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천상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송말삼걸(宋末三傑)
文天祥 | 문천상
'''

'''이름'''
문천상(文天祥, Wén Tiānxiáng)
''''''
송서(宋瑞)/이선(履善)
''''''
문산(文山)
'''생몰'''
1236년 ~ 1282년
'''주군'''
송이종
송도종
송공종
'''국적'''
남송(南宋)
1. 개요
2. 생애
3. 정기가
4. 기타
5. 기타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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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세기에 몽고의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때,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 부터 1279년 광동 애산 전투에서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장장 40여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여 몽고의 몽케 칸 또한 남송의 합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 출신의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은 송 왕조가 3백 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상의 보답이었고, 송대 문관정치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것이기도 했다.

-진정(金諍), 중국 과거 문화사 中-

중국 남송의 정치가 겸 장군, '''지고의 충신이자, 망국 유신의 꺾이지 않는 절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물.'''
남송 최후의 승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장세걸, 육수부와 더불어 남송을 대표하는 세 명의 충신인 송말 삼걸의 일원이다. 자는 송서(宋瑞) 또는 이선(履善), 호는 문산(文山).

2. 생애


강서성 노릉 길수현[1] 출신. 1258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때 시험관이 당시 황제인 이종에게 각별한 인재를 얻은 것을 경하했다고 한다. 당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하북을 아우른 몽골 제국이 남진을 준비하던 상황이라, 바야흐로 남송은 위기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1259년 몽케가 직접 이끄는 몽골군이 사천을 침공해 합주가 포위되자 조정에서는 천도를 결정했으나,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다. 그후 복직했으나 재상 가사도와 견해가 맞지 않아 다시 물러났다.
강화에만 골몰하며 몽골과 남송 조정 양측을 기만하려던 가사도가 쿠빌라이 칸의 군대에게 패하고 피살당한 뒤, 몽골군이 맹공을 가해오자 지역의 유지였던 그는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가산을 모두 처분해 1만의 군사를 조직, 의병을 모아 싸웠다. 주변에서는 모두 남송은 끝장났다며 부질없는 짓 하지 말라 했지만 문천상은 의연하게 대답하였다.

나도 그걸 왜 모르겠나? 나라가 위급해 천하에 군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한 사람도 응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내 비록 이 무모한 짓을 하다가 목숨을 잃어도 이로써 천하의 충신들과 의사들을 일어나게 할 수 있다면 한이 없겠네.

이후 복직되어 1276년 우승상 겸 추밀사에 올랐다. 얼마 후 수도 임안으로 육박해 오던 몽골군과 교섭하려고 총대장 바얀과 회견했지만, 바얀에 의해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억류당했다.
문천상이 잡혀 있는 동안 임안이 함락당해 남송은 멸망을 맞았고, 북으로 끌려가던 중 탈출해 복주에서 장세걸, 육수부와 함께 도종의 맏아들 단종을 받들고 저항을 계속한다. 그러나 1278년 오파령 전투에서 패해 장홍범에게 붙잡혀 그 길로 대도(북경)에 압송되었다. 그리고 장세걸과 육수부는 애산으로 도주하던 중 사망한 단종을 대신하여 조병(남송 마지막 황제 소제)을 황제로 옹립하고 저항을 계속하나 애산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원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힌 문천상이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데 과연 그 심정이 어땠을지...
문천상이 이 참상을 보고 〈육희가(六噫歌)〉라는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폭풍이 일어나서 바닷물이 나는구나, 아!(颶風起兮海水飛噫)

문무(文武)가 다 없어지니 화덕(火德)이 쇠하는구나, 아!(文武盡兮火德微噫)[2]

새매는 공격하지만 베풀 곳이 없구나, 아!(鷹鸇相擊兮靡所施噫)

홍곡은 날고자 하나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鴻鵠欲擧兮將安歸噫)

강물에서 노를 치며 노래하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둠이여, 아!(櫂歌中流兮任所之噫)

홀로 《춘추(春秋)》를 안았거늘 날 알아주는 이 없네, 아!(獨抱春秋兮莫我知噫)

남송이 완전히 망한 뒤에도 이런 문천상의 명성을 잘 알았기에 바얀은 일부러 문천상을 죽이지 않고 수도 대도로 압송했다. 쿠빌라이 칸과 대면한 자리에서 문천상은 무릎도 안꿇으려 했지만 여럿이 달려들어 간신히 그를 주저 앉혔고 문천상은 그 자리에서

흥망성쇠는 천하의 법도이고, 망국의 군신은 자고로 주살을 면치 못하거늘 이 몸이 어찌 살길 바라겠는가? 나라에 충성하다 죽는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라고 말한다. 쿠빌라이 칸은 그래도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서

흥망성쇠가 천하의 법도라면 얼마나 많은 제왕들이 있었는가? 세지도 못할 정도의 흥망성쇠가 무성하거늘 그대는 왜이리 고집을 부리는가?

라고 하였으나 다시 문천상은

그 많은 열일곱 조대의 역사를 어찌 여기서 다 논한단 말이오, 대칸? 여기가 과거 시험장이라도 된단 말이오?

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쿠빌라이 칸이 다시

그대의 나라는 증흥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서도 왜 황제를 두번이나 다시 세웠는가?

라고 묻자 문천상은

아비가 병에 걸려 치유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서도 자식들은 치료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오? 나라도 마찬가지인 것이오. 멸망할 나라일지언정 마지막 하루까지 본분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니겠소? 이 문천상도 그럴 뿐이니, 더이상 나를 욕보이지 말고 어서 죽이시오!

라고 결연히 외쳤다고 한다.
그때부터 처형당할 때까지 옥에 갇혀 지냈는데, 애산 전투에서 흩어진 남송의 잔병들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글을 쓰라고 권유받았으나 과령정양(過零丁洋)이라는 시를 지어 이를 거절했다.
쿠빌라이는 그 재능을 아깝게 여겨 마음을 돌려 보도록 계속 설득했는데, 이때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망국을 향한 자신의 충절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피력했다. 정기가는 진짜 위엄이 넘치는 명문으로 심지어는 '''제갈량출사표'''에 비견되기도 할 정도이다.정기가[3] 거의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쿠빌라이는 처형을 주저하며 시일을 끌었고, 신료들도 문천상에게 호의적인 여론이었으나 문천상이 살아있어 남송의 잔병들이 소요를 그치지 않는 것이 밝혀지자 어쩔 수 없이 처형하기로 중론을 모았다. 투옥 5년여만인 1282년 남쪽을 바라보고 연경(燕京)의 시시(柴市)에서 참형되니 향년 47세였다. 이때 쿠빌라이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얼마 안 있어 사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사자가 이르렀으나, 문천상은 이미 처형되어 죽어 있었다. 처형 후에도 쿠빌라이는 '그야말로 진정한 사내 대장부였다' 라며 애석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처형당할 때 형리를 둘러보며 '''"내 할 일은 이제 다 끝났다."'''라고 말했는데, 이 문구는 '''吾事畢矣(오사필의)'''라 하여 사자성어로 남아있다.[4][5]
며칠 뒤에 그의 아내 구양씨(歐陽氏)가 그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다고 한다. 문천상의 처형 소식을 듣고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을 막론하고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이후 장의보(張毅甫)라는 자가 문천상의 시신을 업고 길주(吉州)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렀다. 마침 임모(林某)라는 자가 혜주(惠州)에서 문천상의 어머니의 관(棺)을 메고 같은 날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그의 충효(忠孝)에 감응한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3. 정기가


天地有正氣

천지유정기 (천지에 올바른 기운이 있어)

雜然賦流形

잡연부유형 (엇섞여 유동적인 형체에 부여되더니)

下則爲河嶽

하즉위하악 (땅에서는 강과 산이 되고)

上則爲日星

상즉위일성 (하늘에서는 해와 별이 되었구나)

於人曰浩然

어인왈호연 (사람이 호연지기라고 부르는 것이)

沛乎塞蒼冥

패호색창명 (아주 많아지면 푸른 하늘을 가득 메우노라)

皇路當淸夷

황로당청이 (왕도가 맑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

含和吐明廷

함화토명정 (조화로움 머금고 밝은 조정에 펼쳐지나)

時窮節乃見

시궁절내견 (시절이 곤궁할 땐 절개를 보여)

一一垂丹靑

일일수단청 (하나하나 역사에 드리웠도다)

在齊太史簡

재제태사간 (에 있어서 태사의 죽간)[6]

在晋董狐筆

재진동호필 (에 있어서 동호[7]

의 붓)

在秦張良椎

재진장량추 (에 있어서 장량철퇴)

在漢蘇武節

재한소무절 (에 있어서 소무의 부절[8]

이 있었네)

爲嚴將軍頭

위엄장군두 (장군 엄안의 머리가 되고)

爲嵇侍中血

위혜시중혈 (시중 혜소의 피[9]

가 되기도 했으며)

爲張睢陽齒

위장수양치 (휴양을 지키던 장순[10]

의 이빨이 되고)

爲顔常山舌

위안상산설 (상산 태수 안고경의 혀[11]

가 되기도 했네)

或爲遼東帽

혹위요동모 (어떤 때는 요동 관녕의 모자[12]

가 되어)

淸操厲氷雪

청조여빙설 (맑은 지조는 얼음이나 눈보다 매서웠네)

或爲出師表

혹위출사표 (어떤 때는 제갈량출사표가 되어)

鬼神泣壯烈

귀신읍장렬 (귀신도 장렬함에 울어대었고)

或爲渡江楫

혹위도강즙 (어떤 때는 강 건너 삿대가 되니)[13]

慷慨呑胡羯

강개탄호갈 (강개함이 오랑캐를 삼킬만했고)

或爲擊賊笏

혹위격적홀 (혹은 역적 치는 철퇴 되어)

逆竪頭破裂

역수두파열 (역적의 머리를 깨뜨렸네)[14]

是氣所磅礡

시기소방박 (이러한 정기 온 세상에 가득하여)

凜烈萬古存

늠렬만고존 (늠름하고 장렬함이 만고에 전해진다.)

當其貫日月

당기관일월 (이러한 정기거 해와 달을 꿰뚫으니)

生死安足論

생사안족론 (생사를 어찌 논할 것인가?)

地維賴以立

지유뢰이립 (땅을 묶는 밧줄은 이에 의지해 우뚝 서고)

天柱賴以尊

천주뢰이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은 이에 힘입어 높여진다)

三綱實係命

삼강실계명 (삼강이 실로 이로써 맥을 유지하고)

道義爲之根

도의위지근 (도의가 이를 뿌리를 삼았도다)

嗟予遘陽九

차여구양구 (슬프다, 내가 어지러운 때 만나)

隸也實不力

예야실불력 (매인 듯 힘 못썼겠는가?)

楚囚纓其冠

초수영기관 (남쪽의 갇힌 사람 갓에 끈 매고)

傳車送窮北

전거송궁북 (수레에 실려 끝 북에 이르러 보니)

鼎鑊甘如飴

정확감여이 (끓는 솥 달기 엿보다 더하건만)

求之不可得

구지불가득 (찾아도 얻을 길이 없구나)

陰房闃鬼火

음방격귀화 (어둔 방에 귀신불만 껌벅거리는데)

春院閟天黑

춘원비천흑 (봄 동산 하늘 캄캄에 잠기었구나)

牛驥同一皂

우기동일조 (소와 기린 한 마구에 서고)

鷄栖鳳凰食

계서봉황식 (닭 봉황에 깃들여 같이 먹다가)

一朝蒙霧露

일조몽무로 (하루 아침 안개 이슬 맞고 보면)

分作溝中瘠

분작구중척 (도랑 속의 뼈다귀 신세 돼버리니)

如此再暑寒

여차재서한 (이렇듯 두 번 더웠다 춥는 동안)

百沴自闢易

백려자벽역 (온가지 병 스스로 물러갔구나)

嗟哉沮洳場

차재저여장 (아아, 슬프구나. 이 진탕 속이)

爲我安樂國

위아안락국 (나의 즐거운 나라가 되었네)

豈有他繆巧

기유타무교 (어찌 무슨 잔재주 있어)

陰陽不能賊

음양불능적 (음양이 도둑질 못한 것일까)

顧此耿耿在

고차경경재 (돌아보아 이 속에 깜박이는 빛)

仰視浮雲白

앙시부운백 (우러러 저기 떠도는 흰 구름)

悠悠我心悲

유유아심비 (끝없는 내 마음의 슬픔)

蒼天曷有極

창천갈유극 (푸른 하늘인들 다하랴만은)

哲人日已遠

철인일이원 (어진 이들 가신 날은 이미 멀어도)

典刑在宿昔

전형재숙석 (그 본 때는 아직 엊그제로다)

風檐展書讀

풍첨전서독 (처마 밑에 책 펴 읽고 나니)

古道照顔色

고도조안색 (옛길이 내 낯을 비춰주는구나)


4. 기타


오늘날 악비와 더불어 충절의 표상으로 숭앙받고 있으며, 남송 정권에게 있어 그 양끝에 있었던 이 둘은 남송에게는 실로 과분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를 존중해줬던 송나라이기에 악비와 문천상같은 걸출한 영웅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고 할 수 있겠다. 정작 다른 통일왕조들은 내부가 썩어 자멸했으니말이다. 하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추진하는 현 중국 정부 노선 때문에 평가에 혼란이 초래되고 있다는 점마저 악비와 비슷하다.
용모가 준수했으며, 집에 많은 처첩과 악사들을 거느렸고 멱을 감으며 장기를 두는 취미를 가졌을만큼 불굴의 충신이라는 이미지와 언뜻 안 어울려 보이는 호화현란한 사생활을 즐겼다고 전한다. 또한 임안으로 몽골군이 육박한 와중에도 친구들과 뼈있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실속 없는 엄숙주의를 배격하면서도 공사구분이 대단히 명확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천상에게는 문벽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원나라에 투항하였고 훗날 문천상을 설득시키기위해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문천상은 그를 별로 질책하지 않았다. 문벽이 투항할 당시에는 형세가 이미 기울어진 판국이라 결사항전 해봤자 백성들만 보복 학살을 당하게 되고, 개인적으로는 가문의 후사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5. 기타 창작물에서


코에이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남송측의 핵심 장수로 등장한다. 원조비사에서는 시나리오 3에서 하남의 재야장수로 등장하며, 정치력 B 전투력 D 지도력 B 매력 B로 전형적인 책사형 장수로 고려를 선택하여 남송을 정복했을 때 훌륭한 정치고문으로 삼을 수 있다.[15] 징기스칸 4같은 경우 몽골측이 남송을 멸망시키면 쿠빌라이와 바얀의 능력치가 전부 +5되어 엄청난 먼치킨으로 거듭나지만 반대로 남송에서 대도를 빼앗으면 문천상의 모든 능력치가 +5씩 올라가게 된다. (이 때문인지 시나리오 2에서는 정치력 100인 인물이 없고, 가장 정치력이 높은 문천상의 정치력이 '''94'''다.) 덧붙여 시나리오 시작부터 충성도가 100인 유일한 인물.
김용의 소설 의천도룡기에서 장삼봉조민무당파에 쳐들어왔을 때 그의 싯구를 읊으면서 젊었을 때 그를 흠모하여 만나고 싶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1] 현 장시성 지안시 지수이현[2] 화덕을 이은 송(宋)나라가 쇠락하여 망함을 뜻함.[3] 여담이지만 정기가에 '위엄장군두'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엄장군이 '''엄안'''이다. 장비가 엄안을 생포하고 항복을 요구하자 '촉에 단두장군(목 잘리는 장군)은 있어도 항장은 없다' 며 거절했던 일화를 인용한 것. [4] 나 吾, 일 事, 마칠 畢, 어조사 矣. 여기서 어조사 의는 '~었다.'로 해석하면 된다.[5] 송사 문천상기에 수록된 내용이라는 말도 있다.[6] 춘추시대 제나라의 최저가 군주인 제후장공을 죽이자 사관은 '최저가 주군을 시해했다'고 죽간에 기록했고, 최저가 그 사관을 처형하자, 그 사관의 동생이 똑같이 '최저가 주군을 시해했다'고 죽간에 기록하자 또 그를 죽였다. 사관의 막내동생까지도 위 두 형들과 똑같은 행동을 벌이자 최저는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고 한다.[7] 진영공을 살해한 이는 조돈의 종제인 조천인데, 종제가 임금을 살해했음에도 벌하지 않자 조돈이 군주를 죽였다라고 썼다.[8] 소무는 흉노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그가 사신으로 왔다는 징표인 부절을 버리지 않았다. 황제의 어명을 받았다는 징표를 위험한 상황에서도 버리지 않았다는 절의를 묘사한 것.[9] 혜소는 팔왕의 난 당시 혜제(서진)를 호위했는데, 패전을 당해서 다른 신하들이 모두 도망간 와중에도 혜소 혼자서 혜제를 지키다가 사마영의 군사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 혜소의 피가 혜제의 옷에 튀었는데, 이후 시종들이 핏자국을 닦아내려 하자 혜제는 '이는 충신의 피이다'라며 거절했다.[10] 안사의 난에서 수년간 휴양성을 지켜서 안록산을 저지한 장군, 죽을때 이를 너무 심하게 갈아서 이가 없었다고 한다.[11] 역시 안사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킨 당나라의 인물. 당의 유명한 문인 안진경의 사촌동생이다. 안록산에게 포로로 잡혀 안록산을 욕하다가 혀가 뽑혀 죽었다.[12] 조조조비가 계속 초빙했으나 한나라의 유민으로 행세하며 출사하지 않았으며 늘 소박한 옷차림과 모자 하나만 쓰고 지냈다.[13] 동진의 조적이 북벌을 위하여 장강을 건널 때 노를 두들기며 반드시 중원을 회복하겠다며 강물에다 맹세한대서 유래[14] 당의 주체가 난을 일으켰을 때 단수실이 철퇴로 주체를 때려 주체는 뺨에 피를 흘리며 도망갔다고 한다.[15] 시나리오 3에서 나오는 이성계의 경우 전투력 A로 핵심 전투 장수라 정치고문으로 쓰기엔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