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서울 성북)

 


1. 개요
2. 창작물에서
3. 같이보기


1. 개요


貞陵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
본래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던 능이었다. 그러나, 1409년 태종의 명령에 따라 지금의 자리인 정릉동으로 옮겼다. 원래는 안암동으로 능지를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능을 이장하면서 능 주변에 있던 비석 및 석상을 모두 제거하고 능을 묘로 격하, 사실상 주인없는 가묘(假墓)로 전락시켰다. 세종대왕 때는 영정마저 불살랐다. 그러다가 1669년 우암 송시열현종(조선)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 때 들어서 정릉으로 봉안되었다.
태종 이방원이성계를 꼬드겨 이복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 계모 신덕왕후를 싫어하였으며, 신덕왕후 역시 방원을 경계하였다. 신덕왕후가 사망한 후, 결국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잡아두고 이복동생 이방번이방석을 붙잡아 죽였다.
이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를 비롯한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못해 결국 정동에 있던 능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강제이장시키고 능에서 묘로 격하하며 심지어 정릉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청계천 광통교 밑을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리고 이 돌들을 보면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힌 채 끼워진 돌들도 볼 수 있다. 조선이 사라진 후인 오늘날까지도 신덕왕후태종의 악연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축물.[1]
아이러니 한 것은 이방원이 정릉 석물들을 광통교 밑에 처밖아 놨기 때문에 청계천에 잠겨 사람 손이 타지 않았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조각들을 보면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등이 보이는데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이어서 아직 유교가 절대화 되기 이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금강저에는 중앙에 조선왕조의 어기에도 그려저 있는 태극 문양이 있어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서울 중구의 정동은 정릉을 처음 조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그대로 정릉의 '정'에서 가져왔으며, 이후 정릉을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그곳의 마을 이름 역시 능 이름을 다시 가져와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또 하나의 정릉(靖陵)이 있는데 이 곳은 별개로 조선 11대 왕 중종이 홀로 묻힌 능이다. 상세내용은 정릉(서울 강남)으로.

2. 창작물에서


  •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정릉이 누구의 무덤이냐"는 교수의 질문에 "정조?"라고 대답하는 여주인공 양서연(수지)의 대사가 있었다. 정조가 정답이 아닌 거 같자 정종? 정약용? 이라고 연속으로 틀린 답을 내놓는다. 틀린 답을 내놓을 때마다 강의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커진다.

3. 같이보기



[1] 여담으로 이 광통교 정릉 석물들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복원되기 전에는 청계고가차도 밑에 묻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