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종(송)
[clearfix]
1. 개요
송의 제16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7대 황제. 묘호는 없으며, 시호는 효공의성황제(孝恭懿聖皇帝)이다. 휘는 현(顯). 연호는 덕우(德祐)를 썼으며[2] , 일반적으로는 공제라고 부르지만 다른 호칭으로는 공종(恭宗)도 있다.
2. 생애
2.1. 황제로서의 삶
송도종의 6남이며, 도종과 황후 전씨(皇后 全氏) 사이에서 1271년 태어났다. 동복형[3] 조서(趙舒)가 유아기때 사망하였고 도종의 첫 아들인 광충선왕(廣沖善王) 조작(趙焯) 역시 2살때 사망해서 사실상 도종의 적장자였다. 1273년 가국공(嘉國公)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인 도종이 34살의 나이에 사망할 당시 겨우 4살이었지만, 도종의 살아있던 아들 중 나이가 많았던 이복형 익왕(益王) 조시(趙昰)[4] 가 서자라서 남은 유일한 적자였던 그가 황제가 되었다.
공제가 즉위했을 당시에도 이종, 도종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사도가 전횡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종 생전에 남송의 노력에도 양양이 몽골군에게 함락되면서 최후의 보루였던 대몽골 방어선은 무너진 상태였다. 따라서 공제 즉위 당시, 원나라는 옛 남송의 투항군을 흡수한 대군을 이끌고 공세에 나서 장강 상류의 지역은 모두 점령당했다. 이 때 가사도는 원나라 대장 바얀[5] 에게 화의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심한 공세를 당했다.[6] 가사도의 화의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과거 가사도의 거짓말[7] 을 철썩같이 믿고 있던 송나라 조정은 가사도에게 13만 군대를 이끌고 바얀이 이끄는 20만의 원나라군과 싸우게 했다. 가사도는 어쩔 수 없이 출전했으나,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한 큐에 박살남으로써 사실상 정예군을 통한 반격이 힘들게 된 남송의 멸망은 기정 사실화되었다.[8]
가사도는 이 일로 탄핵받아 귀양 조치되었고 1276년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 대군이 수도 임안을 포위했다. 남송의 조정은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있고 나라가 어려우니 화의를 받아달라고 바얀에게 요청했으나 원나라 측은 남송의 다급한 요청을 거절했다. 이때 바얀은 “너희 조상이 어린 황제(후주#s-2(後周)의 공제 시종훈)의 자리를 빼앗고 나라를 세웠다. 그러니 그 후손인 어린 황제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라면서 남송 측에게 힐문했다고 한다. 결국 공제는 할머니 사태후, 어머니 전태후 등과 함께 항전을 포기하고 스스로 임안의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하지만 이 시기 장세걸, 육수부, 문천상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도종의 남은 황자들을 데리고 나와 그 중 공제의 이복형인 익왕 조하를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도망쳐서 철저하게 항전했다. 그러나 사실상 남송은 공제의 항복으로 이미 멸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2. 멸망 이후의 삶
임안에서 항전 대신 항복을 택하였지만 바얀은 송나라의 사료[9] , 황실의 보물들을 싣고, 공제를 포함해서 할머니 사태후[10] , 공제의 모친 전태후, 남송의 황족들과 임안에 남아있던 대신들을 원나라 수도 대도로 압송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강의 변 당시 휘종, 흠종, 끌려온 황실 사람 등이 금나라에서 겪은 고초와 달리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공제를 불러들여 절을 받은 다음 잔치를 열고 흥겨워했지만 그의 황후 차븐은 예로부터 천 년 넘게 가는 나라는 없으니 언젠가 자신의 후손들에게도 이런 날이 올까봐 불안해 했다고 한다.[11]
공제는 원나라 쿠빌라이에게 첫인상이 좋게 평가되었고 영국공에 봉해졌다. 그리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고 첩으로 원나라 황실의 '한록로 매래적'을 하사받았다. 그 뒤에는 전직 황제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정상인이었던 그는 성년이 되면서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쿠빌라이와 원 조정에서도 숙청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12] 그리고 어느날 부인과 함께 우연히 쿠빌라이와 원나라 대신들이 공제를 없애 후환을 제거하려던 것을 들은 이후부터는 삶 자체가 바뀌게 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였던 원나라 공주는 매일같이 쿠빌라이에게 남편을 살려달라고 빌었고, 공제 역시 쿠빌라이에게 출가하게 허락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결국 쿠빌라이는 공제를 불쌍하게 여겨 그와 가족들을 살려주지만, 대신 이후부터 공제는 불법 교리 공부에 매진하고 권력에는 손도 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1288년, 17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라마승이 되었고 이무렵 어머니인 전태후 역시 비구니가 되었다. 이후 공제는 티벳어를 열심히 익혀 티벳불교의 불법에 통달했으며 티벳불교 서적 번역, 주해를 해서 합존법사로 불렸고 현실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나 마음이 바뀐 건 아니라서 원나라는 남송의 황제였던 그를 감시했으며, 결국 1323년 52세의 나이에 결국 송을 아직도 그리워하여 반원 움직임의 거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끝내 사사되었다.[13]
원나라 공주와의 사이에서 얻은 외아들 조완보[14] 역시 머리를 깎게 한뒤 출가시켜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생몰연도와 사인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전설에 따르면 원 말기에 결국 아버지처럼 사사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송의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다.[15]
3. 야사
야사에서는 한록로 매래적은 나중에 명종의 후비가 되었는데 이미 공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명종은 이를 몰랐고 자신의 아들인지 알았으며 그 아이가 훗날 원나라 마지막 황제 혜종이라고 카더라라는 이야기가 있다. 시황제가 사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떡밥과 더불어 유명하다. 사실이라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이, 당시에는 유전자 검사가 없었기 때문에 친자식 유무는 사실상 군주의 승인과 양육 환경으로 결정났다.
4. 둘러보기
[1] 비공식 묘호.[2] 때문에 그를 덕우황제라 부르기도 한다.[3] 도종의 정실, 후실이 낳은 아들 중에서는 둘째 아들에 해당함.[4] 숙비 양씨의 아들로 휘를 고쳐 일반적으로 익왕 조하라고 부른다. 공제 즉위 후 길왕(吉王)에 봉해졌으며 훗날 단종(송).[5] 한자로는 '백안(伯顔)'으로 표기됨[6] 원나라가 이전에 가사도의 화의를 받아들여 준 것은 내부 황위 계승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사라지고 양양도 함락한 이 시점에서 원나라가 남송이 요청한 화의를 받아 줄 리가 만무했다.[7] 가사도는 몽케칸의 침략 당시, 악주 지방 사령관이었다. 그는 이종과 조정에 알리지 않은 채 몽케칸의 죽음으로 급히 돌아가려고 한 쿠빌라이와 몰래 '밀약' 을 맺고 쿠빌라이의 철수를 보장해주는 대신 부교를 놓고 강을 건너 철군하는 쿠빌라이 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모션을 취했다. 가사도는 이때 쿠빌라이 군에게 경미한 피해를 입혔는데, 밀약 내용을 숨기고 자신이 쿠빌라이군을 배후에서 공격했다고 조정에 보고해 공을 획득했다.[8] 사실 남송의 운명은 양양이 원나라에게 함락되면서 사실상 결판난 상황이었다.[9] 원래 바얀은 임안을 깡그리 불태우고 사료(史料)들도 훼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한 문인이 역사를 없애버리면 그 나라는 의미가 없다라는 식으로 설득했고 바얀과 원나라는 임안에 있던 송나라의 사료들을 그대로 싣고 대도로 옮겼다. 그래서 훗날 송나라의 사서 <송사>를 만드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10] 이종의 황후[11] 그 우려는 정확히 들어맞아 후에 원나라도 철저히 멸망당하고 만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몽골 정복 이후 원나라의 후신을 칭하고 보르지긴 씨족과의 통혼으로 황실이 원나라 황실의 방계 후손이 되기까지 한 청나라는 원나라보다 더욱 철저히 멸망당하고 만다.[12] 쿠빌라이가 어느 날 황금용이 대도 궁궐 내 기둥을 휘감고 있다가 갑자기 발톱을 세워 그를 향한 것을 본 꿈을 꿨는데, 다음날 아침 조회때 공제가 우연스럽게도 그 기둥 앞에 있자 쿠빌라이는 공제를 숙청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13] 당시 공제를 감시하던 이들이 공제가 고향을 떠나 살면서 매화가 피고 지는 것을 담은 시를 지었다하여 이를 보고했고 원영종때 이 일로 사사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공제는 정상인이었기 때문에 언제든 반원 움직임의 거두가 될 수 있는 게 현실이기도 했고 6천만명이나 되는 최하층 남송인 계급이 원을 무너뜨리려고 계속 이를 갈고 있어서 원으로서는 구심점을 어떻게든 없애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14] 원나라 순제때까지 살아있었고 반원운동이 전개되는 등의 움직임 속에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나라가 그를 강제로 사주로 옮겨 살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와 기타 끌려온 송나라 사람들의 자손들은 원나라 말기에 모두 살해되었고, 이들의 혼백들이 송나라 조상의 묘에서 통곡하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15]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한족 동포들의 손에 조씨가 멸족되는 조선의 왕씨 몰살 같은 일은 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