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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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의 제17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8대 황제. 묘호는 단종, 시호는 유문소무민효황제(裕文昭武愍孝皇帝), 휘는 하(昰). 연호는 경염(景炎). 송도종의 아들이자, 송공제의 이복 형이다.
2. 생애
조하는 1269년 임안에서 송도종 조기의 3남으로 어머니 숙비 양씨에게서 태어났다. 조하는 형들이 일찍 죽어 아버지 송도종이 죽을때 사실상 장남이어었지만 어머니가 후궁인 숙비 양씨라 황후 전씨의 소생이었던 이복동생 조현에게 계승권이 밀려 황제에 오르지 못한다. 이후 조현이 즉위한 뒤 1274년에 길왕(吉王)에 봉해졌다.
당시 조국 남송은 말그대로 멸망 문턱까지 와 있었다. 중앙정부의 갖은 노력에도 5년간 몽골군의 포위망과 끊임없는 방해 탓에 도움을 받지 못하고[1] 버티던 요충지 양양이 결국 원나라에게 함락됐다. 이후 남송의 장강 방어선은 양양이 뚫리면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고 장강 상류 부근이 원나라 수중에 들어가면서 수도 임안부는 언제라도 내줄 판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버지 도종이 34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어 어린 동생이 황제로 즉위한 것도 악재중의 악재였다
남송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서 13만의 정예군을 편성해 방어전을 시도한다. 문제는 거짓 승전보고[2] 로 명성을 얻은 우승상 가사도에게 13만 정예군의 지휘권을 넘겼고, 그 결과 남송의 마지막 13만 정예군은 가사도의 졸렬한 지휘로 힘도 못 써보고 바얀이 이끄는 20만 대군에게 한 큐에 완전 박살났다. [3]
1276년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는 임안을 포위했고, 급해진 남송은 최후의 화의를 시도하게 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끝이 났다. 따라서 황제 조현와 수렴청정을 하던 사태후[4] , 공제의 모친 전태후, 남송 조정, 황실 사람들은 스스로 수도 임안 문을 열고 항복했고 대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남송의 부흥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진의중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임안이 함락되자 황족 가운데 익왕 조하와 조하의 어머니인 숙비 양씨, 도종의 7남인 위왕 조병[5] 등을 데리고 나와 그 중 나이가 많은 조하를 황제로 옹립했고 이렇게 조하는 7살 나이에 송나라의 황제가 된다. 이후 남송 부흥군은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처절해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원의 군대 역시 복주를 항복시키고 천주의 실력자인 성박사 포수경을 포섭하는 등 점차 강남을 확고하게 지배하면서 남송 부흥세력을 점점 압박해나갔다. 이에 부흥군은 단종을 모시고 남쪽으로 향했고 최후의 수도인 애산에서 결전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단종과 남송 망명 정부는 해운을 장악한 포수경 없이 배를 제대로 구하지 못한 탓에 애산까지 가는 파천길 중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 과정에서 태풍이 불었는데 이 일로 익사할뻔 한 어린 단종은 충격을 받아 병을 얻어 재위 2년만인 1278년 지금의 홍콩 근처인 복주 인근에서 오늘날로 고작 초등학교 3학년 나이에 불과한 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단종의 유해는 영복릉에 안장되었으며[6] 뒤는 역시 도종의 아들이자 당시 7살에 불과한 단종의 이복 동생 조병이 물려받았는데, 그가 바로 남송을 부흥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애산 전투와 함께 장렬하게 짧은 생을 마감한 송소제다.[7]
단종의 일생은 조선 단종 못지않게 참담했지만, 스스로 임안부 성문을 열고 항복한 공제, 애산 전투 후 바다로 뛰어들어 죽은 동생 소제와 달리 상대적으로 인지도는 처참하다. 그러나, 묘호라도 받았으니 철저하게 냉대받다가 티베트까지 끌려가 거기서 사사당하거나 물에 빠져 죽은 동생들보다는 그나마 편안히 죽은 편이다.
3. 둘러보기
[1] 남송 조정은 온갖 수를 이용해서 양양에 물자, 원군 등을 끊임없이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2] 가사도는 이종때 당시 내분으로 회군해야 할 쿠빌라이 칸과 밀약은 맺은 뒤, 회군하던 몽골군을 공격하는 시늉을 했고, 밀약 사실을 숨긴 채 남송 조정에 자신이 쿠빌라이 칸을 격퇴했다고 거짓보고했다. 하지만 원나라와 쿠빌라이는 가사도를 결코 무능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3] 이후 가사도는 이 일로 즉시 조정으로 소환된 뒤 과거 거짓보고 등이 들통나서 탄핵되고 유배지로 쫓겨나던 중 암살당했다.[4] 이종의 황후[5] 도종과 수용 유씨 소생이다.[6] 남송 역대 황릉은 임안에 있었다. 그러나 수도가 함락되고 망명 정부라서 복주 일대에 간소한 장례를 치뤘다. 봉분은 매우 작았으며 현재는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7] 결국 1279년의 애산 전투와 함께 소제와 송 군신 전원이 바닷물에 몸을 던지면서 남송은 완벽하게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