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의 맹
1. 개요
한자: 澶淵之盟
1004년에 송나라와 거란(요나라)이 전연(澶淵, 현 허난성 푸양시濮阳市)에서 맺은 외교협정. '전연의 맹약'이라고도 한다.
2. 상세
요성종 때 요나라는 동으로 만주에 자리잡은 발해의 후신인 정안국을 무너뜨리고 서로는 서역의 유목 민족들을 복속시키고 당항 등 티베트계 나라들이 조공해오는 등 국력이 급격히 커졌다. 또한 993년에는 고려로부터 송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서부의 몽골, 동부의 여진인들을 제압하고 위무하는데 성공하여 요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요는 2차에 걸친 북벌이 실패해 군사력이 약화된 중원의 통일 왕조, 북송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999년부터 1003년까지 총 3 차례에 걸친 침공이 성공적으로 돌아가자, 자신감이 생긴 성종은 모친 예지황후와 함께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다.
요군은 초기에 승세를 잡아 하북의 주요 거점을 빠르게 함락하고 개봉이 눈에 보이는 전주까지 진군했다. 금세 요군이 전주를 함락하고 황하를 도강해 개봉을 포위할 듯 보였지만, 송의 재상 구준이 송진종에게 친정을 건의하고 송의 금군이 진종과 함께 북상하여 송군이 사기가 오르자 요는 예상외의 항전에 당황했다. 거기다 요의 명장인 소달름(蕭撻凜)이 정찰 중에 송의 장교인 장괴가 발사한 쇠뇌에 맞아 암살당한 탓에 요군 전체가 충격을 받아 급격히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전황은 교착되었고, 이에 더해 하북의 송군이 재정비에 성공해 요군의 후방으로 진군하려 하자 요는 난색에 빠졌다.
하지만 송진종은 요와의 전투 의지가 별로 없었고, 요나라의 섭정이던 소태후 역시 송과의 분쟁이 완만히 해결되기를 바랐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관계가 얼추 맞아 떨어지자, 그 뒤에는 이를 협의하는 일만이 남았다. 요의 비룡사 한기와 송의 우반전직 조이용이 수차에 걸쳐 교섭하여 마침내 1004년에 전연의 맹약을 맺어 화해한다. 맹약의 주요 내용은 송이 요에게 30만의 세폐를 제공하는 것과 양국이 형제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2.1. 맹약의 내용
1. 송은 요에게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매년 세폐로 보낼 것.[1]
2. 국경선은 현재 상태로 유지할 것.[2]
3. 송, 요의 황제는 형제 관계를 맺는다. 송 진종이 요 성종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요 성종이 동생이나, 후대에는 나이로 따져서 형과 동생을 정한다.[3]
3. 맹약 체결 이후
전연의 맹을 체결한 뒤부터 송 - 요 관계는 기본적으로 평화로웠지만, 국지전이나 영토 분쟁이 벌어져서 송이 요의 군사적 압력을 받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요흥종이 서하와의 전쟁으로 정신 없는 것을 노려 소혜진으로 하여금 송의 국경을 침범하도록 명한 일이다. 이에 송은 요와 재협상하여 30만냥의 세폐를 50만냥으로 증액하는 조건으로 전연의 맹약을 갱신했다. 송의 입장에서 50만냥은 송의 예산에 비해 아주 적은 돈이고 요와 전쟁을 벌여 그 전쟁 비용을 감당하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저렴했으나 재정 지출이 늘어나는 것이기에 세폐 증액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하와의 전쟁이 급하고 요의 대군이 남하한 상황이라 요가 내건 일부 요구 사항은 거부하고 세폐 증액과 세폐의 명칭 변경과 같은 요구는 수용하는 조건으로 맹약을 갱신했다. 이후의 송은 25만 5천냥의 세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서하와 강화하였고 금과 해상의 맹을 체결할 때에도 요에 주던 세폐를 금에게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행보를 보인다. 그리고 요나라는 이러한 군사적 압박, 허세를 부려 송 신종 연간까지 송으로부터 영토를 할양받고 송의 정세를 살피는 등의 이득을 누렸다. 송 역시 요가 허세를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피해가 크다고 볼 수는 없고 요가 진실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적당히 양보해주었다.
요와 서하에 주는 75만 5천냥의 세폐가 송에게는 재정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송은 국경 무역을 통해 세폐로 인해 발생하는 재정 지출의 상당 부분을 회수했다. 오히려 국경 무역을 통해 벌어들이는 상세와 관세가 세폐를 상회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을 정도라서 세폐가 문자 그대로의 지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송은 이미 송 인종 연간에 1년 세입이 6000만 냥이 넘었고 북송 말기가 되면 세입이 1억냥에 가까웠다. 서하와의 전쟁으로 재정의 80% 이상을 군비에 쏟고, 그러고도 이기지 못한 경험이 있는 송 입장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매년 75만 5천냥을 지불하는 것은 엄청나게 저렴한 것이었다.
또한 세폐는 전쟁 억제재로도 기능했다. 요는 30만 냥의 세폐를 국가발전과 세금감면에 투입했는데, 송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재정 누수와 혼란이 벌어지고 인민이 세금 증액과 전쟁세의 압박을 받게 되어 자칫 잘못하다간 민란이 터질 수 있었다. 그래서 요는 세폐의 중요함을 알아서 송의 사신이 방문하면 지방관들이 영접하고 공손히 예를 취하도록 지시하고 송의 사신단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사신단에게 돈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만약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참하도록 했다. 물론 요는 군사적으로 송을 압박해 영토나 세폐의 증액, 정탐, 명분상에서의 이득을 취하기는 했으나, 세폐가 끊기는 것은 바라지 않아서 실제로 전쟁을 일으킬 의사는 없었다.
서하는 호전적인 군주인 이원호가 등극한 뒤부터 수년에 걸쳐 송과 전쟁을 벌였다. 이원호는 10만의 병력으로 100만에 가까운 송군을 몰아붙였으나, 기나긴 전쟁으로 영토가 피폐해지고 아버지 이원호가 받던 14만냥의 세폐와 송과의 무역이 끊겨서 약탈한 물자로도 국가를 부양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결국 송과 서하는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화를 체결하고 이원호는 아버지가 받던 14만냥의 세폐를 25만 5천냥으로 증액하는데 성공했다.
전연의 맹으로 평화를 이루기는 했지마는 요와 서하 같은 군사 강국들이 장성 이남에 진출해 장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송은 국가 안보를 위해 국경과 수도권에 대군을 상시 주둔시켜야 했다. 고질병인 문치주의로 인해 유능한 장교단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도 있어서 송은 병력 증강을 추진하였으나, 강병을 자랑하는 요와 서하와 비교하면 병력의 질이 영 좋지를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이들도 기본적인 국력과 인구면에서 압도적인 송을 아예 멸망시킬 수는 없어서 3자 간의 균형이 이루어졌다.[4]
전연의 맹으로 이뤄낸 평화 덕분에 송과 요는 사절교환과 무역 등을 활발히 벌였고 송 뿐만 아니라 요 역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실제 이 평화는 여요전쟁과도 엮여 한바탕의 소란이 일어난 뒤부터 동북아는 100여년의 평화를 누렸다.[5] , 이 평화는 1125년에 송이 금과 손잡고 쇠퇴하던 요를 협공해 요을 결국 멸망시킴으로써 깨지게 된다. 그리고 금을 끌어들여 연운 16주 전체를 회복하려던 송은 금과의 관계 악화와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정강의 변이 일어나 개봉이 함락당하고 회수 이남으로 남천하는 비극을 겪었다.
[1] 당시 송은 연운 16주 중 막주와 영주, 즉 요에서 관남 10현이라 부르던 지역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거란은 관남을 수복하여 연운16주 전체를 차지하려 했고 송은 관남을 필두로 연운 16주 전체를 되찾으려고 했다. 이에 Christian Schwarz-Schilling은 비단 20필과 은 10만냥이 관남에서 거둘 수 있는 토지세를 대신한 것이라 주장했다.[2] 송은 건국 초기부터 석경당이 요에 내준 연운 16주를 빼앗으려 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2번 출정했는데 2번 다 실패한 것. 그리고 이 맹약으로 송은 연운 16주를 못 찾게 되어 좀 아쉬웠을 것이다.[3] 송사에서는 요 성종이 송 진종을 형으로 부른다고 되어 있으나, 요사에서는 송 진종이 요의 예지황후를 숙모라 부른다고 되어 있다. 양측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하고 인민들에게 선전했던 것이다.[4] 참고로 서쪽에서 3자균형을 이룬게 송, 요, 서하였다면 동쪽에서는 송, 요, 고려였다.[5] 이때 고려와 송은 요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 친하게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