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colbgcolor=#94153E> '''윤선도
尹善道 | Yun Sun-do
'''
'''출생'''
1587년 7월 27일[1] 조선 한경 동부 연화방[2]
'''사망'''
1671년 7월 16일[3] 조선 전라도 해남군 보길도
'''호'''
고산 또는 해옹
'''직업'''
시인, 정치가, 학자
'''붕당'''
'''남인''']] (1575 - 1671)
'''시호'''
충헌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작품
5. 원림
5.1. 수정동 원림
5.2. 금쇄동 원림
5.3. 부용동 원림
6. 풍수지리
6.1. 산릉의〔山陵議〕
6.2. 고산 윤선도 묘소
6.3. 명지관 이의신과의 관계
7. 의학
8. 사후
9. 참고문헌


1. 개요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조 문신이며 시조작가. 서울 출생. 본관(本貫)은 해남(海南). 휘(諱)는 선도(善道)이며, 자(字)는 약이(約而)이다. 호(號)는 고산(孤山)ㆍ해옹(海翁).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예빈시부정을 지낸 윤유심(尹惟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윤유기(尹惟幾)의 양자이다. 예조참의의 벼슬을 하였으며,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광해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얼신(孼臣)인 이이첨과 그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집권세력이 저지르는 불의를 보면 충분(忠憤)의 상소를 올렸으나, 그들의 무함(誣陷)으로 세 차례나 벽지의 유배지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집권세력인 서인들의 과도한 횡포로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등도 오히려 그를 두둔하고 마지못해 집권세력의 뜻에 동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에게도 출사(出仕)할 기회가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봉림과 인평 두 대군의 사부가 되어 인조의 총애를 얻었을 때였고, 그리고 제자였던 봉림대군효종으로 등극한 후였다. 그때에 여러 차례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으나 당쟁이 치열했던 상황 속에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南人)의 가문에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西人)에 맞서강력하게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정치적 한계를 느껴 더이상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세상의 일상사 마져 뒤로한 채, 사화와 당쟁으로 인해 은거하는 조선의 유학자들의 이상향(理想鄕)인 주희(朱熹)의 운곡기(雲谷記)에 기록된 은일적(隱逸的)인 삶[4]을 찾아 자연에서 유거(幽居)하는 생활로 지냈다.
인적이 없던 깊은 산속인 해남의 수정동문소동금쇄동이나, 바다 가운데인 보길도 부용동의 천석(泉石)이 뛰어난 은거지에 물을 끌어오고, 나무를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자연친화적인 원림(園林)을 조경하여 산수(山水)의 즐겼으며, 그곳에 거문고와 장구, 가무(歌舞)를 배치하여 곡조를 박자에 맞게 익히도록 해서 때때로 듣고 감상하며 자기의 회포를 부치고 답답한 심정을 푸는가 하면,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의 시를 지었다. 시가무(詩歌舞) 합일(合一)이라는 예악사상(禮樂思想)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작용한 것이다.
특히 시조(時調)에 뛰어났다. 산수자연에 의미를 부여하여 시로써 아름답게 표현하고 승화시킨 뛰어난 시인이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 국문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진다. 가사문학(歌辭文學:장가)의 대가인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과 더불어 시조문학(時調文學:단가)의 대가로서 국문학사상 쌍벽을 이루며,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朝鮮)의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했다.
또한 그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경사(經史), 백가(百家)를 읽었으며, 의약(醫藥), 복서(卜筮), 음양(陰陽), 지리(地理)까지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의약에도 뛰어나 내의원에서 수차례 그를 불러 왕과 중궁전, 대비전의 의약에도 참여케 하고, 정적이었던 원두표(元斗杓)의 심한 설사병을 치료해주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효종이 승하하자 능자리를 선정하는 간산(看山)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대왕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융릉[5]으로 옮기면서 그를 가리켜 "오늘날의 '무학'으로 신안(神眼)을 가졌다"라고 칭송하였다.
노년에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효종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서인세력과 함께 복제문제로 효종을 서자 취급하는데에 격분하여 논례소(論禮疎)와 예설(禮說) 2편을 상소했다가 험난한 유배생활을 마치고,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유훈에 따라 그가 생전에 점지해 놓았던 전남 해남 구시리 문소동터에 안장(安葬)되었다.
사후 숙종이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전례(典禮)가 바르게 되고 시비(是非)가 정해져서 송시열이 이미 악당(惡黨)의 우두머리의 죄인으로 처벌받았다. 그러고 보면 비록 윤선도의 관작(官爵)을 회복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저승의 원통함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니, 의정(議政)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 중에 허적이 과중(過重)하다고 하므로, 마침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했다.

2. 생애


정해년(1587, 선조20) 6월 22일 경진 술시에 한경 동부 연화방[6]에서 아버지 윤유심(尹惟深)과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8세 갑오년(1594, 선조27)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惟幾)의 양자(養子)로 들어가서 뒤를 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기뻐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윤의(倫義)와 종사(宗事)의 중함을 생각하여, 양부모를 섬기며 효성을 다하였다. 이에 윤유기가 이르기를 “내가 아들이 없다가 효자를 얻었으니, 나는 여한(餘恨)이 없다.”라고 하였다.
11세 정유(1597, 선조30) 산사(山寺)에서 독서하였는데, 승도(僧徒)가 수륙(水陸)의 큰 재회(齋會)를 베풀자 유자(儒者)와 불자(佛者)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실컷 구경하였는데도, 그 만은 홀로 단정히 앉아 꼼짝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글을 읽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15세 신축년(1601, 선조34) 이미 글을 지을 줄을 알아서 한 편씩 발표할 때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17세 계묘년(1603, 선조36) 남원윤씨(南原尹氏)와 혼인하고, 진사 초시에 합격했다.
20세 병오년(1606, 선조39) 승보시에 연달아 장원급제하고, 향해에도 합격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 《소학(小學)》의 책이 금해졌는데 그가 옛날 서책들을 점검하다가 이 책을 찾아내어 읽어 보고 나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을 만들어 내는 틀이 모두 여기에 있구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이 책을 전공(專攻)하였다.
자기에게 절실하고 내면으로 접근하는 학문에 종사하여, 한마음으로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침잠하여 탐색하면서, 몇 년 동안 반복하여 수백 번을 읽었다. 이로부터 공부가 순일하게 무르익고 의리(義理)가 관통하였으며 문장 실력도 크게 진보하였다.
이에 다시 예전에 읽던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으로 나아가 되풀이해서 공부를 하니, 어디를 대하든 그 이치가 훤히 뚫리면서 과거에 심오해서 풀리지 않던 것들이 모두 얼음 풀리듯 시원하게 이해되었으며, 나아가 의약(醫藥)과 복서(卜筮)와 음양(陰陽)과 지리(地理) 등의 글에 대해서도 모두 능통하여 막힘이 없게 되었다.
22세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여름에 양모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상(喪)을 당하여, 거상(居喪)을 하며 상례를 극진히 하였다.
23세 기유년(1609, 광해1) 가을에 또 생모 순흥안씨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신해년(1611)에 상복을 벗었다.
25세 신해년(1611, 광해3) 비로소 해남에 내려갔다. 선대의 묘소와 옛집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26세 임자년(1612, 광해4) 가을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였다. 이때 소암(疏庵) 임숙영(任叔英)이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는데, 그가 지은 시 모설방고산(冒雪訪孤山)을 보고는 당대(當代) 제일(第一)이라고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반드시 장원(壯元)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험장에 나아갔을 때 그가 지은 글이 수석(首席)이 되어야 마땅했으나, 시험관이 이를 이상(二上)의 제이(第二)의 등급에 놓았으므로 논하는 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이해 겨울에 윤유심이 병들어 눕자, 그가 밤낮으로 병구완을 하며 허리띠를 풀지 않고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 몇 달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그가 청하기를 “서모(庶母)가 몇 년이나 받들어 모셨으니, 지금 와서 어찌 재산을 내려 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윤유심이 말은 못해도 얼굴빛으로 동의하였다. 그가 마침내 종이와 붓을 직접 가져와서 부리던 노비들의 문권(文券)을 작성하여 서모에게 주었다. 그 뒤에 그의 백씨(伯氏)가 넘겨준 노비들 중에 선비(先妣)가 예전에 부리던 자들이 많다면서 다른 비복(婢僕)으로 바꿔 주려고 하였으나 그가 안 된다며 다투었다.
29세 을묘년(1615, 광해군7) 봄에 상복을 벗었다.
30세 병진년(1616, 광해군 8) 세모(歲暮). 이때 광해(光海)의 정사가 혼란한 가운데, 얼신(孼臣:흉악한 신하)인 이이첨(李爾瞻)이 국권(國權)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설득하고 달래고 기만하며, 선량한 사람을 모함에 빠뜨려 해치는가 하면, 널리 패거리를 심어 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면서, 이를 저촉하여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멀리 귀양 보내어 쫒아보내곤 하였다.
그가 충분(忠憤)을 가누지 못하면서 스스로 ‘대대로 국록(國祿)을 먹는 집안에 태어났으니, 지금 비록 아직 벼슬을 하지 않은 처지에 있다고 해도, 차마 군부(君父)가 위태한 것을 좌시(坐視)하며 입을 다문 채 나라를 등질 수는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윤유기에게 편지로 고하고는 항소(抗疏)하되, 정사의 권한이 아랫사람에게 옮겨져서 임금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 민심이 원망하며 이반하고 풍속이 무너졌다는 것, 인사 행정이 공정하지 못하여 과장(科場)에서 사사로운 편의를 쓰는 것 등을 극구 말하였다. 그러고는 이이첨이 권력을 멋대로 휘둘러 정사를 어지럽힌 정상을 차례로 나열하고, 이와 함께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이 용렬하고 나약한 것을 언급하고 나서, 먼저 이이첨이 위복(威福)의 권한을 제멋대로 희롱한 죄를 바로잡아 처형한 다음에, 유희분과 박승종이 임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과 이덕형(李德馨)과 심희수(沈喜壽) 등 여러 원로(元老) 및 홍무적(洪茂績)ㆍ정택뢰(鄭澤雷) 등 상소한 여러 유생들이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잇따라 유배된 일을 말하였는데, 이와 같은 말들이 매우 격렬하고 간절하여 광해를 느끼어 깨닫케할 기대를 갖게 하였다.
광해(光海)가 그 소(疏)를 내려보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모두 이이첨을 두려워하여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원(政院)과 삼사(三司)와 관학(館學)이 이이첨의 속뜻에 영합하여 한목소리로 날조하여 무함하되, 당역(黨逆)이 현인(賢人)을 함정에 빠뜨려 김제남(金悌男)을 위해 옥사(獄事)를 뒤집어엎으려 한다는 죄목으로 논하였다. 광해는 서두르지 않고 있다가 상소가 빗발치자 마침내 그를 경원(慶源)에 안치(安置)하였다.
그가 명을 듣고는 태연히 행장을 꾸려 출발하려 할 적에, 종실(宗室)인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과 귀천군(龜川君) 이수(李睟) 등이 소(疏)를 올려 이이첨의 죄악을 논하고, 또 말하기를,
“윤모(尹某)가 상소한 것은 충직(忠直)하니 죄를 주면 안 된다.”
하였으므로, 그들도 남해(南海)에 안치되었다. 그가 금산(錦山)에게 말하기를,
“저번에 내가 소를 올릴 적에 공이 내가 위기를 자초한다고 깊이 염려하여 탄식하면서 나를 경계하였는데, 공이 어찌하여 또 이런 일을 하셨단 말이오.”
하니, 금산이 웃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기상(氣象)이 침착하고 덤비지 않는 것이 전혀 멀리 귀양 가는 사람 같지 않소.”
하였다.
그가 귀양갈때 홍원(洪原)에 이르니 조생(趙生)이라는 기생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맞이하면서 "내가 벌써부터 영감의 이 행차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가 시를 지어 사례하기를,
내 일이 진실로 제 때가 아닌데
너는 알았지만 나는 알지 못하였네.
글을 읽었으나 너만 못하니
나야말로 천치로다.
하였다.
31세 정사년(1617, 광해9) 2월에 그는 비로소 경원(慶源)의 배소(配所)에 도착하였다. 경원은 함경북도에서도 가장 변방인 바닷가에 위치하여, 경성(京城)에서 2천여 리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풍토와 기후가 완전히 다른 데다가 먹고살 길이 또 막막하였는데, 그는 잡곡밥과 나물국을 먹으면서도 태연히 거처하며 오직 문을 닫고 글을 읽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리고 때때로 산언덕과 골짜기를 소요(逍遙)하면서 노래를 읊으며 회포를 위로하기도 하였는데, 나라를 걱정하고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이 미상불 시구(詩句) 사이에 드러나곤 하였다.
32세 무오년(1618, 광해10) 겨울. 이때 많은 선비들이 당시에 일어난 일를 말하다가 북쪽으로 유배를 당했는데, 이이첨이 이것마저도 불쾌하게 여기고는 말하기를 “북쪽으로 귀양 간 사람들이 호지(胡地)에 가까이 있는 만큼 필시 오랑캐와 내통할 것이니, 모두 남쪽 변방으로 옮겨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도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이배(移配)되었다.
33세 기미년(1619, 광해11) 여름에 양부 윤유기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예법을 초과하여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였고, 빈소(殯所)에 있지 않다고 해서 거상(居喪)하는 상례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제수(祭需)를 갖추어 보내 제사도구에 진설하게 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지극히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니, 보는 자들이 슬퍼하였다.
이때에 부처(付處) 이상의 형벌에 대해서 속금(贖金:돈으로 속죄하는 것)하는 영(令)이 있었으므로, 경성에 있는 그의 서제(庶弟)가 그를 위해 그 일을 도모하려고 하였는데, 그가 그 소식을 듣고는 만류하며 말하기를 “의리상으로도 감히 하지 못할 점이 있을 뿐 아니라, 재력(財力)도 거기에 미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또 자처(自處)하는 것을 너무 고생스럽게 한다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의리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감히 자신(自信)하지 못하지만, 고락(苦樂)에 대해서는 서로 견주어 살필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37세 계해년(1623, 인조 원년) 3월에 인조가 반정(反正)을 하고 나서 갇혀 있던 죄수를 크게 석방하여, 그도 귀양살이 7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금오랑(金吾郞: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으로 부름을 받고 경성에 돌아와서, 비로소 관찰공 윤유기의 묘소에 달려가 곡하였다. 얼마 뒤에 벼슬을 그만두고 해남(海南)으로 돌아왔다.
조정이 광해조에서 그가 절조를 세운 것을 중시하여 장차 차서(次序)를 뛰어넘어 뽑아서 쓸려고 하였다. 그러자 시의(時議)가 또 그의 상소문 중에 김제남(金悌男)과 관련된 말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는데, 상공(相公) 장유(張維)와 상공(相公) 김류(金瑬)만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그 말은 말의 흐름상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니, 어찌 그 말을 가지고 이 사람의 허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형가(荊軻)는 연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고 살아 있는 번오기(樊於期)에게 머리를 달라고 했는데, 윤선도는 간신 이이첨을 죽이자고 청하였거늘, 도리어 죽은 김제남을 아끼는가?”
하니, 말하던 사람이 그제서야 중지하였다.
40세 병인년(1626, 인조4) 11월 안기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41세 정묘년(1627, 인조5)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이 병량소모사(兵糧召募使)로 영암(靈巖)에 진주(進駐)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렀다.
사포서 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그만 두었다.
42세 무진년(1628, 인조6) 봄에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시험관 이조판서 장유(張維)가 그의 책(策)을 보고 "동국제일책(東國第一策)"이라고 감탄하였다.
인조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를 문관(文官)과 음관(蔭官) 가운데 으뜸가는 사람 중에서 뽑으라고 명하였는데, 그가 제1인으로 천거되어 제수를 받았다. 장유의 특별 천거가 있었다.
그는 강학청(講學廳)에 나아가 상에게 아뢰어 《소학(小學)》을 먼저 가르치게 해 달라고 청하고는 마침내 그 과정을 엄하게 수립하였다. 그리고 그 규모(規模)와 차제(次第)는 일체 고인(古人)의 성법(成法)을 준수하여, 힘써 격물치지(格物致知))와 함양(涵養)을 위주로 하였다.
이전에는 대군(大君)이 암송을 할 때마다 비록 불통(不通)에 해당하더라도 사부가 된 자가 감히 정직하게 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매번 서과(書課)에 정직하게 쓰고 숨기는 법이 없었다. 환관(宦官)이 “불통일 경우에는 상이 반드시 회초리를 든다.”라고 하였지만, 그는 이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마다 궁노(宮奴)가 반드시 궁문(宮門) 밖에서 그를 시중들곤 하였는데, 언젠가 하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그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은 병이 나서 강의를 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돌아갔는데, 봉림대군이 이 사실을 알고는 궁노를 불러다 곤장을 쳤다. 그가 사도(師道)로 자처하며 경례(敬禮)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봉림대군이 한번은 당시(唐詩) 1책을 보내어 그에게 교정(校定)해서 선별(選別)하도록 하였다. 그가 그 시권(詩卷)의 맨 처음에 차일장혼음(此日長昏飮)의 시와 일리양조채(日裏颺朝彩)의 시 두 수가 실려 있는 것을 보고는, 글을 올려 답하기를,
“시(詩)라는 것은 성정(性情)을 읊조리며 정신(精神)을 유통(流通)시키는 것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법칙에 관계가 있는 시는 읽으면 행하는 데에 유리한 이익이 있고, 사람의 속성과 사물의 정태(情態)를 잘 말한 시는 보면 식견이 늘어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만, 악을 경계하기에도 부족하고 선을 본받기에도 부족한 것들은 모두 정자(程子)가 말한 쓸모없는 언어라고 할 것이니, 본시 볼만한 가치도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이 시권(詩卷)의 맨 처음에 나오는 절구(絶句) 두 수 중에 하나는 방탕에 흘러 돌아갈 줄 모르는 뜻이 들어 있고, 하나는 재능을 과시하며 출세하려고 안달하는 마음이 들어 있으니, 어찌 책의 첫머리에 두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그러나 가령 정부(貞婦)와 충신(忠臣)의 심사(心事)를 모사(模寫)하고, 붕우(朋友)와 형제(兄弟)의 정사(情思)를 곡진히 표현한 것과 같은 작품들은 자못 의미가 있어서 모두 음영(吟詠)할 만한 것들이니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43세 기사년(1629, 인조7) 겨울에 임기가 만료되어 자리를 옮길 때가 되었는데, 인조는 ‘윤선도가 마음을 다해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행실과 일 처리도 사표(師表)에 실로 부합된다.’라고 생각하고는, 비록 다른 관직으로 옮기더라도 다음 해까지는 겸직(兼職)하게 하라고 이조(吏曹)에 명하였다. 공조좌랑에 올랐다.
이로부터 누차 벼슬을 옮기면서도 모두 궁사(宮師)를 겸대(兼帶)하였는데, 기한이 차면 그때마다 다시 임명하곤 하였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5년에 걸쳐서 성의를 다해 가르쳐서 이끌 수 있었다. 인조가 그를 돌보는 뜻이 매우 융숭하여 하사한 물품도 매우 많았는데, 이는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리고 봉림대군이 즉위해서는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그를 언급할 때마다 여전히 ‘우리 선생님〔吾先生〕’이라고 칭하였다.
44세 경오년(1630, 인조8)에 그의 두 아들이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니, 인조가 특별히 향기로운 술과 진기한 음식을 하사하여 문희(聞喜)의 용도로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합격자 명단 게시하는 날이 되자, 또 불러서 편전(便殿) 앞의 차비문(差備門)에 오게 하여 술을 하사하니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전후(前後)의 궁사(宮師)들이 입은 은전(恩典)의 정도가 여기에 따라올 수가 없었다.
7월 병 때문에 공조좌랑을 그만두고
10월 별시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12월 공조정랑으로 특별히 임명되고 명년까지 사부를 겸하도록하였다.
45세 신미년(1631, 인조9) 봄에 그가 친구 몇 사람을 데리고 양주(楊州) 고산(孤山)의 별서(別墅)에서 노닐 적에, 내전(內殿)이 또 술과 안주를 성대히 마련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그가 시를 짓기를,
궁중의 술병을 낚시꾼에게 뽐내면서 / 宮壺誇釣叟
신선의 음악을 강 마을에 울렸다네 / 仙樂動江村
누가 알겠는가 사흘간의 이 낙이 / 誰知三日樂
모두 구중궁궐의 은혜인 것을 / 摠是九重恩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 시를 전하여 외웠다.
이에 앞서 윤유기의 초상 때에 상주(喪主)가 없어서 반장(返葬)하지 못하고 양주의 노원(蘆原)에 임시로 매장하였는데, 그가 유배지에서 돌아와 10년 동안 경영한 끝에, 이해에 비로소 해남(海南)에 새로 묘역(墓域)을 조성하고 옮겨 모셨다.
46세 임신년(1632, 인조10)에 그가 병에 걸려 거의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인조가 날마다 약물(藥物)과 주찬(廚饌)을 내리다가, 병이 낫자 그제야 그쳤다. 그는 처음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겨졌다가 조금 뒤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승진하였으며, 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으로 승진하였다. 대간(臺諫)이 너무 빨리 4품에 올랐다는 이유로 개정할 것을 청했으나, 상이 듣지 않고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으로 바꿨는데, 병으로 체차(遞差)되어 해남(海南)으로 돌아갔다.
그는 관직에 거할 때에는 일의 큰 줄거리를 유지하는 데에 힘썼으나 세밀한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가부(可否)를 결정할 때에는 의연히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어렵게 여겼으며, 이서(吏胥)들도 두려워하면서 감히 농간을 부리지 못하였다.
47세 계유년(1633, 인조11)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임명되었다. 이해 가을에 관서(關西) 지방의 경시관(京試官)이 되었다. 그가 일찍이 광해조 때에 과장(科場)에서 편의(便宜)를 얻자는 마음을 쓰는 풍조를 미워하였으므로, 이때에 와서 그는 여러 시관(試官)들과 함께 사의(私意)를 단절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침착하게 참고하여 조사하여 공도(公道)를 회복하고 인재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뒤에 누차 참시관(參試官)에 후보자가 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말하기를 “시장(試場)의 일은 모두 상시관(上試官)이 하기에 달렸다. 참고(參考)하는 자는 자기의 뜻을 펼 수가 없으니, 처음부터 응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이때 소현세자의 장인인 재상(宰相) 강석기(姜碩期)가 그가 궁사(宮師)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여 인조의 후은(厚恩)을 입는 것을 미워하여, 비어(飛語)를 날조하여 기필코 그를 음해(陰害)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는 마침내 벼슬에 대한 뜻을 끊어 버리고서 가족을 이끌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두 번 제수되고, 사헌부(司憲府)에 한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8세 갑술년(1634, 인조12) 봄에 그를 관서(關西) 변방의 고을 수령 후보자로 하고, 또 호서(湖西)의 막료(幕僚) 후보자로 했는데, 이는 대개 그를 외방(外方)으로 내보내려는 의도에서였다.
경북 성주(星州)에서 관리가 목사(牧使)에게 칼부림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새로 부임하는 수령을 엄선(嚴選)하라는 인조의 명에 따라 그를 현감(縣監)에 임명하니, 그가 행장을 급히 꾸려 부임하였다. 그가 현감이 되었는데, 겉으로는 인조의 교지(敎旨)가 있어서 특별히 선임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마음에 거슬려 배척한 것이다. 그가 정사를 엄숙하고 분명하게 행하면서 사적인 청탁을 근절하니, 완악한 주민이 두려워 복종하고 간사한 관리가 숨을 죽여, 관아에 업무가 응체되는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일 중에 불가(不可)한 점이 있으면, 비록 방백(方伯)이 명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사리에 입각하여 일의 의심스러운 곳을 캐어 밝히므로 방백이 뜻을 굽히고서 그의 말을 따랐는데,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앙심을 품었다.
이해 여름에 사간(司諫) 김령(金坽)과 함께 옥당록(玉堂錄 홍문록(弘文錄))에 등재(登載)되었으나, 모두 의정부(議政府)에서 삭제되었다.
49세 을해년(1635, 인조13) 가을에 삼남(三南) 지방에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행하였는데, 전제(田制)의 등수(等數)가 너무 중해서 인정(人情)이 소요(騷擾)하며 원망하였다. 이에 그는 소장을 올려 그 이해관계를 밝히고 등수를 낮추어 경감하도록 청하였다. 그리하여 백성의 먹을 것을 넉넉히 해서 민심을 단결시키고, 나라의 근본을 보전하여 하늘의 명을 안정시키는 것으로써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삼도록 청한 것이다.
그가 수령(守令)로 있을 적에 털끝만큼도 사리(私利)를 도모하지 않았고, 또 명예를 낚는 것을 미워하여, 안 해도 될 어려운 일이나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향족(鄕族) 중에 빈궁해서 귀의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필요한 물건을 대 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를 좋아하지 않는 무리가 이런 일을 빌미로 비방하는 말을 지어내는가 하면, 당국자(當局者)가 또 그가 상소한 일 때문에 미워하였으므로, 그는 이해 겨울에 병을 이유로 체차(遞差)해 줄 것을 청하였다. 경상감사(慶尙監司) 유백증(兪伯曾)이 예전의 일로 감정을 품고 있다가 비방하는 뜬소문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파직하라고 계청(啓請)하니, 이에 대간(臺諫)의 탄핵이 일제히 일어나며 공격하자 파직되었다. 그는 이에 하직하고 해남으로 돌아와 일구일학(一邱一壑: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 삼으며 사는 삶)의 마음으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50세 병자년(1636, 인조14) 12월에 청(淸)나라가 쳐들어와서 성세(聲勢)가 매우 급박해지자, 공경(公卿)과 대신(大臣)이 종사(宗社)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ㆍ원손(元孫)ㆍ대군(大君) 등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江華都)로 향하였다. 대가(大駕)가 출발하여 남문(南門)에 이르렀을 때에 적(賊)의 선봉이 벌써 사현(沙峴)에 이르렀으므로, 대가가 마침내 동문(東門)으로 다시 빠져나와 마침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때 해남(海南)에 있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계책을 세우기를 “삼남(三南)의 장수(將帥)들 중에는 이 적의 칼날을 당해 낼 자가 한 사람도 없고, 함께 일을 해 볼 만한 사람도 없다. 남한산성이 겹겹이 포위된 상황에서 중도에 길이 막혀 끊기기보다는, 차라리 곧장 강도로 가는 것이 낫겠다. 강도도 하나의 조정이다. 강도에 현재 있는 군병과 제도(諸島)에 피란한 사람들과 삼도(三道)의 수군(水軍)이 합세하면 병력도 적지 않을 것이요, 게다가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거리도 매우 가까우니 수당(隋唐)의 사이와 같은 그곳에서 군사 작전을 펼 만한 땅도 많이 있을 것이다. 진실로 나와 뜻을 같이하며 나의 모책(謀策)을 제대로 쓸 자가 있다면, 혹 기병(奇兵)을 내고 필승의 전략을 구사하여, 현재 기승을 부리는 적을 격파할 수도 있고, 남한의 포위를 풀 수도 있고, 강화도의 수어(守禦)에도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계책을 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일의대수(一衣帶水)는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극력 말하여, 배을 미리 준비해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극구 청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사 강화도를 지켜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남한산성으로 하여금 견제당하는 걱정이 없게 한다면, 이것도 하나의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향족(鄕族)을 규합하고 가동(家僮)을 가려 뽑은 뒤에 배 한 척을 얻어서 길을 떠났다. 그는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이 대임(大任)을 결코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강화도가 함락되기 이전에 기필코 도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조수(潮水)의 오르내림과 바람의 순역(順逆)과 날의 명암(明暗)을 헤아리지 않고서, 위험을 무릅쓰고 밤낮없이 전진하다가 길에서 수군의 제장(諸將)을 만나면 반드시 얼른 가야 한다고 극력 권하곤 하였다. 그가 타고 간 배는 선구(船具)나 격졸(格卒) 면에서 전선(戰船)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였으나, 먼저 출발했던 주사가 거꾸로 그보다 뒤처졌으며, 그와 동시에 강도에 도착한 것은 오직 통영(統營)의 주사뿐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할 즈음에는 벌써 강화도가 함락된 뒤였다.
그는 통영의 중군(中軍)인 황익(黃瀷) 및 첨사(僉使) 변언황(邊彥璜)ㆍ조광필(趙光弼) 등과 서로 모여서 통곡하며 하루를 유숙(留宿)하였으나, 이미 동지(同志)도 없고 직호(職號)도 없는 상태에서 사세(事勢)가 이미 글러 버려 별의별 계책을 생각해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피란을 온 사대부(士大夫) 및 주사의 제장이 한목소리로 말을 전하기를 “대가(大駕)가 포위를 뚫고 동쪽으로 탈출하여 장차 영남(嶺南)으로 향하려 한다.”라고 하였는데, 적병(敵兵)이 육지에 그득할 뿐더러 그때에는 또 해변에까지 매우 세차게 달려들어 부딪침으로 다시 탐지하여 들을 길이 없었다.
이에 그는 ‘얼른 호남(湖南)으로 돌아가면 필시 조정의 명령이 통행(通行)하는 곳이 있을 것이니, 행재(行在)가 있는 곳을 알아서 따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황익 등과 통곡하며 작별한 뒤에 배를 돌려 남쪽으로 향했는데, 그때 황익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취화(翠華)가 실제로 영남을 지나서 남쪽을 향했다면 바다에 배를 띄워 따라가려고 한다. 그리고 만약에 또 불행한 일이 생겼다면 서산(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서산지미(西山之薇)>, 기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기자지금(箕子之琴)>, 관녕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것<관녕지탑(管寧之榻)>이 나의 뜻.”라고 하였다.
그는 돌아오다가 해남(海南)에 이르러서야 적과의 화의(和議)가 이미 정해졌다는 것과 대가(大駕)가 도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는 배에서 내리지 않고 장차 세상을 등지고 탐라(耽羅:제주도)로 들어가서 살려고 하다가, 배가 보길도(甫吉島)를 지날 적에 바라다보니 산봉우리가 수려하고 골짜기가 깊숙하였으므로, 그는 “여기에서 살아도 좋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나무를 베어 길을 내었다. 산이 주위를 에워싸서 바닷소리도 들리지 않고 청량(淸涼)하고 삽상(颯爽)하며 천석(泉石)이 기막히게 아름다워 참으로 세상 밖의 가경(佳境)이었으므로 마침내 부용동(芙蓉洞)이라고 명명하고는, 격자봉(格紫峯) 아래에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고 편액을 내걸고서 노년(老年)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집을 지을 때에는 모두 잡목(雜木)을 사용하면서 말하기를 “소나무는 국가에서 금하는 것이니 범하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52세 무인년(1638, 인조16) 봄에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에 막 대란(大亂)을 겪어서 변방의 경보가 끊이지 않았는데,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이 병량소모사(兵糧召募使)로 영암(靈巖)에 진주(進駐)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렀다.
당로자(當路者:중요한 지위나 직분에 있는 자)가 그를 매우 미워하여 온갖 헐뜯을 자료들을 주워 모은 뒤에, 그가 "배를 타고 강화도(江華都)에 도착해서 대가(大駕)가 환도(還都)한 것을 알고서도 끝내 분문(奔問)을 하지 않았으며, 피란 온 처자(處子)를 약취(掠取)하여 섬 안에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고 탄핵하였으므로, 그를 체포하여 법리(法吏)에게 넘겼으나, 취조한 결과 그러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 이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덕형(李德泂)이 헌의(獻議)하기를 “먼 지방에 있는 몸으로 변란의 소식을 듣고 분개한 나머지 개인적으로 배와 곁꾼을 마련하여 천리 멀리 환난을 구하러 달려왔으니, 비록 미치지 못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충성심이 가상합니다.”라고 하니, 인조도 그의 억울한 점을 살펴 주고, 단지 분문(奔問:달려 가서 문안이나 위문을 드림)하지 않은 죄만을 물어서 영덕현(盈德縣)에 도배(徒配: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일)하였다.
53세 기묘년(1639, 인조17)에 사면을 받고 석방되어 돌아와서는 마침내 집안일을 아들 윤인미(尹仁美)에게 맡기고는 해남 수정동(水晶洞) 산속에 집을 짓고 거처하였다. 뒤에 또 문소동(聞簫洞)과 금쇄동(金鎖洞)의 두 곳을 얻었는데 모두 유수(幽邃)하고 소쇄(蕭灑)하였으며 수석(水石)의 정취(情趣)가 있었다. 그는 항상 이곳을 왕래하며 소요(逍遙)하였을 뿐, 가묘(家廟)의 큰 제사가 있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58세 갑신년(1644, 인조22) 봄에 인조가 병이 들자 내의원(內醫院)이 그를 불러 약을 의논하도록 청하였다. 그가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를 올려서 병을 낫게 하는 처방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마음은 일신(一身)을 주재(主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장육부(五臟六腑)와 구규(九竅)ㆍ백맥(百脈)과 기혈(氣血)ㆍ음양(陰陽)의 순역(順逆)과 성쇠(盛衰)와 안위(安危)가 모두 하나의 마음에 매어 있습니다. 마음이 편안하면 백 가지 몸이 모두 편안하여, 풍한(風寒)ㆍ서습(暑濕)과 귀매(鬼魅)ㆍ백사(百邪)가 어디로도 들어올 수 없지만, 마음이 불안하면 이와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나랏일이 어렵고 힘든 것이 천고(千古)에 없던 바이니, 성상의 마음속의 일이 어떠할지는 말씀하시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약재(藥材)로 인재(人材)를 비유하며, 약을 쓰는 도리와 약을 분변하는 도리를 논하였는데, 소(疏)를 올렸으나 보고되지 않았다.
59세 을유년(1645)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세상을 떠났다. 봉림대군이 세자(世子)의 지위에 올랐다.
60세 병술년(1646)에 강옥(姜獄:소현세자의 빈인 강빈의 옥사(姜嬪獄事))이 일어나서 강빈은 사사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다.
63세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 여름에 인조가 승하(昇遐)하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였다.
그는 병이 심해서 달려가 애도(哀悼)하지 못하고 고을 관아에서 곡하였다.
9월에 소를 올려 병으로 분곡(奔哭)하지 못한 사정을 진달하는 한편, "좋은 정치는 인재를 얻어야 하고 인재를 얻으려면 내 몸을 먼저 닦아야 하며, 몸은 도로써 닦고 도는 인으로 닦아야 하는 것을 논하였으며, 이와 함께 소현세자의 아들을 놓아주어 성은(聖恩)을 온전히 할 것과 보호하는 방도를 다하여 성궁(聖躬:임금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을 편안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 소를 현(縣)과 도(道)를 통하여 올렸으나, 감사(監司) 이시만(李時萬)이 기각(棄却)하고 위에 올리지 않자, 그는 마침내 아들 윤인미(尹仁美)로 하여금 대궐에 가서 직접 올리게 하는 동시에, 짧은 소(疏)를 갖추어 상소가 기각되어 대신 올리게 된 사정을 진달하게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도 처음에는 그 소를 받지 않았으나 뒤에는 단지 그의 소만 접수하였다. 이에 효종이 우악(優渥:은혜가 매우 넓고 두텁다)하게 비답을 내렸는데, 그중에 “전일의 사부(師傅)의 은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느꺼워(어떤 느낌이 마음에 북받쳐서 벅차다) 탄식이 나왔다. 헤어진 뒤로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그리운 생각이 정말 깊기만 하니, 종용히 올라오도록 하라. 내가 강직한 그 말을 직접 듣고 싶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그러자 그를 꺼리는 자들이 효종의 뜻이 그를 중하게 돌아보는 것을 알고는 다시 중용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역습할 계책을 세우고는 마침내 말하기를 “자식을 보내 소를 올리게 하면서 은연중에 조정을 탐색하며 시험하려 하였으니, 나국(拿鞫)하여 죄를 정하소서.”라고 여러번 아뢰었으나, 효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6세 임진년(1652, 효종3) 봄에 효종이 바야흐로 《서전(書傳)》을 강학(講學)하는데, 의심나는 곳이 자주 있었지만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많이 대답하지 못하자, 효종이 그의 경학(經學)을 생각하고는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효종의 뜻은 대개 관직(館職 홍문관(弘文館))이나 양사(兩司)의 자리에 있었지만, 전관(銓官)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도 관직에 속한다고 하자, 마침내 사예에 임명하였다. 그러고는 효종이 직접 교서(敎書)를 지어서 그를 불렀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간절하였으므로 그가 어쩔 수 없이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3월에 도성 문 밖에 와서 상소하여 그동안 무함을 받은 것을 극력 진달하며 체직(遞職)을 청하니, 효종이 그가 온 것을 기뻐하며 다시 우악하게 비답을 내리며 얼른 도성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가 사은숙배(謝恩肅拜)할 때에 효종이 즉시 인견(引見)하며 위유(慰諭)하여 이르기를,
“서로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예전과 같은데 살결은 어찌 그리도 쇠하였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체질이 포류(蒲柳:신체가 허약함을 비유한 말)와 같아서 이미 심하게 쇠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소명에 응한 것은 단지 천안(天顔:임금의 얼굴)을 한번 뵙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효종이 일어나 앉으라고 명하니, 그가 머리를 들고 효종을 우러러보았다. 승지(承旨)가 무례하다고 하면서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효종이 엄한 목소리로 이르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은데, 어찌 얼굴을 보아서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에 특명(特命)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는데, 재차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효종이 경연(經筵)에 들어와 참여하도록 명하고는 의심나는 곳을 묻자, 그가 명백하게 해석하여 꺼림칙한 부분이 없게 하였다. 이에 효종의 뜻이 더욱더 그에게 기울자, 시배(時輩)의 질투가 더더욱 심해졌다.
다음 날에 정언(正言) 이만웅(李萬雄)이 맨 먼저 모함하는 논을 발하고는 동료의 의논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듣고는 즉시 정원(政院)을 나와 정병(呈病:병으로인한 상소)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에 소를 올려, 시의(時議:당시 사람들의 의론)에 미움을 받아서 정세(情勢)가 위박(危迫)해진 것을 모두 진달하고, 고향에 돌아가 죽게 해 줄 것을 청하니, 효종이 답하기를,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좋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라에는 법이 있다. 저 질투하는 무리가 어찌 감히 우리 조정에 몸을 담고서 간악한 계책을 꾀한단 말인가. 내가 너무도 놀랍기만 하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 직무를 살피라.”
하고는 오히려 특명으로 이만웅을 체직(遞職:벼슬을 갈리다)시켰다.
그가 재차 소를 올려 체차(遞差: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를 허락받고는 도성을 나와 장차 남쪽으로 돌아가려 하니, 효종이 재차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그리고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전(前) 승지(承旨) 윤선도가 참혹하게 무훼(誣毀)를 입었으니, 필시 서울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느낄 것이다. 만약 그가 정신없이 허둥지둥 내려가게 되면, 내가 당초에 역마(驛馬)로 불러 높이 예우(禮遇)한 뜻이 실로 못 되니, 본원(本院)은 그를 타일러서 가지 못하게 하고, 종용히 진퇴(進退)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도록 하라.”
하니, 그는 마침내 감히 결행하지 못하고서 남양주 고산(孤山)의 시골집에 머물며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이해 여름에 효종이 또 사람을 보내 존문(存問:윗사람의 위문)하고, 주찬(酒饌)과 절선(節扇:단오절에 선물하는 부채)을 하사하였다. 8월에 또 특명으로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하였다. 그가 현(縣)과 도(道)를 통해 정병(呈病)하였으나 체차(遞差)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마침내 도성 외곽에 와서 상소하여 무턱대고 벼슬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을 진달하고, 이와 함께 새로 제수한 관직을 갈아 줄 것을 청하니, 효종이 답하기를,
“아, 오늘날 정신없이 낭패를 당하게 된 것은 내가 천리 멀리 불러와서 오히려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세상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벼슬길이 구당(瞿塘:벼슬길의 난관에 봉착할 때 이 지명을 흔히 인용하여 비유하곤 한다)과 같다는 말이 참으로 이유가 있다. 스승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는가, 의리 중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유년 시절부터 모셨으니, 그 공이 홀로 뛰어나다. 출사(出仕)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고, 물러나 숨는 것은 이름을 얻으려 함에 가깝다. 나의 마음을 응당 몸받아서, 관직을 비워 두지 말지어다.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속히 되돌려, 공경히 직무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그는 마침내 힘을 내어 관직을 수행하였다.
10월에 소를 올려 시무 팔조(時務八條)를 진달하며, “하늘을 두려워하고〔畏天〕, 마음을 다스리고〔治心〕, 인재를 잘 분별하고〔辨人材〕, 상벌을 분명히 하고〔明賞罰〕, 기강을 떨쳐 일으키고〔振紀綱〕, 붕당을 깨뜨리고〔破朋黨〕, 나라를 강하게 하는 도를 행하고〔強國有道〕, 학문하는 요령을 파악해야 한다.〔典學有要〕”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해직(解職)하여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효종이 비답을 내리기를,
“상소한 내용을 살펴보니, 나라를 다스리는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이 모두 들어 있다. 말마다 절실하고 글자마다 간절해서 재삼 읽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감히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계속 소장(疏章)을 올려 나의 과실을 지적하여 부족한 점을 보완하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니, 얼른 나와서 직무를 살피라.”
하고,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원소(原疏)는 안에 두고 보고 싶다.”
하고는 소를 내려보내지 않았다.
이때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로가 있는 것을 믿고, 제멋대로 기세를 올리며 교만하게 굴자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였으므로, 그가 항소(抗疏)하여 말하기를,
원두표는 재주는 많아도 덕은 없고, 이익만 좋아할 뿐 의리는 없으며, 성질이 사납고 음흉하며, 표독스러우면서 화심(禍心)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가에서 이야기하는 자들이 모두 좋게 죽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원두표를 먼 외방에 한가히 머물게 하여 공신(功臣)을 보호하는 도리를 곡진히 하소서.”
하였다. 그런데 대사헌(大司憲) 홍무적(洪茂績)이 원두표의 패거리라서, 그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할 것을 청하면서 굳게 쟁집(爭執)하여 마지않으니, 효종이 부득이 따랐으므로, 그가 마침내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원두표가 이로부터 자신을 억제하며 단속하려고 힘썼으므로, 그가 생애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그가 상소한 덕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69세 을미년(1655, 효종6)에 처음으로 서반(西班:무반(武班))의 직함에 서용(敍用)되었다. 이때 조정이 바야흐로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를 수괄(搜括)하고, 해도(海島)의 거민(居民)을 몰아내고, 외방의 어부(漁夫)를 강도(江都)에 이주시키고, 여러 곳의 산성을 수축하게 하는 한편, 양전(量田)과 호패(號牌)의 일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온당하지 못한 점을 논하니, 효종이 그 소를 묘당(廟堂)에 내려보냈으나, 모두 채택되지 않았다. 오직 도민(島民)을 몰아내는 일만 효종이 특명으로 정지하게 하였을 뿐, 어부를 이주시키는 일에 대한 건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0세 병신년(1656, 효종7)에 효종이 재이(災異:재앙(災殃)이 되는 괴이(怪異)한 일) 때문에 구언(求言)을 하니, 그가 또 상소하여 ‘재이를 막는 길은 오직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고, 민생의 안정은 오직 적임자를 택하는 데에 있음’을 말하고, 또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위(武威)를 숭상하지 말아서 양기(陽氣)를 북돋우고 음기(陰氣)를 억제하기를 청하니, 효종이 은혜롭게 답하였다. 그의 지위가 비록 재상(宰相)은 아니었지만 전후에 걸쳐 효종이 비답을 내리면서 재상에 걸맞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 또한 그을 존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71세 정유년(1657, 효종8) 가을에 중궁(中宮)의 병환(病患)에 관한 일로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와서 약을 의논하였다. 겨울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자, 누차 진소(陳疏)하며 물러가겠다고 청하였으나, 그때마다 효종이 온유하게 비답을 내리며 만류하였고, 그도 병이 있어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효종이 은상(恩賞)으로 하사하는 물품이 줄을 이었으며, 또 약물(藥物)도 내려보냈다.
72세 무술년(1658, 효종9) 봄에 특별히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자, 그가 다시 진정(陳情)하며 체차(遞差)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그를 미워하는 자가 효종의 뜻을 동요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감히 더 이상 배격(排擊)하는 꾀를 내지 않고서, 마침내 비방하는 말을 퍼뜨리고 추악하게 헐뜯으며 말하기를 “유후성(柳後聖)을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임명한 뒤에야 윤모(尹某)를 참의로 삼을 수 있다.”라고 하는가 하면, 또 “사람의 벼슬을 어찌 매번 특명(特命)으로 내려 주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가 이 말을 듣고는 사직(辭職)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마침내 이 말을 인용하였는데, 정원(政院)이 효종의 귀에 이 말이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소(疏)를 접수하지 않았으며, 모두 13번이나 올려도 모두 기각(棄却)하며 말하기를 “만약 병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봉입(捧入)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에 따로 하나의 소를 작성하여, 제순(帝舜)이 눈이 잘 보이고 귀가 잘 들리게 한 고사와 위상(魏相)이 건의하여 부봉(副封)의 제도를 폐지한 고사를 인용하며, 정원이 옹폐(壅蔽)한 행태를 배척하였다.
이에 효종이 그의 전소(前疏)를 들이도록 명하고, 또 정원(政院)이 옹폐한 정상을 힐책하니, 정원이 말을 꾸며 대답하였다. 그가 다시 상소하여 이를 논하고는 치사(致仕)하여 돌아가겠다고 청하니, 상이 우악(優渥)하게 비답(批答)하며 허락하지 않고서, 하교(下敎)하여 정원을 준절히 꾸짖었다. 이에 대간(臺諫)과 관학(館學)의 장소(章疏)가 일제히 함께 일어나면서 기필코 중하게 모함하려고 하니, 효종이 누차 엄한 유지(有旨)를 내렸다. 그리고 이르기를 “이 사람이 부뚜막신에게 잘 보일 줄을 알지 못하니, 정말 감탄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고는, 그의 체직(遞職)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을 끝내 억지로 출사(出仕)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그의 병세가 심하였고, 또 그를 미워하는 자가 위험한 말들을 날조하여 무해(誣害)하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고산(孤山)에 초가집을 짓고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에 송준길(宋浚吉)과 이단상(李端相) 등이 성총(聖聰)을 속여 가리고,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을 추가로 무함하여 그 서원(書院)을 허무는가 하면 그 위판(位板)을 불살랐다. 이에 곤재의 손자인 정국헌(鄭國憲)이 소(疏)를 품고 와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번번이 정원(政院)에 의해 기각당하였다. 그가 국시(國是)가 문란해지고 유선(儒先)이 무함당하는 것에 분개하여, 수천 언의 소장을 진달해서 명백하게 빠짐없이 변론(辨論)하였으나, 정원이 기각하고 위에 보고하지 않았다.
뭇사람들의 비방이 비등(沸騰)해지는 가운데, 찬선(贊善) 권시(權諰)가 그의 동료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소를 그만두도록 넌지시 권하였으니, 이는 대개 송준길을 변호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나의 소장(疏章)이 가로막혀서 위에 진달할 수 없다면 그만이지만, 어찌 내가 스스로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나의 이해를 계교(計較)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위세(威勢)와 화복(禍福)에 겁을 먹은 나머지 뜻을 굽혀 세상에 아부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누차 상소하면서 멈추지 않으니, 송준길에게 아부하는 자가 사설(邪說)이라고 지목하며 효종에게 아뢰어 물리치게 하였다. 이에 재잘거리는 자들이 떼로 일어나 더욱 심하게 공척(攻斥)하였으나, 효종이 듣지 않고 단지 파직(罷職)만을 명하였다.
73세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에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顯宗)가 18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는 궐하(闕下)에 나아가 분곡(奔哭)하고 성복(成服)을 하고 나서 곧장 고산(孤山)으로 돌아왔다. 산릉총호사(山陵摠護使)인 원상(院相) 심지원(沈之源)이 계청(啓請)하여 그에게 간산(看山)하게 하였다. 그는 명을 듣고 도성에 들어와서, 병이 심하고 산술(山術:풍수지리)에 어둡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첨지(僉知)에 서용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총상(摠相:총호사) 심지원과 여러 지사(地師)들을 따라 여러 곳을 간심(看審)한 결과, 오직 영릉(英陵)의 홍제동(弘濟洞)과 수원부(水原府) 뒷산이 국장(國葬)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었는데, 여러 지사들도 이 의견에 모두 찬동하였다.
현종이 홍제동은 경숙(經宿 왕이 궐외에서 유숙함)을 해야 하는 지역으로서, 자전(慈殿:임금의 어머니를 이르던 말)의 뜻에도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하여, 마침내 수원(水原)으로 정하였다. 일단 재혈(裁穴 묘혈 자리를 재어서 정함)을 하고 공사를 시작함에 총상(摠相) 이하가 길지(吉地)를 얻었다고 서로 축하하였는데, 그가 홀로 말하기를 “이 땅을 쓸 것이라고 어떻게 기필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하현궁(下玄宮 왕의 하관(下棺))의 의식을 행하고 나서야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 말을 듣는 자들이 그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의심하며 모두 믿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에 수원 사람이 권요(權要)에게 뇌물을 주어 왕릉(王陵)으로 쓰지 못하게 하려고 꾀하였고, 당로자(當路者)도 수원의 장지(葬地)가 그의 주장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노여워하며 기필코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원은 국가의 대진(大鎭)이니, 읍(邑)을 옮기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로서 안 될 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마침내 일제히 일어나 쟁론(爭論)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현종이 이에 총상(摠相) 이하를 불러 의논하게 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가 나아가 아뢰기를,
“인산(因山)의 땅으로는 홍제(弘濟)가 제일 좋습니다만, 자전의 뜻을 어기는 것이 미안하다면, 수원이 비록 주민을 이주시키는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단연코 쓸 만한 곳입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수원을 쓰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만약 수원의 땅을 쓰려고 한다면, 기준에 맞게 양전(良田)을 보상하고 그들의 생업을 후하게 해 주며 10년 동안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주(移住)할 백성들이 이 일을 즐거워하며 이주하는 근심을 잊게 해 줌으로써, 민심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말을 진정시켜 음즐(陰騭)이 모여들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강제로 이 지역을 쓴다고 할지라도, 끝내 묘혈(墓穴)은 길한데 장례(葬禮)는 흉하게 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니, 현종이 모두 받아들였다.
그가 무더위와 비를 무릅쓰고 애써 병든 몸을 이끌고서 분주(奔走)한 것이 거의 한 달이었다. 이때에 와서 병세(病勢)가 또 심해졌고 산릉(山陵)의 일도 이미 정해졌으므로 마침내 들것에 실려 고산(孤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총상(摠相)에게 글을 보내어, 탑전(榻前)에서 진달한바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해 줘야 하는 뜻을 다시 말함으로써, 상이 듣고 그대로 행하기를 기대하였다.
이때에 산릉이 이미 수원(水原)으로 정해져서 공역(工役)을 모두 거행했는데도 언자(言者)들은 더욱 안 된다고 쟁집(爭執)하였으며, 이상진(李尙眞)과 기중윤(奇重胤) 등이 또 건원릉(健元陵)의 안쪽 언덕을 추천하였다. 이에 다시 간산(看山)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공은 병들었다고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기백(畿伯)에게 정장(呈狀)하여 안쪽 언덕은 쓸 수 없다는 뜻을 대략 말하였다. 급기야 재심(再審)할 적에 현종이 특명을 내려 그에게 가서 간심(看審)하도록 하자, 그는 병을 무릅쓰고 나아가서, 그곳은 흠결(欠缺)이 있는 만큼 국가의 쓰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진달하였다.
현종이 또 명하여 수원을 그대로 쓰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신(大臣)과 삼사(三司) 및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이 한목소리로 논집(論執)하였는데, 현종이 노하여 꾸짖으니 언자(言者)가 더욱 들고 일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종의 앞에 함께 와서 극력 쟁집(爭執)하여 마지않았으므로, 현종이 어쩔 수 없이 결국에는 수원을 포기하고 건원릉(健元陵)의 안쪽 언덕을 쓰기로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영릉(寧陵)을 천개(遷改)하는 빌미가 되었다.
시배(時輩)가 그를 미워하는 것이 더욱 심해져서, 그가 인산(因山)이 정해지기도 전에 지레 먼저 고향으로 내려갔는가 하면 재심(再審)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무함하고는, 불경죄(不敬罪)와 호종(怙終)한 죄를 범했다고 지목하며 나문(拿問)하라고 청하였는데, 현종이 듣지 않고 단지 파추(罷推)하게 하였다. 이때 그가 사적(私的)으로 친한 이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10년 이내에 왕릉 위에 망극(罔極)한 변고가 일어나서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거조가 있을 것이다. 나는 보지 못하겠지만 여러분은 이러한 일을 응당 보고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 15년이 지나 왕릉 위에 봉분(封墳)을 하고 나무를 심어 놓은 곳이 무너져 내려서 마침내 홍제동(弘濟洞)으로 옮기게 되었다.
74세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현종의 체후(體候)가 미령(未寧)하자, 그를 불러서 약을 의논하게 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인 이상 경석(李相景奭)이 처음으로 공을 만나 보고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초 이 사람을 본 적이 없지만 지금 약방에서 살펴보건대, 지금 막 중한 논핵(論劾)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털끝만큼도 개의(介意)하지 않으니, 천품(天稟:타고난 기품)이 온통 나라를 위한 지성(至誠)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효종(孝宗)의 초상 때에, 조 대비(趙大妃)는 장자(長子)를 위한 삼년복(三年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이 《의례(儀禮)》의 네 가지 복제 가운데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설을 인용하고, 본국의 제도 및 명(明)나라의 제도를 가탁(假托)하여 기년복(期年服)으로 정하였는데, 외인(外人)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지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인 허목(許穆)이 당시에 장령(掌令)으로 있다가 마침내 상소하여 논변(論辨)하며 즉시 복제(服制)를 추가로 개정할 것을 청하니, 현종이 송시열 등에게 다시 자순(諮詢)할 것을 명하였는데, 송시열 등이 모두 안 된다고 고집하면서, 심지어는 “효종대왕이 인조대왕의 서자(庶子)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孝宗大王不害爲仁祖大王之庶子〕”라고 하는가 하면, “단궁(檀弓)이 문(免)의 복장을 하고 자유(子游)가 최복(衰服) 차림을 한 것도, 과연 모두 돌아볼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檀弓之免子游之衰 果皆不足恤乎〕”라고 하고, 또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었는데도, 그다음 아들을 모두 장자라고 이름 붙여서 그를 위해 참최복을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엄하지 않게 된다.〔長子成人而死 而次長皆名長子而服斬 則嫡統不嚴〕”라고 하였다.
그가 이에 상소하여 송시열 등이 예법(禮法)을 잘못 의논한 것과 대비(大妃)의 복제를 잘못 정한 것을 극력 논변하고, 종통(宗統)과 적통을 나누어 둘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논한 뒤에, 삼년의 복제로 정하여 팔방에 반포해서 대소 신민(臣民)들이 조정의 의논에 이견(異見)이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하라고 청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송시열과 송준길이 왕에게 빈객(賓客)의 대우를 받던 학자의 지위에 처하여 선왕을 제대로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이끌어 가지 못한 나머지, 함궐(銜橛)의 우려를 빚고 말았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재궁(梓宮:왕의 관곽(棺槨))에 전판(全板:온전한 판목(板木))을 쓸 수 없게 하였고, 인산(因山)에 길지(吉地)를 놔두고 흠결이 있는 곳을 택하여 선왕(先王)으로 하여금 안부(安富)하고 존영(尊榮)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객관적으로 그 사적(事迹)을 고찰해 보건대, 불인(不仁)한 자가 아니면 지혜롭지 못한 자이니, 그런 자가 어떻게 예(禮)에 유독 밝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의 이 소(疏)가 올라가자 중외(中外)가 크게 경악하였다. 정원(政院)이 먼저 발동하고, 삼사(三司)와 관학(館學)이 뒤를 이어 일어나서, 기필코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말이 선왕(先王)을 범(犯)하고 유현(儒賢)을 무함(誣陷)했다고 지척(指斥:웃어른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함)하여 현종의 노여움을 격발함으로써 마침내 삼수(三水)에 안치하였다. 이곳은 북쪽 끝으로 삼강(三江), 허천(虛川), 읍루(挹婁)의 옛 땅이었으며 뒤에 말갈(靺鞨)이 되었는데, 산과 못은 일찍 얼어붙고 오곡(五穀)은 생산되지 않으며 청강(靑江) 밖에는 예부터 파저(婆豬 만주인)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속히 국법(國法)에 따라 사형(死刑)에 처하라고 청하는가 하면, 나국(拿鞫)하여 형률(刑律)을 적용하라고 청하였는데, 현종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 유계(兪棨)가 현종에게 아뢰어, 그의 소를 가져다가 조정에서 널리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고 불태우게 하였다.
그가 장차 떠날 무렵에 오래된 친구들이 모두 위문을 하였는데, 그는 태연자약하게 담소(談笑)하며 말소리와 얼굴빛에 어떤 기미(幾微)도 보이지 않고 말하기를 “어리석고 망녕됨이 늙어서도 변하지 않아 또 이런 행색을 짓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취한 것이니,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뜻을 갖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양주(楊州)의 누원(樓院)에 이르렀을 때 마침 비가 왔는데, 말 위에서 멀리 영릉(寧陵:효종의 능)을 바라보고는 마침내 감회에 젖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으니, 듣는 자들이 슬퍼하였다.
6월에 삼수에 도착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죽지 않고 배소(配所)에까지 왔으니, 이는 천행(天幸)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성상의 은혜라고 할 것이다. 위를 보면 하늘이 있고 아래를 보면 땅이 있으며,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완연히 고향에서 보던 것과 같고, 주민이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있는 줄을 알고 있으니, 이만하면 또한 노년(老年)을 보내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예설(禮說) 2편을 지어서 상소문 속의 미진한 뜻을 드러내 밝혔다.
75세 신축년(1661, 현종2) 여름에 가뭄 때문에 심리(審理)하다가 그를 북청(北靑)으로 이배(移配)하였다. 그는 필시 뒤에 다른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바로 떠나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의 탄핵(彈劾)이 발동하여 그대로 삼수에 안치(安置)하였다. 이는 대개 삼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악한 곳이기 때문에, 시의(時議)가 반드시 그를 이곳에 오래도록 놔두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구언(求言)에 응하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윤선도의 전소(前疏)는 효종을 위해 좌단(左袒)을 한 것이니,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둘로 나누는 설은 단연코 그냥 놔두면 안 된다.”라는 내용으로 말하고, 종통과 적통의 귀결처(歸結處)를 명백히 변론하여 선왕(先王)의 실록(實錄)에 분명히 기록할 것을 청하였는데, 소(疏)가 올라갔으나 현종이 답하지 않았으며, 조경 역시 이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대간(臺諫)이 다시 추가로 그를 논하여 마침내 위리(圍籬)의 형벌을 가했으니, 이는 대개 송시열이 그가 지은 예설(禮說)을 보고서 더욱 노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80세에 가까운 나이로 오래도록 궁박한 재액(災厄)에 처하였는데, 음식과 거처가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 편히 지내면서 이연(怡然)히 자득(自得)하였으나, 오직 임금을 그리는 한 생각만은 잠시도 잊지 못하였다.
76세 임인년(1662, 현종3) 봄에 그의 장자(長子) 윤인미(尹仁美)가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그를 찾아 뵐려고 하였다. 대신(大臣)이 마침내 그 일로 심리(審理)하여 현종에게 아뢰어 위리를 철거하게 하였는데, 대간이 안 된다고 옥신각신 다투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77세 계묘년(1663) 여름에 수찬(修撰) 홍우원(洪宇遠)이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진달하면서, 그가 논한 종통과 적통의 설이야말로 명백하고 적확하여 바꿀 수 없는 의론이라고 말하고, 그의 석방을 청하였으나 오히려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리고 을사년(1665, 현종6) 봄에 유생(儒生) 성대경(成大經)이 역시 상소하여, 그를 석방하여 언로(言路)를 소통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답이 없었다.
이때 또 가뭄 때문에 심리하다가, 집 가까운 곳으로 이배(移配)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전남 광양(光陽)으로 옮겼다. 3월에 삼수(三水)를 출발하여 6월에 광양에 도착해서 백운산(白雲山) 아래에 거하였다. 광양도 남쪽 끝 바닷가로 풍토가 매우 나빠서 수족이 마비되는 병과 괴질이 있어 객지에서 와 사는 사람 10명 가운데 8, 9명은 죽었다. 시배(時輩)가 이 때문에 그를 이곳에 처하게 한 것인데, 그는 몇 년을 거하였지만 끝내 아무 탈이 없었다. 그가 유배당한 뒤로 나라에 경사가 있어서 사면(赦免)하거나 심리(審理)할 적에, 시배가 번번이 그의 죄는 종사(宗社)에 관계된다며 저지하곤 하였다.
81세 정미년(1667, 현종8) 여름에 또 가뭄이 들어 심리하였으나 그는 여기에 끼이지 못하였다. 가뭄이 더욱 심해지자 유생 이석복(李碩馥)이 또 상소하여, "윤선도을 석방해서 하늘의 뜻에 응하고 재이(災異)가 그치게 하라"고 청하였으나 답을 내리지 않았다. 7월에 와서도 가뭄이 여전히 그치지 않자 다시 심리를 행하였다. 현종이 그를 석방하려고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이경석(李景奭)과 정태화(鄭太和)가 모두 극력 찬동하였으며, 송준길(宋浚吉)도 석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유독 좌상(左相)인 홍명하(洪命夏)만이 예전의 의견을 고집하였으며, 오두인(吳斗寅)과 이유상(李有相) 등도 쟁집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현종이 듣지 않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윤선도는 선조(先朝)에서 예우하던 신하인데 나이가 여든을 넘었으니 특별히 석방해 내려보내라.”라고 쓰게 하니, 좌우에서 마침내 감히 더 이상 말하는 자가 없었다.
8월에 그는 해남(海南)으로 돌아가 선영(先塋)에 참배하고, 9월에 보길도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갔다. 이때 나이가 81세였으나, 정신(精神)과 기력(氣力), 시청(視聽)과 언동(言動)이 쇠하지 않은 가운데, 우유(優游)하며 편히 쉬고 한적하게 스스로 즐긴 것이 5년이었다.
85세 신해년(1671, 현종12) 6월에 가벼운 병 증세를 보이다가 낙서재(樂書齋)에서 천수(天壽)를 다하니, 춘추(春秋) 85세였다.
아들 윤인미(尹仁美) 등이 영구(靈柩)를 모시고 바다를 건너, 그해 9월 22일에 문소동(聞簫洞) 옛터의 해향(亥向:북북서)을 바라보는 언덕에 장사 지내었으니, 이는 유지(遺志)를 따른 것이다.
임자년(1672, 현종13)에 현종이 윤선도의 관작(官爵)을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갑인년(1674, 현종14)에 인선왕후(仁宣王后:효종의 비)가 승하(昇遐)하였다. 조 대비(趙大妃)가 또 서자(庶子)의 며느리를 위한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것으로 정해지자, 영남(嶺南)의 사인(士人)인 도신징(都愼徵)이 항소(抗疏)하여 논변(論辨)하니, 현종이 크게 깨닫고서 예관(禮官)을 금부(禁府)에 넘기는 한편, 예경(禮經)을 친히 상고하여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장차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에 예(禮)를 그르쳤던 일의 근본(根本)을 캐어 들어 연구(硏究)하려고 윤선도의 전소(前疏)를 들이도록 명하였으나, 그 소가 불태워져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들이지 못하였다.
이해 가을에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肅宗)이 13세에 왕위를 이었다.
경자년(1660) 이후로 예(禮)를 논변하다가 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등용하는 한편, 송시열이 예(禮)를 무너뜨리고 정사를 어지럽힌 죄를 다스려 북쪽 덕원(德源)으로 귀양 보냈다가 다시 남쪽 장기(長鬐)로 옮겨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이듬해인 을묘년(1675, 숙종1) 봄에 숙종이 연중(筵中)에서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전례(典禮)가 바르게 되고 시비(是非)가 정해져서 송시열이 이미 악당(惡黨)의 우두머리의 죄인으로 처벌받았다. 그러고 보면 비록 윤선도의 관작(官爵)을 회복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저승의 원통함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니, 의정(議政)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 중에 허적(許積)이 과중(過重)하다고 하므로, 마침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였다.
기미년(1679, 숙종 5) 8월 2일 숙종이 윤선도에게 충헌(忠憲)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경신년 (1680, 숙종 6) 윤 8월 10일 송시열의 일파인 수찬(修撰) 이사명(李師命)이 상소하여 윤선도(尹善道)의 관작(官爵)과 추증(追贈)한 시호(諡號)를 추후해서 삭탈(削奪)하게 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 15)2월 13일 우의정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윤선도(尹善道)는 소(疏)로 잘못된 예(禮)를 옳고 그름을 따지어 가며 해석(解釋)하였으니 그 공(功)이 가장 컸으므로, 증작(贈爵)ㆍ사시(賜諡)하였다가, 이사명(李師命)의 말 때문에 환수(還收)하였습니다. 이제 송시열이 이미 득죄(得罪)하였다면 윤선도의 관작(官爵)ㆍ시호(諡號)도 명하여 시행함이 마땅하며, 그 아들 윤인미(尹仁美)의 환수한 증직(贈職)도 또한 다시 윤허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숙종이 그대로 따랐다
6월 3일 송시열이 제주(濟州)에서 나치(拿致)되어 돌아오는데,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갈 때에 만나는 곳인 정읍현(井邑縣)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나이 83세였다.

3. 가족관계


고조(高祖) 윤효정(尹孝貞)은 생원(生員) 출신으로 은자(隱者)의 덕을 소유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호(號)는 어초은(漁樵隱)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증조(曾祖) 윤구(尹衢)는 호가 귤정(橘亭)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 당세(當世)에 저명하였다. 중종 초년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현인(賢人)들과 장차 큰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끝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걸려 찬출(竄黜)되었으며 전원(田園)에 돌아가 생을 마쳤다. 기묘 명신(己卯名臣: 기묘사화 때에 화를 입은 사림(士林))으로 이 사실이 기묘당적(己卯黨籍 기묘년에 화를 입은 제유(諸儒)의 약전(略傳))에 실려 있다. 관직은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이르렀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윤구는 홍중(弘中), 의중(毅中), 공중(恭中)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 윤홍중(尹弘中)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차남 윤의중(尹毅中)은 문과 출신으로 관직이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이르렀으며, 선조조(宣廟朝)의 명경(名卿)이었다.
윤홍중은 아들이 없고, 윤의중은 유심(唯深), 유기(唯幾), 유순(唯순)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윤유심(尹唯深)은 관직이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에 이르렀고, 윤유기(尹唯幾)는 문과 출신으로 관직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윤홍중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윤유기는 능성 구씨(綾城具氏) 현령(縣令) 운한(雲翰)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역시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윤유심의 차자(次子)로서 윤유기의 뒤를 잇게 되었다.
윤유심의 비(妣)인 생모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이고, 좌의정(左議政) 현(玹)의 손녀이며, 승의랑(承議郞) 계선(繼善)의 딸이다.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 1588년 - 1655년 2월 22일, 판서(判書) 윤돈(尹暾)의 딸)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는데 인미(仁美), 의미(義美), 예미(禮美) 그리고 두 딸이 있으니, 심광면(沈光沔:청송)의 처와 이보만(李保晚:광주)의 처이다. 추우당 심단(沈檀)이 심광면의 아들이다.
첫째 아들로 윤인미(尹仁美, 1607년(?) - 1674년, 진사, 자(字)는 자수(子壽)이고 호(號)는 뇌치헌(牢癡軒))며느리 : 전주유씨(감사(監司), 유항(柳恒)의 딸, 유영경의 종손녀)
손자 윤이석(尹爾錫) 손자며느리 : 청송심씨 (종친부 전부(宗親府 典簿) 심광사(沈光泗)의 딸, 이조판서 심액(沈詻)의 손녀, 남인 산림 공조참의 심광수(沈光洙)의 조카
증손자 윤두서(尹斗緖)
둘째 아들 : 윤의미(尹義美, 1612년 9월 25일 - 1636년 5월, 진사) - 형 윤선언(尹善言)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손자 : 윤이후(尹爾厚)
셋째 아들 : 윤예미(尹禮美, 1619년 4월 28일 - 1669년 8월)며느리 : 이씨, 이숙진(李叔鎭)의 딸
손자 : 윤이구(尹爾久, ? - 1656년 3월)
사위 : 심광면(沈光沔, 1622년 - 1647년)외손자 : 심단(沈檀, 1645년 - 1730년)
사위 : 이보만(李保晩) 또는 이간만(李侃晩)
한양조씨와의 사이에
윤순미(尹循美, 1638년 6월 - 1667년 9월)
사위는 성균관직강(直講) 이익로(李翼老)
경주설씨(1620년 ~ ?)와의 사이에
윤직미(尹直美, 1643년 ~ 1724년) : 학관(學官). 보길도에서 그를 모시고 생활하였으며 윤선도의 시문과 작품을 일부 정리하여 보존, 후대에 전하였다.
사위는 황도빈(黃道彬), 양헌직(楊憲稷)
국보 제240호 윤두서 자화상(尹斗緖 自畵像)을 그린 이가 증손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이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이 윤두서의 외증손자이다. 현대 후손으로는 제12대 대법원장을 지낸 윤관(尹錧)이 있다.

4. 작품


그가 해남 수정동, 금쇄동, 보길도 부용동, 양주 고산, 함북 경원 등에서 지은 75수의 시조(詩調)가 고산유고에 실려 있다.[7]
〈산중신곡(山中新曲)-만흥(漫興) 6수, 조무요(朝霧謠) 1수, 하우요(夏雨謠) 2수, 일모요(日暮謠) 1수, 야심요(夜深謠) 1수, 기세탄(饑世歎) 1수, 오우가(五友歌) 6수〉 18수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추야조(秋夜操) 1수, 춘효음(春曉吟) 1수, 고금영(古琴詠) 1수〉 2장 =>3장
<증반금(贈伴琴) 1장> 〈초연곡(初筵曲)〉 2장 〈파연곡(罷宴曲)〉 2장 〈어부사시사(漁父四詩詞)〉 40수 〈몽천요(夢天謠)〉 3장 〈견회요(遣懷謠) 5편 〈우후요(雨後謠) 1장〉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임오년(1642, 인조20) ○이하 금쇄동(金鎖洞)에 있을 때이다.
'''만흥(漫興)''' 6수
산수간 바위 아래에다 띳집을 짓는다 하였더니
내 뜻 모르는 남들은 날 비웃는다고 한다마는
무지렁이 내 마음에는 분수인가 여기노라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 먹은 뒤에
바위 끝 물가에서 실컷 노니노라
여남은 일이야 부러워할 게 있으랴
술잔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님이 온다 한들 이렇게까지 반가우랴
말도 없고 웃음도 없어도 못내 좋아하노라
누구는 삼공(三公)보다 낫다 하나 만승(萬乘) 천자가 이만하랴
이제 생각해 보니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현명하였구나
자연 속의 한가한 흥취는 아마도 비길 곳이 없을레라
내 성품이 게으른 걸 하늘이 아시고서
인간 만사를 한 가지 일도 맡기지 않으시고
다만 다툴 사람 없는 강산을 지키라 하시는도다
강산이 좋다 한들 내 분수로 누운 것이겠는가
임금님 은혜를 이제 더욱 알겠노이다
아무리 갚고자 해도 해 드릴 일이 없어라
'''조무요(朝霧謠)'''
월출산(月出山)이 높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왕제일봉(天王第一峯)을 일시에 가렸구나
두어라 햇빛 퍼지면 안개 걷히지 않겠느냐
'''하우요(夏雨謠)''' 2수
비 오는데 들에 가겠느냐 사립문 닫고 소 먹이거라
장마가 계속되겠느냐 쟁기며 연장 손질하거라
쉬다가 날 갤 때 봐서 사래 긴 밭 갈거라
심심하긴 하다만 일 없기로는 장마로다
답답하긴 하다만 한가하기로는 밤이로다
아이야 일찍 잤다가 동 트거든 일어나거라
'''일모요(日暮謠)'''
석양 진 후에 산기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까우니 물색(物色)이 어두워진다
아이야 범 무서우니 나다니지 말거라
'''야심요(夜深謠)'''
바람 분다 지게문 닫아라 밤 되었다 불 끄거라
베개에 드러누워 실컷 쉬어 보자
아이야 날 새어 오거든 나의 잠을 깨워다오
'''기세탄(饑世歎)'''
환자(還子) 타 먹고 산다고 그것을 그르다 하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명함을 이럭저럭 알겠구나
아아 사람이 그른 것이겠는가 세운(世運)의 탓이로다
'''오우가(五友歌)''' 6수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떠오르니 그 모습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외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지만 자주 검어지고
바람 소리 맑다지만 그치는 때가 많노라
깨끗하고도 그치는 때가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 물〔水〕 -
꽃은 무슨 일로 피었다가 쉽게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른 듯했다가 누레지는지
아마도 변치 않을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 돌〔石〕 -
따뜻해지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하여 눈이며 서리를 모르느냐
깊은 땅속까지 뿌리 곧게 뻗어 있음을 이로 인해 알겠노라 - 솔〔松〕 -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누가 곧게 자라게 한 것이며 속은 어이하여 비었는가
저러고도 사시사철 푸르니 그것을 좋아하노라 - 대〔竹〕 -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 달〔月〕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장
을유년(1645, 인조23) 11월 ○금쇄동(金鎖洞)에 있을 때이다.
'''추야조(秋夜操)'''
쉬파리가 죽었으니 파리채는 놓았으되
늦가을이라 낙엽 지니 어여쁜 님 늙으시겠네
대숲에 달빛이 맑으니 그것이나 보고 노노라
'''춘효음(春曉吟)'''
‘음(吟)’이 어떤 본에는 ‘곡(曲)’으로 되어 있다.
엄동설한이 지나갔느냐 설풍(雪風)은 어디로 갔느냐
천산만산(千山萬山)에 봄기운이 어리었구나
지게문을 새벽에 열고서 하늘빛을 보리라
'''고금영(古琴詠)'''
버려졌던 가얏고를 줄 얹어 타 보니
청아한 옛 소리 반가이 나는구나
이 곡조 알 이 없으니 갑(匣)에 넣어 놔두거라
우연히 불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가야(伽倻)의 고금(古琴)을 얻어 먼지를 털고서 한 번 퉁겨 보니, 청량한 열두 줄의 음색에 최선(崔仙)의 마음 자취가 완연한지라, 차탄하고 영탄(詠歎)하는 중에 절로 한 곡조가 완성되었다. 또 생각해 보니, 이 가야금이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버려진다면 먼지 쌓인 한 조각 고목(枯木)이 될 것이요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쓰인다면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을 이룰 수 있을 것이지만, 세상에 음률을 아는 자가 드무니 오음과 육률을 이루고 난 뒤에도 어찌 지우(知遇)를 받고 못 받는 일이 없겠는가. 그러한즉 이 가야금에 대한 감회가 단순하지 않기에 다시 고풍(古風) 한 편을 지어 이 가야금의 울울함을 쏟아 낸다.
가야금 있으나 알아주는 이 없으니 / 有琴無其人
먼지 속에 묻힌 지 몇 해이던고 / 塵埋知幾年
안족(雁足)은 반나마 부서졌어도 / 金雁半零落
오동나무 몸통 그래도 온전하여라 / 枯桐猶自全
줄 고르고 한 번 퉁기어 보니 / 高張試一鼓
빙철 소리 임천에 울려 퍼진다 / 氷鐵動林泉
서성 위에서 소리 낼 만도 하고 / 可鳴西城上
남훈 앞에서 들려 드릴 만도 하네 / 可御南薰前
귓가엔 쟁적 소리 넘쳐 나는 판이니 / 滔滔箏笛耳
이 뜻을 누구에게 전할 것인가 / 此意向誰傳
비로소 알겠노라 도연명이 / 乃知陶淵明
끝내 안족과 줄 갖추지 않은 까닭을 / 終不具徽絃
'''증반금 〔贈伴琴〕'''
반금에게 주다. 을유년(1645, 인조23) 〔贈伴琴 乙酉〕
소리는 혹 낸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대처럼 이러하랴
마음은 혹 이러하더라도 소리를 누가 그대처럼 내겠나
마음이 소리에 나니 그것을 좋아하노라
훌륭하오. 그대 마음이 은연중에 천지조화와 합치되어 거문고 일곱 줄에서 나는 온갖 소리들이 모두 방촌(方寸 마음) 사이의 일이니, 내가 매양 들을 적마다 고기 맛을 잊는다오.
금쇄동(金鎖洞)의 병든 몸이.
'''초연곡 2장 〔初筵曲 二章〕'''
집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대장(大匠)의 공이로다
나무는 어이하여 곧은가 고조줄을 좇았노라
이 집의 이 뜻을 알면 만수무강하리라
술은 어이하여 좋은가 누룩을 섞은 때문이로다
국은 어이하여 좋은가 염매(鹽梅)를 탄 때문이로다
이 음식의 이 뜻을 알면 만수무강하리라
'''파연곡 2장 〔罷宴曲 二章〕'''
즐기기도 하겠지만 근심을 잊을 것인가
놀기도 하겠지만 길게 이어지기는 어렵지 않겠느냐
어려운 근심을 알면 만수무강하리라
술도 먹겠지만 덕 없으면 혼란해지고
춤도 추겠지만 예 없으면 잡스럽게 되나니
아마도 덕과 예를 지키면 만수무강하리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신묘년(1651, 효종2) ○부용동(芙蓉洞)에 있을 때이다

앞 강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떠라 배 떠라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려온다
지국총(至匊悤) 지국총 어사와(於思臥)
강촌(江村)의 온갖 꽃들 먼빛이 더욱 좋다
날이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 병은 실었느냐
동풍이 건들 부니 물결이 곱게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東湖)를 돌아보며 서호(西湖)로 가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아온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 깊은 소(沼)에 온갖 고기 뛰노누나
고운 볕이 들었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이어라 이어라
그물을 넣어 두랴 낚싯줄을 놓을 건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탁영가(濯纓歌)에 흥이 나니 고기도 잊겠도다
석양이 비꼈으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언덕 버들 물가 꽃은 굽이굽이 새롭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정승을 부러워하랴 만사를 생각하랴
방초(芳草)를 밟아 보며 난초며 지초 뜯어 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일엽편주에 실은 것이 무엇인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갈 적에는 안개뿐이었고 올 적에는 달이로다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리련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붉은 낙화(落花) 흘러오니 무릉도원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속세의 티끌이 얼마나 가렸느냐
낚싯줄 걷어 놓고 봉창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되었느냐 자규새 소리 맑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남은 흥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도다
내일이 또 없으랴 봄날 밤이 곧 새리라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싯대로 막대 삼고 삽짝문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부의 생애는 이러구러 지내리로다
여름
궂은비 멎어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떠라 배 떠라
낚싯대를 둘러메니 깊은 흥을 금치 못하겠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안개 낀 강 겹겹이 높은 산은 누가 그려 내었는고
연잎에 밥 싸 두고 반찬일랑 장만 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푸른 대삿갓은 쓰고 있노라 녹색 도롱이는 가져오느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흰 갈매기는 내가 좇는가 제가 좇는가
마름 잎에 바람 부니 봉창이 서늘쿠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여름 바람 일정하게 불겠느냐 가는 대로 배 맡겨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북쪽 포구 남쪽 강이 어디가 아니 좋을런가
물결이 흐리거든 발을 씻은들 어떠하리
이어라 이어라
오강(吳江)에 가자하니 천년노도(千年怒濤) 슬프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초강(楚江)에 가자하니 어복충혼(魚腹忠魂) 낚을세라
버들 숲 녹음(綠陰) 어린 곳에 이끼 낀 바위 낚시터도 기특하다
이어라 이어라
다리에 도착하거든 낚시꾼들 자리다툼 허물 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학발(鶴髮)의 노옹(老翁)을 만나거든 뇌택(雷澤)에서의 자리 양보 본받아 보자
긴 날이 저무는 줄 흥에 미쳐 모르도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돛대를 두드리고 〈수조가(水調歌)〉를 불러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애내(欸乃) 소리 가운데에 만고(萬古)의 마음을 그 누가 알까
석양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깝구나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이 솔 아래 비껴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푸른 숲에 꾀꼬리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구나
모래 위에 그물 널고 그늘 밑에 누워 쉬자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모기를 밉다 하랴 쉬파리에 비하면 어떠한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다만 한 근심은 상대부(桑大夫)가 들을까 하는 것이네
밤사이 풍랑을 어찌 미리 짐작하리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들판 나루터에 비껴 있는 배를 그 누가 일렀는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시냇가 그윽한 풀도 진실로 어여쁘다
오두막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둘러 있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부들부채 비껴 쥐고 돌길로 올라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옹(漁翁)이 한가하더냐 이것이 구실이라
가을
속세 밖의 좋은 일이 어부의 삶 아니더냐
배 떠라 배 떠라
어옹을 비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의 흥이 한가지이나 가을 강이 으뜸이라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만경창파에 실컷 배 띄워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 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흰 구름이 일어나고 나무 끝이 흐늘댄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 타고 서호(西湖) 가고 썰물 타고 동호(東湖)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흰 마름 붉은 여뀌는 가는 곳마다 보기 좋다
기러기 떠가는 저 편으로 못 보던 산 보이네
이어라 이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취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석양이 비치니 뭇 산이 수놓은 비단이로다
반짝이는 물고기가 몇이나 걸렸는가
이어라 이어라
갈대꽃에 불 붙여 가려서 구워 놓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질흙 병을 기울여서 박구기에 부어다오
옆바람이 고이 부니 다른 돋자리에 돌아왔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어스름은 나아오대 맑은 흥취는 멀어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단풍나무 맑은 강이 싫지도 밉지도 않구나
흰 이슬 비꼈는데 밝은 달 돋아 온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봉황루(鳳凰樓) 아득하니 맑은 빛을 누구에게 줄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옥토끼가 찧는 약을 호객(豪客)에게 먹이고저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이곳이 어드메뇨
배 매어라 배 매어라
서풍(西風) 먼지 못 미치니 부채질해 무엇하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들은 말이 없었으니 귀 씻어 무엇하리
옷 위에 서리 내려도 추운 줄을 모르겠도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낚싯배 좁다지만 뜬구름 같은 속세에 비겨 어떠한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내일도 이리하고 모레도 이리하자
소나무 사이 석실(石室)에 가서 새벽달을 보려 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빈산에 낙엽 진 길을 어찌 알아볼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흰 구름이 쫓아오니 여라의(女蘿衣)가 무겁구나
겨울
구름 걷힌 뒤에 햇볕이 두텁다
배 떠라 배 떠라
천지가 얼어붙었으되 바다는 의구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깁 비단 편 듯하다
낚싯줄이며 낚싯대 손질하고 뱃밥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소상강(瀟湘江)과 동정호(洞庭湖)는 그 물이 언다 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때에 고기 잡기 이만한 데 없도다
얕은 개의 물고기들이 먼 소에 다 갔나니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잠깐 날 좋을 제 낚시터에 나가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미끼가 좋으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간밤에 눈 갠 후에 경물이 다르구나
이어라 이어라
앞에는 유리 같은 만경창파요 뒤에는 옥 같은 천 겹 산이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그물이며 낚시 잊어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이어라 이어라
앞 개를 건너려고 몇 번이나 헤아려 보았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공연한 된바람이 행여 아니 불어올까
자러 가는 까마귀 몇 마리나 지나갔는가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우니 저녁 눈발이 잦아드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압지(鵝鴨池)를 누가 쳐서 초목의 치욕을 씻었던고
붉게 물든 벼랑 푸른 절벽이 병풍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크고 작은 물고기를 낚으려나 못 낚으려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쪽배에서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채 흥에 겨워 앉았노라
물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궂은 구름 한하지 마라 세상을 가리운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물결 소리를 싫어하지 마라 속세의 시끄러움 막는도다
창주오도(滄洲吾道)를 예로부터 일렀더니라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칠리(七里) 여울에서 양피(羊皮) 옷은 그 어떠한 이던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천 육백 날 낚시질은 손꼽을 제 어찌하던고
어와 해 저물어 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도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 붉은 꽃 흩어진 데 흥청이며 걸어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설월(雪月)이 서봉(西峯)을 넘어가도록 송창(松窓)에 기대어 있자
동방에 예로부터 〈어부사(漁父詞)〉가 있는데,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시(古詩)를 모아 곡조로 만든 것이다. 이 〈어부사〉를 읊조리노라면 강바람과 바다 비가 얼굴에 부딪히는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훌쩍 세속을 떠나 홀로 서려는 뜻을 가지게 한다. 이 때문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도 좋아하여 싫증 내지 않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도 칭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음향이 상응하지 못하고 말뜻이 잘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고시를 모으는 데 구애되었기에 국촉(局促)해지는 흠결을 면치 못한 것이다. 내가 그 뜻을 부연하고 언문을 사용하여 〈어부사〉를 지었는데, 계절별로 각 한 편씩이며 한 편은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곡조며 음률에 대해서는 진실로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며 창주오도(滄洲吾道)에 대해서는 더욱이 감히 내 뜻을 가져다 붙일 수 없으나, 맑은 강 넓은 호수에 조각배를 띄우고 물결을 따라 출렁일 때에 사람들에게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노를 젓게 한다면 또한 하나의 쾌사(快事)일 것이다. 또 훗날 창주(滄洲)에서 거처할 일사(逸士)가 반드시 나의 이 마음과 뜻이 부합하여 백세의 세월을 넘어 느낌이 일지 않으리라고는 못할 것이다.
신묘년(1651, 효종2) 가을 9월 부용동(芙蓉洞)의 낚시질하는 노인이 세연정(洗然亭) 낙기란(樂飢欄) 옆 배 위에서 적어 아이들에게 보인다.
'''어부사 여음〔漁父詞餘音〕'''
강산이 좋다 한들 내 분수로 누운 것이겠는가
임금님 은혜를 이제 더욱 알겠노이다
아무리 갚고자 해도 해 드릴 일이 없어라
이것은 바로 〈산중신곡(山中新曲) 만흥(漫興)〉의 제6장인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여음(餘音)이 되겠기에 여기에 거듭 기록한다.
'''몽천요 3장 〔夢天謠 三章〕'''
임진년(1652, 효종3) ○고산(孤山)에 있을 때이다.
생시런가 꿈이런가 백옥경(白玉京)에 올라가니
옥황상제는 반기시나 신선들이 꺼리도다
두어라 오호연월(五湖煙月)이 내 분수임이 옳도다
풋잠에 꿈을 꾸어 십이루(十二樓)에 들어가니
옥황상제는 웃으시되 신선들이 꾸짖는구나
어즈버 백만억(百萬億) 창생(蒼生)의 일을 어느 겨를에 물으리
하늘이 이지러졌을 제 무슨 기술로 기워 내었는고
백옥루(白玉樓) 중수할 제 어떤 장인바치가 이루어 내었는고
옥황상제께 아뢰어 보려 했더니 다 못하고서 왔도다
《시경(詩經)》 〈위풍(魏風) 원유도(園有桃)〉에 이르기를 “동산에 복숭아나무 있으니 그 열매를 먹도다. 마음에 근심하는지라 내 노래 부르고 또 흥얼거리노라. 이내 마음 모르는 자들 날더러 교만한 선비라 하네. 저 사람이 옳거늘 그대는 어이하여 그러느냐 하네. 마음에 근심함이여. 그 누가 이것을 알리오. 그 누가 이것을 알리오. 또한 생각하지 않아서로다.〔園有桃 其實之殽 心之憂矣 我歌且謠 不知我者 謂我士也驕 彼人是哉 子曰何其 心之憂矣 其誰知之 其誰知之 蓋亦勿思〕”라고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에 이르기를 “강해에 은거하여 맑고 깨끗이 세월 보내고픈 마음 없지 않으나, 살아서 요순 같은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 만났으니 차마 곧바로 아주 이별 못하겠네. 동학한 늙은이에게 비웃음 받고 호탕하게 노래 부르니 더욱 소리 높도다.〔非無江海志 瀟灑送日月 生逢堯舜君 不忍便永訣 取笑同學翁 浩歌彌激烈〕”라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고 읊조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소리로 발현되어 길게 노래 부르게 되었으니, 어찌 동학들의 비웃음 섞인 비난과 “그대는 어이하여 그러느냐.”라는 책망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이른바 “내가 옛사람을 생각하노니 실로 내 마음을 아셨도다.〔我思古人 實獲我心〕”라는 경우인 것이다.
임진년(1652, 효종3) 5월 10일에 부용동(芙蓉洞)의 낚시질하는 노인이 병으로 고산(孤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쓴다.
꿈인가 생시인가 한번 백옥경에 오르매 하늘문이 열리니 / 夢耶眞耶一上玉京閶闔開
옥황상제는 반기시나 신선들이 꺼리도다 / 玉皇靑眼群仙猜
두어라 오호연월을 한가로이 배회하도다 / 已矣乎五湖煙月閑徘徊
야인이 나비로 화하여 나풀나풀 십이루로 날아드니 / 野人化蝴蝶翩翩飛入十二樓
옥황상제는 웃음 띠셨으나 신선들이 꾸짖는구나 / 玉皇含笑群仙尤
어즈버 백만억 창생의 일을 어느 겨를에 물으리 / 吁嗟乎萬億蒼生問何由
구천(九天)이 이지러졌을 제 무슨 기술로 기워 내었는고 / 九重天有缺時補綴用何謨
백옥루 중수하던 날 어떤 장인바치가 이루어 내었는고 / 白玉樓重修日何工成就乎
옥황상제께 아뢰어 보려 했더니 물을 겨를 없는지라 돌아와 하릴없이 한숨짓노라 / 欲問玉皇無暇問歸來空一吁
이상은 〈몽천요〉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병신년(1656, 효종7)
'''견회요 5편 〔遣懷謠 五篇〕'''
이 이하는 무오년(1618, 광해군10) ○경원(慶源)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것인데, 여기에 부록(附錄)한다.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그르다 하나
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있으랴
내가 한 일 망녕된 줄을 나라고 하여 모를쏜가
이 마음 어리석음도 님 위한 탓이로세
다른 사람 아무리 말해도 님이 헤아려 보소서
추성(楸城) 진호루(鎭胡樓) 밖에 울어 예는 저 시냇물아
무엇을 하려고 주야로 흐르느냐
님 향한 내 뜻을 좇아 그칠 때를 모르는도다
뫼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리워하는 뜻은 많고 많고 크고 크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나니
어버이 그리워할 줄을 처음부터 알았건마는
임금 향한 뜻도 하늘이 생기게 했으니
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그것도 불효인가 여기노라
'''우후요〔雨後謠〕'''
어떤 사람이 “시임 재상이 허물을 고치자 때마침 궂은비가 갰다.”라고 하기에, 나는 “그가 허물을 고친 것이 진실로 이 비가 개고 이 구름이 걷히고 이 앞내가 도로 맑아진 것과 같을 수 있다면 우리들이 감히 그의 인(仁)을 허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언문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궂은비 개었단 말인가 흐리던 구름 걷혔단 말인
앞내의 깊은 소(沼)가 다 맑아졌다는 것이냐
진실로 맑기만 맑아지면 갓끈 씻어 오리라

5. 원림


윤선도는 보길도와 금쇄동(문소동, 수정동 포함)에 원림을 직접 조영하였는데, 그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 화려함을 생각하고 찾아갔다가 막상 이 원림을 대하게 되면 실망을 하게 된다. 유적지에는 순수자연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의 생활공간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림의 뜻을 이해하고 대자연에 몰입하여 그를 느끼게 되면 비로서 그 앞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그는 "사군자의 처세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두 가지 길일 따름이니, 조정이 아니면 산림이라 한 것은 곧 고인의 말입니다. 제가 이미 병이 들어 세로에서 행세할 수 없으니 수석에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지 아니하고 다시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자가 운곡[에 들어가고] 이자현이 청평[에 들어가며] 최고운이 가야[에 들어간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이원이 반곡으로 돌아가자 한퇴지는 서를 지어 찬양했고, 유지지가 여산에 살자 구양수는 시를 지어 훌륭히 여기었으니, 내가 어찌 이원과 여지지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또한 당세인이 어찌 구양수와 한퇴지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림(園林)이란 순수자연은 그대로 둔 채 거기에 최소한의 인위만을 가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원(庭園, garden)과 다르다. 
서울대 성종상공학박사는 "윤선도는 당시 여타 선비들과 구분되는 성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탁월한 예술적 소질과 감성의 소유자란 점이고, 둘째 자연에 대한 특별한 애호와 성벽을 숨기지 않고 토로하면서 적극적으로 찾아 즐기려는, 관념에 머물었던 당시 선비들과는 다른 실천궁행(實踐躬行실제로 몸소 실행함)의 자세를 지녔으며, 세 번째 당시 사상적 한계를 뛰어넘는, 유불선을 포용하는 열린 태도와 편력, 그리고 시대를 앞선 독창적인 시각으로서 천문, 지리, 의학을 위시한 과학적 지식에 대한 폭넓은 조예와 그에 입각한 실학적 자세를 견지하였다는 점 등이다. 그의 원림들에서 당시의 유교적 관념을 뛰어넘는 자연 경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원림에 대한 적극적인 예술적 활동과 체험이라는 점이 유달리 부각되는 것은 이같은 그의 독특한 개성에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대표적인 원림조영의 실천가로 평가하였다.
그는 원림을 조성한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빈번한 유람과 탐승을 통해 체험하고 그 경험을 시, 수필, 음악 등으로 노래함으로써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켰다

5.1. 수정동 원림


수정동 원림은 그가 성산현감을 사직하고 정치에 염증을 느껴 속세를 벗어나 깊은 산속에 은거하기로 작정하면서 찾은 은거지이다.

5.2. 금쇄동 원림


그가 수정동 원림과 문소동을 오가다 금쇄석궤를 얻는 꿈을 꾼후 발견한 은거지로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181번지 산 정상부위에 위치해 있다.
금쇄동에 관한 내용은 그가 지은 금쇄동기(金鎖洞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마치 신선세계를 찾아 올라가는 과정처럼 경물에 의미를 부여해가며 산수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5.3. 부용동 원림


병자호란때 근위병을 조직하여 강화도로 가던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치욕이 있자 이에 충분을 느껴 더이상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자 제주도로 가던중 보길도에 들려 부용동을 발견하고 마지막 삶터로 작정한 곳이다.
그는 부용동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지역은 비록 해도(海島)라고 말은 하지만, 천석이 절승(絶勝)하여 참으로 세상 밖의 선계(仙界)라서, 나의 삶을 마치도록 소요할 수가 있으니, 〈운곡기(雲谷記)〉에서 '산에서 밭 갈고 물에서 낚시하며, 성품을 기르고 서적을 읽으며, 거문고를 타고 질그릇을 두드리면서, 선왕의 풍화를 노래하면, 즐겁게 생활하며 죽음을 잊을 수 있다.'라고 말한 경지를 또 거의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집안일을 정리하고 이 산속에 숨어 살 계책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언덕을 거닐고 골짜기를 찾아가서 놀다가 쉬다가 하고 멀리 바라보기도 하며,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대나무에 기대기도 하며, 물고기를 구경하고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회포를 잊곤 하나니, 옛날에 산속과 바다에 들어간 사람들이 꼭 무심(無心)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들도 대개 때를 만난 것이 좋지 못하여 포부(抱負)를 펴지 못한 채 당시 세상을 상탄(傷歎)하면서 불쾌한 기색과 우울한 회포가 없지 않았으므로 산수(山水)를 즐기며 세상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보길도 부용동의 조경에 대한 내용은 그의 5대 손인 윤위(1725~1756)가 그의 사후 78년경에 보길도를 답사한 후 작성한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실려있다.

6. 풍수지리


윤선도는 풍수지리에도 특별한 능력을 갖추었다. 정조대왕은 "윤선도는 오늘날의 무학(無學)’이라고 부른다. 감여(堪輿)의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神眼)이 있었다."라고 일컫을 정도였다. 교하천도론을 부르짖었던 명풍수 이의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6.1. 산릉의〔山陵議〕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己亥
효종이 승하하자 간산(看審)을 위하여 윤선도를 불렀다. 이 산릉의는 그때 윤선도가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작성된 것이다.
과천(果川)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묘산(墓山), 광주(廣州) 안여경(安汝敬)의 묘산, 헌릉(獻陵) 이수동(梨樹洞)의 터, 영릉(英陵) 홍제동(弘濟洞)의 터 등 이상 네 곳의 산론(山論)은 초고(草稿)가 전하지 않는다.
'''김영렬의 묘산〔金英烈墓山〕'''
평평한 지맥(支脈)의 용이 멀리서부터 내려와 매우 유순(柔順)해져서 강을 굽어보는 큰 들판에 구불구불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마치 등나무 덩굴이 서로 얽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산과 하나의 물이 정답게 감싸는 곳마다 모두 혈(穴)을 짓고 있으니, 참으로 예로부터 마디마디가 옥(玉)의 땅이라고 말해지는 곳인데, 김영렬(金英烈)의 산소도 바로 여러 군데 맺혀 있는 혈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혈이 많이 맺혀 있기 때문에 단연 뛰어나게 특이한 하나의 혈이 없으니, 국가의 능침(陵寢)의 큰 용도를 논의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윤반의 묘산〔尹磻墓山〕'''
용혈사수(龍穴砂水)가 좋다고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하니, 참으로 쉽게 얻지 못할 길지(吉地)입니다. 그러나 당초 대룡(大龍)이 크게 혈을 맺은 곳이 아니라서, 능침의 후보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게다가 이곳은 세조대왕(世祖大王)의 국구(國舅)의 장지(葬地)입니다. 간산(看山)하러 가는 일행이 그 산에 들어가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하니, 감히 그 가부(可否)를 논하지 못합니다.
'''광주 속달의 동래군 묘산〔廣州束達東萊君墓山〕'''
산세가 힘차면서 약동을 하며 뭇 산들이 폭주(輻輳)하여 에워싸고 있으니, 길지라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명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내수구(內水口)가 조여지지 않아서 2천 보(步)쯤의 거리까지 물길이 보이니, 완전무결한 국세(局勢)는 못 되는 듯싶습니다. 그리고 비록 길지라고 말은 하지만, 하나의 산줄기 위에 장사 지낸 분묘가 무려 17기(基)에 달합니다. 200여 년 동안 대대로 큰 벼슬아치를 배출하다 보니 지기(地氣)가 새어 나간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남아 있는 것은 얼마 없을 듯합니다.
'''남양 홍 정승의 묘소와 홍기영의 족장〔南陽洪政丞墓所洪耆英族葬〕'''
용세(龍勢 산세(山勢))가 멀리서부터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서 구불구불 내려오는 가운데, 소조(小祖)의 산(山)이 존경스럽게 우뚝 서 있고, 똬리를 튼 국세가 견고하고 주밀하며, 조안(朝案)이 정답게 바라다보이니, 이곳이 길지임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홍 정승과 홍기영의 양묘(兩墓)가 모두 같은 국(局) 안에 있으면서 단지 한 겹의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또 홍기영의 묘소와 같은 맥(脈)의 약간 위에 홍섬(洪暹)의 묘소가 있으니, 이는 곧 홍기영의 아비로서 역시 정승(政丞)을 지냈습니다. 등록(謄錄)에서 말하는 홍 정승은 바로 홍언필(洪彥弼)이니, 이 사람은 홍섬의 아비입니다. 그리고 홍언필의 묘소와 같은 능선의 조금 아래에 있는 하나의 묘에는 그 비갈(碑碣)에 홍 동지(洪同知)라고 적혀 있는데, 묘소 아래의 사람들은 그 이름은 말하지 못하고 단지 홍언필의 부친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묘소는 바로 홍씨(洪氏)의 성(姓)이 이 산에서 발복(發福)한 시조(始祖)의 무덤으로, 대대로 고위 관원을 배출한 것이 100여 년을 밑돌지 않는다고 사료되니, 이곳은 정기(精氣)가 비축되어 있는 완전한 땅은 못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백발의 노파에게서 후사(後嗣)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옛사람이 깊이 경계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런 곳을 국가 능침(陵寢)의 후보지로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수원 호장 집의 뒷산〔水原戶長家後山〕''' * 현 융릉자리
신이 삼가 이 산을 살펴보건대, 용혈사수(龍穴砂水)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아름다워 조그마한 결함도 없으니, 참으로 대단한 길지로서 그야말로 천 리 이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천재일우의 땅입니다. 안팎과 주변이 모두 길격(吉格)인 것에 대해서는, 여러 술관(術官)들이 모두 구체적으로 진달할 수 있을 것이니, 신이 꼭 중복해서 상세히 진달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대개 그 용의 국세〔龍局〕가 영릉(英陵)의 그것에 버금가는 만큼, 주자(朱子)가 말한 ‘종묘(宗廟)의 혈식(血食)이 길이 이어지게 하는 계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원(水原) 향교(鄕校)의 터도 이 원국(垣局) 안에 있으면서 혈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호장(戶長) 집의 뒷산과 견주어 논할 수는 없습니다. 호장 집 뒷산의 건너편에서 또 새로 하나의 혈(穴)을 얻었는데, 여기도 똑같이 하나의 원국 안에 있고 사수(四獸 청룡, 백호, 주작, 현무)도 법도에 합치됩니다. 호장 집의 뒷산에 비교하면 고하(高下)가 현격하긴 합니다만, 여기도 쓸 수 있는 곳입니다.
'''낙생역의 이증 묘소〔樂生驛李增墓〕'''
순한 용이요 순한 사격(砂格)으로서, 국(局)을 빌려다 쓰면서 조금 혈(穴)을 맺었을 뿐이라서 눈길을 줄 만하지 않으니, 어찌 감히 국가의 용도를 의논하겠습니까. 그저 주전(廚傳)만 허비할 따름이니, 이런 곳이 등록(謄錄)에 기재되어 있다니 괴이할 뿐입니다.
'''양재의 새로 천거하는 산〔良才新薦山〕'''
원국이 에워싸 보듬고 있으면서 산세가 지극히 유순한데, 높은 곳에 자리를 잡으면 공중에 떠서 노출되고, 낮은 곳에 자리를 잡으면 우묵해서 움집처럼 됩니다. 혈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국가의 용도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벌아치산(伐兒峙山)'''
남산(南山)이 끝나려 하는 부위에서 몸을 뒤집어 형세를 역전시키며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의 형국을 이루었는데 하수(下手)에 힘이 들어 있습니다. 안산(案山)과 역수(逆水)가 활처럼 감싸고 있으며, 바깥의 조산(朝山)도 정답게 바라다보이니, 완연히 하나의 길지(吉地)가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대세(大勢)를 가지고 논하건대, 이곳은 산의 배후(背後)에 해당하는 데다가, 여기(餘氣)가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명당(明堂)이 반듯하지 않으며, 용맥(龍脈) 중에 골짜기를 지나는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니, 옛사람이 말한 병든 용이 아닌가 의심되므로 성주(聖主)의 의관(衣冠)을 모실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을 듯합니다.
'''왕십리의 산〔王十里山〕'''
원국(垣局)이 잘 둘러 있고 조산과 안산이 구비되어 있어 완연히 혈(穴)을 이룬 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혈과 가까운 곳의 능선에 퇴사(退卸 변화)가 없어서 그 능선의 형태가 완둔(頑鈍)하며 순욕(唇褥 혈 앞의 봉긋 솟은 부분)이 단정하지 못하니, 쓸 만한 곳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건원릉 안에서 새로 얻은 산〔健元陵內新得山〕'''
신이 삼가 구(舊)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의 우측 두 번째 언덕을 간심(看審)해 보건대, 용세(龍勢)가 서너 번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며 기상(氣象)이 매우 유순하였고, 안산(案山)이 정답게 수구산(水口山)과 합금(合襟)하였으며, 바깥의 조산(朝山)도 수려하였습니다. 이런 점은 좋았습니다마는, 혈도(穴道)가 급한 듯하고 혈(穴)이 있는 곳에 골바람이 비껴 불어오는 것이 흠이었습니다.
구(舊) 목릉의 좌측 첫 번째 언덕은 일찍이 장중귀인(帳中貴人)이라고 말해지던 곳인데, 귀인(貴人)이 아니라 바로 돈금(頓金)이었습니다. 그러나 용맥(龍脈)의 형세는 서너 차례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였지만, 단지 기상이 유순한 점에 있어서는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중에도 혈도는 평탄하고 혈에 임한 곳은 굽은 듯하였는데, 수구(水口)가 합금하지 못해 텅 비어 있는 공간이 꽤나 컸고, 바깥 조산의 수려함도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 언덕의 흠이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혈도가 평탄하고 혈에 해당하는 곳에 움푹 팬 곳이 없는 것으로 본다면,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비해서 조금 나을 듯합니다.
대개 두 개의 혈(穴) 모두에 미진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대개 건원릉(健元陵 조선 태조의 능) 국내(局內)의 남은 기운이 맺힌 것일 뿐이요, 온전한 기운이 혼융하게 이루어진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흠결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논해 보건대, 모두 쓸 수 있는 혈이긴 합니다만, 양쪽 모두 완전히 구비된 아름다운 곳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혈(穴)과 수원(水原)의 산의 우열을 정하는 일은, 신(臣)이 당초에 수원의 산을 논할 적에 소견을 망녕되게 진달하였으니, 지금 감히 재차 그르칠 수 없기에 뭐라고 진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건원릉 좌측의 첫 번째 언덕〔健元陵左一岡〕'''
신이 일찍이 주자(朱子)의 말을 들어 보건대, 선조의 무덤 근방에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선조의 영혼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간심(看審)한 건원릉의 첫 번째 언덕은, 건원릉의 입장에서 말하면 청룡(靑龍)에 해당하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60보쯤 되고, 목릉(穆陵)의 입장에서 말하면 백호(白虎)에 해당하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40보쯤 됩니다. 그렇다면 미안(未安)할 뿐만이 아니고, 청룡과 백호의 땅을 파서 상하게 할 경우, 선왕(先王)의 능침에 해가 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선왕의 능침에 해가 되는 점이 있다면, 용맥(龍脈)이나 혈도가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나 길한지의 여부는 논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6.2. 고산 윤선도 묘소


고산 윤선도의 묘소는 풍수지리를 하는 이들이리면 한번쯤은 방문했을 만한 명당자리로 정평이 나있다.  
윤선도가 지은 금쇄동기에 보면 그가 자신의 묫자리를 발견한 기록을 남겼는데 "국고대(臺)아래 서북쪽에 깊은 계곡이 있으니 바로 옥녀동(玉女洞)이다. 내가 지난해 여름에 이곳을 얻었는데 기이한 형상이 있다."라고 하였다.
옥녀는 풍수지리 형국론에 나오는 용어로
"옥녀(玉女)는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으로서 도교에도 자주 등장하여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고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런 형국이 있는 양택이나 음택에서는 만인이 부러워하는 인물이나 재자가인(才子佳人)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윤선도는 자신이 얻은 묘소자리의 형국이 옥녀형이라 하였는데, 과연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 현손자인 낙서 윤덕희, 내손자인 청고 윤용까지 3대가 유명한 화가인 것을 보면 이 옥녀형 묘소자리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이 금쇄동기를 지은 시기가 55세 되던 1641(신사)년 겨울에 지었으니, 이곳을 발견한 것은 전년 여름인 54세 되던 1640(경진)년 여름이 된다.

6.3. 명지관 이의신과의 관계


교하천도론을 주장했던 조선조 명지관 이의신(李懿信)은 윤선도의 넷째 증조부인 행당공 윤복의 셋째 사위다.
해남윤씨 문중에는 당악문헌이라는 문중기록이 있는데 충헌공 유사에 보면 윤선도와 이의신과의 관련 내용이 있는데,
​"충헌공은 젊은시절 선대의 집에 불길한 조짐이 있어 이의신과 함께 산천을 두루 다녔는데 드디어 월출산 아래에서 길지 4~5곳을 얻었다. 귤정공으로부터 이하 모두 옮겨 안치하였다. 아마 충헌공은 이의신에게서 세상에서 훌륭한 것을 얻음이 또한 많다." 또
​"이의신은 경자년(1660, 현종 1) 당시에 어떤 사람의 집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충헌공이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고, 탄핵이 있을것을 추측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길 '윤씨 가문에 산소를 잘 쓴 음덕이 내리는구나'고 하였다." 한다.
이 내용을 보면 그와 이의신은 풍수지리로 자주 어울렸으며, 이의신으로부터 풍수지리에 관하여 많은 얻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7. 의학


윤선도는 의학(醫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내의원에서 불러 인조와 현종 그리고 중궁전의 의약을 하였고, 정적들의 병까지 치료해주었으며, 집과 유배지에서도 진료를 해준 약화제의 기록이 있다.
46세(1632, 인조10)때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며 예조 판서(禮曹判書)인 최명길(崔鳴吉)이 그를 유의(儒醫)로 천거하자[8] 거절하면서 말하길,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병들어 침상에 누워 있을 적에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에 견줄 수 있다. 따라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술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 부자(天子)가 또 그 말을 《소학(小學)》이라는 책에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소싯적에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을 맞아 처방을 점검할 즈음에 대략 듣고 본 것이 있을 뿐이요, 의도에는 실로 어둡기 그지없으니, 어떻게 감히 지존(至尊)의 약을 함부로 의논하겠습니까. 성의는 비록 한이 없다 해도 알지 못하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민간에서 알고 지내는 자가 간혹 와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번번이 “알지 못해서 감히 알려주지 못한다.”라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혹 일가(一家)에 같은 병증(病症)을 앓는 자가 힘은 없고 일은 급해서 의관(醫官)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에 나에게 와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대략 들은 바를 설명해서 채택하는 데에 참고하도록 한 것이 한두 번 있긴 하였습니다만, 그때에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거나 확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항상 남을 그르치고 스스로를 그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58세 1644, 인조22) 2월 인조가 병이나 그를 불러 의약하려 했으나 그도 병으로 가지 못하고 상소했으나 보고되지 않았다.
66세 (1655, 효종6) 6월 좌윤(左尹) 송시길(尹時吉)이 병으로 자문을 구하자 그가 답하였다.
"나에게 약(藥)을 물어보는 것은 바로 맹인(盲人)에게 길 안내를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탁을 받고서 그만둘 수 없기에, 애오라지 옛 처방을 참고하여 멀리서 청한 뜻에 부응하려니,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에 매우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잡치부(雜治賦)〉에 이르기를 '사기(邪氣)를 없애는 것은 도적을 쫓는 것과 같으니, 괴수는 섬멸하되 협종(脅從)은 용서해야 한다. 정기(正氣)를 기르는 것은 소인(小人)을 대하는 것과 같으니, 자기를 바르게 하고 지나치게 따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구본론(求本論)〉에 이르기를 '그 근본을 찾지 않고 다스린다면, 음양(陰陽)의 사기(邪氣)가 더욱 벋어 나가서 제어하기 어렵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보내신 기록 중에 잡증(雜症)이 많습니다마는, 작은 것에 눈길을 주다 보면 큰 것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대병(大病)은 주(酒)가 습(濕)을 발생시키고, 습이 화(火)를 발생시키고, 화가 기(氣)를 잠식하여, 그로 인해서 기가 허(虛)해진 것이니, 담(痰)과 풍(風)은 모두 습과 화가 불러들인 것입니다. 소병(小病)은 대개 심(心)과 신(腎)이 교통하지 못하고 비(脾)와 위(胃)가 화합하지 못한 탓이니, 여러 증상은 모두 여기에 근원하는 것입니다.
대병에는 육군자탕(六君子湯)을 써야 하고, 소병에는 고암심신환(古庵心腎丸)과 삼백탕(三白湯)을 써야 합니다. 《의학입문(醫學入門)》의 잡병제강(雜病提綱) 풍조(風條)를 자세히 음미하면 육군자탕이 얕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울조(鬱條)의 말단(末端)의 주(註)를 자세히 음미하면 삼백탕이 가벼운 것 같아도 실제로는 무거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의논에 대한 참고용으로 써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70세 (1656, 효종7) 중궁의 의약차 내국에 입궐
72세 (1658, 효종9) 4월 공조참의 윤선도가 소를 올렸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의술의 전래는 그 유래가 깊습니다. 역대의 성군(聖君)ㆍ철보(哲輔)로서 이것에 유의하지 않은 이가 없고, 예로부터 어진 사람이나 효자라면 다 같이 이것에 주의할 줄 알았습니다. 신농씨(神農氏)가 온갖 약초들을 맛보았고 황제(皇帝)는 침구법을 창안하였으니, 이 두 임금이 성군(聖君)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또 이윤(伊尹)은 탕액(湯液)의 시조이고 적양공(狄梁公)은 침술이 신묘하였으며, 범중엄(范仲淹)은 명의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이 세 신하가 현신(賢臣)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이천 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기를 ‘병상에 드러누워 있을 때 되잖은 의원에게 맡기는 것은 부자(不慈)하고 불효(不孝)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술도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를 《소학》에 실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다 같이 도를 알지 못하면서도 이처럼 좋은 교훈을 만세에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어렸을 때 어버이의 질병 때문에 옛 의방을 검토해 보기는 하였으나, 지식이 얕아서 남들이 더러 지나친 추대를 하여도 신은 이것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전하 역시 이것을 가지고 신을 등용하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74세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현종의 체후(體候)가 미령(未寧)하자, 그를 불러서 약을 의논하게 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인 이상 경석(李相景奭)이 처음으로 공을 만나 보고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초 이 사람을 본 적이 없지만 지금 약방에서 살펴보건대, 지금 막 중한 논핵(論劾)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털끝만큼도 개의(介意)하지 않으니, 천품(天稟)이 온통 나라를 위한 지성(至誠)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정약묭이 여유당전서에서 말하길,
"원두표가 설사(泄瀉)가 한도없이 나오는 병을 앓아서 윤선도에게 약을 묻자 윤선도가 냉수를 양껏 마신 뒤에 그만 두게 하였다.
원두표의 자제들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우리 집안에 화(禍)를 입히려고 하기 때문에 질병이 더욱 심해지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으나, 원두표가 마침내 밤에 몰래 우물가로 가서 물을 흠뻑마시고 나니 병이 잘 나았다.
자제들이 그렇게 한 까닭을 물으니, 원두표가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입히고자 한다면 어찌 약으로 죽이겠는가?'하였다.
나(정약용)는 어려서 매번 여름철 설사로 고생을 하였는데 번번이 냉수를 가지고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해 주니 또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가 남긴 약화제(藥和劑)를 보면
오선주방(五仙酒方) - 건강주,
선창약(癬瘡藥) - 버짐을 없애는 약,
회충약(蛔충藥) - 회충을 없애는 약,
해수약(咳嗽藥) - 노인들의 해수병 치료약,
복학신방(腹학神方) - 어린애들의 자라배를 다스리는 약,
우역신방(牛疫神方) - 소의 전염병을 퇴치하는 처방, 등
다양하고 신기한 처치법이 남아있어 고산선생의 의술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 중궁전과 대전에 올렸던 처방전들
淸胃瀉火湯, 八物二陳湯, 淸金導積散, 養血淸火湯, 導赤二四湯, 逍遙散, 葶藶木香散, 二母寧嗽湯, 淸火化痰湯, 荊防敗毒散, 防風通聖散, 加味小柴胡湯, 大胃風湯, 四君子湯, 升麻葛根湯, 淸胃瀉火湯, 加減涼膈散, 升麻黃連湯 등
*. 화제(和劑)
錢氏白朮散, 加味嘉禾飮, 加味麻桂飮, 導滯通經湯, 癬瘡藥, 加味正氣散, 枳朮四物湯, 등

8. 사후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탓에 남인 내부에서도 적을 만들었는데 1675년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숙종은 그를 특별히 의정(정승)으로 추증해야 한다고 했고, 허목윤휴가 계속 추천하여 그를 의정 벼슬 중의 하나를 추증하려 했으나 허적, 권대운 등 탁남파의 반대로 실패하고 결국 이조 판서에 추증된다.[9]

9.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홍재전서
고산유고
해남윤씨문헌

[1] 음력 6월 22일[2] 현 서울 종로구 연지동.[3] 음력 6월 11일[4] 산수간에 밭갈고 낚시질하며 본성을 기르고 책을 읽고, 거문고 타며 장구치고 선왕의 유풍을 노래하니, 즐거움에 죽음도 잊을만 하다.[5] 윤선도가 잡은 효종의 능자리[6] 현 서울 종로구 연지동[7] 고산유고 제6권 하 별집에는 가사(歌辭)라고 분류되어 있다.[8] 호의의 뜻이었지만 사대부가 의약에 밝다고하면 천시하던 세태에 의약은 잡학이나 기술이 아니라 의도(醫道)라고 여겼던만큼 못마땅하였기 때문[9] 허적과 권대운은 서인과 타협을 주장하던 인물로 당대에도 변절자 취급을 받았다. 더구나 허적의 고모가 서인 이광정 가문에 시집갔고 그 때문에 민유중, 민정중 형제는 그의 고종 조카가 되는 것 때문에 같은 남인들로부터 서인들과의 화합을 주장하는 진정성을 의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