방해와 방어선 때문에 쉽지 않았고,[2] 장강 방어선의 보루인 양양은 결국 함락되었다.
양양 함락 이후 쿠빌라이와 몽골의 생각처럼 송나라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몽골군은 자신들을 막던 양양성을 넘어 장강 이남으로 진출했으며 남송의 수도 임안은 몽골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274년 마음 편하게 가사도에게 전권을 주고 안락한 생활을 보내던 도종은 방탕한 생활 끝에 34살의 이른 나이로 사망하고 영소릉에 안장되었다. 만약 도종이 조금만 더 살아있었더라면 가사도가 패망하면서 같이 망국의 군주가 되었겠지만, 하필 도종이 죽은 뒤에야 가사도가 패망함으로써 망국의 군주는 그의 뒤를 연달아 이은 어린 아들들이 차지하게 된다.[3]
도종은 지적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정무를 돌보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그의 치세는 실질적으로 가사도의 치세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가사도에게 폐위되지 않은 것이나 망국군주를 면한 것을 보면, 그래도 사주는 잘 타고 났었던 모양이다.

3.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남송의 황제로 등장한다. 본인의 능력치는 심히 암울하며 북쪽의 쿠빌라이의 세력은 강대하고 무섭다. 무엇보다 대도에는 전투 95의 바얀이 있다. 어떻게든 대도를 함락시키면 도종의 능력치가 올라가지만 도종의 수명이 낮기 때문에 금방 죽어버려서 빨리 함락시켜야 능력치 상승 효과를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도종의 능력치가 올라가봐야 그게 그거라 안습하다. 다만 도종 뿐만 아니라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의 능력치가 상승하므로 도종보다는 이 세 사람의 능력치를 올려주기 위해 보는 게 좋은 이벤트이다. 그러나 도종은 자식이 없기 때문에 짧은 수명 동안 후계자 생산이 시급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나리오에서의 남송 플레이는 타임 어택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4. 둘러보기




[1] 이종의 후궁이자 총애를 받은 귀비 가씨의 남동생이자 당시 재상.[2] 일각에서는 남송과 가사도가 양양을 말그대로 방치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남송 조정과 가사도는 지원군, 물자 등을 보내려고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남송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몽골 측의 단단한 양양 봉쇄라인을 제대로 뚫어내지 못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양양성은 몽골의 정예군을 상대로 5년을 버텼다.[3] 다만 그가 지적장애라는 건 쿠빌라이도 알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우대받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오히려 어려서 항복했을 뿐 명백한 정상인이었던 아들은 쿠빌라이의 지시로 숙청대상 명단에 올라 겨우 당대에는 목숨을 건졌으나 대신 머리를 깎이고 티베트로 추방당했으며, 결국 40여년 뒤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