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응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1996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장응진은 1880년 3월 15일 황해도 장련군 이도방(현 황해남도 은률군)에서 장의택(張義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1897년 한양으로 상경하여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00년 도쿄 준텐(順天)중학 2학년에 편입되었고, 중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체류하다가 1905년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1909년 3월 윤리, 수학, 물리, 수공 과정을 졸업했다.
1906년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 회장과 태극학회 기관지 <태극학보>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09년 귀국하여 평양 대성학교 총교수로 근무했으며, 그해 8월 윤치호, 이승훈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했다. 이후 신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징역 7년의 판결을 받고 1년간 복역하다가 최종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1913년 11월부터 휘문고등보통학교 학감으로 재직했으며, 1920년 5월 조선교육협회 설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1922년 11월 조선민립대학 설립기성준비회에 참여했다. 1924년 6월 동맹휴교에 나선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퇴진을 요구하자 8월에 사직했다.
퇴직 후 보성전문학교 강사 겸 촉탁을 맡았으며, 1925년 6월 공립학교롤 옮겨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유로 재직했다. 1928년 11월 히로히토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1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을 맡아 조선인 사립학교를 담당했으며, 학무국 편집과 편수관을 겸임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교과서 편찬과 검정 업무를 맡았다.
1931년 11월 교육효적자선장 위원회 위원과 사립학교 교원자격 인정 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37년 1월 학무국 사회교육과가 사회교화 진흥책으로 기획한 사회교화 방송에 강사로 참여했으며, 1937년 12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8년 9월 조선인 최초로 공립고등여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광주욱공립고등여학교에 부임했으나 1942년 3월 사직했다.
1939년 8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에서 발행하는 <가정의 벗>에 '새로운 세상을 마지하야-총후부인에게 드리는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40년 1월 12일, 장응진은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이 사람이나 여러분은 다 같은 황국의 신민이요, 천황 폐하의 적자이올시다. 다같이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고 있는 정성을 다하여 분수에 응한 자신의 직분을 즐겨 다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이것이 우리의 행복이 될 뿐 아니라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갚는 일이 되는 것이오시다. 황국신민으로서 각자의 직분에서 충성을 다하면 성전의 목적이 이루어지리이다.
1942년 9월 정5위에 서위되었으며, 그해 11월호 <반도의 빛> 잡지에 '부르심을 받자올 날을 앞두고'라는 글을 게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국내 통제가 단순히 법령의 제재와 통솔자의 지위 명령에만이 아니라 전 국민 하나하나의 자각에 의해 원활하게, 또 전투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구주대전(歐洲大戰)에서 배워야 한다.
8.15 광복 후, 그는 1950년 6월부터 휘문고등학교 교장을 맡아 근무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신한 뒤 임시교사를 세웠으나 그해 8월 30일 과로로 사망했다.우리 조선에 지원병 제도가 실시된 이래 지원병 되기를 자원하느 청년이 해마다 늘어서 금년에는 25만명 이상에 달하고, 그중에는 혈서로써 지원한 청년까지도 있어서 참으로 기쁜 현상이고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하니, 이는 참으로 슬픈 현상이다. 제국 군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일본정신의 정수인 천황의 성훈을 잘 받들어야 하며, 지원병의 부모는 자식을 기쁜 마음으로 바쳐서 내선일체의 이상을 완성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지도자가 되도록 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신민회에 가담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의 행적을 고려하여 1963년 장응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1996년 서훈 취소되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