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의 난

 


1. 개요
2. 전개
2.1. 실제로 정여립이 반란을 꾀했나?
3. 후일담 - 기축옥사
4. 미디어 매체 및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선조 22년(1589)에 일어난 기축옥사의 시발점이다.

2. 전개


'''정여립 : “이 썩어빠진 조정 가지고 왜놈들을 막을 수 있어?”'''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대사.

발단은 선조 22년(1589)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 군수 이축, 재령군 군수 박충간의 연명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여립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쳐들어가 병조판서 신립과 조정 중신들을 죽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파직하거나 죽이는 등의 혼란을 야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놀란 선조는 중신들을 불러모아 대책 회의를 하였다. 당시에는 동인들이 집권 중이었고 정여립은 동인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언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들은 정여립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동인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안악군의 조구가 자신의 계획을 고변한 사실을 금구에서 변숭복에게 전해들었다. 그 후 변숭복 및 아들 정옥남과 함께 자신이 서실을 차리고 대동계(大同契)를 운영했던 죽도(竹島)[1]로 도주했다. 그러나 진안 현감이 토벌대를 조직해 추격하자 변숭복과 정옥남을 살해한 후 자신도 칼을 거꾸로 세운 다음 자살했다. 이후 동인들의 입지는 축소되어 버렸는데, 그의 자살은 반역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2]

2.1. 실제로 정여립이 반란을 꾀했나?


여기서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정여립의 행보와 정황적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 우선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한 게 맞다면, 설령 도망치더라도 그 전에 모반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을 소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는 수많은 문서와 편지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그의 도피는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졌다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본인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안에 각종 편지와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또한 정여립이 도망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대동계원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도망친 곳은 자신이 대동계원들과 함께 하던 연고지인 죽도였다. 또한 정여립은 죽도로 간다고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관군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여립이 도망치는 신세에 놓인 사람이었다고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 다른 정황적 증거들도 의구심을 더 부채질한다. 김장생(金長生)의 《송강행록》[3]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공은 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는 정여립이 반드시 도망을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입궐을 서둘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만 놓고 본다면, 정철은 정여립의 행적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로 인해서 서인 세력들이 이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실제로 《동소만록》과 같은 야사에서는 "정여립이 죽도로 놀러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정여립을 습격하여 살해한 후 자결로 위장했다" 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러한 의문점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이 아예 날조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만약 자살이 아니라 살해설이 맞다면 모반의 주동자로 지목된 정여립 본인을 잡아다가 문초하지도 않았으며, 실제로 당시에는 정철이 서인의 모략가인 송익필(宋翼弼)[4] 형제와 모의하여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5] 하지만 타살설은 어디까지나 설이고 정여립은 자살한게 맞는걸로 보인다. 정여립이 자결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과 박춘룡은 정여립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을 심문했던 사람은 정여립과 9촌 관계로 정여립과 가까운 사이라고 유배되었던 정언신이다. 이후 선조가 친국하는 자리에서도 정여립이 타살당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정옥남과 박춘룡은 잡혀온 후 한참 동안을 감옥에서 심문 받고 권정례 후 처형되었는데, 만약 서인이 정여립을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한게 사실이라면 서인들이 그때까지 정옥남과 박춘룡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이 소문에 의하면, 정철은 송익필 형제를 시켜 전라도에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또한 송한필은 황해도에 정여립에 대한 호의적인 소문을 내서 정여립으로 하여금 모반을 부추기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조작의 주체는 세력도 미미했던[6] 서인이 아니라 선조 본인이 상황을 기가 막히게 이용한 것뿐일 가능성이 크다. 후술하겠지만 후일 선조는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 정철의 측근들과 양천회를 비롯한 당시의 고변자들을 혹독하게 심문하여 정철의 사주였다는 증언을 받아내긴 했는데 이거 자체도 그냥 고문으로 인한 허위 자백일 가능성이 크다. 역모 조작범이라는 정철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여립 자신은 당파를 바꾼 적도 있고 때에 따라서 정치적 목적으로 한때 자신의 스승이자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율곡 이이를 강하게 비판하였다.[7][8] 스승인 이이를 욕하고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파를 옮긴 행적 때문에 서인뿐 아니라 동인에서도 비주류였다. 거기다 선조도 그를 매우 싫어했다.[반론A][재반론A]
다만 정여립의 형 정여복과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이 정여립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인 도잠과 설청은 정여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생각해 정여립에게서 도망쳤고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후에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고 편지를 쓰기도 한 걸보면 정여립의 행동이 수상했던 건 사실로 보인다.
정여립은 파격적인 이론 제시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다만 그가 말했다는 '천하는 공물(公物)이니...'라는 말은 정여립이 먼저 한 건 아니고, 이전부터 나와 있던 말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 부분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 정여립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조선이 정여립의 '천하는 공물(公物)' 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였다면, 서양 크롬웰의 공화정보다도 앞서 이를 실현한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하였다.

3. 후일담 - 기축옥사


정여립이 자결한 후, 선조는 조정 중신들을 위관으로 임명하고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당초 정언신도 위관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정철이 입궐하여 "정언신이 정여립과 인척지간이므로 위관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선조에게 간언, 정언신 대신 정철이 위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정언신은 "이게 다 이이의 제자 놈들의 짓이다. 정여립의 충성심은 해를 꿸 만한데 서인 놈들이 모함하니 이들을 다 죽여 마땅하다!"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 정여립이 역적으로 확정되자 "걔 역적 맞음."이라고 꼬리를 내리지만, 정여립과 주고받은 서신이 잔뜩 발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유배로 감형된다.[9]
다른 중신들도 위관이었지만 사실상 정여립 사건 수사는 정철이 주도했다.[10] 정철은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한 문서와 편지들을 샅샅이 검토하여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들이게 했다. 일차로 정여립과 모반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이기, 황언윤, 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집을 수색해보니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장형 끝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정철 등 서인들의 진정한 목표는 이발을 위시한 동인 세력들의 제거였다. 서인측 유생들은 동인측 인사들이 정여립과 모반을 꾸몄다며 이들을 처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결국 이발을 위시한 동인의 중요 인물들은 원지로 귀양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교생 선홍복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다시 이발 등을 위시한 동인 중요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자 이들은 다시 끌려와 국문을 받게 되었고 국문 과정 중 장을 맞다 죽고 만다. 선홍복은 자백 후 처형되었는데, 처형 직전 '''"'이발 등의 이름을 대면 살려 주겠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
정여립의 난은 실로 임진왜란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뒤흔들었다.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여립과 단지 시국을 논했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와 참혹한 고문 끝에 희생되었다.[11] 가장 처절했던 죽음으로는 멸문당한 이발의 가족들일 것이다.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본인뿐만 아니라 일가가 모조리 붙잡혀 선조 앞에서 국문을 당했다. 이발의 가문은 9대조부터 과거에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었는데 가문 자체가 거의 박살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선조는 이발의 어린 아들에게 "너는 네 아비에게 무엇을 배웠느냐"라고 묻자, 이발의 어린 아들은 "저는 제 아비에게서 충, 효 외에는 배운 것이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 이 말에 선조는 길길이 날뛰며 "역적의 자식놈이 저런 참람한 말을 하다니!" 라며 이발의 어린 아들을 고문했다. 이발의 아들압슬[12]을 받고 사망했으며, 여든이 넘은 노모는 장형으로 사망, 즉 맞아 죽었다.[13]
이런 엄청난 비극 때문에, 오늘날 겨우 살아남은 이발의 후손들은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고기를 다지며 "정철! 정철!"을 외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결국 최종적 지휘자는 선조였다. 정철도 일이 커지자 크게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훗날 선조는 "과인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며 정철에게 뒤집어씌우니 선조가 정철을 이용한 것인지 아님 정철이 주도한 것인지는 다만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또한 호남 출신의 유학자로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가지고 있던 정개청도 정여립의 집터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붙잡혀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정철은 정개청의 저서인 <우득록>을 보고선 "절의를 배격했다"며 그를 맹비난했다.[14] 심지어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 라고 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기축옥사로 인해 전라도 지역은 '반역향' 이라는 낙인이 붙는다. 또한 정여립 등 혐의가 덧씌워진 주요 인물들은 사지가 찢겨 전국 팔도에 조리돌림당해 역적의 말로가 어떤지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이용됐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반역향 지정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은 바로 호남에 근거지를 둔 정철 본인이었다. 때문에 당시 호남 계열 동인은 타 지방 동인에 비해 높은 비율로 쓸려나갔다.
그렇다고 영남의 피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 임란 당시 김성일의 막료로 영남 일대에서 종사했던 이로의 <용사일기>[15]에 따르면 진주성 주변 사람들은 기축년 변고(기축옥사)에 의해 최징사(곧 최영경)가 원통하게 죽고 유종지가 무함되며 이에 지방 선비였던 하향 같은 이가 분통이 터져 목 매어 죽었다는 것 때문에 고을 사람들의 원한이 극도에 달하여 있었다고 하며 이를 위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진주성은 경상 우도 지역, 즉 영남이다. 이때 좌 우도는 왕, 즉 한성에서 바라본 기준이므로 낙동강 이서 지역이다.
정철이 이렇게 영남 측 동인까지 잡아가면서도 동인 중에서도 유독 호남쪽 동인들을 집요하게 숙청한 이유는 그의 최대 정적 이발이 호남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란 설이 지지를 얻고 있으나 지금도 논란이 분분하다.
임진왜란이 터진 이후 호남의 차별은 전보다 잦아들었지만, 반역향의 이미지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영의정 이원익이 선조에게 "양반 중에서 근왕하는 자들은 다 호남 사람입니다. 호남을 필히 거두어 써야만 합니다"며 건의하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 인재 풀이 크게 훼손되어 이전처럼 조선 사림계를 주도하는 명망 있는 산림 및 관료 배출이 급락. 이와 관련해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드디어 선조 30년(정유년) 2월 22일자에 정유재란을 맞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조 본인이 호남 탄압 사실을 직접 시인했으며 전쟁이 났으니 도와달라고 다시 호남에 러브콜을 보내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이 시기까지 호남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근거이며 이 이후 차별이 완화 혹은 없어졌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다. 실록과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한계가 있지만 많은 공문서를 베낀 난중잡록의 특성과 수정실록의 사료로 쓰인 것을 생각하면 사료성은 있으므로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탄압이 확실했던 시기는 정여립의 난 이후 10여년 정도로 볼 수 있다. 다만 반란 주동자들로 찍힌 인물들의 복권은 훨씬 더딘 편이었고 특히 정여립 본인은 당파와 관계 없이 끝끝내 역적 괴수로 남았다. 당장 인조반정 이후에 기술되어 서인 중심의 당파적 서술이 많다고 추정되는 수정실록은 물론이고 기축옥사의 피해자인 북인들 위주로 지나치게 편향되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 선조실록 또한 정여립에 대한 평은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딱히 인과성이 있다기보다는 억울하게 호남계 동인이 타겟으로 걸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기존의 반역향들은 대체로 고을 단위로 지정된 것에 비해 기축옥사로는 호남 전체가 반역향으로 몰렸다. 그리고 후대에는 이 전례로 인해 반역향을 지정할 때마다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진다. 참고로 두산 백과사전에 따르면 전라도 지방만은 정여립의 반란 이후에 비로소 차별대우를 받았을 뿐 그 전에는 공평한 대우를 받았다는 설명도 있다. 실제로 옥사 이전까지 호남은 반란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으니 당시 도민들의 낭패감은 실로 굉장했을 것이다.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곤재 정개청은 본인이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과 숙종 때 서인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기축옥사는 선조 재위기 호남계 동인에 한동안 큰 타격을 주었던 사건이며 특히 핵심 연루자로 몰렸던 이들은 수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과 관련해 류성룡(유성룡), 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옥사 당시 희생된 최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 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
사실상 정개청을 정여립 급으로 다루어서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인데 정개청의 제자들은 이를 정철이 젊을 적에 정개청이 '정철처럼 술마시고 노는 걸 어린애들이 보고 배운다'라고 말한 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다. 사실 그보다는 정개청도 정여립 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고 이에 정철이 그를 비루한 인물이란 이유로 혹독하게 심문했고 결국 고문치사한다.[반론B] 후일 정개청의 사당 건립 문제는 조선 말까지 이어지는 조선뜨거운 감자였다.
또한 남명 조식의 제자인 진주의 최영경은 정여립 본인으로 추정되는 부두목 '정팔룡'의 수괴인 '길삼봉'(吉三峯)이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길삼봉은 조선 시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최대의 미스테리 인물이다. 신분도 불명이고, 연령도 불명. 초기에는 나이 많은 어느 집 노비라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나중에는 연령도 20대에서 70대까지, 신분도 사대부에서 노비까지, 반역에 있어서도 일개 수하에서 심지어 정여립보다도 상위 위치('길삼봉이 상장, 정팔룡과 정여립이 차장')를 커버하게 되면서 정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등장하는 길삼봉의 기록만 해도 밑도 끝도 없다. 그래서 길삼봉이라는 이름은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사람이 죽어나가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말처럼 사용되었다. 길삼봉으로 엮여서 죽은 사람만 1천여 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길삼봉에 대해 정여립 본인 혹은 옥사를 주도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란 해석도 있다.
그간 최영경은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거두들이 소인이니 모두 죽여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일삼아 서인 세력의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정여립이 잔치를 열면서 최영경을 극진히 모셨다는 진술이 나오면서 잡혀들어갔다. 이에 최영경은 자신이 서울에 있을 때 인연이 있었지 편지 왕래도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주장했으나 편지가 하나 나오긴 했다. 이에 최영경은 나이가 들어서 헷갈렸다고 했고 이에 정철을 비롯한 수사관들은 아무래도 이 양반은 깨끗한 것 같으니 풀어주는 것이 맞다고 선조에게 진언했으나 대간이 그럴 수 없다고 결사 반대하는 통에 선조가 풀어주려다가 입장을 번복했고 결국 옥사하고 만다.
정여립의 난으로 일어난 일련의 숙청극을 "기축옥사"라고 한다. 기축옥사로 동인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16] 그러나 정철이 지나치게 동인계 인사들을 잡아들여 죽인 탓에 말썽이 일었고, 서인의 권력이 너무 커졌다고 우려한 선조는 정철이 광해군의 조속한 세자 책봉을 주장한 것을 빌미로 그를 파직시켜버렸다. 또한 윤근수는 삭탈 관직, 양천경, 양천회 등[17] 무고한 자들도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심지어 선조는 최영경을 복권시키면서 정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의 참혹한 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부담은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저 당시 당대의 고승인 휴정, 유정이 연루되었다.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던 승려 중 무업(無業)이란 자가 고문을 받고 휴정과 유정이 역모와 연관이 있다고 무고를 한 것. 이 때문에 휴정과 유정 모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선조가 두 사람을 신임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훗날 구국의 명장으로 칭송될 이순신도 연루된 일이 있다. 당시 이순신의 친구인 조대중이란 사람은 기생과 헤어져 눈물을 흘렀는데, 이것을 보고 '''역신 정여립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해 조대중은 끔살. 한편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의 행장록에 따르면 이때 하급 관리인 이순신이 정언신을 면회할 겸 의금부에 방문했다가 의금부 관리들이 술판을 벌이는 것을 보고 '''어진 선비[18]가 하옥되었는데 무슨 짓이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여론이 있었다는 걸 반증한다는 설부터 이순신의 의기를 강조하는 설 혹은 행장록에 적힌 미화된 이야기라는 설 등 의견이 여러가지로 나뉜다.
이순신과는 다른 면으로도 연결되는 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부하들 중 한 명인 안위[19]의 경우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조사를 받았고, 전공을 세워서 승진한 이후에도 역적의 친척이라며 몇 차례 파직을 당했다.
안습한 사례는 김빙이라는 사람의 이야기. 그는 평소에 찬 바람을 쐬면 눈물이 나는 눈병을 가지고 있었는데[20] 자결한 정여립의 시신에 한 번 더 형을 가하는 자리에서 '''하필 찬바람이 불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역적 놈이랑 무슨 관계이길래 눈물을 쏟는 거야!"라며 붙들리고 '''결국 처형당해 버렸다.[21]'''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던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수사 및 공판 기록)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법에 따라 여자와 아이는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발 가문을 개박살내고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이고, 최영경도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22] 후일 정철을 토사구팽해버린 과정을 볼 때 강경파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고 조정의 절대 다수였던 동인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인들 중 류성룡을 비롯한 남인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지나치게 서인 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선조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해석이 강하다. 실제로 선조는 류성룡 등을 탄핵한 상소를 보고 아예 류성룡에게 보여주며 "이놈들이 나라 대신들 다 죽고 나서야 그만둘 모양이다."라며 비난했고 류성룡에게는 "금옥과도 같은 선비"라며 신임을 보여줬다. 특히 서인 강경파 조헌에 대해서는 간귀라 부르며 이후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마천령 넘어 귀양가게 될 것)이라고 디스했다. 즉 남겨둬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은 남겨놨다는 뜻.
그렇지만 선조의 바람과는 달리 기축옥사로 동인이 받은 타격은 심각하였고, 정철의 처리와 급진/온건 성향을 문제로 조식 계열의 북인과 이황 계열의 남인으로 또다시 분당된다. 이후로는 류성룡 주축의 남인이 여당이 되지만, 이 남인은 '''임진왜란'''이라는 숙청 이상의 파급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책임을 떠안아 북인에게 세력을 넘겨주고, 북인은 다시 광해군과 함께 몰락하면서 동인 계열은 사실상 남인 계열의 극소수만 남아버린다. 이것은 이후 왕권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동인은 '근왕파'로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데, 인조 이후로는 '신권정치'를 추구하는 서인이 주도권을 가져가게 된다.
아울러 이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서 17세기부터 조선에서는 이른바 정씨진인설이 나돌면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정씨진인이란 정씨 성을 쓰는 진인구세주가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부패한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태평성대를 누린다는 내용인데 그 정씨 성을 쓰는 진인의 모티브가 바로 정여립이었던 것. 그리고 이 정씨진인설을 담은 예언서정감록이 18세기부터 조선 사회에 나돌면서 조선 사회는 끊임없이 반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4. 미디어 매체 및 기타


정여립은 어른의 사정으로 은근히 미화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23]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 영화판은 이몽학의 난과 이 사건을 결부시켜서 그리고 있다.
전설의 고향 2009판에서는 '죽도의 한'이라는 제목으로 정여립의 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나왔다. 전설의 고향이라 전체적으로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심었다. 정여립 역할은 공교롭게도 사극에서 죽는 역할로 자주 나오는 중견 배우 김갑수다.
이두호의 작품 '파행'에서는 주인공인 임차손[24]이 모종의 일로 모은 재물을 가지고 이 쪽과 결탁했다는 암시를 풍겼다. 오래된 친구 이순신[25]에게 말하는 대사로 길삼봉이라는 자가 동쪽에서 온...으로 암시하지만 작품 자체가 어른의 사정으로 연중되는 바람에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유승진의 포천에서는 정도령과 결탁해서 반란을 꾀하는 것으로 나온다.
웹툰 오성X한음에서는 사건이 나기 5년 전부터 선조가 배후에서 일부러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게 유도하여 장기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미끼로 쓰는 것으로 나온다.
구가의 서에서는 직접 나온 것은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언급을 통해서 언급된다. 정확히는 살해당한 박무솔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우기 위해 조관웅이 그를 이 난과 연관시킬 때 대동계가 언급된다.
징비록에서는 초반부를 장식하는 사건으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배후에 선조가 있는 것 같다는 이산해의 언급으로 선조 배후설도 같이 채택했다.
소울 칼리버 6에서는 황성경 스토리의 주된 배경이다. 황성경이 어느 날 종적을 감추고 행방불명되나, 황성경의 사부인 성한명[26] 은 서인들의 감시를 받아 공공연히 황성경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충무공 이순신동인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라 서인들의 견제를 받고 있는데, 성한명은 이순신의 절친한 친구이며, 황성경은 아예 이순신의 직속 부하인지라 이순신과 같이 엮여 있기 때문. 여기에서는 정여립의 난이 조작이라는 학설을 따랐으며, 정철소울 엣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국왕이순신이 아끼는 부하에게 소울 엣지 탐색 임무를 맡긴 것을 씁쓸해한다고 언급된다.

5. 관련 문서



[1] 이름 때문에 바다 위에 있는 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은 진안금강 상류에서 구량천과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섬 모양의 지형이다. 하중도까지는 아니고 금강과 구량천이 아슬아슬하게 잘록목을 이룬 호리병 모양이다. 네이버 지도[2] 그런데 정옥남은 사실 현장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길삼봉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배후라고 주장했다가 참형을 받아 죽는다.[3] 정철의 행적을 기록한 책[4] 1534~1599. 서인계 예학의 태두로, 이이, 성혼, 정철와는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조부는 갑사였던 송린이고 조모는 안돈후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녀 안감정이다. 부친인 송사련은 본래 관상감 판관이었는데, 자신의 입신을 위해 외숙부인 안당 집안을 무고하여 순흥 안씨 일문과 훈구파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여러 사림들을 죽게 만드는 협잡을 저질러(1521, 신사무옥) 당상관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세월이 흘러 안씨 집안은 신사무옥과 무관하다 하여 신원되었고(1566), 20년 뒤에는 이 사건이 송사련의 무고였음이 밝혀졌다. 이에 안씨 집안에서는 동인들의 비호 아래 죽은 송사련 대신 살아있는 송익필을 겨냥하여 그를 종으로 환천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송사련은 추탈되고 그 아들인 송익필은 안씨 집안의 종이 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송사련의 자식들은 각지로 뿔뿔히 흩어졌고, 송익필은 정철 등의 비호 아래 1589년까지 진안 운장산과 광주 등지를 전전하였다. 일각에서는 이 시기에 졸지에 선비에서 노비로 신분이 떨어질 판이 되자 정철과 함께 동인을 몰락시킬 꾀를 내었고, 이것이 기축옥사로 발전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후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해배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았고, 1599년 당진 마양촌에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가례에 주석을 단 가례주설이 대표적이며, 제자로는 김장생, 김반, 정홍명, 강찬 등이 있었다. 김장생의 제자였던 우암 송시열은 훗날 송익필의 글이 없던 묘비에 글을 써주면서 송익필은 김장생이 첫걸음을 내딛게 이끌어 줬다고만 언급하였고, 김장생이 스승으로 모신 것은 이이였다고 공식 기록하였다. 송익필 신분상의 이유로 서인의 학통에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인듯 하다. 대한제국의 멸망 직전인 1910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묘소는 당진시 원당동에 있다.[5] 이와는 반대로 송익필이 동인강경파들을 엮기 위해 기축옥사를 기획-조종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송익필이 기축옥사 이후 동인들을 탄핵하는 상소의 배후로 지목되어 유배를 간 것으로 보았을 때, 그가 동인들을 탄핵하는 데 관여한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송익필은 기축옥사를 기획하고 조종할 모략을 꾸밀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안당 집안과의 노비 환천 소송에서 지고난 후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어느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산해 정철 김은휘(황강 김계휘의 동생이자 김장생의 숙부) 등이 마련해준 거처를 전전하며 피해다녔던 처지였다. 본인과 식솔들 건사하기도 힘든 이런 상황에서 모략을 꾸민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그 많은 동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송익필에게 순순히 당해버리는 것도 납득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한편 송익필 배후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는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작하기에 누구보다 알맞는 인물이었다. 동인에 대한 원한이라는 동기와 모략을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서인의 수장인 정철과 가까운 사이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노비로 떨어졌다는 점을 부각시켜 서인을 한낱 노비에게 놀아난 세력으로 공격하기에도 적당하였기 때문이다.[6] 동서 분당 초기에는 동인이 압도적인 집권 세력이었다.[7] "율곡 이이는 서모와 싸우고 한때 불교에 심취하였던 패륜아성균관에 모실 필요도 없다"거나 하는 류의 이야기가 정여립에게서 나왔다. 다만 율곡 이이가 학문이 높지만 한때 승려 생활 즉 불가에 몸 담은 전력 때문에 출사를 못했으므로 불가에 몸 담은건 비밀은 아니고 누구나 다 아는 얘기였다. 또한 정여립이 동인을 대표해서 공박에 앞장선 면이 강했다.[8] 정여립이 한때 자신의 스승인 이이에게 이런 패드립을 친 것은, 이이가 자신이 이조전랑에 추천받은 걸 반대했기 때문이다.[반론A]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서 왕의 외척인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를 반대하는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갈리면서 동서 붕당이 시작되는데 이때 붕당을 꺼리며 이후에도 그렇지만 양시양비(兩是兩非)를 주장하는 이이와 함께 박순 등이 서인으로 분류되고, 정여립은 동인의 입장에 선다. 이전에는 동서 붕당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정여립은 처음부터 동인으로 이때부터도 심의겸 지지자들을 깠다. 이를 훗날 소급적용하여 이이는 서인이고, 이이의 제자는 서인이니 그러므로 동인이 됐다는것은 당파를 바꾼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건 억지이다. 즉 서인 입장에서 자신들 구미에 맞게 억지로 문제를 삼은 것뿐이다.[재반론A] 확실히 앞에 나온 내용에서처럼 선조시기의 붕당은 정확하게 구분되는 바가 아니였다. 정철은 학통상 동년배인 율곡이 아닌 화담 서경덕에 가까웠는데, 서경덕의 제자들은 대체로 북인계열 속하였다. 그리고 율곡 스스로 서인이라고 한 적도 없다.(붕당이 시작되는 측면에서도 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비교적 오래전에 조정에 출사한 노회한 사림을 지칭하는 명칭이였고, 선조시기쯤에 새롭게 출사한 퇴계와 남명, 화담의 제자들이 동인이라고 패거리를 만들었다. 이에 동인과 비슷한 연배의 율곡은 이들을 조화시키기 위하여서 조정자를 자처하였지만, 동인 패거리들은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율곡을 서인이라고 지칭시켰다. 이후 율곡의 제자들은 대체로 서인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여립이 당파를 바꿨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지만, '''그는 유학에서 중시하는 君師父一體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에 왕인 선조도 그렇고, 정통유학을 자처하는 퇴계의 제자들에게서도 비판받았다.(남인들도 율곡을 승려출신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제자가 스승을 비판하는 것에는 엄격한 편이였다.) 그러나 실천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남명의 계통에서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류하다가 큰 타격을 받았다.[9] 정언신은 이렇게 당했어도 말할 것이 아닌 것이 고변 당시에는 전혀 믿지 않고 손 놓고 있다가 선조가 독촉하자 하는 시늉만 하려고 하였다.(이는 정여립의 반란이 거짓이라고 생각한 탓이고, 고변자들의 일부가 종계변무에 공을 세운자들이라 무고죄 처벌이 어렵다라는 측면에서 시간을 끌어서 흐지부지 넘기려는 생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고 상식적으로 역모 의심자의 인척이 역모사건에 추국을 담당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후 문제가 된 서신도 처음에는 주고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는데, 이후에 발견되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였다.[10] 물론 정철의 뒤에는 선조가 있었다.[11] 다만 천여 명일지는 의문이다. 과장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12] 사기 조각 등이 난무한 바닥에 꿇리고 무거운것으로 짓누르는 형벌. 가뜩이나 고문법중에는 인두로 지지는 낙형과 함께 제일 강도가 높았고 고문치사하는 경우가 많아 2차 이상을 가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는데 성장중인 어린이에게는 그야말로 사형선고였을것이다.[13] 보통 노인과 어린아이는 고문하지 않고 금고하거나 노비로 만드는 쪽으로 되어 있었고, 조사를 담당했던 정철마저도 노모와 아이만은 아량을 베푸심이 옳지 않겠느냐고 상소하였으나 선조는 '역모 사건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며 어거지로 끌고오게 했다.[14] 반면 선조정철이 압수한 천여 권의 책 중 <우득록>을 보고 "이 책은 옛 글을 읽은 사람의 저술이다. 모두 돌려주도록 하라."라고 했으나 돌아온 건 우득록 하나뿐이었다고 한다.[15] 경상도 각 지방의 의병 및 관군과 의병의 연계 활동, 의병 상호간의 교섭 등을 기술한 중요한 사료 중 하나[반론B]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원래 박순과 허엽(허균과 허난설헌의 부친)은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하는 동문이였는데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서 박순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허엽은 김효원을 밀면서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선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같은 스승에게 배워도 당색이 달라지니, 학문적 성향이 당색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였다. 정개청은 화담 서경덕으로부터 수학하기도 하였다. 원래 박순과 허엽의 당파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심의겸, 김효원 이전에는 서인 동인 붕당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박순은 서인으로 분류된다. 정개청의 제자들은 좌의정 남이공(南以恭)과 같이 동인 계열이 많아서 동인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정개청 자신은 뚜렷한 당색없이 학문에만 전념하는 학자였다. 박순이 서인이니 정개청도 당연히 서인이고, 그런데 동인으로 바꿨다는 주장은 서인 측에서 나중에 꿰어맞춘 주장일 뿐이다.[16] 하지만 서경덕계(=북인 온건파)인 이산해가 영의정을 하고, 남인의 경우엔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17] 양천회는 정언신을 고발했고 양천경은 최영경을 고발했다.[18] 당시 정언신은 정여립의 친척으로서 원래 정여립의 반란 음모를 듣고 비웃은 사람이었으며 원래 사건 조사관이었으나 여립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자리에서 쫒겨나고 수감되었다. 이 때 선전관이었던 무신 이응표는 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문서 중 정언신 관련 편지들을 몰래 처분했으나 문인들의 멋부리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 17장이나 문서가 남았다.(무신 이응표가 정언신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정여립과의 서신을 모두 처리했다고 말해서, 정언신은 서신인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앞서 나온 바와 같이 유식하지 못한고로 17장이나 그냥 두면서 정언신의 죄가 커졌다.)[19] 명량해전 때 이순신에게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며 호되게 꾸중을 들은 그 장수이다. 명량해전 당시의 이미지를 앞뒤 이해없이 본다면 느낄 선입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부산왜군 진영에 침투해 진영을 홀라당 불태워 버리는 등의 작전을 수행한 인물이고 명량해전 때도 가장 먼저 복귀해 싸워서 이순신의 추천으로 파격 승진한 사람이다(솔직히 안위는 당시 일개 고을 수령이라서 해전에 익숙한 인물도 아니었고 직책상 꼭 참여할 인물도 아니었다). 이 두 사건으로 성웅의 남자란 평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김경진이 쓴 '격류'를 포함한 임진왜란 작품이나 슈타인호프가 쓴 이순신의 나라에서 그러한 설정들을 차용. 최측근으로 나타난다.[20] 안구건조증의 증상이다[21] 선조 수정실록 24권, 선조 23년 3월 1일 임인 4번째 기사[22] 하지만 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던 동인은 정철이 어차피 선조가 최영경 죽일 것을 알고 일부러 멋부린 것이라고 평가하며 정철을 탄핵했다.[23] 물론 이는 정여립이 잘했다기보다는 이후 선조가 벌인 여러 찌질함에 대한 반동이다.[24] 임꺽정의 아들로서 생존했다.[25] 이순신은 임꺽정 원작에서도 까메오로 나왔다. 파행에서는 아예 임차손과 이순신의 평생에 걸친 우정이 주제이다.[26] 성미나의 아버지. 무신(武神)이라고 불릴 정도로 검술에 능한 무사이며, 가공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