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좌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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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진은 여수의 진남관으로 4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옛 전라좌수영 터에 세운 것이다.
조선 시대 수영 중에서 전라도의 동쪽에 존재하던 수영이다.[1]

2. 상세


전라 좌수영성은 영이 설치된 직후 전라좌수사 박양신에 의해 성종 16년(1485년)부터 수축되기 시작하여 성종 21년(1491년)에는 완성되었다. 『호좌수영지』ㆍ『성종실록』에는 성곽의 둘레 3,634척(약 1,133.44m), 동서 1,200척, 남북 908척으로 동서가 약간 긴 형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성내의 샘도 6곳과 7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1847년의 기록인 『호좌수영지』에는 체성 주위가 3,158척, 여첩 437좌, 총혈 1302, 곡성 6처에 포루와 화포기 각각 6좌, 성내 민가 2024호, 천정 성내 7곳 성외 2곳, 연못 1처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좌수영성은 조선 후기까지도 중요한 수군영으로서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는 객사 건물인 진남관과 일부 성터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장수인 이순신이 이곳 전라 좌수영의 지휘관 전라좌수사여서 다른 수사들에 비하여 인지도가 가장 높다. 임진왜란 ~ 정유재란 사이의 정전 기간 동안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였다. 다만, 이건 전라좌수사란 직책이 그만큼 중요했다기 보다는, 당시 좌수사의 영향이 컸다.[2] 이후 이순신이 일시 파직되면서 원균(...)이 후임 삼도 수군 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었다가, 그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자(...) 이순신이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로 임명된 바가 있다. 이 때 패전으로 전라 좌수영 본영의 시설들은 파괴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잠시 삼도 수군 통제영을 겸하기도 했다. 이는 1601년 경상 우수사 이시언이 삼도 수군 통제사를 겸직하고 경상우수영을 통제영과 겸하면서 바뀐다. 이시언이 통상대감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전라좌수영 부지에 세운 객사인 진남관은 오늘날도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5관(순천 도호부, 흥양현, 광양현, 낙안군, 보성군)과 5포(사도 - 첨사진, 여도 - 만호진, 녹도 - 만호진, 방답 - 첨사진, 발포 - 만호진)를 관할한다. 순천 도호부는 현대의 순천시와 여수시, 흥양현은 고흥군, 낙안군은 현대의 순천시 낙안면 및 벌교 지역이다. 광양현은 광양시, 보성군은 벌교를 제외한 보성군 지역이다. 사도는 여수시 화정면 사도, 여도는 고흥군 점암면, 녹도는 고흥군 도양읍 녹동 지역, 방답은 여수시 돌산면, 발포는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위치해 있다.
전라 좌수영 본영과 방답진은 순천도호부에 있었다. 현대에는 각각 여수시의 구시가지(중앙동, 충무동 등)와 돌산도에 해당한다.
사도, 여도, 녹도, 발포는 흥양현에 있었다. 만호진이 못되는 규모로는 순천 도호부에 권관이 지휘하는 돌산포영과 좌수영 군사를 나누어 지키는 여수석보가 있었고 흥양현에 권관이 지휘하는 율현보가 있었다. 현재 유일하게 삼도수군통제영 휘하 수영중 유일하게 온존히 보존돼있다.수영이었던 진남관 그리고 선소 그리고 기타 시설물 등 그리고 민족의 성웅인 충무공의 승전이 여기서 다만들어진거라 여수시에는 충무공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1] 이름이 좌(左)수영인 것은 한양에서 남해 쪽을 바라보았을 때 전라도의 왼쪽이기 때문이다. 경상도의 서쪽에 해당하는 경상우수영과는 바로 인접해 있다.[2] 원래 가장 중요한 요충지는 일본과 근접한 경상우수영. 왜란 이후, 경상우수사가 통제사를 겸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