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산 전투
1. 설명
“충후함으로 전조의 자손들을 돌보고
(以忠厚養前代之子孫)
관대함으로 사대부들의 바른 기풍을 진작하며
(以寬大養士人之正氣)
다스림으로 백성들의 삶을 부양하라."
(以節制養百姓之生理)
'''원나라와 송나라#s-4의 최후의 결전.'''13세기에 몽고의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때,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부터 1279년 광동 애산崖山 전투에서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때 까지, 장장 40여 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여 몽고의 몽케 칸도 남송의 합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 출신의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남송의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은 송 왕조가 3백 년간 사대부들을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고, 송대 문관정치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것이기도 했다.
-진정(金諍), 중국 과거 문화사 中-
이 전투에 패배하면서 남송은 완전히 멸망했으며 중국의 역대 왕조의 멸망 중에서도 가장 비장하고 장렬한 최후로 유명하다.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은 현대의 광둥성 장먼시 애산(야멘)진이다. 영어 표현인 Yamen은 崖門의 중국어 발음 Yámén 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애산진은 현재는 내륙으로 약간 들어가 있는 지역이나, 당대에는 그 지역이 해안가였다. 750년 정도가 지나면서 퇴적이 계속되어 해안선이 바뀌고, 중국 내부에서도 간척을 하다보니 현재 애산진은 내륙으로 6km 정도 들어온 곳이 된 것.
2. 배경
1276년,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 군대는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켰다. 공제는 항복하고 끌려갔으며, 남송은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송나라 신하들과 백성들은 저항을 계속하였는데,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등의 남송의 중신들이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은 공종의 이복형 익왕 조하를 황제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 운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군대가 강대하여 송나라 잔당은 패배를 거듭하였고 어린 단종은 병사하고 만다.
남송 잔당은 단종의 후임으로 동생 위왕 조병을 황제로 옹립한다. 남송 수군 선단은 해상을 떠돌며 저항하다가 중국 대륙 남쪽 끝인 애산[2] 에 주둔하여, 요새와 행궁을 구축하고 마지막 거점으로 삼았다.
원나라는 이 애산의 마지막 거점을 공략하고자 한족 투항자들을 모아서 대규모 수군을 편성하였다. 이때문에 남송은 그나마 우위에 있던 수군 전력마저도 따라잡히고 말았으며, 애산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게다가 1278년에는 육지에서 저항 활동을 하던 문천상마저 원나라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3. 전투
당시 망국이 임박해 있던 실정에는 어울리지 않게, 애산의 남송 조정에는 각지에서 모집된 20만의 의병이 집결하여 조씨 황실과 명운을 같이 하고 있었다. 또한 조송에 선양한 후주의 구 황족인 시씨가문 역시 애산전투에 참전, 송태조 조광윤 이래 3백여년간 이어져 온 의리를 끝까지 지킨 일화 또한 애산전투 관련한 유명한 미담 중 하나다.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묶어서 화공에 대비하여 진흙을 칠하는 등 만만의 준비를 하였다. 결사적인 항전 끝에 여러 차례 원나라 함대를 격퇴하였지만, 애산은 고립되어 있었고 궁지에 몰리게 된다. 원수 장홍범[3] 이 지휘하는 원의 함대는 남송으로 들어가는 식수와 식량을 차단하였고, 남송 함대는 굶주림에 시달렸다. 식량과 식수가 고갈된 남송의 병사들은 마른 음식과 바닷물을 먹고 구토하였다.
양측의 길고 긴 대치는 부원수 이항의 합류로 끝났다. 이항이 합류하자 장홍범은 군을 재정비하였고, 3월 18일 저녁에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화포 사용은 서로의 배를 묶은 남송 함대의 진이 파괴되어 오히려 후퇴를 쉽게 할 우려가 있다 하여 금지되었다. 다음날이 되자 장홍범은 함대를 4개로 나누어 송의 함대를 동쪽, 북쪽, 남쪽에서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머지 함대를 이끌었다. 처음의 공격은 격퇴되었지만 원 함대는 물러나더니 풍악을 울리며 쉬는 척을 하더니 한낮이 되자 다시 정면돌파를 감행했다.
질병과 기아로 이미 진이 빠져있던 송의 해군은 원 함대의 대공세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이들에게는 원 함대에서 쏘아올린 화살비가 쏟아졌다. 남송 병사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사살되거나 부상당하여 혼란에 빠지기 시작해 사실상 붕괴되었다. 배를 묶어놓은 상태로 후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원의 병사들이 송의 함대로 뛰어들어 근접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대규모의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수만여명에 달하는 남송 병사들이 학살당하거나 물에 빠졌다. 절망한 남송군 수뇌부는 차례차례 자살을 택하였다. 이에 장세걸은 대세가 기운 것을 깨닫고 정예병을 중군에 집중시켰으며 육수부와 송 소제를 데려오게 하였다. 최후의 돌파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수부는 배 안에서 어린 황제에게 제왕학의 개론서인 대학을 강론하고 있던 중, 패배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결국 어린 황제와 함께 바다에 투신하였다.[4] 황제의 어머니 양태후는 구출되었지만 그녀도 절망하여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남송 함대를 이끌던 장세걸은 끝까지 살아남아 대월로 망명해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태풍이 불어닥쳐, 남송 최후의 함대와 함께 익사했다. 원나라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바다 위에 떠오른 시체만 10만 구였다고 한다.
이로서 남송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고, 남중국해로 도피한 장세걸 함대가 폭풍에 침몰, 대도로 압송된 문천상이 처형되면서 남송 부흥 운동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4. 어록
'''이제 사직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바, 존망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선 오랑캐들에게 사로잡혀 욕을 당하시느니, 차라리 이 노신(老臣)과 바다에 몸을 던져 순국하시어, 구천에 계신 조종조(祖宗朝)를 뵘이, 대송(大宋)의 천자로서 떳떳한 바가 될 것 입니다.'''
-송나라 좌승상 '''육수부''', 몽골군에게 포위된 애산 섬 앞바다에서 마지막 천자 소제와 함께 몸을 던지던 때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연명한 바는 조씨 황실의 골육을 보전키 위해서였거니와, 이제 일이 이 지경에 이른 바 내 살아 있은들 더 무엇하겠소?'''
'''하늘이 대송(大宋)을 망하게 하려거든 나의 배를 모조리 바다 속에 가라앉게 하소서!'''
-송나라 통군 대원수 '''장세걸''', 애산 전투 이후, 패잔 선단을 이끌고 도주하던 중 폭풍을 만난 때에. 결국 배는 모조리 가라앉고 장세걸과 송군 10만은 함께 수장되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극소수의 병사는 살아남았고, 언급이 없는 나머지 10만여 명은 도망친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내 업무를 완수했다.(吾事畢矣)'''
-문천상이 애산 전투 이후에 구속된 상태에서 원나라의 회유를 거절하고 끝까지 송의 신하로 남기를 선택해 처형당하면서 남긴 말.
'''검을 갈아 돌로 만든 정이 갈라지고(磨劍劍石石鼎裂), 말이 장강을 마셔 장강이 말라버렸다(飮馬長江江水竭). 우리왕조의 백만전포는 붉게 물들었는데(我朝百萬戰袍紅), 모조리 강남 남녀들의 피로구나(盡是江南兒女血).'''
5. 후일담
몽골 제국이 사방으로 쪼개지고 나라 사정이 엉망이 된 원나라 말기, 강남의 호주(濠州)[5] 에 떠돌이 가난뱅이 농부 주오사(朱五四, 주세진이라고 하기도 한다.)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오사에게는 아들이 네 명이 있었고, 딸이 둘이 있었다.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전부 하찮은 집안의 농부일 뿐이니 제대로 된 이름 같은 것도 없다. 셋째가 중칠(重七)이고 넷째가 중팔(重八)이라는 식이었을 뿐이다. 하나같이 하잘것 없던 집안에서 유달리 기인(奇人)이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 있다고 치면, 바로 주오사 영감의 장인 어른이었다. 중팔 형제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된다. 막내인 중팔에게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가끔씩 해주는 이야기만은 어렴풋이 추억에 남아 있었다.
그 노인은 죽었을 때 나이가 99살이었다.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허리가 꼿꼿했고 긴 흰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거의 50년 ~ 60년 전에 몽골과 싸우는 전투에 참여했다고 했다. 당시는 몽골이 전 세계를 집어삼켰고, 최대의 적수인 남송을 유린하여 수도마저 함락하고 대충신 문천상(文天祥)도 사로잡았을 때다.
그렇다. '''주오사의 장인이자 중팔의 외할아버지는 그 애산 전투의 생존자였다.''' 장세걸 휘하의 친위병으로 그를 끝까지 따랐고, 어린 황제도, 대신 육수부도 바다에 빠져 목숨을 버린것처럼 그 역시 장세걸 함대를 덮친 태풍에 휘말려 바다에 빠져 죽기만을 기다렸으나 요행히 구조를 받아 살아남았다. 그리고 온갖 고생을 겪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 날의 기억은 늙은 노인에게 있어서 평생의 자랑이었고, 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깊은 상처였다. 노인이 눈물을 머금은 채 옛일을 이야기할 때면,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은 사람들 역시 똑같이 눈물을 훔쳤다고 전해진다.
노인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둘째가 바로 주오사 영감에게 시집을 온 진씨(陳氏)였다. 그리고 후일, 이 노인의 막내 외손자인 중팔, 다른 이름으로는 '''명나라 초대 황제 홍무제 주원장'''으로 불리는 이 사람은 후일 강남에서 몸을 일으켜 파양호 대전를 통해 명나라를 세웠고, 수십만 대군을 몰아 몽골 황금씨족이 다스리는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쳐들어가 몽골 제국, 원나라를 멸망시켰다. 애산 전투로부터 90여년, '''그 당시 끝까지 항전하던 어느 남송 한족 병사의 후손이 기어이 세계를 지배하던 유목 민족의 대제국을 거꾸러뜨리고 다시 한족의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6]
장세걸은 태풍을 만나 하늘이 대송을 멸하려 한다면 지금 모두 물에 빠져 죽게 해달라 절규했었다. 결국 시세는 장세걸의 절규처럼 되었으나 하늘은 그 와중에도 기어이 한 사람을 살려, 그 사람의 후손으로 하여금 대송(大宋)을 멸망시킨 대원(大元)을 멸하게 하였다. 이것을 과연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정말로 하늘에게 뜻이 따로 있어 천명이 있다는 것인지 후세 사람으로선 알 수 없게 만든다. 출처는 명사(明史) 권 300 외척전.
물론 새 왕조가 개창될 때 정당성과 명분, 극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을 위조하거나 아예 대놓고 만들어 넣는 경우도 있으므로 어느 정도 가려들을 필요는 있지만, 홍무제의 외조부가 애산 전투 생존자라는 기록이 마냥 허구로 치부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선 애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패잔병의 규모가 크게는 10만 명 가까이로 추정되는데, 13세기 후반이면 중국 인구가 1억이 채 안되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다.[7] 이 중 10만 명이라 해도 결코 적은 수가 아닌데 그나마도 이 8천만 명이라는 추정치는 화남, 화북을 다 합친 추정치다. 당시 남송의 강역이 화남 지방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데다가 역사적으로 화북 지방의 인구가 화남 지방의 인구보다 더 많았다는[8] 점을 감안하면, 당시 중국 화남 지방의 인구 약 3,200만 명 중 애산 전투의 패잔병들이 많게는 10만 명, 적어도 수만 명은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 3,200만 명이라는 추산치는 '전체 인구', 즉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여성이나 노인, 어린아이들을 모두 포함한 수치니까 병사 혹은 군관으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인 청장년 남성 인구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따져본다면 당연히 1,600만명 미만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 정도면 당시 화남 지방에 거주했던 장정들에게서 애산 전투에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와도 전혀 특이할 것이 없는 비율이다.
또한 전통적으로 부계사회였던 당시의 중국에서 기왕 명분 세우기 목적으로 조작을 할 거면, 어중간하게 외조부 진씨 노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놓고 조부 주씨 노인으로 날조하는 쪽이 더 나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약 주씨네 가문이 명문가라서 이런저런 기록이 많은 집안이었다면 상대적으로 조작하기 쉬운 외조부 쪽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없진 않겠으나, 주씨네 가문은 주원장 이전까진 족보 조작은 커녕 가족이 죽어도 장사조차 못 지낼 정도로 한미한 농사꾼 집안이었기 때문에 기록같은 게 남아있을 리도 없었다. 당연히 외조부 대신 친조부 주씨네 이야기로 주작을 한다고 딱히 반증을 당할 염려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명사는 명이 아니라 '''청이 편찬한 사서'''이다. 역사서를 쓰는 건 당연히 후대이므로(삼국시대는 고려에서 다뤘고(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는 조선에서 다뤘듯이)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청의 아이신기오로 씨가 굳이 거짓부렁까지 섞어가면서 홍무제 용비어천가를 써줄 이유가 없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설령 '청나라가 명사를 쓸 무렵에는 명나라 대에서 친 뻥이 마치 정사처럼 알려져 있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기에도, 역사서를 어디서 주워들은 풍문으로 쓰는 것이 아닌 만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서들은 '진위여부가 의심되지만 확인할 수는 없는 기록들'에 대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이러이러해서 주작일 것으로 의심된다'는 식으로 따로 주석을 달아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명사에선 그러한 언급은 없다. 게다가 명사는 실질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시점(삼번의 난이 진압된 이후)부터 계산해도 '''56년''', 명사관이 처음 설치된 시점부터 계산하면 '''110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강희제가 직접 초고를 열람하고 내용의 정확성을 강조'''할 정도로 정밀한 검정을 거쳐서 편찬된 사서다. 고작 확인되지 않은 저잣거리 소문 따위를 비중있게 적었을 리 없다. 따라서 과장은 있을지언정 홍무제의 외조부가 애산 전투에 참전한 것 자체는 실화일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800년 후, 이 전투가 벌어진 곳 일대에서는 송대의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나오면서, 지하철 공사를 제대로 방해하고 있다. 튄마선 1단계 공사 당시 이 일대에서 송대 유물이 으리으리하게 나오면서 공사가 상당히 지연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