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칠천량 해전'''
漆川梁海戰

'''시기'''
1597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장소'''

조선 경상도 칠천량
경상남도 거제도칠천도 사이 해협
'''원인'''
원균자승자박(自繩自縛)
'''교전국'''
[image]
조선

[image]
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원균'''†[1]
이억기
최호
배설
김완
배흥립
우치적
<^|1>'''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다다유타
구키 요시타카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병력'''
거북선 3척
판옥선 120~130척
세키부네 60여 척
후속전선 1천여 척[2]
'''피해'''
거북선 3척 침몰
판옥선 60 ~ 70척 침몰[3]
세키부네 8척 침몰[4]
왜군 100여 명 전사
(가토 요시아키 왼팔 경상)[5]
'''결과'''
'''일본군의 대승'''[6], 조선 수군 '''와해'''
'''영향'''
조선 수군의 제해권 상실, 정유재란의 확전(擴戰).
1. 개요
2. 이순신의 파직
3.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
3.1. 원균의 내키지 않는 출전
3.2. 무능한 지휘관, 곤장을 맞다
4. 전투의 전개
4.1. 7월 15일 : 일본군의 기습 공격
4.2. 7월 16일 : 불타는 칠천량
5. 전투의 결과
6. 패배의 원인?
7. 경과 요약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9. 기타
10.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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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월 18일, 맑음

새벽 나절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모레 전에 수군이 피습되어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하고 '''"수군이 궤멸했다."'''하였다. 들으며 통곡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난중일기 - 정유년(1597)

정유재란 당시 벌어진 해전.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 대패한 전투로, 한국사 졸전 중에서도 최고 수위라 할 만한 황당한 패배이다.[7] 세계사를 봐도 이 정도로 황당한 졸전은 손에 꼽힐만할 것인데, 판옥선의 성능이 일본의 세키부네보다 훨씬 우수하였고 거북선 역시 많은 양이 있었으며, 탑재화기도 천지현황 총통 등으로 일본보다 훨씬 화력이 강했다. 더군다나 병력 수도 밀리지 않았고, 질도 다수 전투에서 승리한 베테랑급 전력이었지만[8] 현실은 대참패. 사실 이순신의 대단함을 떠나 그냥 원균 자체가 장수로서의 자질이 있는지조차 의심되는 졸장이란걸 보여준 전투다.
칠천량 해전에서 '''당시 최대 규모의 정예군'''이 전투를 치르지도 못하고 몰살되면서 후폭풍은 엄청났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말아먹는 바람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전처럼 수군이 완벽하게 재건되지 못했고, 하마터면 평야지대 호남이 뚫리고[9] 적이 서해안을 통해 '해상으로 보급하는' 사태까지 벌어질 뻔했다.[10] 이후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상술한 최악의 사태를 막기는 했지만, 스스로도 하늘이 도와 이겼다고 할 정도로 매우 불리한 판세 속에서 싸워야 했다. 원균은 아군이 '''싸우지도 못하고 학살당하도록''' 모든 전략을 틀어놓았는데, 막말로 원균 대신 그냥 평범한 장수가 이끌기만 했어도 이런 대참패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원균이 최정예 병력을 어떻게 탕진했는지를 요약하면, '''휴전 기간에 일본군에게 사기쳐서 욕을 먹고, 비무장 수송선을 추격하다가 해류에 병력이 떠내려가고, 병력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면서 개죽음당하게 하고, 함대 120여 척이 적선 60여 척에게 얻어맞다가, 뜬금없이 병력을 막다른 지형에다가 상륙시켜서 전멸당했고 절반만 살아남아 도주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과 일본 양쪽의 기록에서 모두 별다른 차이가 없다(...).

2. 이순신의 파직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다시 진주한 가운데, 평소 가토 기요마사와 으르렁대던 고니시 유키나가[11] 눈엣가시를 남의 손 빌어 처리하자는 생각으로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간첩질을 하던 이중첩자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가 바다 건너서 온다니깐 빨리 처리해.' 하는 정보를 흘렸다. 요시라를 시켜서 김응서에 준 편지에는 대놓고 '이 사실은 절대 비밀로 지켜야 한다. 내가 가토를 제거하려고 하는 걸 태합이 알면 내가 무사하지 못하니까 내가 가토에게 직접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너네에게 부탁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적었다.
이에 김응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곧바로 상부에 보고했고, 권율은 소식을 접하고는 조정에 이를 알린 뒤 동시에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해서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를 잡으라 명령했다. 과거에는 이순신이 이에 대해 '어찌 적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습니까?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라며 출전 명령을 거부했고, 선조는 이순신이 어명을 거역했다는 핑계로 이순신을 파직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아래에 언급할 선조의 의심병에 따른 행동과 발언 때문에 이런 통념이 자리잡았던 것.
권율이 직접 달려와서 한산도에 명령을 내렸을 때 이순신은 마침 전라좌수영의 공무로 인해 여수에 있었다. 게다가 풍랑이 들어 바로 한산도로 돌아가지 못해 남해도에 있던 차에 가토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첩보를 흘린 때는 1월 11일, 육로로 보고된 때는 13일인데, 이순신은 '''1월 10일'''에 이미 가토가 가덕도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즉 고니시는 이미 가토가 바다를 건너온 상황에서 '헐 가토 건너오기 전에 막아야 함' 이라는 떡밥을 흘린 것이다.(...) 거기다가 김응서의 보고가 한양에 도달했던 날짜는 '''1월 19일'''이라 이미 가토는 부산에 도착한 뒤였다. 이러니 조정에서부터 가토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어도 이순신은 '가토가 이미 도착했는데요.' 하는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조정은 '비록 가토가 이미 상륙한 뒤지만 어쨌든 해상으로 압박을 주면 다른 부대는 함부로 못 건너올 것' 이라는 논리로 부산포 공격을 지시했고, 이순신은 이를 충실히 복종해 부산포까지 가서 일대를 들쑤셨다.[12]
그런데 1월 21일, 선조는 '이순신이라서 못 잡은 것임. 나라면 잡을 수 있었음.' 라는 내용으로 원균이 올린 장계를 받아보더니, 23일에 느닷없이 "그때가 하늘이 준 기회였는데 가토를 왜 안 잡았냐?" 라면서 뜬금없이 광분했다. 가토 사건 전에도 선조는 계속해서 수군에게 출전을 명령했는데, 이는 육군보다 수군의 승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수군을 이용해서 전쟁을 이기자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선조의 명령 중 몇몇은 이순신으로서는 하면 안 되는 불리한 전투임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가 잦았고, 이렇게 명령불복종이 누적되면서 서로 아슬아슬한 사이였는데 가토 사건으로 선조가 빌미를 잡았다 볼 수 있다.
게다가 선조의 이런 의심병은 바로 전해인 1596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더 심해졌다. 이몽학의 난은 의병을 모집한 후 나라를 전복시키려던 것이었는데, 선조는 나라를 구한 무인들이 백성들에게 인망을 얻으면 '그들이 병력을 이끌고 나라를 전복할 수 있다.' 라는 편집증에 가까운 경계심을 품었다.[13] 이에 무인들을 철저하게 압박했는데, 이런 이유로 희생된 인물이 대표적으로 이순신과 김덕령이었다.
애초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계기가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인이 백성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나라를 엎어버린 것이라 왕으로서 걱정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다. 허나 문제는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이었다.''' 왕권 강화고 뭐고간에 일단은 전쟁부터 종결을 짓고 다음을 생각하는 게 맞지만, 선조의 히스테리는 전시에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결국 2월 4일, 사헌부에서는 선조의 눈치를 보며 이순신을 탄핵했고, 탄핵이 결정된 후 선조는 딱 이틀 뒤에[14]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도성으로 압송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2월 26일,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임명되었다.'''

3.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


이순신은 배 134척과 수군 병력 1만 7천여 명,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 근,[15] 여분의 총통 300자루 등을 후임 원균에게 넘긴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싫어하던 이순신을 내쫒고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은 자기도 능력이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했다.
원균이 얼마나 이순신을 질투했는지를 묘사한 기록이 있는데, 조선 중기 유학자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峰全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안방준의 숙부인 안중홍의 처가 원균의 집안 출신이어서 막 통제사가 된 원균이 안중홍을 찾아와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원균은 "제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라고 말하였고, 안중홍은 "적을 무찔러서 이순신보다 더 큰 공을 세워야 진짜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지, 겨우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소?" 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원균은 "'멀리서 싸울 땐 편전을 쓰고, 가까이서 싸울 땐 칼과 몽둥이를 쓰면 됩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조선 수군 전체를 총지휘하는 통제사라는 자가 어떻게 싸워서 공을 세우겠느냐는 질문에 겨우 '활 쏘고 칼 휘두르면 됩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원균이 돌아간 이후 안중홍은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기겁도 저 따위는 아닐 것이다." 라면서 크게 탄식하였다고 한다.[16]
'''참고로 이순신이 원균에게 인계한 이 병력과 물자들은 대부분 이순신이 중앙 정부의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만들어낸 전력이었다.''' 이순신은 군량미도 둔전이나 통행증 발급으로 알아서 조달했고, 화약의 주 재료인 염초도 알아서 만들었고, 심지어 조정이 종이가 모자라다는 걸 알자 종이를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이순신이 조정에 뭘 해달라고 한 것은 관리들의 인사이동을 요청한 것, 역병이 돌았을 때 의원을 보내달라고 한 것, 최전방에서 구할 방도가 없는 유황을 보내달라고 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순신에게 선조와 조정은 도움을 주기는 커녕 수군의 기반이 되는 우수영 관할 14개 고을 중 무려 9개 고을을 육군 소속으로 징발했고, 전쟁 초기부터 수군 소속 고을의 군량을 육군에서 징발하거나 명나라 군대 뒤치다꺼리하느라 써버리는 막장에 이르렀다. 즉 정부가 군대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군대가 정부를 지원한 것이다. 원래 군대가 생산에는 도움이 안 되어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유지가 된다는 점을[17] 고려하면 그 군대의 지원을 역으로 받아먹었던 선조와 조선 조정의 무능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순신이 1593년 11월 17일에 보낸 <연해안의 군사와 양곡과 병기를 전부 수군에 소속시켜 주기를 청하는 장계(請沿海軍兵糧器全屬舟師狀)>[18]에서 '지난번 장계에 해군력 증강 계획안을 보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전라 좌도에 고을 5개, 우도에 14개 고을이 있었는데 9개 고을이나 육군에 전속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수군 소속 고을에서 군량미까지 계속 징발하고, 경상우도 연해안 고을은 다 털리고 백성들은 숨어 사는데 수군이랑 육군이 병력 뽑겠다고 착취하고, 충청도 애들은 몇 번이나 도와달라고 했는데 오지도 않고 진짜 답답하고 걱정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매사를 땜질식으로 처리하다가 또 망하면 어떻게 되돌릴 겁니까?' 라는 내용으로 항의했을 정도였다. 상기한 물자들은 조선 정부의 행정적인 문제가 터지는 와중에도 그가 피땀 흘려 어렵게 만들어 낸 물자들이다. 이후 이 9개 고을은 저 물자들을 모두 말아먹고, 명량 해전 이후에야 조선 조정은 수군 육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1597년 12월 25일 수군 소속으로 돌려줬지만 임진왜란 초반에 이순신이 주장했던 해군 증강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데다 기껏 모아놓은 것조차 날려먹었으니 말 그대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일 뿐이었다.
이런 병력을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참패로 허비하고 난 뒤, 이순신이 복귀해서 노량 해전 때까지 이 악물고 재건한 전선은 이 때의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이때 이순신의 수군 전력은 전선 60여척, 병력 1만 6천여 명으로 병력은 어떻게 복구했지만, 병사들이 탈 군선은 시간과 자금 문제로 보충할 수가 없었던 것.
1597년 3월 9일, 거제도 기문포에 왜선 3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균은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다. 당시가 휴전 기간이었기에 항왜를 보내 술과 먹을 걸 줘가면서 안심시킨 뒤 돌려보낸 후 뒤를 쳤는데, 오히려 일본군에게 반격을 받아 그만 '''임진왜란 최초로 해상에서 판옥선 탈취를 당했다.''' 판옥선 안에 실린 화포와 화약, 기타 무기까지 빼앗긴 건 덤. 결국 그 판옥선을 부숴버렸는데 이를 왜구의 목을 쳐서 장계를 써 올렸는데, 선조는 이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통제사 '''원균(元均)이 임명을 받자마자 곧 무용(武勇)을 떨쳐 적선 3척을 포획(捕獲)하고 수급(首級) 47급을 바쳤으니 매우 가상하다. 원균과 공이 있는 사람을 즉시 논상(論賞)하고, 혹 관원을 보내 호군(犒軍)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할 일을 의계(議啓)하라.''' 그리고 적의 수급과 계본(啓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아울러 참작하여 논상할 것으로 비변사에 말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3월 25일 2번째 기사##'''

참고로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는 고성 현령 조응도와 병력 140여 명이었다. 고로 일본군보다 아군의 피해가 더 크다는 소리이다.(...)
당연히 일본 측은 '아직 휴전 기간인데 이렇게 뒤통수 치는 게 어딨냐!' 라고 항의했고 조선 조정은 당황했다. 결국 원균에게 줄 포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원균은 선조의 기대와는 달리 이순신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걸었다. 작전은 고사하고 이순신이 만든 조선 수군의 작전회의실 운주당(運籌堂)에서 기생을 불러다 같이 놀며 술을 퍼마신것이다.(...) 선조는 이를 보고 나서야 원균의 문제점을 깨달았는지 '너 부산 언제 공격할 거냐?' 라고 물어보며 압박을 했다. 원균은 당장 부산포를 때려 부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말을 바꿔 '저 혼자서 부산포 공격은 무리고 30만 조선 육군이 안골포, 가덕도를 쳐주시면 부산으로 달려가 적진을 모조리 소탕하겠습니다.' 라는 내용으로 답했다. 조선 육군의 병력 규모를 몰랐거나, 부산포 공격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서 출정을 피하려 한 듯하다.
조선 조정과 원균이 이러고 있을 때 일본군은 '왜 자꾸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는지' 분석했고, 그를 토대로 새로운 전략들을 구상했다. 일단 조선의 판옥선은 일본의 함선보다 월등히 강력하니 판옥선 한 척 당 일본 배 4~5척이 빠르게 접근하여 화포를 장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백병전을 벌인다는 것, 해군 대 해군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육군과 합동해서 움직인다는 것, 어둠을 틈타 밤에 기습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은 이러한 전략들을 모두 활용한 사례였다.

3.1. 원균의 내키지 않는 출전


조선 조정에서는 원균에게 병력 5천 명까지 지원하면서[19] 압박을 넣었고, 결국 6월 18일, 원균은 조선 함대 100여 척을 이끌고 부산포로 향했는데, 부산포로 가는 길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안골포에서 적선 두 척을 빼앗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보성 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자 부산포는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귀환했다.
조정에서 까라는 부산포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지휘관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나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원균은 출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597년 7월에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경상우수사 배설 등 지휘관과 조선 함대 169척을 이끌고 출전한 후 7월 7일에 부산포 근처 다대포에 정박했다. 그리고 이후의 상황 전개는 다음과 같다.

8일: 왜군과 첫 교전을 하여 왜 수군의 빈 배 8척(...)을 불사르는 전공을 세움.

9일: 서생포에서 일본 수군이 공격하자 '''겁 먹고 도망가다가 판옥선 20여 척 가까이를 상실하는 패전을 겪음.'''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칠천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판옥선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것이다.(...) 1592년부터 97년까지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지휘했을 땐 판옥선을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14일: 부산포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하던 도중 일본 본토에서 오던 수송 선단과 마주쳤고,[20]

이때 수송 선단이 도망치자[21] 원균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달려들었는데, '''그만 판옥선 12척이 해류에 떠내려가 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만다.''' 그리고 5척은 도모포에, 7척은 서생포로 표류했고 '''서생포에 표류한 인원들은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22] 비무장 적선을 잡겠다고 격군(노를 젓는 병사)들이 지칠 때까지 뒤쫓았다는 소리다. 현대 해군으로 비유하자면 구축함 수십 척이 적 수송함 몇 척을 뒤쫓다가 연료가 바닥나서 해류에 떠밀려 표류 끝에 전사자가 발생한 격이다.

원균은 이 출전으로 왜선 10척을 부수고 판옥선 32척을 잃는, 이순신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교환비로 교전한 뒤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전까지 원균은 전투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이 전투에서 원균이 사실상 처음 보여준 지휘 능력은 말그대로 최악 그자체라 향후 최악의 패전을 보여주는 복선이나 다름없었다.

3.2. 무능한 지휘관, 곤장을 맞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에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난중잡록》

원균은 물러나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권율이 고성(固城)에 있다가 원균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며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와서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촉했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오자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는데 여러 장수들이 원균을 보고 군사일을 의논하고자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그날 깊은 밤 왜선이 습격해오니 군이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해안에 올랐다.

《징비록》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도원수 권율은 직접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때려버린다. 다만 여기에서 기록이 서로 엇갈리는데,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7월 11일'''에 권율이 원균을 곤양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치자, 그날 밤으로 원균이 부산으로 출진했다고 한다. 반면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가덕도에서 돌아온 원균을 고성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쳤고, 그날 밤으로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원균이 곤장을 맞은 것은 칠천량 해전 직전인 '''7월 15일'''이 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징비록의 신뢰도는 난중잡록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징비록은 칠천량 해전의 날짜부터 8월 7일로 잘못 기록했고, 이는 류성룡이 쓴 칠천량 해전의 정황이 피상적임을 보여준다. 물론 난중잡록에 기록된 칠천량 해전의 정황도 조선군이 식수와 땔감을 구하다 기습받은 장소를 영등포로 적은 기록이 있는 등 정확하지는 않다. 실록은 기습받은 장소가 가덕도라 하였고, 해소실기는 영등포에서 적과 대치하며 하릴없이 기각지세를 이루었다고만 했으니 여러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 징비록을 일정 부분 참고한 선조수정실록도 원균이 곤장을 맞은 시점은 출진하기 전이라고 했다.
  • 조선 함대는 15일에 칠천도로 이동해서 그날 밤 붕괴되었는데, 이 한나절 사이에 고성까지 가서 매를 맞고 왔다고 보기는 시간이 빠듯하다.
  • 권율이 11일 어간에 곤양에 있었음은 난중일기로 증명되지만,[23] 15일에 고성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이는 해군참모총장이 장병들 보는 앞에서 합참의장에게 얼차려를 받은 격이라 원균에게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원균의 아들인 원사웅까지 같이 곤장을 맞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24]
권율이 원균을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억지로 밀어넣었고, 따라서 권율에게도 칠천량 패전의 책임이 일정부분 있다는 주장도 있다.[25] 그런데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이런 주장에는 의문이 있다. 당시 조정이 원균에게 요구한 내용은 함대를 나누어서 해상의 적 보급선을 교란하라는 것이었지, 군대를 죄다 이끌고 부산으로 몰려가 해전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곤장을 친 당사자인 권율은 물론이고, 심지어 선조마저도 당시 원균에게 그 정도의 기대를 걸지 않았다.

도원수가 비밀 장계 한 통을 올렸다. (그 내용은 대강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가 고단한 것은 원균이 말한 바와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조실록』 30년(1597) 5월 8일

가령 크게 싸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배를 3등분해서 절영도 앞바다를 번갈아 오가며 뒤따라온 배가 이어가고 앞에 있던 배가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주사의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면 부산과 서생포에 상륙해 있는 왜적들은 모두 군량미 수송로가 끊길까 걱정할 것이고, 뒤를 이어 나오는 적선들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주저하여 함부로 건너오지 못해서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의 형세는 선두와 후미가 단절되어 우리가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5월 12일

신구(新舊)의 전선을 모두 합쳐 절반은 한산도 등에 머물러 있고 반은 운도 등처의 해양에 출몰하게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정박할 곳이 없기는 하지만 번갈아 교체하면서 끊임없이 왕래하면 형세상 반드시 피차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안골포 등처에 왜적이 있지만 본진의 선박으로 배후를 도모할 계책을 세울 수 있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이 있더라도 해양의 선박으로 즉시 처치케 할 수 있으므로……

『선조실록』 30년(1597) 6월 1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 부대로 나누되 배설은 경상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는 전라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최호는 충청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원균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6일

도원수 권율이 장계하길…… "이런 식으로 계속 번갈아 교대하며 뒤에 오는 자가 나아가고 앞에 간 자가 돌아오면, 그곳의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혹시 돛을 달더라도 파두(波頭)에 부서질 것이니, 이곳에 있는 적들의 형세가 고단해지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8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사(舟師)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7월 10일

이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곤장을 맞은 뒤 원균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홧김에 전 함대를 이끌고 출전해 버렸다는 것이다. 원균은 이후 부산 가덕도에 도착해 물을 싣기 위해 수군 400명을 보냈다. 그런데 가덕도에 다카하시 나오쓰구가 이끄는 일본군이 있어 기습을 받자, 원균은 '''그 병사들을 전부 가덕도에다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26]
그렇게 도주한 원균은 가덕도에서 거제도 북쪽에 위치한 영등포로 이동했으나 이곳에서 또 다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았고, 육지에 진을 치지 못하고 쫓겨난 조선 수군은 다음날인 7월 15일 영등포 일대에 비바람이 몰아쳐 더 이상 배가 정박하지 못하게 되자 폭풍우를 헤치고 칠천량으로 향했고[27] 그곳에 정박하며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조선 수군의 무덤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4. 전투의 전개


[image]
요약하자면 원균은 출정 이후 무능한 지휘랑 멍청하고 무리한 추격전으로 조선 수군의 진을 다 빼놓은 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시점에서야 귀환을 결심했고, 귀환 과정마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일본군에게 완벽한 습격의 장을 만들어준 채로 정박해 있다 습격당해 조선 수군 전체가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으며 와해되었다.
칠천량 해전은 당일의 전투행위 자체가 경악할 정도로 졸렬하고 무능한 것이 많은 이들에게 주목받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대패를 일으킨 것은 출정부터 칠천량에 정박하기까지의 과정에 있다. 물론 출정 후 그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최악의 지휘만을 보여준 원균도 이러한 정면 대결이 시작되면 조선 수군의 막강한 화력에 기대어 전투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지만 그것마저 포기한 것은 여전히 최악 중 가장 최악인 부분이다.

4.1. 7월 15일 : 일본군의 기습 공격


칠천량에 진을 친 후 원균은 그때까지 경과로 의욕을 잃자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28] 이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동태를 지켜보다 기회를 눈치채고 칠천량으로 몰려갔다. 특히 이순신에게 늘 패배하기만 했던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있는 배를 다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일본 육군도 칠천량으로 갔다.
7월 15일 밤 10시, 조선 수군의 군량선에 불이 났다. 이는 일본 수군이 벌인 짓이었는데 조선 수군 함대가 기습을 당해 배가 불탄 적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지휘관인 원균이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주위를 더욱 철저히 경계하라고 명령했을 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7월 15일, 왜장이 날랜 군졸들을 모집해 작은 배를 타고 우리 군사와 함대의 동태를 살폈다. 우리 병사들이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으므로 적들이 포 두발을 발포했다. 우리 군사들은 몹시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적들이 병선을 타고 일거에 진격, 한산도가 마침내 무너졌다.

'''《해상록》'''


4.2. 7월 16일 : 불타는 칠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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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도. 거제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에 위치.
군량선에 불이 붙은 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16일 새벽 4시.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향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초기에 기습한 적선은 겨우 두 척이고, 1천 척에 달한다는 일본 수군은 기습이 성공한 뒤 한참 후에야 차례대로 도착했기에 조선 수군에 대한 수색 섬멸 작전만 수행했고, 육군은 거제도 등으로 도망가는 조선 수군을 잡았을 뿐이었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 10여척으로 우리 전선 사이를 뚫어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 5척 ~ 6척으로 우리 진을 둘러 쌌는데, 우리 복병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이미 복병선은 적에게 불태워 없어졌다. 균이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문득 각 배 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여 총탄이 발사되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하였다.

'''《난중잡록》'''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수군 지휘부는 아무것도 몰랐다. '''즉 일본군이 조선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도 몰랐다는 소리다!''' 군대에서 초병 세우고 주기적인 정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가까운 것이고, 난중일기나 이순신의 장계에서 허구한 날 탐망선을 띄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를 알 수가 있다. 원균 말고도 이억기나 최호 같은 개념인들도 있었으나 이런 실수를 할 위인들이 아님에도 경계망이 뚫렸다는 것도 뭔가 이상한데, 난중일기에서 좌수영 본영의 진흥국이 백의종군 상태인 이순신에게 찾아와 원균이 못되게 군다고 이야기했음을 감안하면 원균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막대한 불이익을 주었고, 이 때문에 이억기나 최호 등의 명령권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수도 있다.[29]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기습 공격으로 당황한 채로 교전하여 싸움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초반에 일본군 배 2척이 기습공격을 하자 조선 수군의 절반이 도망갔고,(...) 나머지 절반은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긴 했으나 지휘권이 가동되기는 했다는 소리다. 어쨌든 원균은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김완은 기습해 온 적선이 단 두 척밖에 안된다며 거부했다. 결국 조선 수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여 조방징인 김완의 함선은 점령당하고, 김완은 분전 중에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혔고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다. 훗날 일본에서 탈출하여 조선으로 돌아온 김완이 《용사일록(龍蛇日錄)》[30]에서 이 상황을 회고하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十六日五更, 賊雲集, 放砲夜驚. 我舟師已蒼黃擧碇, 疾者先出溫川, 鈍者未及出, 賊已回擁 (中略) 主將失措諸船已潰, 一半北于鎭海, 一半奔于巨濟. 時余獨掉後船鼓角促旗. 南渡浦萬戶姜應彪·會寧浦萬戶閔廷鵬·助羅浦萬戶鄭公淸·海南代將·江津大將等各從水使已走遠洋. 余獨與軍官·射夫及奴子, 放砲齊射, 殊夗力戰, 一倍厮殺之. 際勢甚孤弱, 揮旗馳進, 主將謝曰 "令公奮戰之力, 甚多也." (中略) 主將曰 "李億祺·崔浩不知去處. 惟令公戮力捕捉, 夗而後已." 聽訖回視, 賊船二隻已近百武之間. (中略) 余亦左脚中丸, 危怕之際. 高聲疾呼曰 "主將! 主將! 胡不出救!" 主將元均醉酒, 高臥號令, 軍官金大福片箭十餘射. (後略)

7월 16일 5경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나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라고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31]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 라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 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김완,『해소실기』 《용사일록》 출처

이때 후퇴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2척의 병력이 기습한 이후 본격적으로 참전한 일본군은 도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요시아키가 창과 포로 무장한 한 척의 거함에 뛰어 올라 몇 사람을 참수하자 적(조선 수군)이 그를 공격하려고 했다. 요시아키의 조카 곤시치로 등이 분전하여 드디어 배를 빼앗았다. 요시아키는 또 적의 별선에 뛰어오르려 하다 발을 헛디뎌 바다로 떨어졌다.

'''《정한휘보》 권4 30면'''

위와 같이 당시 일본 수군의 전술은 군선의 돛대를 사다리로 이용해 전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것인데, 이 때문에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는 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기록상 싸우다가 자결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전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아서 보통은 자살 행위를 연상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보는 편이다. 배설은 적선 8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선의 수가 너무 많아 결국 밀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가자 원균은 각 수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고 전 수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로 잡혔던 김완의 해소실기에 나온 내용으로, 최소한 전투 초반 지휘 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념상 칠천량 해전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 전투에서 왜군에게 공격을 받아 조선 수군 전체가 그 자리에서 섬멸당하고 이후 명량 해전 때 참전한 판옥선 12척만이 간신히 도주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전력을 유지하였다.
해소실기의 내용에 따르면 16일 오전 8시쯤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반도를 향했다. 이 서남쪽으로 도주한 함대가 배설을 위시로 한 훗날 합류하는 함대로 추정한다. 하지만 원균 등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주력 함대는 죄다 진해만으로 달려갔고, 한산도가 아닌 고성현 춘원포[32]로 도망갔다. '''그리고 여기서 원균이 지상에 내려서 도망치자는 결정을 내렸는데, 왜군의 기습을 받아 이순신이 힘들여 쌓아놓은 조선 수군을 제대로 교전 한번 해보지 않고 완벽하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명 ∼ 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선전관 김식의 보고. 《조선 왕조 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 2번째 기사##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선조 30년(1597년) 7월 21일 살아남은 병사가 없냐고 묻는 선조에게 이항복이 대답한 내용.

차라리 원균이 한산도로 퇴각해 견내량을 틀어막고 버티기만 했어도 이 정도의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고 각기 도망치거나 아예 지휘권이 붕괴된 상황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로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원균이 조선 수군을 퇴각조차 할 수 없는 춘원포로 다 몰아버렸으니... 이 시점에서 조선 수군은 지휘관들 상당수가 원균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고 도망쳤기에 절반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원균과 함께 전멸당했다.
원균이 맛이 가서 그냥 군대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으면 대다수가 무사히 도망쳐 나중에 수습할 여지라도 있었지만, 원균이 지휘권을 독점한 상황에서 군대의 절반 이상을 춘원포로 후퇴시켜버리다보니 조선 수군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이순신이 엄청난 노력 끝에[33] 만들어 놓은 최정예의 조선 함대와 수군이 그저 일본 수군 50척이 기습했다고 와해되었고,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되어갈 때쯤 1천 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 본 함대가 칠천량에 도착했다. 이들은 춘원포에 고립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가토 기요아키는 약간 뒤에 도착했는데 전투는 이미 한참 전이었다.

《정한휘보》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나마 본 함대가 도착했을 시점에는 이미 삼도 수군의 절반 이상이 전장을 빠져나간 뒤였기에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5. 전투의 결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 3번째 기사##.'''

칠천량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충격을 받았고 이후의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중에 선조가 했던 말이다. 쉽게 말해 '칠천량 패전은 원균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라는 것이다. 사실 만약 패전의 책임이 원균에게 있다면 잘 싸우던 이순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선조 또한 책임이 있다. 물론 왕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할 신하야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왕의 위신이 깎인다. 그러니 원균에게 잘못이 없고 패전은 단지 운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은근슬쩍 변명하며 책임을 회파하는 것이다. 사족으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승리를 거둔 이후 이를 "하늘이 도왔다.(此實天幸)" 고 평했는데, 두 사람이 비슷한 말을 했음에도 느낌은 전혀 다르다.
선조는 처음 패전 소식을 듣고 '한산을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한 형세를 지키며 우주방어 했어야 하는데 괜히 출동해서 졌으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하늘 때문이다.' 라는 내용으로 말했다. 그런데 괜히 출동하여 적의 함정에 들어가지 말고 한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순신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을 한 이순신이 빨리 출동 안 한다고 처형하겠다며 길길이 뛰다가 결국 백의종군에 처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꽂아넣은 책임자는 선조 자신이었다. 그 전에도 원균이 구원병을 요청하여 (요즘 말로 하자면) 큰 그림을 그렸다며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하고 이순신을 평가절하한 적이 수 차례 있었던 점 등도 함께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유재란은 1597년 1월에 시작됐고, 이 전쟁의 첫 회전(會戰)인 칠천량 해전은 동년 7월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 패배를 기점으로 정유재란의 전선(戰線)이 하삼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실패했던 수륙병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왜군이 한양을 노릴 수 있게끔 됐다. 한마디로 '''정유재란 초반의 국면을 결정지은 전투이다.''' 이 수륙병진은 임진왜란 때도 시도되었던 작전인데, 실제로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올라간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에게 '우리 수군이 곧 서해로부터 10만 명이 당도할 것이다. 이제 조선의 임금은 어디로 가시려나이까?' 하는 글을 보내서 겁을 주기도 했다. 실제로 했다면 순식간에 전쟁을 끝낼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선조에게 글을 보내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의 제해권이 완전히 조선 수군에게 들어왔기에 불가능해진 작전이었다. 이후 이 작전은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괴멸되자 정유재란 초기의 왜군의 핵심 전략으로 채택되기도 한다.
조선 수군 함선 134척 중 절반 가까이가 살아남긴 했으나 대부분 개별적으로 후퇴한데다가, 한산도에 남겨둔 배, 또는 건조 중인 배가 다수 있었으나 적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끝까지 편제를 유지해 명량 해전 직전까지 수군에 남은 건 배설이 도망칠 때 끌고 간 12척 정도로 조선 수군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실, 제대로 된 전투 없이 다 도망갔기 때문에(...) 이억기, 최호를 제외하면 지휘관급 전사자는 거의 없었으며, 병력 손실도 규모에 비해 적었고, 함선 또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겠지만 적어도 절반 이상이 살아남았다고 보는 게 맞다. 즉, 모두 죽었다기보다는 지휘 체계고 뭐고 모조리 무너져서 뿔뿔이 흩어진 것. 실제로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本道)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將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이항복, <백사집>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일본군 장계에 따르면 칠천량에서만 적선 160여 척을 탈취하거나 불태웠고 연안에 남겨진 전선들 또한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이순신한테 합류한 전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과장된 면이 있다. 아마도 판옥선 외에 협선 등의 작은 배들까지 합산하거나 제대 장수들의 보고가 겹친 사례로 볼 수 있다. 의외로 이런 경우는 현대에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수(배설)가 전장에서 도망친 것은 다른 경우였다면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이 경우에는 최고 지휘관과 지휘부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고, 전 병력이 사분 오열되어 각개 도주하는 상황이었기에 배설이 휘하 전선을 이끌고 퇴각한 것은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행동이다. 또한 배설이 그나마 명량 해전 당시 12척이라도 투입할 수 있는 배를 남긴지라 되려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역사에 기록된 명량 해전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후 수습된 조선 수군의 80여 척이 넘는 판옥선 대부분 역시 수색 소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배설은 자기 휘하의 챙길 수 있는 전함은 최대한 온전하게 챙겨서 도망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량 해전 당시 참전한 판옥선의 소속이 제각각인 점이 그 근거이다. 즉 배설이 직접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 외에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함선은 최대한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복직한 이순신이 싸우러 나갈 배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배설은 퇴각하면서 한산도에 있던 물자들을 일본군 손에 넘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태웠다. 난중일기 8월 13일에 전라 좌수사 시절부터 여수 본영의 우후로서 이순신을 보필해오던 측근이었던 이몽구가 여수 본영에서 피난해오며 병장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 80대라는 중형을 내렸으며, 난중일기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이 이몽구를 처벌하라는 유지를 갖고온 것을 생각하면 배설의 행동은 전술적으로 옳은 행동이었다. 퇴각시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물품(식량, 무기, 자재)을 폐기하는 기초적인 전술이다. 이후에도 이몽구가 멀쩡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연말에 전사한 걸 보면 처벌은 받았어도 참형과 같은 극형은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선 처벌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엄한 처벌을 주문한 것으로 보이며 조정에서 탄핵을 받은 건 확실히 맞지만 처형인지는 알 수 없다. 이몽구는 1605년에는 원무공신 2등에 추증, 복권되었다.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함선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는데 시간상 보면 건조하는 속도로는 그렇게 빨리 불어나기 힘들다. 노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은 대략 판옥선 60척으로, 명량 해전 이후 1년 2개월 남짓이었다. 아무리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지만 조정의 지원도 어려운 상황에서 처음부터 이 전선들을 새로 만들었다고 보긴 힘들며, 이중 일부는 칠천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잔여 전선들이 합류했거나 뒤늦게 찾아낸 뒤 수리해서 다시 배치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즉 살아남은 장수 대부분이 배와 휘하 병력을 데리고 숨어 있었고 그나마 배설만 자기 휘하 병력을 새로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했다는 소리가 된다.실제로 명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장수들이 수군에 합류해서 도망친 죄로 처벌받은 기록이 있다. 첨언하자면, 칠천량 해전 때 배설의 함대만 유일하게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고,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 습격 때 최초로 응전한 장수도 배설이었다. 그러나 배설은 이때 얻은 까임방지권을 명량대첩에 참가 안 하고 탈영하면서 써버렸고[34]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잡혀와 목이 잘렸다.(...) 다만 이때의 배설은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기에[35] 여러 정황상 배설의 도망은 미묘하며 무조건 비난할수가 없다. 자세한 내용은 배설 문서 참조.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순신이 막아내어 유지할 수 있었던 남해의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이는 전라도가 더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아 인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조선의 보급고였으므로 매우 중요했다. 단적인 예로 도원수 권율의 병력은 자신의 부임지였던 광주(현 광주 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수군도 마찬가지로 삼도연합수군이라고 해도 사실상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핵심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말한 '약무호남 시무조선'은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일본 입장에선 임진년 당시 한양 이북으로 진격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인 해상 보급 문제가 원균 덕분에 해결되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패배도 패배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 대다수가 갓 뽑은 오합지졸 신병들이 아닌, 임진왜란 개전부터 약 6년간 왜군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승리한 역전의 베테랑들이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군관들을 비롯한 지휘관들 역시 6년간 이순신 밑에서 맹활약을 펼친 실력파 부장들이 많았는데, 이 해전에서 그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쳤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산도 대첩을 비롯해 6년간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주역들이 이 해전 한 번에 죄다 증발된 것이다. 해군에서 숙련된 인력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감안하면, 이는 큰 타격이며 사기가 떨어짐은 너무나 당연했다. 《난중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순신이 말한 것은 아니고 이순신을 찾아온 이가 이순신에게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중략)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후략)

'''《난중일기》 정유년(1597) 5월 20일, 5월 23일.'''

다만 일본군은 너무 뜻밖의 대승을 거둔 탓에 서해로 곧바로 진출하지 않고 7월 말까지 주변 지역을 소탕하고 약탈하는 모습만 보였고 8월에는 이마저도 중단하여 이순신이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 일본군은 애초에 이런 식의 대승을 염두에 두지 못하여 서해로 보급 선단을 진출시킬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수군이 투입되는데 사천과 곤양을 거쳐 하동 땅 두지진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고 이때 수만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영화 명량에서도 칠천량 해전의 이러한 상황을 잘 묘사했다. 영화 초반에 일본군에게 끝까지 분전하다 참혹하게 잡혀 끌려다니다 사살된 장수와 조선 군영에서 탈영하려다 참수당한 공포에 실성한 병졸이 임란 초기부터 이순신 밑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한 부장과 병졸이라는 설정이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이 조선 수군에게는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온 것과 같았다.'''

'''《조선일일기》'''[36]

여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현실을 깨달은 선조는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하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제수했다. 이 부분을 김경진 소설 임진왜란에선 '임금이 신하에게 싹싹 비는' 상황이라고 서술하는데,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중앙집권 국가에서 왕이 신하에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소리.
물론 선조의 속내야 안봐도 뻔해서, 이순신을 여전히 불신하며 다시 기용하기 싫다는 기색을 드러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하들이 여전히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라고 요구하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승인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이순신한테 내린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장군을 주어 제대로 뒤통수를 쳤다. 그러니까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때에는 소장이 된 셈이다. 이러면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들과 같은 품계 즉 계급이 같으므로 지휘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휘하 수사들이 통제사 명령을 잘 따랐기에 이후 별 탈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배설은 도망, 김억추는 육군으로 전근 나간 이후 임명된 수사들이 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로 이 세 사람은 이전부터 이순신의 부장이자 최측근들이었다. 참고로 이순신이 받은 절충장군 품계는 명량해전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나도 유지되었다. 이것도 선조가 쩔쩔매는 명나라 경리 양호, 제독 마귀(!?) 등이 선조한테 이순신의 품계 좀 올려달라고 다그치자 마지못해 올려준 것이고, 그나마 다시 올라가긴 했지만 원래의 정 2품을 절대로 해주지않고 이보다 낮은 종2품 가선대부로 해주었다.(...)
하여튼 이순신은 원통함을 뒤로 한 채 조선 수군 재건에 나서게 된다. 패전 후 상황이 얼마나 암담했는지 당시 체찰부사 한효순은 '''"밤낮 눈물로 배를 만들었다.'''' 라고 기술할 정도.#

그해 여름 사이에 수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들이 궤멸했다. 주상께서 애통해하며 ‘한산도 수군의 일이 일시에 무너지고 전선이 1척도 없으니 경이 급히 30척을 만들어 수군을 도우라’고 하명하셨다. 명을 받은 이후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배를 만들어 변산 지역의 배 태반을 입수했다.

《월탄연보》

이렇듯 조선 수군은 세계 해전사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황당한 패전으로 소멸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선 엄청난,정말 백만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엄청난 기적 이 필요해 보였다.

6. 패배의 원인?


'''우선 원균 개인의 무능함이 제일 큰 원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기생을 끼고 살았다고 하고, 이 때문인지 부하들과의 관계가 나빠서 부하들이 원균에게 반발하여 원균의 말을 듣지 않는 상황까지 되었다고 한다.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과 원균의 부하들이 같이 원균을 까는 장면이 자주 나올 정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거기다가 작전 중에도 '''경계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움직이다가 다급해지자 부하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겨 쳐놓고 도망쳤다.

(중략) 이때까지 이순신 휘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원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통제사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부체찰사 한효순이 이 문제를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해결해보려 했지만 미처 조처를 취하기 전에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

이덕형이 올린 보고서. 《선조실록》34년(1601) 1월 병진 기사.

이러한 이야기는 칠천량 해전이 벌어지기 한달 전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중략) 휘하의 여러 장수 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6월 17일

아군의 행동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적진 한가운데를 들이침에도 적정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여 왜선의 대대적인 기습을 허용하고, 그 때문에 일본군의 장기인 백병전을 허용하고, 제대로 된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엉뚱한 곳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수륙 양쪽의 협공을 허용하는 등 전투 과정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일본군도 바보는 아니니 전쟁을 또 일으키기 전에 당연히 새로운 전술을 연구해서 올 것이다. 실제로 이순신은 이것을 대비하기 위해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패턴을 눈치채면 전략을 바꾸었다. 그런데 원균은 이순신이 어찌 하는지 잘 보면서도 적을 분석하고 전술을 연구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
전략적으로 보자면 거제도 북동쪽 ~ 부산 까지 왜성이 들어선 데다가, 조선수군이 거제도 동쪽에 거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컷다. 때문에 부산을 공략하기 위한 동선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고, 주변 왜성에 주둔한 왜군은 이러한 조선군을 추적하기 쉬운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부산 공략에 있어 거제도의 중요성을 조선 측도 모르지는 않았다. 이를 위해서 1594년에 조선 조정의 주도로 수군을 동원해 여러차례 해전을 벌였고, 대표적인 해전이 장문포 해전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륙작전을 벌여 왜성을 함락할 규모의 군대와 이를 지원할 충분한 수군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조명연합군의 능력으로는 동원하기 어려운 규모의 군대였고, 결국 이순신 이억기 등의 전라도 수군에만 모든것을 의존했기에 이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37]. 이순신은 이 점을 잘 알았기에, 해당 지역을 점령하여 왜군 코앞에 거점을 마련한다는 계획 대신에 전라도 연안 및 서해로 왜군이 진출하는것을 막아서면서 간간히 부산을 들쑤시는 전략을 고수했지만 현장의 사정을 모르는 조정은 이순신의 명령 불복종의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는 싸우지 말라.'고 명령할 정도로 조선 수군을 두려워했다. 해안 지방 곳곳에 왜성을 쌓아 오로지 방어와 최소한의 보급로 확보에만 주력했을 뿐이지 조선 수군과 정면 충돌은 극도로 피했다. 다만 그럼에도 조선 수군이 외해로 나가 부산포로 진격해서 싸우는 것은 수군의 장수 김완이 무리수라고 간하며 반대할 정도로 무모했다. 이 작전이 그대로 시행되었다가 처참히 실패한 전투가 바로 이 칠천량 해전이다. 이 덕분에 도도 다카도라는 조선 수군 궤멸의 1등 수훈자가 되어버렸다. 전사자가 얼마나 많이 났으면 칠천량 주변 섬에 '혈도(血島)'란 이름이 붙었겠는가?
그리고 권율의 실책도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본인이야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 말이 달라지는 신임 통제사의 태도가 화나가서 했다지만,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치기까지 했으니 통제사나 휘하 수군 입장에서는 내몰리는 격이었다. 원균도 아예 바보는 아니어서 부임 이후 부산포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했지만, 자신이 이순신을 모함하며 부산포 공략이 가능하다고 큰소리를 쳤기 때문에 이제 와서 못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억지로 끌고 나갔고, 결과는 패배로 이어진 것이다.
그 다음은 '''이런 참혹한 사태의 원인을 만든 선조다.''' 원균이 제아무리 무능하다 한들 그동안의 전투 경험만으로도 이 전투는 무모하다는 것은 알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선조는 그동안 이순신한테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으면서 현장 지휘관들의 합리적인 조언도 무시하고 되도 않는 명령만 내리다가 불합리한 논리에 편승해 이순신을 내쫓았다가 그 논리에 묶여 원균에게 출정을 강행하게 만들어 조선 수군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패전을 하자 책임을 회피하는 무책임함을 보였으며 이순신을 여전히 불신하고 기용하지 않으려다 신하들과 명군 지휘관들이 권고하자 마지못해 기용하며 여전히 지원을 해주지 않고 품계까지 깍아서 내리는 졸렬함까지 보였기에 선조가 원균 다음으로 큰 책임이 있다.

7. 경과 요약


1597년. 모든 표기는 음력.
  • 1월 1일: 요시라김응서에게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상륙한다는 이야기를 흘림. 조정에서는 비변사 회의를 통해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
  • 6일: 공무차 남해로 출장을 간 이순신의 선박이 폭풍우에 정박 함.
  • 10일: 이순신이 정찰을 통해 가토 기요마사부산 가덕도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파악.
  • 13일: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상륙.
  • 19일: 조선 조정에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도착했다는 김응서의 보고가 도착.
  • 21일: 조선 조정에 원균이 보낸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이순신이 아니라 나였으면 막는다.'는 장계가 도착.
  • 24일: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
  • 2월 10일 :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함대 63척이 부산포를 공격.
  • 25일: 한양에서 내려온 파발이 한산도에 도착. 이순신은 파직과 함께 압송되고,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원균 부임.
  • 3월 9일: 거제도에서 왜군을 유인해 47명의 목을 베고 승리를 거둠. 다만 판옥선 탈취 당함.
  • 6월 18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 100여 척이 부산포 출정.
  • 19일: 거제 안골포 해전 승리.
  • 7월 8일: 일본군 선박을 포착한 원균의 조선 수군이 무리하게 추적하다가 판옥선 12척 손실 발생.
  • 9일: 서생포 해전에서 판옥선 20여 척 손실.
  • 11일: 원균, 도원수 권율로 부터 곤장을 맞음.(징비록엔 7월 15일)
  • 14일: 가덕도와 영등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당해 조선 수군 퇴각.
  • 15일: 기상이 좋지않아 칠천량에 정박.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조선 수군 지도부 당황.
  • 16일: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조선 수군 일부 병력을 제외하곤 와해. 원균은 춘원포에 상륙후 도주. 생사는 불명.
  • 23일: 조선 조정은 모친상을 치르고 있던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사절을 파견.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8.1. 조선왕조 500년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46회에 아주 간략히 나왔다. 평상시엔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 안하냐고 대들던 다혈질로 나왔던 원균이 정작 권율이 출전 명을 내리자 출전 못한다고 버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뜬금없이 나온 태도 변화인 만큼 원균 명장론을 내세웠던 이 작품이 가진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원균을 용장처럼 묘사해놓다보니 정작 칠천량 해전 때 머뭇거린 이유가 설명이 안되는 것... 정작 전투 장면은 그냥 원균이 배타고 나가는 장면에서 해설로 때워버리면서 임진왜란을 다룬 다른 사극들과 마찬가지로 원균이 전사한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했다.

8.2.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신승수 영화 감독이 나래이션을 한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묘사하고 있는데 원균이 권율에게 얻어터진 후 출진은 했으나 밤에 쳐 자다가 갑자기 왜군에게 불화살로 기습을 당했다. 이후 원균은 우왕좌왕하며 전투조차 못해보고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마치 샌드백처럼 실컷 두들겨 맞기만 했다. 이후 배를 모두 잃은 원균은 육지로 도망쳤다가 육지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2명 정도 베더니 3번째 왜병에게 살해당해 전사했다.
명대사는 "장군, 배 한 척에 불이 났사옵니다."[38]

8.3. 불멸의 이순신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가 틀리고.. 이순신이 옳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불멸의 이순신 칠천량 해전 예고2 中 원균

주소 영상 참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1회 ~ 92회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그동안 이순신을 모함하고 자신이 떵떵거리며 주장했던 논리에 의해 선조와 권율 등에게 두들겨맞고 부산진으로 쫒겨나다시피 출정하게 된 이후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던 원균이 김완·이억기·우치적의 충언을 받아들여 견내량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지만, 곧바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고 구키·도도·와키자카가 조선 수군을 비웃는 장면을 넣었다. 특히 와키자카는 "지금 이 모습을 이순신이 봤어야 하는데"라고 말한 뒤 포격전은 일본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백병전으로 조선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도도는 거북선의 사각지대인 돛대로 사다리를 놓고 침입하는 왜군을 지휘하면서 "이걸로 메구라부네의 생명도 끝이 나겠군"이라 말하며 조롱한다.
이후 일본군 함대가 한꺼번에 투입된 데다 칠천량에 정박해 있던 조선군이 일본군의 기습 포격전을 맞아 포 한방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발려버렸고 일본군의 '''화포 사격'''과 접현 전투로 대다수의 배가 '''격침당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39] 이제껏 무적 무패 신화의 위용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이 정말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억기를 시작으로 작중에서 감초 역할을 했던 여러 군관들, 병졸들이 떼로 몰살당하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마침내 자신이 틀렸고 이순신이 옳았음을 깨닫고 늦게나마 갱생한 원균이 전사하기 직전에 우치적 등에게 이순신의 충직한 부하가 되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조선 수군이 더는 분열하지 않고 이순신 휘하에 완벽히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손실이 워낙 컸기에 이 정도 성과(?)는 아무래도 좋을 지경. 작품 외적으로는 마지막에 원균이 사망하는 장면을 지나치게 열혈적으로 묘사하여 대중들로부터 원균을 지나치게 옹호했다는 비판도 들었다.

8.4. 징비록



48화에서 아주 간략하게 다룬다. 전반적인 해전의 묘사나 원균이 죽는 장면 등은 전혀 안 나오고 그냥 내레이션 처리. 정유재란이 시작된 후 등장인물들이 칠천량에서 패했다고 언급만 하는 정도다.

8.5. 명량


직접적인 전투 묘사는 나오지 않지만 전후의 전멸한 판옥선들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꽤 자주 거론된다. 작중 배설이 칠천량을 언급하여 왜군의 전력이 강해졌음을 얘기하고 잡혀온 탈영병은 자신의 동료들이 칠천량에서 모두 죽었다며 울먹거리지만 이순신은 그걸로 할 말 다했느냐고 묻고 직접 환도로 목을 쳐버렸고[40] 다른 탈영병들도 모조리 사형에 처해졌다.[41]

8.6. 벽람항로


국내4서버의 명칭이 옥계인데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그 지역이다. 아래의 기타에 옥계 마을이 언급된다.

9. 기타


거제시 하청면의 칠천도 옥계 마을에 칠천량 해전 공원이 위치해 있다. 이름만 보면 원균 기념 시설로 오해할지도 모르나, 사이트 문구부터가 아픈 역사를 발판삼은 다크투어리즘의 명소 칠천량해전공원이다. 즉, 어두운 역사를 접근하여 패배도 기억하자는 의미가 크다. 칠천량 해전의 배경인 이순신의 파직 과정도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아 하옥됐다는 통념이 아닌 실제 사실을 충실히 설명하고, 기문포 해전 등의 통제사가 된 원균의 실책이나 출진 과정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정리하여 이해를 돕는다. 다만 정작 칠천량 해전 자체는 이 문서의 내용이 아닌 통념에 가까운 내용으로 소개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 문서의 2번 부분까지는 이 전시관에서도 잘 다루었지만, 3번 부분의 칠천량 해역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의 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궤멸당했다는 통념에 가까운 구성이다. 공원이 위치한 칠천량 해역을 강조하다 보니 이렇게 된 모양.
  • 반대로 평택시에 위치한 원릉군기념관에는 원균은 수륙병진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의 억지로 눈물을 머금고 출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애초에 칠천량 해전공원과 달리 원릉군기념관은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가 원균 재평가(...)를 노리고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원균은 잘못 없고 패전은 조정 탓'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상기되어있듯 당시 조정이 무리한 출정을 감행시켰다는 것도 논란이 있는 부분이라 걸러들을 것.
  • 조선에게는 그야말로 쓰디 쓴 참패이지만, 한편으론 이순신이 자칫 저평가를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준 전투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면 원균옹호론에 대해 비판하고 원균을 재평가할 가능성을 없앤 전투이기도 하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간혹 판옥선의 성능 자체가 일본의 군함을 압도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찍어 눌렀을 뿐 이순신이 훌륭한 전술, 전략가는 아니었다고, 은근히 판옥선을 치켜세우면서 이순신을 템빨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칠천량 해전이 설명되지 않는다. [42] 물론 그런걸 떠나 진정한 군인이라면 자기 명예에서 손해를 볼지언정, 칠천량의 패전이 없었기를 바랐겠지만.
  • 원균이 말아먹고 파탄 직전에 놓인 조선 수군은 이후 알다시피 이전 삼도 수군 전력의 15분의 1도 안되는 소 함대를 가지고 최대 333척 규모로 추정되는 일본 함대를 패주시키는 기적같은 승리를 한다. 일명 명량 해전. 여기서 적선이 몇척이었느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일단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적선은 133척이다. 그러나 징비록과 정조 대에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서는 왜군 전선 숫자가 각각 200척과 333척으로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이순신을 띄우기 위해 뻥튀기한 것이라기보단, 명량에서 이순신의 시선으로 확인한 적선만 133척이었으니, 그 후미에서 대기하던 적선의 숫자를 포함한 여러 경로의 정보들까지 취합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고, 서해를 통하여 곧바로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키려고 출발한 것이었으므로 순수한 수송 선단의 규모 역시 상당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추론은 소설 격류에서 김경진이 자세히 다루었다. 사실상 칠천량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이득은 이후 원균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

10. 말말말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 4월 2일 2번재 기사.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칠천량의 패배 소식을 들은 뒤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음력 7월 18일 일기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박문수, 《조선왕조실록》영조 71권, 26년 7월 3일 3번째 기사.


[1] 전사하지 않고 생존했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원균 항목 참조.[2] 이들 전선은 전투가 마무리될 시점에 도착해 조선 수군에 대한 추격 섬멸 작전만 수행했다.[3] 이순신이 함대를 재건할 때의 상황과 결과를 계산하면 이 정도 피해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나마 막판 원균의 지휘가 붕괴되면서 도망간 함선이 많았기에 절반이나마 건질 수 있었다.[4] 배설의 전과[5] 화살이 박혔다.[6] 문자 그대로 조선 최고의 정예군이 전투 하나 없이 공중 분해되었다. 그나마 병력은 다수 살아남아 이순신이 복직한 뒤 합류했지만, 이들은 원균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함선에 남아 있었던 병력이다. 즉 원균의 지휘를 충실하게 따랐던 병사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7] 굳이 비슷한 케이스를 찾자면 용인 전투, 쌍령 전투, 현리 전투 정도를 들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이 세 전투는 아군의 규모만 컸을 뿐 실상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규모만 큰 오합지졸이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적군에게 전술 / 전략적으로 와해되거나 모랄빵으로 무너지는 상황은 역사적으로 꽤 흔한 일이다. 어이없는 패주이지만 용인 전투는 지휘권이 통합되지 않았고, 쌍령 전투는 전투 직전에 전투에 무지한 문관 하나가 무슨 약을 빨았는지 대뜸 지휘관을 참수해버리고 지휘권을 강탈했으며 정작 상대방인 청군도 지리멸렬한 싸움을 벌인 끝에 지휘관이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현리 전투는 긴급 징집되어 소총 사격만 몇 번 해 본 상태에서 끌려온지라 사실상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병력들이 참전했다. 그 외엔 탄금대 전투통주 전투 등도 들 수는 있겠다만, 이 전투의 수장인 신립강조는 최소한 싸움이 벌어진 후 우왕좌왕하진 않았다.[8] 엄밀히 말해 국가 단위로 대대적으로 키워져 온 훈련된 정예병이라기보다는 현대적 의미의 군인, 즉 어느 정도의 기술자와 노동자의 성질이 더 큰 병력으로, 전시 상황이란 특수 상황 속에서 연전연승만으로 급속도로 다져진 형태의 정예병이었기에 병사들의 질은 뛰어나나 그들을 운용할 교리가 시스템으로 정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충분히 무능한 지휘관이라면 밑바닥 없이 추락할 수도 있는 환경이었다. 가장 비슷한 실패사례는 고수전쟁 당시 고구려의 수도로 직접 침공을 가하려고 했던 우중문과 우문술 휘하의 정예병 30만이지만, 이들은 숫자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위용이 있었기에 고구려는 수많은 심리전을 중첩시켜 사기를 꺾고 전쟁을 포기하게 만들어 후퇴시켜서 몰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9] 사실 호남 전체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뚫렸다. 일본군은 남원성을 함락시켜 성 안의 백성들을 도륙한 뒤, 도원수 권율이 지킬 수 없다고 버리고 간 전주성까지 함락시켰다. 이후 일본군은 충청도까지 진격했다. 그나마 직산에서 막아내서 일본군이 더는 올라오지 못했던 것[10]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강이 많아서 해상수송에 대다수 운송을 의지하는 대신 육로 개척이 미진했다. 그래서 주변국의 한반도 침략시 최소 주요 거점에서 버티기만 잘해도 침략군은 지치고 보급이 어려워져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때문에 고구려 시기 수나라 침입, 통일신라 시기 당나라 침입, 고려 시기 요나라 침입원나라 침입, 조선 시기 청나라 침입같이 대륙국의 침입 당시 한반도 국가의 주요 전술은 출입구(고구려는 천리장성을 피두로 한 요동방어선, 통일신라는 기벌포, 고려와 조선은 강동6주)를 틀어막아 적의 보급을 괴롭히고 본진에서 적의 본대를 상대로 시간을 벌어 적이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하는 방법이 주요 전술이었다. 반대로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이 재해권을 장악하여 해상 운송을 틀어막자 일본군은 험악한 육로를 통한 보급에 제풀에 지쳐서 왜성을 쌓아 버티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그러던 와중에 칠천량 해전으로 바다가 뚫리고, 한반도의 발달한 수로를 통해 일본군이 원활하게 보급을 받았다면 거기서 전쟁이 사실상 끝날 가능성도 높았다. 명량해전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고 우승을 거두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이후 전쟁의 전개 과정을 완전히 바꾸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11] 고니시와 가토는 이미 센고쿠 시대부터 원수 지간이었는데,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고 싶어할 정도로 심하게 미워했다. 그런데 고니시가 직접 가토를 공격하면 태합에게 벌을 받을 것이 뻔하므로, 조선의 힘을 빌려서 가토를 제거하고 싶어했다고 한다면 조선인들도 납득할 수 있었다. 두 사람 간의 원한은 일본은 물론 조선 사람들도 다 알 만큼 유명했기 때문.[12] 이순신이 이때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하라고 명령한 날짜는 2월 6일이었고, 이순신이 부산포를 쑥대밭으로 만든 날짜는 2월 9일~10일이었다. 이후 파발이 한산도 본영에 도착한 날짜가 2월 26일이었고 이순신은 파직당하자마자 압송당했다.[13] 조선이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 생각하면 선조의 이런 경계심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다. 또한 이몽학이 내세운 명분이 일본군에게 침략당한 무능한 조정을 대신해서 일본군을 몰아낸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이런 명분을 걸고 반란을 일으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선조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후 주요 인물만 제거하고 의병 대다수는 풀어주었고, 그때와 똑같이 선조는 제어하기 힘든 이순신을 무력화하고 자신이 보기에 말을 잘 듣고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원균을 임명한 것이다. 문제는 원균이 장수로서는 최악의 인물이었다는 점.[14] 당시 조선은 아무리 왕이 대신을 몰아내려고 마음을 먹는다해도 보통은 탄핵을 두어 번 반려하는 모양새를 취하던 시대였다. 그나마 그 신하가 무능함으로 원성이 자자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순신은 유능한 장수로 조정에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는 선조가 이순신을 싫어하며 작심하고 파직했다는 뜻이다.[15] 이 화약은 조선 육군이 '''임진년~계사년 2년 내내 생산한 화약(3천 6백 근)보다도 많다!'''[16] 조괄과 기겁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서 유명한 졸장들이다. 즉 원균의 친척조차 '저 사람은 제대로 싸울 능력이 없다. 분명 일을 크게 망칠 것.' 이라고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17] 실제로 이 때문에 막대한 규모의 군대를 항상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유럽에서는 상비군이 거의 없고 그때마다 농노들을 징집해서 투입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연히 질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몸빵 정도 역할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결정적인 활약은 용병이 도맡았다. 중국도 마찬가지라서 중국의 왕조들도 대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할만큼 부유하지 않다보니 대다수의 병력들이 나라에서 그때 그때 징집한 징집병들이 대다수였고 중요한 역할은 각 부대의 장군들이 사비를 들여서 키워 두었던 사병들이 도맡았다. 오늘날 한국군이 심심하면 대민지원을 나가는 이유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게 없어서 정부의 지원만 빨아먹고 사니까 답례로 노동력이라도 제공하라는 것이다. 이는 미군도 마찬가지다.[18] 출처:이충무공전서, 卷之三, 장계 36.[19] 이순신이 통제사일 땐 조정에서 병사를 지원한 적이 없었고, 전술했던 대로 오히려 수군 소속을 육군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조의 총애를 듬뿍 받는 원균에게는 지원을 못 해줘서 안달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도원수 권율 휘하의 병사들을 수군 소속으로 보내준 일이 있었다.[20] 임진왜란 당시 종군한 승려 케이넨이 쓴 《조선일일기》에 수송 선단이라고 쓰여져 있다.[21] 선전관 김식의 장계에는 수송 선단이 바다로 유인한 후 뿔뿔이 흩어졌다고 쓰였지만, 일본 측 기록에는 '조선 수군이 있으니 도망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22]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과 16일 기사에 기록.[23]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라고 했다.(『정유일기』 7월 8일)[24] 이 주장을 하는 쪽은 KBS 프로그램 <역사에의 초대>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그 프로그램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25] 당시에도 "지난날 주사(수군)의 싸움은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원수가 된 자로서는 힘을 헤아리고 시기를 보아서 대항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그 상황을 치계하여 후회가 없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러데 이러한 계획은 하지 않고 경솔한 생각과 부질없는 행동으로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독촉했다가, 마침내 6년 동안 경영하여 어렵게 마련한 주사를 단번에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많은 산책을 한 곳도 지키지 못함으로써 적이 호남으로 들어가 군민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11월 4일
"한산 싸움(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그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이다. 그의 서장을 보면, 안골포가 그 앞에 있어 금방 들어갈 형세가 못되니 육군으로 하여금 먼저 적을 몰아내게 한 다음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원수가 잡아들여 곤장을 치자,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과연 그가 스스로 패한 것인가?" 라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34년(1601) 1월 17일
[26] 참고로 이순신은 1597년 2월 있었던 부산포 출전 당시 가덕도에 물을 길으러 갔던 조선 수군 5명이 일본군 병사들에게 붙잡히자 배 62척과 김응서의 육군 병력을 동원해 가덕 왜성에 무력시위를 했고, 이에 겁먹은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포로들을 돌려준 적이 있었다.[27]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장초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에 따르면 "7월 9일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음으로 거제 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 라는 기록이 있다.[28]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던 김완이 쓴 해소실기에 내용이 있다.[29] 이순신은 통제사 복직 후 서해 쪽으로 후퇴하면서도 정박할 때마다 탐망선을 띄웠다. 그 덕에 어란포의 왜선을 확인한 뒤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고, 그날 밤 더 많은 전선으로 일본군이 습격을 했는데도 막아내었다. 워낙 전과가 찬란하다 보니 부각되지 못하는 감이 있는데 이순신은 싸움보다는 적의 동태와 전망을 살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다.[30] 김완의 후손들이 그의 글과 시문(詩文) 등을 모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 수록되었음.[31] 경계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고 싶어 안달이냐.'라 며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32] 크게 두 곳으로 추정하는데 현 지명 통영시 광도면 황리(우세설)와 현재 통영시 용남면 춘원포 설이 있다.[33] 전술했듯이 이순신은 전쟁 중 조정으로부터 단 한 번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여러 물품을 조정에 바쳤으며 심지어 조정에서 사용할 종이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자 이순신이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수군 육성과 이들을 먹여살릴 보급, 그리고 말도 안되는 전투를 동시에 해냈다는 소리이다.(...)[34]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지휘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배설이 자발적으로 먼저 떠났다고 묘사했다.[35] 현대로 치면 PTSD라 할수 있는 증세들을 보였다. 실제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전쟁터에 오래 있다보면 걸릴수 있어 마냥 겁쟁이라고 할수 없다.[36] 일본 규슈의 우스키 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였던 케이넨이 쓴 종군 일기. 케이넨은 주군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가해 《조선일일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37] 명군과의 수륙 합동을 하면 가능성이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것이, 당시 명군은 무력시위를 제외하고는 부산 일대 왜군을 압박할 의지나 능력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왜군 10만이 진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구원하지도 못했다.[38] 원균의 부장이 자고 있는 원균을 깨우면서 한 말이다.[39] 당시 일본 함선의 일종이었던 안택선은 설계 및 제작법상의 한계로 뱃머리에 2문 정도의 화포를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군다나 주력선으로는 세키부네라는 것이 따로 있었고, 안택선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연출을 위해 과장한 셈. 덧붙여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가 막강한 타격을 입는 것으로 묘사하는 바람에,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이 조선 함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도 흩어진 함대를 불러모으는 게 아니라 일일이 새로 건조하고 신병을 모집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오류가 발생했다.[40] 다만 실제 역사에선 전란이 끝난 1599년에 처형되었다.[41] 한번 넘어가면 다 도망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원래도 적전도주는 사형에 처하던 이순신이었지만 설사 관대한 지휘관이었다 해도 이 때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42] 사실 이게 맞다. 원균은 당시 자기 자신만 빼면 절대 이 정도의 패배까지는 할 수 없는 조건이 다 붙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 조선 수군은 기본적으로 갖춰진 요소들은 많았다. 그리고 이순신의 활약에 이것들이 역할을 해준건 맞다. 하지만 이순신이 부임하기 전만 해도 군기는 빠지고 필요한 물자가 심지어는 전함조차 원래 있어야 할 숫자에 못미칠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해결하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심지어 유능한 부하를 발굴하고 병사들을 노련한 정예군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이 모두 있음에도 원균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게다가 원균이 자기는 해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게 조정에서 꽃아줬다면 또 모르겠는데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 그는 전라좌수사, 경상우수사를 역임했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중 가장 큰 규모인 경상우수영의 경상우수사였다. 더욱이 임진왜란때는 제대로 된 활약이 전무하지만 이순신과 함께 어쨌거나 같이 싸운건 맞다. 더욱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것도 자신이 친 구라덕이다. 때문에 원균의 무능이 아니면 판옥선의 성능, 화포의 성능, 유능한 부하, 경험많은 부하, 보급 등등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참패한건 설명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