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만
1. 소개
전 KBO 리그 삼미 청보와 롯데에서 뛰었던 좌완 투수. 성적은 보잘 것 없지만 어째 진기록이 많은 선수다. 부족한 팀 사정 덕에 성적은 좋지 않으나 많이 구른 선수. 성적에 비해 승운은 좋은 편이었다.
2. 입단 전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대성고 3학년이던 시절인 1973년, 당시 정성만은 황금사자기 충남 예선전에서 대전고를 상대로 선발로 등판해 7이닝까지 노히트노런으로 호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이 대전고 출신이었던 심판들은 당연히 대전고가 올라가기를 원했고, 2이닝밖에 안 남자 편파판정을 시작, 한가운데 공도 볼로 선언하며 3:0이었던 스코어는 3:4로 둔갑하며 대전고의 승리로 끝난다. 이에 대성고의 한 선수가 심판을 밀쳐 버린 것이 이어 집단린치로 이어져 사상초유의 심판 집단 폭행이 일어나게 된 것(…) 대성고는 학교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야구부를 해체시킨다.
당시 2학년이던 박철순[1] 은 배명고로 전학을 가야했고 3학년 중에는 팀에이스인 정성만과 주장인 유상호만이 살아남아 야구를 계속하게 된다.
이후 성균관대로 진학 후에는 74년 경희대학교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으며 프로입단전에는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에서 뛰다 육군 현역으로 가게 된다.
3. 프로 시절
1982년 시즌이 끝난 후 전역한 정성만은 삼미 슈퍼스타즈 신인테스트를 받은 후 신고선수로 입단하게 된다. 1983년에는 12번밖에 등판하지 않았는데 그 중 한 번은 14이닝 완투승이었다. 이는 KBO 최다 투구이닝 승리. 181구 박충식이나 선동열 VS 최동원은 모두 15이닝 무승부이다.
1984년 성적의 특이점은 7연승을 거뒀다는 점. 8연승은 해태에게 저지 당한다. 여기서 재미난 점은 이해 정성만은 8승밖에 못했다는 점. 즉, 8승 중에 7승이 저 7연승이다(…) 결국 시즌이 끝난 후에는 최다피홈런과 더불어 규정이닝을 채운 선수 중 방어율 꼴찌를 기록하게 된다.
1985년에는 개막전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을 상대로 정성만은 무사사구 완투, 팀은 5:1로 완승을 거둔다. 이렇게 정성만도 삼미도 산뜻하게 시작을 알렸으나 귀신같이 삼미는 30일 동안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며 팀은 18연패를 기록, 2020년까지 깨지지 않은 연패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연패가 끝난 뒤인 5월 4일 OB 베어스 전. 3:3으로 팽팽하던 상황에서 9회말, 신경식의 중전안타로 OB 베어스의 승리가 선언 됐는데 이때 상황에 대해 주루방해냐 수비방해냐를 가지고 두 팀이 항의를 반복했고 심판번복도 매번 반복되며 무려 50분을 끌었다. 2루심은 벌금 10만원을 받을 정도로 컸던 사건. 이때 한 경향신문 기자는 선수들이 격하게 항의하던 장면을 찍고 있었는데 정성만은 이 기자의 카메라를 뺏어서 던져 렌즈 파손을 했다고 한다. 대성고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좀 그랬던 순간. 5월 8일 롯데전에서는 커리어상 유일의 완봉을 기록. 롯데로부터 2완투를 얻어냈다며 기자들로부터 롯데 킬러 타이틀을 받고 로나쌩 인증을 받는다. 이 해 정성만은 37번의 출장 중 23번의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중 11번은 완투였다.
그 후 정성만은 기량이 급격하게 하락. 87년 시즌을 앞두고 이루어진 임호균, 양상문, 정구선 트레이드 때 사이드 메뉴로 롯데로 건너가 1시즌을 뛴 후 은퇴하게 된다.
4. 기타
마구마구에선 정기만이란 가명으로 등장. 84랑 85가 그래도 쓸 수는 있는 스페셜로 나왔다. 85가 BB/K 성적이 더 좋아 제구가 더 높으나 84의 경우 계투 팀컬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당시에는 흔한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른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