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부흥운동

 




[image]
1. 개요
2. 약사
3. 목록
3.1. 후발해
3.3. 연파국
3.4. 올야국(오사국)
3.6. 고욕국
3.7. 대발해(대원국)
4. 소멸
5. 괴뢰국
5.1. 동란국
6. 고려와의 관계
7. 한국사
8. 평가
9. 발해부흥운동을 기록한 역사서
10. 유사사례
11. 같이 보기


1. 개요


渤海復興運動
926년 ~ 1116년
926년 거란족 국가 요나라발해의 부여부와 상경용천부를 타격하며 발해를 붕괴, 멸망시킨 이후 요나라에게 정복당한 만주 일대에서 발해 계통의 반요 세력들과 발해의 후계 왕조들이 여러 번 등장한 것을 일컫는 용어이다.
결국 장기간 존속에는 모두 실패했고 한국에서는 사료도 부족하면서 이 시기에 대해 별 관심도 없는 편이고 족보도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연구가 제대로 안 된 시대다. 일단 산발적인 반란이 아닌 나름의 국가 체제를 이룬 듯한 후발해, 오사국, 정안국부터가 중구난방이다. 심지어 1998년에 몽골에서는 발해 멸망 이후 발해 대씨 왕실과 지배층, 유민의 일부가 '서발해'(西海復)라는 왕국을 세웠다는 논문도 나왔을 정도였다. 이 문서의 서술 내용도 구체적인 존속 기간 등의 정보를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이 좋다.

2. 약사


'''국명'''
'''존속 기간'''
[1]

후발해
926년 ~ ?년
'''정안국'''
938년 ~ 986년2대 48년
연파국
975년 ~ 995년1대 20년
올야국[2]
995년 ~ ????년
흥료국
1029년 ~ 1030년1대 1년
고욕국[3]
1115년 2월 ~ 7월1대 4개월
대발해(대원국)
1116년 1월 ~ 5월1대 4개월

3. 목록



3.1. 후발해


발해가 멸망한 926년 이후에도 929년 5월에 고정사(高正詞)가 발해 사신으로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파견되는가 하면, 송대(宋代)에는 ‘오사성발해왕(烏舍城渤海王)’이란 칭호가 공식적으로 송나라에서 사용되어 후발해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오대(五代) 및 송대에 외교 활동을 벌였던 ‘발해’를 ‘후발해(後渤海)’ 또는 ‘오사성발해(烏舍城渤海)’라 부른다. 자료 부족으로 후발해의 건국 연대 및 지속 기간, 그리고 권력 기구 및 통치 세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견해들 모두 후발해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있다.
중심지는 후발해·정안국이 모두 자리잡은 압록강 유역으로 비정하기도 하고, 과거 발해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지역 혹은 옛 부여부(扶餘府)에 가까운 곳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후발해의 발전은 군사·외교적인 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발해 멸망 직후 발해왕의 동생이 옛 수도 상경용천부를 포위하였으며 975년 거란에게 반기를 들고 도망 온 발해 유민 출신의 장수 연파(燕頗)와 함께 발해의 옛 부여부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또한 발해의 옛 장령부(長嶺府) 지역이었던 휘발하(輝發河: 回跋河) 유역에서의 싸움에서도 원군 7천명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979년경에는 정안국의 일부 세력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한편, 외교적인 면에서는 고정사, 성문각(成文角) 등을 후당에 7차례나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발해와 중국과의 관계는 954년 7월 발해 호족〔酋豪〕 최오사(崔烏斯) 등 30인이 후주(後周)에 귀화했던 기록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의 후발해는 주로 내정과 거란과의 관계에 관심을 쏟았던 것 같다.
후발해인들은 주변 국가로 정치적 망명이나 이주도 했다고 생각되는데, 934년 고려에 내투한 대진림(大陳林)과 938년에 내투한 박승(朴昇) 등과 같이『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는 ‘발해’인들의 상당수도 후발해인일 개연성이 크다.
그 존속 혹은 멸망 시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일본의 학자인 와다 키요시(和田 淸)는 후발해의 중심을 압록강으로 보며 후발해의 뒤를 이은 정안국(定安國)을 별개로 보고 정안국의 건국 시점인 938년 무렵까지인 10여 년간 존속했다고 보고 있다.
다음으로 또 다른 일본 학자인 히노 카이사부로(日野 開三郞)는 후발해에서 정안국으로 바뀐것이 아니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대광현과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4]를 중심으로 한 '대인선의 동생',[5] 즉 '대광현의 숙부'가 있었고 두 세력의 갈등관계에서 대광현이 패배하여 934년 고려로 망명하였고 이후 오사성를 거점으로 한 올야(兀惹) 정권이 후발해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 남해부의 열씨 정권이 대광현의 공백을 틈타 압록강에 정안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동란국이 요양으로 이동한 까닭도 후발해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올야정권이 거란(契丹)의 공격으로 붕괴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후발해의 멸망을 1007년으로 보고있다.
발해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1003년경에 후발해가 소멸되었다고 보거나 북한의 학자인 박시형은 요사(遼史)에서 1114년경에 올야, 성주, 빈주, 양주등이 여진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으로 그 소멸 시기로 보고 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발해유민들이 살던곳으로 추정된다. 1115년 금나라가 세워졌지만 곧 1116년에 요동에 대발해가 세워졌기 때문에 전혀 가능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박시형 역시 후발해의 중심을 오사성으로 보고 있다.남한의 학자인 이용범은 와다 키요시의 견해를 따르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한국사》에도 후발해를 10여 년간 존속한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 한규철은 고려사에 기록된 1050년경을 후발해의 멸망으로 보고있다. 그 이유는 발해 멸망후 많은 발해 유민들이 거란,여진으로 불려왔고 11세기 까지 발해인의 정체성을 유지한 이들은 발해의 후속 국가소속의 유민들이기 때문이다. 1029년과 1030년 사이에 내투한 발해인들은 흥료국의 실패로 내투한것이고, 1116년 내투한 발해인들은 대발해의 실패로 내투한 이들이다. 그래서 1050년 고려로 내투할때 스스로 발해인이라 한 이들은 후발해인들일 것이고 흥료국, 대발해와 관계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내투한 시점을 후발해의 멸망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1114년경에 여진에 들어갔다는 올야, 성주, 빈주, 양주등은 후발해의 잔당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중에 보면 또 이런 설도 있는데 일부 중국책[6]에는 1114년또는 1115년에 금나라가 세워지면서 후발해가 망했다고도 하는데, 후발해가 1114년에 망하고 일부 발해 유민들이 다시 대발해를 세웠다가 금이 발각하여 항복하거나, 금이 무너트렸다는 설도 있다.

3.2. 정안국



2대 48년정도 지속된 발해부흥운동의 국가 중 하나이다. 928년에 옛 고구려의 수도였고 발해의 주요도시였던 국내성(國內城) 지역에서 정안국(定安國)이 건국되었다. 정안국도 후발해(後渤海)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세력을 갖췄으나 결국은 요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로 전락, 결국 986년 요가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여요전쟁)을 계획하면서 중간에 끼어 있던 정안국은 장애물 없애는 겸해서 없어지고 만다. 정안국의 멸망과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시점이 맞물리기 때문인지 한국사 교육과정에서는 발해의 후계국가 중 유일하게 간단히라도 언급되는 나라다.

3.3. 연파국


燕頗國. 정식 국명이 아니며 연파라는 장수가 부여부에서 항거를 일으켰다. 그 후 그곳에서 세력을 키워서 반란을 하다가 995년 올야에 도망친 뒤 올야국과 함께 거란에게 저항했다고 한다.

3.4. 올야국(오사국)



일본 학자인 히노 카이사부로(日野 開三郞)는 발해 멸망이후 존재했던 후발해(오사성발해왕: 烏舍城渤海王)에서 정안국으로 바뀐것이 아니라 오사성를 거점으로 한 올야(兀惹) 정권이 후발해를 차지했다는 설을 내놓았다.
반면 중국 학자인 량위둬(梁玉多)는 올야국과 정안국을 같은 세력으로 보고있다. 올야족이 발해 멸망후 반거란 투쟁으로 정안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송은 정안국을 인정했지만 거란은 이를 인정하지 않아 정안국이 있음에도 올야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올야(정안국)의 중심지는 상경용천부와 가까운 수분하의 중상류지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히노 카이사부로, 박시형, 한규철과 같은 다른 학자들과도 비슷한 견해다.

3.5. 흥료국



세월이 지나 발해 왕족이었던 대연림(大延琳)은 1029년 8월 3일, 요나라의 제2도시인 요동의 동경(東京) 요양부[7]흥료국(興遼國)을 거란과 전면으로 맞선 발해부흥운동을 벌였다.

3.6. 고욕국


역시 정식 국호가 이니고 요나라의 내몽골에 위치한 요주(饒州)[8]에서 고욕(古欲)이 발해유민들과 발해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스스로 대왕(大王)을 칭했다. 그러나 5개월만에 실패하였다.

3.7. 대발해(대원국)



이즈음에 발해부흥운동이 몇 차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거란 반대 운동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그나마 좀 성공한 운동으로는 "대발해국"이 있는데, 1116년 1월에 고영창이 8천명으로 동경 요양부를 점령하고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이를 대원국(大元國)이라고도 한다.

4. 소멸


발해부흥운동은 주로 요나라 시기에 지속되다가 흑수말갈이 바탕이 된 금나라의 건국과 함께 이들이 발해 유민들을 포용 / 이주하면서 사라졌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특히 마지막 부흥운동인 대원국이 요말금초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초기의 금은 발해 유민을 포용하였다. 이는 완안아골타가 "발해와는 본시 동일한 집안"이라고 말한 데서 근거한다. 그 결과 고영창의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상당수의 발해인들은 금나라 건국에 협조하였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 원해서 협력했다기보다는 2세기 가까이 일으켜왔던 부흥운동들이 모두 실패하면서 생긴 환멸로 인하여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발해인들은 멸망 이후 200여년 가까이 부흥운동을 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공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알려진 것 중에서는 50년 가까이 유지된 정안국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거란의 탄압은 더더욱 심해졌고, 그에 따라 생계에 어려움까지 겪고 있었다.[9] 게다가 실패이후 거란은 발해인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부흥운동에 연관된 발해인들을 거란 내지로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그나마 요동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던 발해인들도 모든 기반을 잃어버리고, 후에 발해인들을 이끌 지도자급 인재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흩어져버린다.
결국 이 같은 요나라의 지속적인 강경책은 발해인들의 응집력을 악화시킨다. 물론 이는 요나라의 멸망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만 되려 요금교체기 때 발해인들이 부흥운동세력, 친거란세력, 친금세력, 반요세력 등으로 분열되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를 못살게 하는 요나라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냐, 나라를 세우는 것이 우선인가로 나누어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고욕의 항쟁, 요양에서 일어난 고영창의 대발해국 등의 부흥운동파가 우세했었지만 오래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나면서 결국 발해인들은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우선 목표를 수정하게 된다. 하지만 발해인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똑같이 요나라를 멸하고자 했던 여진족의 금나라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두 세력은 결국 손을 잡게 된다.
그러나 이런 포용은 금태조 때만 있었다. 결국 금은 건국 초기 발해 유민을 북송 공격군의 선봉으로 활용하다가[10] 이후 1141년 맹안모극 집단에서 배제하여 거란, 여진과 달리 한족과 동일 취급하고 산동으로 이주되었다.[11] 하지만 발해유민들 중 금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금의 중앙정치에서 활약하였다. 그 결과 황제의 어머니를 배출하기도 하였다.[12] 하지만 두 황제에 걸쳐 외척이 발해인이었기 때문에 금장종이후 점차 중앙 정계에서 발해인들이 밀려났다. 또한 발해 유민들은 금세종 때는 한족과 함께 형사취수를 금지하고 삼년상을 강요하며 양자 제도를 불허하는 등 철저하게 한족 취급당했다.
당시의 상황은 당대 사료인 송막기문 발해국에 꽤 자세히 나와있다.
그렇지만 발해부흥운동이 소멸한 이유는 몽골의 침략이 결정적인 원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려에서도 대몽항쟁 이전까지 삼국의 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여몽전쟁을 겪으면서 그러한 의식들은 모두 소멸해버렸다. 금나라에 있던 발해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몽고와의 전쟁을 겪고, 금나라 멸망 이후에는 송나라 정벌에 몽고군의 일부로 동원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발해인들의 민족의식도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진족 같은 경우는 중원으로 가지 않고 만주 산림지대에 남은 여진족들도 상당수가 있었기 때문에 후에 다시 나라를 세우는데 성공한다.
허나 이때 죄다 한족에 동화된 것만은 아니라서 명나라 초기까지도 발해인 관련돼서 기록이 나왔었고 금나라가 멸망한 뒤로 심왕 자리에 고려 왕족이 내정되었다는 기록이나 요동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 그래도 조선초기까지도 요동에 예맥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많이 살았다는것을 추론할수있다.(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그 시절 그곳에 살았던 고려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비단 그 이전 살았던 이들 뿐만 아니라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끌려온 포로들과 이후 원간섭기 시절 고려와 원나라의 착취에 못이겨 도망온 유민들도 있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당시 한반도 남반부를 휘저으며 침탈했던 왜구들의 준동으로 인해 끝내 요동 복속에 실패하면서 요동을 명나라가 차지하였고, 고려를 뒤엎고 일어난 조선은 명에게 조공을 하면서 항쟁을 중단했기에 결국 랴오닝 성 일대는 현재까지도 중국의 영토로 남아있게 되었다.

5. 괴뢰국



5.1. 동란국



이름의 뜻은 동쪽에 있는 거란의 국가로 발해부흥운동의 일부분이 아닌 거란의 괴뢰국쯤 되는 국가이다. 그러나 신동준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괴뢰국이 아니라 준 독립국 수준으로, 감로(甘露)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고 외국과의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발해 유민 190만여명이 살았다고도 하며 동란국 외교 사절이 거란을 욕했다는 기록도 있고[13] 일본과도 발해 때처럼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거절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6. 고려와의 관계


동족인 발해 부흥운동들을 지원하지 않은 고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당시 상황을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다. 당시 고려의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태조 사후에도 혜종, 정종 등 후대 왕들이 재위기간 5년을 못 넘기고 죄다 요절했던 데다가 왕건의 호족우대정책으로 왕권이 불안정했고, 고려의 중앙제도나 군사제도 등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원군 파병은 어림도 없었다. 그나마 4대 왕인 광종이 호족들을 정리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동족이라 마음이 걸렸는지 흥료국을 지원하거나 정안국과 통교하고 이들과 연합해 요나라에 대해 군사공격을 감행하는 등 어느 정도는 노력을 했다. 게다가 이들 나라를 신경쓰느라 고려는 요나라와 세 차례 치열한 전쟁을 해야 했다.
사실 많은 발해 후계국이 건국되었지만 외교관계성립을 위한 고려의 노력은 없었다. 여요전쟁 이후 고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거란은 요성종의 죽음 이후 정국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에 당시 고려의 국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발해 유민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발해부흥운동을 안정적인 국제 정세를 어지럽히는 반란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고려는 발해부흥운동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발해 왕족이나 귀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받아주고 고려에서 왕실 제사를 지내게 해주거나, 왕씨 성을 하사하는 선에 머물렀다. 이러한 고려의 보수적인 대외정책은 금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각각 거란과 금나라, 북송의 지원군요청과 화친요청, 책봉제의를 거절하고 사태를 관망하였다는 점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여진족이 발해 구성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발해부흥운동의 성공은 곧 고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여진족의 이탈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장 흥료국이 세워지자 동쪽과 북쪽의 여진족들이 합류하였고, 금태조가 발해와 여진은 같은 집안이라고 언급하였다. 고려는 여진족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거란의 견제를 받았으며, 거란이 혼란스러워지자 많은 여진부족들이 고려에 내부 혹은 귀화하여 기미주를 자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부흥운동의 성공으로 발해가 다시 건국된다면 북방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을 상실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고려의 입장에서 발해부흥운동의 성공이 반가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는 발해와 '친척의 나라'였으되 '고구려 계승'이 정체성인 왕조였기에, 발해 유민의 편입은 어디까지나 자국 밑으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발해가 일찍 멸망한 탓에 발해와 고려의 외교관계는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는데 만약 발해가 망하지 않거나 발해부흥운동이 성공했어도 서로 고구려의 적통의 정체성을 지닌 발해와 고려 양국 관계가 미묘해졌을 것이다. 별다른 접촉이 없던 발해와 신라 간의 관계보다는 나았겠지만, 천리장성혹은 청천강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발해 후계국이, 남쪽에는 고려가 위치하여 흡사 남북국시대의 연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7. 한국사


한국 국사 교육에서는 여요전쟁 직전 부분에서 정안국을 살짝 언급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교육되지 않는데 이는 사실상 고려후삼국시대 통일과 일부 발해 유민들의 투항을 계기로 고려를 실질적인 한국사의 통합이라고 보려는 역사관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려에 투항한 일부 발해 유민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발해 유민들은 한반도와 관련없는 쪽으로 흘러간 '곁가지' 로서 대다수 거란, 여진족, 몽골,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기에 특별히 더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보이며, 따라서 한국 내에서의 인지도도 낮다.
발해멸망 후 발해부흥운동의 전개과정과 금나라의 건국과정에서 신라계의 관여 등 한국사적으로도 연구과제가 많은 부분이다. 만주일대의 한반도계 민족의 역사가 발해 이후 알 수 없이 단절되기 때문인데, 분명 그 지역의 혈통적, 문화적 승계가 이뤄졌을텐데도 발해 멸망을 기점으로 한국사에서 제외되어버리는 점이 의아하면서 아쉬운 부분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사관이 소중화사상에 기초해 여진족을 오랑캐 취급하면서 민족적, 문화적 동류임을 적극적으로 부정했던 점 또는 조선후기에 여진의 후금이 청으로 중국을 차지하며 조공관계에 놓이자 해당 역사를 감히 민족사로 끌어올 수 없는(만주지역을 봉금한 점도 고려할 때) 사상적 배경에 한계가 있던 점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발해부흥운동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오히려 고구려부흥운동,[14] 백제부흥운동,[15] 신라부흥운동[16]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만큼이다.

8. 평가


우리 역사에서 발해 운동이 의미를 가지는 부분은, 삼국시대로 대표되는 고구려백제, 신라의 부흥운동보다도 더 치열하고 더 오랜 기간동안 매우 끈질기게 일어났던 부흥운동이라는 것이다. 부흥운동 사례 가운데 고구려부흥운동 같은 경우 멸망 후 약 30여년만에 대신 고구려의 국통을 잇는 새 왕조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발해부흥운동은 거의 190여 년 동안 지속된 매우 장기적인 투쟁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 자체는 매우 길고 끈질겼는데, 그 원동력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피지배층 다수의 말갈인과 소수의 지배층 고구려인이 지배하는 발해의 사회로는 이러한 발해부흥운동은 도저히 해석이 안된다. 요사에 기록된 발해인과 말갈인이 원수지간이라는 말에서 여기서 지칭하는 말갈인들은, 일찍이 발해 건국의 주체로 참여한 속말부와 백산부 말갈이 아니라 선왕대에 새로 편입된 흑수부와 기타 연해주의 퉁구스 계열 말갈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요즘 학계에서는 피지배층 대다수가 고구려인이 아니라 말갈인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학자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차라리 대조영의 출신 성분에 관한 논란이 있을지언정, 피지배층 상당수도 기존에 만주 지역에 살던 고구려인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꾸 후대의 관점으로 이 시기를 바라봐서 착각과 오류가 생기는 것인데, 발해의 수도 지역인 두만강 일대는 고구려 시대 때부터 천년 넘게 예맥 계통의 민족들 즉 한국인의 조상들이 또한 살던 곳이다.
즉, 발해의 수도 지역 두만강과 그 일대는 발해 전성기 시절에도 이미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계 주민들이 다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피지배층으로서의 말갈인들'은 아마 예맥화된 말갈인들뿐만 아니라 선왕 대에 새로 편입된 연해주와 아무르강 일대의 퉁구스 계열 흑수부 말갈인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게다가 위의 금나라 시절의 사료를 확인하면 애초에 금나라의 여진족들은 발해인들을 이질적인 집단으로 취급하며 차별하였다. 만약 발해의 피지배층 상당수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금나라의 여진족과 동류의 집단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즉, 발해 주민 상당수는 엄연히 고구려-발해인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이토록 길고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끈질기고도 긴 항전을 계속했는데도 실패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1.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결국 한때 같은 식구였던 여진족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인데, 이미 선왕 시절의 복속으로 서로 원한 관계가 깊이 지속되었다는 것이 기록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진족들은 당연히 금나라의 조상인 흑수부 말갈 계열의 여진일 것이다.
  2. 각 부흥운동 세력간의 통합적인 전선 구축이 안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지도에서도 보듯 이곳저곳에서 부흥운동이 시간차로 일어났지만 결국엔 통합되지 못하고 와해되고 만다. 고구려 부흥운동 당시 대조영과 같은 통합적 리더십을 가진 걸출한 인물이 필요했을 텐데 아마 그런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위의 이유와 연계되는 설명인데, 남쪽에서 같은 동류 집단인 고려가 지속적으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한 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던 곳을 떠나 다른곳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산이 풍부한 귀족층들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고려가 흡수한 발해인들은 아마 상당수가 발해의 엘리트 계층들 즉 핵심 인적 자원들이었을 것이며, 위에서 발해부흥운동이 대조영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지 못한 것도 고려로 이미 유능한 인재풀들이 많이 유출되었던 게 원인일 수도 있다.
  4. 마지막으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부흥운동을 막은 거란족요나라, 여진족금나라의 존재들이다. 중원에 근거를 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세력이 퇴조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이 성공하여 발해를 건국시킬 수 있었던 반면, 발해와 더 가까운 내몽골-만주에 근거지를 둔 요나라, 금나라는 더 강한 압력으로 발해의 부흥을 저지했다.
이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실제로 내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 식의 분석에 그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발해부흥운동 역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안이니만큼 앞으로 관심있게 지켜볼 만한 사항이다.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여진족 부흥의 실마리를 찾을 커다란 단서가 될 수도 있는 만큼,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9. 발해부흥운동을 기록한 역사서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요사
  •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17]

10. 유사사례



11. 같이 보기


[1] 요의 괴뢰국이라는게 통설[2] 兀惹國. 발해계 귀족 오소경이 발해의 고도가 위치한 상경용천부 주변에서 일어났다. 오사성 발해국 혹은 오사국이라고도 불린다. [3] 古欲國. 다만 한국사로 보기에는 좀 애매하다. 발해부흥운동이고 고욕을 비롯한 발해 유민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발해의 옛 땅이 아닌 내몽골에 위치한 거란의 한 주에 일어났던 반란이었기 때문[4] 히노 카이사부로, 박시현, 이용범, 한규철 같은 학자들은 발해 멸망후 이곳을 오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5]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6] 요사.[7] 당연히 일본 도쿄가 아니다.[8] 발해의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다.[9] 실제로 대연림의 부흥운동 또한 막대한 세금부과로 인하여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된 발해인들의 반발을 기반으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었다[10] 이는 여진이 거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랬다. 여진인과 발해인이 서로 원수였기 때문이다(거란국지 1116년 기사).[11] 물론 금 건국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딱 한번 일어나기는 했다. 발해의 옛 정리부에서 항쟁을 일으킨 적이 있다.[12] 해릉왕금세종의 어머니가 발해유민이었다. 하지만 해릉왕과 금세종이 쿠데타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어머니는 추존황후들이다.[13] 옛 발해인이었기 때문이다.[14] 검모잠, 고연무, 고안승, 걸걸중상, 대조영 등이 주도. 이쪽은 결국 성공했다. [15] 부여풍, 흑치상지, 복신, 지수신 등이 주도.[16] 신라 왕조가 멸망한 이후 고려 시대 초, 중기 때 옛 신라 지역인 경상도 일대에서 신라 부흥을 내건 몇번의 반란, 봉기들(동경민란, 김사미, 효심의 난 등)이 존재했다. 일각에서는 신라 부흥이라는 명목을 앞세워 일으킨 민란이란 반론이 있으나, 어차피 모든 부흥운동의 대부분은 멸망당한 옛 왕조의 유민, 백성들이 일으키는 민란에서 시작한다는 전제를 대단히 무시하는 일방적 견해일 뿐이다.[17] 김육불(金毓黻) 저, 화문서국(華文書局), 1934년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