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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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의 제3대 황제(재위 649년 ∼ 683년). 당 태종의 9남이며 휘는 치(治). 모친은 문덕황후 장손씨로, 문덕황후의 3남. 시호는 천황대성대홍효황제(天皇大聖大弘孝皇帝)로, 줄여서 홍황제(弘皇帝)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당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고구려, 백제, 신라, 토번, 돌궐, 왜)와 전쟁을 한 인물이다'''.
2. 황태자가 되다
그는 적자로서는 3번째 아들#s-1이지만 서자#s-1까지 다 포함하자면 태종의 9번째 아들이었다. 이로 인해 원래는 황위 계승과 상당히 먼 입장이었다. 그러나 위징 사후 태자인 이승건의 위치가 불안정해지고[2] 위왕 '''이태'''가 태종의 총애를 받으며, 서로 다투기 시작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고, 결국 계승권이 위태롭다 여긴 승건태자가 한왕 이원창, 재상 후군집과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켜 황위에 오르려다가 발각되어 이원창, 후군집은 사사되고, 이승건은 폐서인되는 일이 일어나면서 일약 이치가 황위 계승의 물망에 오르게 된다.
태종은 처음에는 위왕 이태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태종의 외척이자 유력한 사족인 장손무기가 반대했고, 여기에 위왕 이태가 새로운 경쟁자가 된 진왕 이치를(이때는 진왕이었다.) 협박하는 일이 발각되면서 자신의 사후에도 자식들 간 다툼이 없길 바랬던 태종의 마음이 변하게 된다.[3]
그러자 서자이나 가장 뛰어난 '''이각'''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장손무기가 '''매우 격렬하게 반대'''해서 자신과 친한 조카를 옹립하고자 했고, 결국 이세민은 이각 대신 이치를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4] 이후 태종은 자살쇼를 통해 인자하고 효성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정관 18년(644년) 이치를 황태자로 세운다.
3. 황태자에서 황제가 되기까지
태종은 어떤 의미로는 어쩔 수 없이 이치를 세운 꼴이었고, 황태자가 된 시점에서 아직 20살도 안 된 데다 직전까지 계승 순위에서 상당히 먼 처지다 보니, 신경을 써서 태자를 교육하게 된다.
유력한 중신들을 황태자 주변에 붙이는데, 장손무기를 태자사보, 방현령을 태부, 소우를 태보, 이적을 첨사, 이대량을 우위솔, 우지녕과 고계보를 우서자, 장행성을 소첨사, 저수량을 빈객으로 삼는다. 태반이 공신들이자 재상급인 인재들을 황태자 주변에 붙임으로써 그 지위가 굳건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여기에 자신과 항상 동행하게 하면서 국정에 관해 의견을 말하게 하였고, 자신의 통치 경험을 《제범》이란 책으로 엮어서 학습시키게 하는 등 황제 속성 교육을 시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하게 한다. 또한 이 시기에 고종이 측천무후와 만난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사망시에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불러 고명대신으로 삼고 유언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있으면 너는 천하를 걱정하지 말라." 하는 말을 남겼다. 아무래도 그렇게 속성 교육을 했다지만 당 고종이 여전히 못 미더웠던 모양.
4. 황제로서의 치세
'''의외의 정복군주'''
649년에 즉위한 고종은 아버지에 비하면 별로라는 평이 대체적이지만 그래도 나라를 잘 꾸려나간 것으로 평가받는다.[5] 그러나 측천무후를 후원해 그녀가 국정에 참여하고 공신들을 숙청하며 실권을 잡는 데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는 좀 까이기도 했다.
4.1. 황후 폐위와 새 황후 책봉
고종은 기존의 황태자비였던 왕씨를 황후로 올리나 곧 관계가 소원해지고, 숙비 소씨를 총애하게 된다. 이에 황후 왕씨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하려 하나 내로라하는 명문 집안이었던[6] 황후 왕씨를 장손무기, 저수량을 비롯한 좌명대신들이 옹호하여 분쟁이 심각해진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종은 감업사에 자주 들러 관례대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무미랑(후의 측천무후)를 총애하게 되었고, 652년 결국 무미랑에게서 아들 이홍을 얻는다.[7] 그리고 653년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의 대립이 극한에 치닫는다. 황후 왕씨는 숙비 소씨에 대한 고종의 총애가 멀어지게끔 하기 위해 무미랑을 다시 황궁에 들여 정2품 소의(昭儀)에 책봉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황후의 생각대로 고종의 총애가 숙비 소씨에게서 멀어졌지만, 소의 무씨가 고종을 독점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 황후는 소의 무씨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소의 무씨는 황후와 숙비 소씨에게서 배척을 받는 후궁들과 빈천한 가문 출신의 서족들, 장손무기 및 저수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적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구축했다. 결국 치열한 정치 투쟁 끝에 소의 무씨의 딸 안정공주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8] 공신들의 수장 격이던 저수량과 장손무기가 강등되고,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가 폐서인되어 자결함으로써 무씨가 황후로 책봉된다. 직후 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년 ~ 664년)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맏이인 이홍을 황태자 자리에 올린다.
이러한 황후 폐위와 책봉 과정은 표면상으로는 측천무후의 미모에 홀린 고종의 잘못된 행동이라 평을 받고 있지만, 속내는 전통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관롱 귀족(사족) 세력[9] 과 이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던 서족 세력의 정치 투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며, 측천무후의 승리는 관롱 귀족 집단의 정치적 패배와 몰락으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이런 장면들을 주도한 인물은 측천무후가 아니라 고종 자신이라는 것이 최근의 중평이다. 실제로 측천무후에게는 어느 정도 용인이 되었지만 선황 태종의 측실로 이미 출가했다가 환궁했다는 약점도 존재했고, '''고작해야 당대에 출세한 개국공신이 전부'''인, 격이 턱없이 낮은 가문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10] 때문에 측천무후는 고종의 총애를 제외한 지지 기반이 전혀 없었으므로 황실 내에서 자기 기반 다지기에도 급급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천진 군벌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여서 승리했다면 정치의 신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지만, 그럴 가능성보다는 고종의 심중을 대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1]
4.2. 대외 정책
고종은 태종의 뒤를 이어 '''팽창주의적, 공격적 대외 정책'''을 추구했다. 측천무후의 포스 때문인지 공처가의 이미지도 강하고 병약했다는 점 때문에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구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상당히 호전적인 전쟁광이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전쟁을 많이 했다. 이러한 전쟁은 동쪽에서는 신라와 손을 잡고 아버지 당 태종이 정복에 실패했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등의 성과를 냈지만 나당전쟁에서 패해 목적한 바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한반도에 국력을 집중하느라 서쪽 토번의 가르친링의 성장을 제때 견제하지 못해 수도 장안에서 가까운 지역까지 위협받는 처지가 된다. 애초에 토번은 당이 키운 감이 없지 않은데 토번을 제때에 견제했다면 초기에 몰락시킬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으니 골치거리를 남기게 된 셈.
4.2.1. 돌궐과의 전쟁
고종은 즉위 직후부터 돌궐 세력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인다. 태종에 의해 몰락했던 동돌궐은 설연타의 패망으로 인한 공백을 노려 거비가한이 재기를 노렸고, 세력을 유지하던 서돌궐은 이를 후원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즉위 직후인 650년, 우효위랑장 고간이 거비가한을 추적, 생포한 다음 그 부족을 욱독군산에 이주, 관리하여 동돌궐의 재기를 늦춘다. 이후 657년 좌둔위장군 소정방은 전격적인 진공 작전을 펼쳐 서돌궐의 사발라가한 아사나하로를 공격, 10만여 돌궐군을 격파하고, 종속 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력을 증강해 결국 신강 지역 버얼타라 강(쌍하(雙河))에서 사발라가한을 사로잡고 서돌궐을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658년에는 쿠차에 있던 구자국을 점령하고, 여기를 '''안서도호부'''로 삼은 후, 재차 진격하여 659년 소그드와 페르가나에 도독부를 설치하면서 파미르 고원에 미치는 역대 최대 강역에 도달한다.[12] 하지만 이들 도독부는 665년 폐지된다. 이후 한동안 당나라는 돌궐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679년 동돌궐은 아사나니숙을 가한으로 옹립하며 재봉기, 당 고종은 배행검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30만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진압한다. 아사나복념이 아사나니숙에게 호응해 또다시 들고 일어났는데 당은 이간계를 통해 이를 다시 진압한다. 그러나 서돌궐 또한 682년에 들고 일어났고 이는 왕방경에 의해 일시적으로 진압되었지만 고종 재위 말기 제2 돌궐 제국이 건국되었고 당을 크게 위협하기에 이른다. 당고종에 뒤를 이어 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후대 황제들 역시 다시 강성해진 돌궐에 골머리를 앓았으며 흔하게 북방을 유린당한다.
4.2.2. 백제를 멸망시키다
처음에는 부황의 '''정관의 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신하들을 옆에 두고 대외적으로도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이는 645년 고당전쟁 당시 보인 백제의 태도 때문이었다. 본래 백제는 당나라 건국 직후부터 대당 외교에 대단히 공을 들였으며, 이것이 고구려를 견제하려던 당의 의도와 맞아떨어져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전 작업 아래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대대적으로 신라의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었다 (643년) 이후 당태종의 경고에 따라 의자왕은 스스로 군사를 물려야만 했다. 그리고 645년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백제와 신라 양쪽 모두에 고구려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는데 여기서 신라는 당의 요청에 응해 원군 3만을 보냈지만, 함께 고구려를 치기로 했던 백제는 원군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여 644년 김유신에게 빼앗긴 7개 성을 되찾는다. 즉 백제가 당을 돕는 신라를 공격→고구려 정복에도 간접적으로 걸림돌이 된 셈이므로 태종이 백제에 분노해, 이 사건 이후 백제는 태종이 죽을 때까지 사신을 보내지 못했으며, 고종이 즉위한 후인 650년이 되어서야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당은 김춘추의 언변에 화답해 외교 파트너를 백제에서 신라로 완전히 교체해 버린 후였다.
이를 증명하듯, 651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화친의 조건은 '신라에게서 뺏은 땅(대야성)과 포로들을 모두 돌려줘야 하며, 이를 어길 시 백제를 정벌하겠다'는 것이었고, 의자왕은 당과의 회복노선에 최선을 다하는 듯 하면서, 고구려를 도와 말갈과 함께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신라의 한강 지역 33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이중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로써 다시 한번 백제는 당나라와의 외교 노선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버렸다.
거기에 백제의 내홍이 발생하는데, 642년 의자왕이 백제의 귀족들을 대거 쳐내며, 자신의 아들들에게 고위직을 물려주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여기에 불만을 가진 백제의 귀족 세력들이 대거 신라에게 붙는 상황이 되었다. 655년 10월 김유신이 사비성 근처인 도비천성을 함락시키자 좌평 임자와 내통하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또한 당 고종 역시 신라와 함께 협공할 것을 계산하고,[13] 백제에게는 관계 정상화를 두고 계속해서 거짓정보를 흘렸는데, 이 상황에서도 상황판단을 잘못하며, 자아도취한 의자왕은 결국 성충의 충언을 무시하고 그를 아사시키는 병크를 터트렸다. 고종은 마침내 660년 3월 소정방을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지시하였고 신라 또한 김유신#s-1과 5만 군사를 보내 동서로 협공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대를 끌고 오는 것을 의자왕이 파악할 때쯤, 한강 유역과 대야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의 주력군을 소집하고, 왜에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서, 계백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지연전을 펼치도록 했지만, 결국 전멸했고 자신은 웅진성으로 달아났으나, 예식진의 배반으로 결국 660년 7월 18일 항복을 선언한다. 당군은 의자왕을 포함해 부여씨 왕족, 귀족, 일반 백성 등 포로 13만 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이후 백제는 지방군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이 시작되어 약 3년간 항쟁하였으나 부흥군과 파병된 왜군 연합군이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몰살당하며, 백제의 잔여 세력까지 완전히 몰락한다.
4.2.3. 고구려를 멸망시키다.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하자 고구려는 신라, 당나라,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고립 상태가 되었다.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지만 이는 태종 당시는 백제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도 하고, 당시 준비 중이던 대규모 고구려 원정에 대한 중지 정도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애초에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이 고구려군에 패퇴했고 이후로도 꾸준히 전쟁을 벌이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의 숙원 사업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655년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여 33개 성을 빼앗자 신라의 김춘추가 구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고구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선제 공격을 했지만 패퇴하였다. 659년에 재차 공격했지만 성과없이 퇴각했다. 그러다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자 고구려를 고립시켰다고 판단하고, 이를 곧 정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661년 정월에 4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하 지역에 도착해 공격하고자 했지만 이때는 백제 부흥군이 나, 당 연합군 진영에 선제 공격을 가하여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 공격 시기를 늦추게 된다.
그리고 그해 8월, 결국 고종은 군대를 내보낸다. 이에 대해서는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이 약간씩 다르다. 대략 계필하력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 대총관, 임아상을 패강도 행군 대총관, 소사업을 부여도 행군 대총관, 정명진을 누방도 행군 총관, 방효태 를 옥저도 행군 총관[14] 으로 삼아 총 35개 군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15] 가장 먼저 고구려 영내에 진입한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었다. 661년 8월, 소정방은 바다를 통해 패수로 진입, 저지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 근처인 마읍산을 점령하여 군영을 세운 후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평양성은 함락이 쉽지 않았고, 전쟁은 장기전이 된다.
그러는 사이 서북 지역에서 철륵이 봉기하면서 계필하력과 소사업군은 철수해야만 했고, 원정군 자체가 절반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방효태군의 괴멸로(사수 전투) 소정방군이 고립되자 결국 원정 자체를 중지시켰다. 이후 당 고종은 철륵의 봉기를 진압하고, 토번의 도전에 대처하는 등 바쁜 시기를 지내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구려에 대한 정벌 의욕을 포기하지는 않았던 당고종은 때마침 연개소문 사후 그 세 아들들간의 정권 투쟁의 결과로 맏아들 연남생이 국내성 일대를 거느리고 투항(666년)하자 재차 공격에 들어간다. 여기에 신라 또한 연씨의 분열로 연정토가 바치는 영토를 얻었고 남쪽에서 협공에 들어갔다.
당은 667년 1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북쪽의 신성을 비롯, 그 휘하의 16개성을 함락시키고 국내성에 웅거한 남생과의 연결선을 확보했으며, 668년 2월에는 부여성과 휘하의 40여개의 성을 함락시켜 후방을 안정화시킨다. 그리고 그해 8월 평양성을 포위하였고 신라와의 협공으로 9월 21일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하고 보장왕에게 항복을 받는다.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705년 만에 멸망했다.
4.2.4. 나당전쟁
그러나 대고구려 전쟁이 끝나자 고종은 신라 또한 장악하고자 시도한다. 백제 영역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영역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명명'''하면서 자국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 그러나 신라는 이전부터 당나라에 대한 불만을 갖고, 당의 야욕을 눈치채고 있었다. 결국 신라군이 검모잠, 안승이 이끄는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힘을 합쳐, 요동과 웅진도독부를 선제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은 7년여에 걸처 이어졌으며, 결국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 등 중요한 교전에서 신라군에게 패배, 당고종은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한반도 바깥 북쪽으로 철수시켜 사실상 나당전쟁을 포기했다. 이후 양국은 장기간에 걸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했다가 당 현종 때에 관계가 복구된다.
4.2.5. 토번과의 전쟁
고종은 토번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실패만 맛보게 된다. 이는 이 시기에 가르친링이 토번의 실권을 잡으며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토번에 대해 이이제이의 용도로 이용하며 당태종 이래 부용 세력으로 유지하고 있던 토욕혼을 663년 대파, 장악한 후 안서 4진을 공격해 함락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고종은 설인귀를 대총관으로, 아사나도진, 곽대봉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10만의 군대를 편성해 670년 공격에 나서게 했지만 가르친링에게 대비천 전투에서 완파당해 장군들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후 토번은 남쪽으로는 파라문, 서쪽으로는 총령, 북으로는 돌궐에 이르며 '1만여 리가 되는' 강역을 지배하에 두었고, 기나긴 국경선을 치고 빠지며 당나라를 괴롭혔다. 679년 이경현, 유심례는 재차 10여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토번을 공격하지만 이 또한 참패, 유심례는 사로잡히고 이경현만 간신히 귀환한다. 당나라는 이에 토번에 대한 대책에 골몰하지만,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하기는 쉬운 티베트 고원으로 쳐들어가기도 무리고 딱히 대응할 방도가 없어 각지의 방어를 견고히 하는 소극적 정책만을 수행하게 된다.
4.3. 대내 정책
대내적으로는 '''무덕율령''', '''정관율령'''을 토대로 '''영휘율령'''을 완성시키고, 얼마 안 가 장손무기에게 영휘율령의 조목마다 주석을 달게 하여 '''<당률소의>'''를 작성, 전국에 반포하고, 뒤이어 율소 찬정, <오경정의(五經正義)>를 반포하는 등 '''당나라 율령과 전장 제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씨족지>를 고쳐 '''<성씨록>'''을 만들어 기존 사족들의 실권을 제한하고, 서족들의 등급을 높이는 개혁적 정책도 실시했다. 또한 정관 말년에 심화된 토지겸병을 막기 위해 구분전과 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하여 '''균전제를 유지'''하는데도 성공했다. 이런 점에서는 전형적인 '''수성군주'''. 660년부터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측천무후가 국정에 개입하게 되는데, 관직을 늘리고 범계를 늘리며 복식을 확정짓고, 인재 채용의 폭을 넓히는 '''전주법'''을 개정했으며 과거 제도를 수정, 보완하는데 측천무후가 함께 했고, 이 과정에서 실권이 천천히 측천무후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내치는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며 이에 고종과 측천무후는 666년 봉선을 수행하여 자신들의 치세가 성공했음을 자평하기도 했다.
4.4. 측천무후의 국정 개입과 장악
고종은 집권 초에는 상당히 의욕적으로 정치를 수행했으나 660년 이후부터는 자주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측천무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고, 정치적으로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고종의 신임에 의해 정치적인 힘도 얻게 된 무후는 아직 힘이 남아있던 장손무기, 한원, 유석, 우지녕 등을 죽였으며, 이후 자신의 반대파였던 재상 상관의도 664년, 이전의 황태자였던 이충과 짜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고 몰아 처형했다. 고종이 무후를 폐위하기 위해 칙서를 내린 것이 들통나 무후가 고종에게 가서 따졌고, 고종이 상관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당시 고종의 권력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라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병이 나아지면 직접 국정을 수행하기도 했고, 이 시기 무후의 정치력은 기본적으로 고종의 신임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딱히 고종의 권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16] 실제로 폐위 운운도 권한이 강해지는 무후에 대한 단순 견제에 가깝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건강 상태는 레알이었기 때문에 고종이 쓰러지고 무후까지 폐위되면 당 황실은 사실상 공황 상태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17] . 이후 무후는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고종의 신임을 회복했다. 황태자로 앉힌 장남 이홍이 675년 병으로 죽자[18] , 둘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가,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하고[19] 셋째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다.
674년 고종은 병세가 심해져 더이상 정사를 돌보기 힘들게 되자 자신은 '''천황''', 무후는 '''천후'''로 칭해 공동 정부의 구도를 형성시켰고[20] , 675년 장남 이홍이 죽자 무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면서 사실상 정권에서 물러나게 된다. 심지어 고종은 무후에게 제위를 넘기려고까지 했다가 재상 학처준의 반대로 이를 취소한 적도 있었다.[21]
5. 사후의 혼란
고종이 죽자, 황태자 이현이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황후 위씨와 그녀의 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에 무후는 중종을 내쫓고, 그녀의 넷째 아들 이단, 즉 예종을 즉위시켰다. 이후 계속해서 일어난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무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690년, 측천무후는 예종도 몰아내고 드디어 제위에 올라 주나라를 세웠다.
무후는 나라를 매우 잘 다스렸다지만 그거야 백성들 사정이고, 당 황실은 이후에도 위황후, 안락공주,[22] 태평공주 등의 음험한 권력투쟁으로 당현종(이융기)이 즉위할 때까지 몸살을 앓았다. 이렇게 된 계기가 측천무후에게 있다고 보는지, 측천무후는 잔인하다는 등 '안 좋은 평가'와 뛰어난 통치자라는 등 '좋은 평가'가 함께 나온다. 자세한 건 측천무후 참고.
6. 그 외에
어머니를 일찍 잃었는데 그래서인지 약간 마더콤 기질이 있었다. 측천무후는 고종보다 연상이었고, 나중엔 과부였던 측천무후의 언니 한국부인 무씨를 사실상의 후궁으로 삼기도 했다.[23]
원래는 여자에게 휘둘린 무능한 인물로 꼽히다가 점점 그 능력을 인정받고, 오히려 여자를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평이 나온다는 점에서, 조선 숙종, 고종과 겹친다. 여담으로 신당서에 혼동(混同) 즉 바보라고 기록될 정도로 악평받은 군주.[24]
고구려 최후결전 때 시어사(侍御使) 가언충(賈言忠)이 의미심장한 제언을 올렸다.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옛 비기(秘記)에 900년 만에 80세 노인에게 수명이 다한다고 기록됐는데 지금 이세적 장군의 나이가 80세입니다."
7. 가정 관계
7.1. 아내
폐황후 왕씨(廢皇后 王氏)
? ~ 655년 사망
측천순성황후 무씨(則天順聖皇后 武氏)
624년 출생 ~ 705년 사망
* 5남 의종 이홍(李弘) 652년~675년
* 6남 장회태자 이현(李訢) 654년~684년
* 7남 당 중종 이현(李顯) 656년~710년
* 8남 당 예종 이단(李旦) 662년~716년
* 3녀 안정공주 654년~654년
* 4녀 진국태평공주 이영월(李令月) 665년~713년
8. 둘러보기(계보)
[1] 일본 천황(天皇)칭호의 어원이라는 학설이 있다.[2] 태종은 신임하는 신하인 위징을 태자 승건 옆에 붙여서 훈육함과 동시에 지위가 굳건함을 대내외에 보이려 했으나 얼마 못 가 위징이 병사한다.[3] 나중에 시중드는 신하에게 '이태를 세우면 이승건과 이치도 모두 온전하지 못할 것이고(숙청당할 것이고), 이치를 세우면 이승건과 이태는 모두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를 대었다. 태종 본인도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를 죽여야 했던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터라, 최소한 자신의 후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4] 이세민의 실책으로 꼽히는 것이다.[5] 앞이랑 뒤가 너무 나라를 잘 다스렸기에 까인다고 보이면 된다. 고종은 당대의 군주들 중 유능한 축(5~7위)에 속한다.[6] 서위 대장 왕사성의 현손이자, 태종의 고모인 동안공주(同安公主)의 손녀이다.[7] 출가한 비구니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는다는 게 좀 이상하지만 황제가 되면 그런 것도 상관없나 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측천무후가 태종의 후궁이므로 고종에게는 의붓어머니 뻘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태종이 후궁으로 들여놓고 워낙 기가 강한 일화 등 때문에 안 건드려서 처녀였다는 식의 드립도 존재하지만, 애초에 그랬으면 궁녀도 아니고 후궁이 되었을 리가 있나. 당나라가 명색은 한족 국가일지라도 북방 유목민적인 색채가 강해서 그나마 넘어갔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8] 측천무후가 안정공주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하였다. 이를 측천무후와 연결된 파벌은 황후가 다녀가서 죽인 것으로 몰아갔으며 이것이 승리의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측천무후가 정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안정공주를 베개로 눌러서 죽였다는 야사가 있지만, 측천무후와 관련된 다른 수많은 야사와 마찬가지로 신빙성은 반반이다.[9] 이 중에서도 북주, 수, 당을 건국한 핵심 그룹은 무천진(武川鎭) 군벌이라고 불린다. 무천진은 북위 말기 육진의 난이 벌어질 때의 6진 중 하나인데, 북주의 실질적 건국자 우문태를 따라 이 지역 선비족들이 이동, 군부의 핵심 집단이 된다. 우문태의 일족인 우문씨, 수 문제 양견의 일족인 양씨, 그 아내인 독고 황후의 일족인 독고씨, 수, 당 교체기 때 최대 세력이였던 이밀의 이씨, 당 고조 이연의 일족인 이씨(농서 이씨), 태종의 황후인 문덕황후 일족인 장손씨가 모조리 이 집단에 속했다. 이들은 8개의 주국 대장군, 12개의 대장군직을 대대로 세습하는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전의 산동, 관중 일대의 귀족과는 대비되는 '신귀족' 집단을 형성해 황실도 이 집단의 주도권을 잡기 힘들 정도였다.[10] 이 시대에 '가문 좀 대단하네.' 하려면 못해도 후한 말부터 거진 수백 년 이상 고위직을 역임해야 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후대의 당 문종이 '''"우리 가문이 200년간 황제를 했는데도 최고 가문이 아니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러니 고작 개국공신 정도로는 단순한 벼락출세 취급을 받았던 것.[11] 사실 <이위공문대>를 보면 태종 본인도 특히 장손무기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태종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후에 측천무후도 쳐내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상황이... 자세한 것은 본문 중 측천무후 관련 대목을 참고.[12] 이후 당현종 때 고선지에 의해 더 서진하기는 한다.[13] 이쯤 되었을 때는 당이 신라에 진법이나 무기 등을 전수하여, 신라의 국력이 백제보다 강했다는 것이 학계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650년대 신라가 백제의 공세에 수세로 일관한 것은 일대일 국력 차이보다는 북쪽 고구려, 서남쪽 백제, 동남쪽 일본에 둘러쌓여있는 지정학적 조건 탓이 크다.[14] 정명진과 방효태는 기록에 따라 총관, 대총관 각각 다르게 기술되었다.[15] 1개 군 = 최소 5,000명이라는 당육전의 기록을 생각하면 최소 병력은 약 17만 5천, 특수 임무를 맡은 군의 경우 규모가 확대된다는 점을 생각하면(당육전에는 최대 1만 이상의 부대로 증편될 때까지 고려하여 장교 배치를 달리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20만 내외에 종속된 기미주의 이민족 병력이 +a 일 것으로 보인다.[16] 상관의 폐위 조서 사건 이후로 고종은 국가 중대사는 재상들이 의결하고, 정책 결정도 재상을 통하도록 만들었는데 측천무후는 이의부, 허경종이 물러난 이후에는 얼마 동안 재상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거나 재상 중에 자기 파벌을 심지 못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힘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고종은 측천무후의 황후 책봉에 반대했던 배행검 같은 인사들도 임용했을 정도로 관료 임용에 있어서도 측천무후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17]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천진 군벌을 기껏 제거한 상황에서 황실의 두 축인 황제와 황후가 대립하다가 권력이 준 공황 상태가 되면 다시 황권 도전 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했다.[18] 신당서에서는 독살설을 제기하고 있지만 자치통감 등에서는 단지 소문이 있을 뿐이라 했으며, <사시황태자굉효경황제> 및 <책시효경황제문> 등 당시의 기록에는 '병이 완쾌된 줄 알고 업무를 넘겼다가 병이 심해져 죽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19] 폐위 후 곧 무후가 죽였다.[20] 선황의 아내뻘인 무후의 환궁과 공치는 당 초기가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북방 국가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증거로 거론된다. 실제로 수 문제와 그 아내 독고황후가 사실상 동등한 직위에서 공치를 한 것이 이 시기 기준으로 100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수 문제의 독고 황후는 스스로도 무천진 군벌 중 선비족 출신으로 워낙에 배경이 강하고 유능해서 오히려 수 문제를 압도해 그런 것이고, 고종과 측천무후는 고종의 병약함과 측천무후의 약한 세력이 조화를 이룬 것도 있었다.[21] 서양에서는 부부계승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또한 무후 사후에는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줄 테니 측천무후의 유능함을 알고 뒤를 맡긴 셈이나 마찬가지이다.[22] 710년,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는 연흠융(燕欽隆)이 중종에게 '두 모녀가 나라를 장악하려고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추궁받을까 두려워 중종을 독살했다.[23] 한국부인 무씨와 죽은 남편 하란씨 사이의 딸 위국부인 하란씨 또한 사실상의 후궁으로 삼았으니 사실상 무씨 자매와 그 딸까지 취한 무씨 가문 덕후[24] 설상가상 토번 관련 기록에는 제 때에 조치를 취하지 못해 토번을 키웠다고 더 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