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사

 


1. 개요
2. 내용
3. 직제의 역사
3.1. 휘하 수영 (수군 절도사)
3.2. 나무위키에 등재된 삼도 수군 통제사 역임자
4. 기타


1. 개요


使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종2품 외관직[1]조선 무관. 조선 수군의 실질적 최고 지휘관. 임진왜란 이후 상설직이 되었다. 일명 통제 사또, 통수, 통곤 등으로 불렸으며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통제사 영감으로 불렸다. 가끔 이순신을 다루는 사극에서 이 시절 이순신을 장군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에서 장군이란 호칭은 대광보국숭록대부와 통정대부 등과 마찬가지로 산직의 명칭과 같아 옳지 않다. 삼도수군통제사 시절 이순신은 통상 대감[2], 통상, 통제 사또(백성들의 경우) 등으로 부르는게 옳다. 일본의 가부키에서 이통제(李統制)라는 이름의 악당(?)이 등장하는데 충무공 이순신을 모티브로한 인물이다. 중국의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처럼 끝내 이길 수 없었던 상대에 대한 정신승리를 위한 캐릭터이다.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에 대응된다. 참모총장이 대우는 장관급이나 실제로 국방부 장관의 아래임을 고려해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위치와 맞아 떨어진다. 판서는 정2품이었기 때문. 다만 군령권이 없는 참모총장과는 달리 통제사는 실제로 지휘도 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같지는 않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하단에 서술.

2. 내용


삼도 통제사·수군 통제사·삼도 수군 통제사라고도 한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하삼도(下三道)'의 수군을 지휘, 통솔한 삼남 지방의 수군 총사령관이다.
조선 수군은 하삼도 외의 다른 도에도 존재했으며 총 7명의 수군 절도사 중 각 도의 관찰사가 겸임하지 않고 정직의 무관이 임명되는 건 총 6명. 전라 좌도, 우도에 각 1명씩, 경상 좌도, 우도에 각 1명, 충청과 경기에 각각 1명이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수군을 제외한 타 지방의 조선 수군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해안 경비대나 수상 경찰 수준이고, 실질적인 해군으로 작용하는 조선의 해상 전력 대부분이 서남 해안의 3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유는 조선 수군의 가장 큰 임무가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3]
고려 시대에는 이것과 유사한 직책으로 해도원수(海道元帥)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강화도를 포함한 경기도 수군을 직할하여 각 지역 수군의 연합 작전을 지휘하는 직위였다.
조선 육군의 경우 도원수란 직책이 있었으나 상설직인 삼도 수군 통제사와는 달리 임시 관직이고 지휘 범위도 유동적이었다.
한편 경기도·황해도·충청도의 수군을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을 인조 시기에 교동도에 설치했는데, 통어영의 장인 삼도수군통어사는 처음엔 경기수사가 겸하다가 영조 39년인 1763년 어영대장 김한구가 “경기수사가 교동도에 주둔하고 있어서 만약 영종도에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도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다.” 라고 보고함에 따라 경기수군을 좌우로 나눠 교동도와 영종도로 방어사를 배속시키고 강화유수가 통어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조 13년(1789년) 통어영이 강화도 방비에만 편중되어 있어서 삼도의 뱃길을 다 지킬수 없다하여 통어영을 다시 교동도로 되돌리고 교동부사가 경기수사, 삼도수군통어사를 겸하게 한다.

3. 직제의 역사


1593년(선조 26년) 8월 평양한성 (서울) 수복 이후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수군에 수군 통제사라는 새로운 직제를 만들고, 초대 수군 통제사에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李舜臣)을 임명하였다.
이는 전(全) 수군을 통솔할 지휘관이 없어 왜적의 침입에 즉각 진압할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조정의 명령에 따라 연합 함대를 구성한 후에도 각도 수사(水使)가 도별로 선단(船團)을 지휘, 각 선단 간의 의견이 상충하여 효과적으로 전국(戰局)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에게 수사 이하 각 지휘관들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군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2대 통제사는 원균이었으나 칠천량 해전으로 말아먹고, 3대 통제사는 다시 이순신이 맡았다. 4대 통제사 이시언(李時言)부터는 거의 대부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가 겸직하였다. 이는 경상우수영의 관할 구역이 일본과의 최전선이어서 그 전력의 비중도 크고, 따라서 경상우수사의 실권도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4]
임진왜란 당시 수군 통제사 벼슬 자체는 정3품 수군 절도사와 동급이었으며, 단지 3도 수사들의 지휘권만을 가진 자리였다. 물론 수군 통제사에 임명될 때 이순신의 품계는 다른 수사들에 비해 높은 '''정2품 정헌대부'''였기 때문에 지휘권을 행사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종식된 후, 통제사는 정3품 수군 절도사보다 상위직으로, 각 도의 지방 행정의 최고직인 관찰사나 육군 최고 지휘관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같은 품계인 종2품으로 격상된다. 또한 대개의 경우 그보다 상위 품계에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설직이 된 이후에 법으로 정한 임기는 2년이었고, 그 아래 수군절도사수령과는 엄격한 상피제[5]가 적용되었다. 수군 통제사가 지휘하는 곳을 통제영(統制營), 또는 통영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한산도 (경남 통영시)에 두었다. 칠천량 해전 때 한산도 통제영은 파괴되었고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재건하면서 고금도 (현 전남 완도군)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잠시 여수의 전라 좌수영이 통제영을 겸하다가 1601년 경상 우수사 이시언이 통제사를 겸직하면서 두룡포(頭龍浦 : 통영시)로 옮겼다. 이후 1895년 7월에 폐지될 때까지 300년간 이어졌고, 그 동안 208명이 수군 통제사 자리에 올랐다.

3.1. 휘하 수영 (수군 절도사)



3.2. 나무위키에 등재된 삼도 수군 통제사 역임자


  • 이순신: 초대, 3대
  • 원균: 2대[6]
  • 이시언: 4대
  • 이운룡: 7대
  • 우치적: 10대
  • 정기룡: 15대
  • 신류: 56대
  • 이봉상: 95대

4. 기타


  • 수군 통제사는 작전 지휘권인 군령권과 일반 지휘권[7]군정권을 모두 가졌다. 따라서 오늘날로 비교하면 4성 제독인 해군참모총장해군작전사령관을 겸임하고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행사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8] 대한민국 해군은 군정권과 군령권이 분리되어 있어, 중장 계급의 해군 작전사령관이 군령권을 행사하고 합동참모의장의 지휘를 받으며[9] 대장 계급의 해군참모총장은 이와는 별개로 군정권을 행사하고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을 보좌한다.

[1] 外官職 : 지방 관청의 관직. 중앙의 경관직(京官職)과 대비되는 개념이다.[2] 품계에 따라 혹은 영감[3] 고려 왕조 붕괴의 요인 중 하나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초기부터 왜구 방지에 큰 신경을 썼다.[4] 경상우수영은 일본에 가장 근접한 최전선에 위치한 부대라는 점 때문에, 조선의 전 수군 부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배 숫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수군이 좌ㆍ우수영 모두 합쳐 약 50척 ~ 60여척 밖에 되지 않았던데 반해, 경상 우수영은 단독으로 75척 ~ 100여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쉽게 말하자면 ''''삼도수군의 절반이 경상우수영''''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를 감안하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경상 우수사인 원균을 제치고 전라 좌수사인 이순신이 임명된 것 자체가 원균이 임진왜란 초기에 한게 아무 것도 없다는 증거다.[5] 相避制 : 친인척간에 같은 관청 또는 업무상 관련 있는 관청에서 일할 수 없게 하고 연고가 있는 지역의 관직을 맡지 못하도록 한 제도[6]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된 후 바로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고 생존마저 불분명해진다. 자세한것은 원균 항목 참조[7] 인사권, 모병, 군함 건조 등이다.[8]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미 해군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이 해군 작전사령관을 겸임하고 군령권과 군정권 모두를 행사했다.[9] 평시 한정. 전시에는 한미연합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