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

 

1. 개요
2. 연혁
3. 교통
4. 능침사찰 목록
5. 같이보기


1. 개요


'''興天寺'''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사찰이다. 행정구역상 주소는 서울 성북구 흥천사길29(돈암2동 595).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2. 연혁


흥천사는 원래 한양도성내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 태조 5년(1396년)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강씨의 능원인 정릉을 도성내에 조성하고, 강씨의 원찰로써 정릉 동쪽에 흥천사를 지었다. 흥천사를 지은 후 태조 7년(1398년) 7월에 열린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직접 참여하거나,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에 사찰 승려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고 천도회를 주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지만, 계모 신덕왕후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1] 태종이 즉위한 뒤인 태종 3년(1403년)에 사찰에 딸린 전답과 노비의 수를 줄이고, 태종 8년(1408년)에는 절의 건물 170칸을 뜯어서 명 사신들의 객사인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나마 사찰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어서 태종 10년(1410년) 태조의 유지(遺旨)를 좇아 절을 수리하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중수하였다.
세종 6년(1424년) 선교양종 통합 당시 교종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 19년(1437년)부터 세종 23년(1441년) 3월까지 왕명으로 사찰을 중수하였고, 절의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慶讚會)를 개최하였으며, 세종 25년(1443년) 4월 회암사(檜巖寺)[2] 주지로 있던 승려 만우(卍雨)를 데려다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한, 세종 29년(1447년)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하였다.
세조 8년(1462년)에는 범종을 만들어서 이 사찰에 봉안하였으며, 옛 흥천사 부지에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한씨의 사저를 지어주기도 했다.[3] 예종 1년(1469년) 명의 왕과 왕후가 지어 보낸 불번(佛幡)을 이 절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성종 11년(1480년) 절을 다시 중수하였으며, 연산군 10년(1504년) 대궐 안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옮겼는데, 그 해 12월에 화재로 절이 소실되어 사리각만 남았다. 중종 5년(1510년)에는 이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선조 2년(1569년)) 사찰이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함취정(含翠亭) 옛 터로 절을 옮겨 지었다. 어찌어찌 명맥은 질기게도 이어져 온 셈이다.
정조 18년(1794년) 이 절의 승려 성민(聖敏) · 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그 뒤 헌종 12년(1846년) 구봉(九峰)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철종 1년(1849년)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철종 4년(1853년) 대웅전(지금의 극락전)을, 철종 6년(1855년) 명부전(冥府殿)을, 고종 2년(1865년) 대방(大房)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로 되돌렸다.
현존하는 전각으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4] · 용화전(龍華殿) · 칠성각 · 독성각(獨聖閣) · 만세루(萬歲樓) · 승방(僧房) · 대방 · 일주문(一柱門) · 종각(鐘閣) 등이 있다. 세조가 봉안했던 범종은 흥천사명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는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 제1460호이다.
사찰 뒤편으로 구립 흥천어린이집과 느티나무어린이집 두 곳의 어린이집이 있다. 두 곳 모두 성북구에서 건립한 '''공립유치원'''이고 흥천사에서 어린이집 부지를 제공했으며 서울시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옥 양식의 어린이집 건축물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의 시인 이상이 1936년에 이곳에서 화가 김환기의 아내였던 수필가 김향안(본명 변동림)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리고 1년만에 이상은 결국 사망했다. #

3. 교통


서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역과 가깝다. 6번 출구로 나와서 천천히 걸어도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아니면 마을버스 22번을 타고 흥천사입구까지 가도 좋다. 다만 올라가는 길이 경사로이고 이 길이 좀 가팔라서 경사로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다. 흥천사 입구에는 350년 된 고목과 절까지 나 있는 가교가 놓여 있다.

4. 능침사찰 목록




5. 같이보기


[1] 정확히는 신덕왕후처럼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정치를 좌지우지하려는 외척들에 대한 경계였다.[2] 태조가 한때 머무르던 곳이기도 하다.[3] 이 사저는 훗날 월산대군의 사저로써 임진왜란 이후에는 임시 행궁으로도 사용되었고 대한제국 시대에는 황궁으로까지 격상된다.[4] 명부전의 현판은 붉은 바탕에 금자로 쓴 것으로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