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
1. 소개
廣通橋 / Gwangtonggyo
청계천의 다리이다. 조선시대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도성 내 주요 도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였다.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청계천의 2번째 다리다.
2. 이름
‘광통교(廣通橋)’는 광통방(廣通坊)의 다리란 뜻이다.
이외에 줄임말인 ‘광교(廣橋)’를 비롯하여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광충교(廣沖橋)’란 이름도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광교라고 많이 불렀다.
이중 대광통교와 북광통교의 경우, 청계천의 지류인 창동천[1] 에 놓인 같은 이름의 다리와 비교되어 붙여진 이름이다.[2] 청계천은 창동천보다 북쪽에 있었고, 다리 역시 창동천의 광통교보다 규모가 컸기에 북광통교, 대광통교라 불린 것이다.
3. 위치
원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와 중구 남대문로를 잇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35 (서린동)와 중구 청계천로 30 (다동) 사이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래 역사 항목 참조.
4. 역사
조선 태조 때 창건했으며 원래는 흙으로 만든 다리였다. 이후 1410년(태종 10년)에 홍수로 무너지자 돌다리로 고쳐지었다. 이 때 다리 건설에 사용한 돌들은 태종의 계모 신덕왕후가 묻혔던 정릉에서 가져왔다.# 이는 신덕왕후에게 원한을 가졌던 태종의 복수(?)라는 의견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정릉에 쓰인 돌들은 무사하여 현대까지 여말선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한성의 큰 길인 육조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 그리고 숭례문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광통교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한성의 최대 번화가가 되었다. 광통교 주변에 여러 수공업 작업장들이 들어섰고 큰 재래시장들도 형성되었다. 심지어는 거지들도 이 근처에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3]
후대 임금들도 광통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단 왕이 숭례문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용하던 다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다리인 만큼 임금 자신이 백성들을 생각한다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도 많이 열렸고,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1760년(영조 36년) 청계천을 준설할 때 영조가 직접 나와 이곳에서 공사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년)에 다리의 기초 부분을 고쳐짓고 난간을 수리했다.#
이후 큰 변화없이 있다가 1899년(광무 3년) 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전차노선이 생기면서 다리 동편에 전차선로가 깔렸다. 1910년 8월에 이 노선이 복선화되면서, 다리는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혔다.
그러다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도로 밑에 묻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 부재들은 창덕궁과 창경궁, 탑골공원으로 옮겼다.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 당시에 원 위치에 세우려 했지만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기존의 광통교는 서쪽(상류 쪽)으로 150m 가량 옮겨 복원했다. 그리고 원래 광통교 위치에는 광교라는 현대식 다리를 만들었다. 현재 광통교는 사람만 통행이 가능하고 차량은 불가능하다.
5. 특징
- 길이 12.3m, 너비 14.4m, 높이 3.7m로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길이보다 폭이 더 넓은 것이 특징이다.
- 광교 아래로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나마도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어서 끼워넣은 것은 조선왕조가 사라진 후인 오늘날까지도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반감을[4] 제대로 보여준다. 동시에 광통교 밑에 처박힌 탓에 사람 손을 덜 타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보전되었고, 건원릉 석물에서와 같은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 태극 문양 등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이전에 조선 초까지 남아있었던 도교, 불교 문화의 잔재를 느낄 수 있다.
6. 교통
6.1. 지하철
-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도보 6분)
-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3번 출구 (도보 8분)
-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 (도보 9분)
6.2. 버스
- 이 곳을 참조.
7. 여담
- 조선시대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백성들이 다리를 밟는 '답교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1년 내내 다리가 건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양의 주민들은 먼저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그 다음에 청계천의 다리 위를 왔다갔다 했는데, 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통교와 수표교로 갔다고 한다. 이 답교놀이는 조선 멸망 이후 한동안 맥이 끊겼다가 1970년에 복원되었고 2009년 3월 5일에 서울시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 하루는 성종 임금이 잠행하다 광통교를 지날 때, 다리 밑에서 묵으려던 한 사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내는 “경상도 흥해[5] 에서 올라온 숯장수 김희동으로 임금님이 어질다 하여 죽기 전 꼭 뵙고자 어렵게 찾아왔다. 임금님 뵈면 해삼과 전복도 드리려고 가져왔다.”고 했다. 이에 흐뭇했던 성종은 자신을 이 첨지라 소개한 뒤 왕을 꼭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따라온 별감에게 귀띔한 뒤 별감의 집으로 김희동을 데려갔다. 다음날 성종은 김희동에게 왕을 만나려면 벼슬이 있어야 하니 원하는 벼슬이 있으면 말해보라 했다. 김희동은 당황했지만 자기 고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충의라는 벼슬을 이야기했다. 사실 김희동은 이 때 반신반의 했는데 그 다음날 정말로 충의초사(忠義初仕)란 벼슬이 내려져 김희동은 궁으로 들어갔다. 가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 첨지가 바로 그렇게 보고싶던 임금이었다. 김희동은 멘붕이 심하게 와서 갖고 온 해삼과 전복을 땅에 떨어뜨리기까지 했으나 성종은 마음을 갸륵히 여겨 그것을 수라상에 올리라고 명했다. 성군인 임금과 그 임금을 생각한 백성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 김두한이 심영을 실제로 쏜 곳이다.[6][7]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선에 위치[8] 해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저격했다고 한다. 그러면 관할 구역이 애매해서 이 사건에 대해 종로구 경찰과 중구 경찰이 서로 책임소재를 떠넘길 수 있었기 때문.[9]
- 2016년부터 매년 4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매주 주말마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 - 청계천 타임투어마켓'이 열린다. 전통의 흔적이 묻어나는 장소를 살려 한국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컨셉이 특징이다. 매주 토요일은 오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요일은 오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트 참조.
[1] 倉洞川. 남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계속 흘러 무교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던 개천이다. 이름은 근처에 있던 선혜청의 곡물창고에서 유래했다.출처[2] 지금의 남대문로1가 23번지 일대에 놓였다.[3] 사실 번화가는 거지들에게는 좋은 곳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그만큼 동냥 받을 확률도 높아지니까.[4] 정확히는 외척에 대한 반감이었지만. 태종은 자신의 처가에게도 그렇고 며느리의 집안에 대해서까지 매우 가혹했다.[5]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일대.[6] 다리는 광통교가 맞으나, 위치는 지금의 광통교 자리가 아닌 신설 광교 자리이다.[7] 이외에도 드라마에서 각색된 부분이 많다. 한 예로, 심영이 사건 발생때 공연하던 극장은 중앙극장이 아닌 현재 명동예술극장인 명치좌였다.실제 김두한의 증언을 심영물에 합성한 영상[8] 정확한 경계선은 청계천이다.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는 경계선 위에 있는 것.[9] 물론 당시가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였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현대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책임기관이 지정되거나 상위기관이 수사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