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선동열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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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2005'''
'''2006'''

'''프리미어 12 우승 코치'''
'''2015'''

'''아시안게임 금메달(감독)'''
'''2018'''




'''1986년 KBO 리그 MVP'''
김성한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장효조
(삼성 라이온즈)


'''1986년 KBO 리그 다승왕'''
김시진, 김일융
(삼성 라이온즈)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김시진
(삼성 라이온즈)

'''1989년 ~ 1991년 KBO 리그 다승왕'''
윤학길
(롯데 자이언츠)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송진우
(빙그레 이글스)


'''1985년 ~ 1991년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장호연
(OB 베어스)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염종석
(롯데 자이언츠)

'''1993년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염종석
(롯데 자이언츠)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정민철
(빙그레 이글스)


'''1987년 KBO 리그 승률왕'''
최일언
(OB 베어스)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윤석환
(OB 베어스)

'''1989년 ~ 1991년 KBO 리그 승률왕'''
윤석환
(OB 베어스)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오봉옥
(삼성 라이온즈)


'''1993년 KBO 리그 구원왕'''
송진우
(빙그레 이글스)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정명원
(태평양 돌핀스)

'''1995년 KBO 리그 구원왕'''
정명원
(태평양 돌핀스)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구대성
(한화 이글스)


'''선동열의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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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통산 최저 평균자책점
1.20

시즌 최저 평균자책점
0.78

0점대 평균자책점
3회
[36]
통산 최다 최우수 평균자책점
8회

연속 최우수 평균자책점
7년
[37]
한 경기 최다 탈삼진
18K
[38]
한 경기 최다 투구
232구

통산 최저 WHIP
0.800

시즌 최저 WHIP
0.538

통산 최다 완봉
29회

시즌 최다 완봉
8회

통산 최고 승률
0.785

통산 최저 HR/9[39]
0.15

통산 최저 자책점
8회

통산 최저 피볼넷
8회

통산 최다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6회

연속 최다 이닝 무피홈런
319이닝

연속 최다 이닝 무실점
49⅓이닝
[40]
포스트시즌 최다 탈삼진
103K

한국시리즈 최다 탈삼진
79K

특정 팀 상대 최다 연승
20연승(롯데)
[41]


'''선동열의 역대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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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8번'''
장진범(1983~1984)

'''선동열(1985~1995)'''

'''영구결번'''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2번'''
결번

'''선동열(2004)'''

조경현(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0번'''
결번

'''선동열(2005~2010)'''

신희섭(2011)
'''KIA 타이거즈 등번호 90번'''
변강득(2011)

'''선동열(2012~2014)'''

김선진(2015~ )



'''KIA 타이거즈 No.18'''
'''선동열'''
宣銅烈 | Sun Dong-Yol
[1]
<colbgcolor=#EA0029>'''생년월일'''
1963년 1월 10일 (61세)
'''출신지'''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원도산마을
(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2]
'''신체'''
184cm | 97kg
'''학력'''
송정서초-송정동초-무등중-광주일고-고려대
'''본관'''
보성 선씨 참판공파[3]
'''가족'''
아버지 선판규(1921~2006), 어머니 김금덕(????~1996)
누나 2명
형 선형주(1958~1974)
'''배우자'''
김현미(1965년생)
'''자녀'''
아들 선민우(1990년생)
딸 선민정(1992년생)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image] 해태 타이거즈 (1985~1995)'''
'''[image] 주니치 드래곤즈 (1996~1999)'''
'''지도자'''
[image] 삼성 라이온즈 스프링캠프 인스트럭터 (2001~2003)
[image]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04)
'''[image] [image] 삼성 라이온즈 1군 감독 (2005~2010)'''
[image] KIA 타이거즈 1군 감독 (2012~2014)
[image]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06, 2015, 2017)
[image]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7, 2017~2018)'''
'''응원가'''
You are my sunshine[4][5]
'''병역'''
병역특례[6]
'''종교'''
천주교 (세례명: 타데오)[7]
'''별명'''
'''SUN''', '''무등산 폭격기''', '''앙팡만''', 나고야의 태양, 광주의 태양, 선뚱, 멍게
1. 개요
2. 소개
5. 플레이 스타일
5.1. 선동열 효과
7. 각종 기록들
8. 시대 논란
9. 대중문화
10. 여담
10.1. 가족 관련
10.2. 야구 관련
10.3. 개인사
10.4. 술꾼
10.5. 그 외
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image]
대한민국의 前 투수, 前 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 '''최동원'''과 더불어 '''KBO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선수와 감독으로서 역대급 임팩트를 남긴 사람이다.

2. 소개


현역 시절 별명은 무등산 폭격기, 국보급 투수, 멍게(피부가 안좋아서), 항상 뚱한 표정과 감독이 되며 살이 찌기 시작해 붙은 별명인 선뚱 등이 있다. 주니치 시절엔 나고야의 호빵맨(앙팡만)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8]
팀에 선동열 하나 있으면 우승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아니 우승이 당연시 되었다. 주요 개인기록은 통산방어율 1.20으로 0점대 방어율만 3차례 기록하였다. 타이틀로는 리그 MVP 3회, 골든글러브 6회, 트리플 크라운 4회, 방어율왕 8회[9], 다승왕 4회 등의 역대급 기록과 타이틀들을 보유하였고 당연히 모두 역대 최고기록이다. 1980~1990년대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에서 에이스로서 6차례 우승(통합 우승은 3번)에 기여하였다. 주요 개인기록도 무시무시한 수준이지만 선동열만이 갖고있는 자잘한 기록들 역시 무시무시한 수준인데 한 경기 최다 탈삼진 (18개)[10], 한 시즌 최다 완봉승 (8회), 최다투구이닝 무피홈런 (319이닝), 특정팀 상대 최다연승 (롯데상대 20연승) 등 현역시절 그의 커리어에는 이런 무섭기까지 한 기록들이 잔뜩 쌓여있다. 34살의 나이에 KBO 출신으로는 최초로 해외리그(NPB)에 진출하여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는데 첫 해는 고전했지만 이후 세이브 1위(구원 2위)까지 기록하는 등 리그 최고수준의 마무리로 활약하다 은퇴했다. 선동열의 성공은 이후 이종범, 이상훈, 구대성, 이승엽 등 국내 탑선수들이 일본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처럼 '''선수시절 그의 기록은 당대 최고이자 KBO 역대 최고.''' 간단하게 그야말로 '''Untouchable'''.
2004년 삼성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11] 취임하며 김응용 삼성 감독 아래서 감독 수업을 받았고, 이듬해 2005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하여 우승 2회,[12] 2위 1회, 4위 2회, 5위 1회를 기록했다. 일반적인 팀이라면 나쁜 성적은 아니나 감독으로 부임하는 동안 계속되는 성적하락, 주축 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13] 레전드 홀대[14] 등으로 재임기간 동안 많은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선수시절 친정팀인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영입되었으나 5위 1회, 8위 2회를 기록하며 좋지 못한 성적으로 팀을 암흑기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레전드(이종범) 은퇴종용, 주축선수들에 대한 혹사 논란 등은 다시 반복되었으며 삼성에서 받던 비판이 다시 KIA에서도 이어지며 결국 불명예스럽게 감독직에서 퇴장하였다.

3. 선수 시절




4. 지도자 시절




5. 플레이 스타일


[image]
선동열의 투구폼
기본적으로는 우완 정통파 파이어볼러 투수로, 특이하게 허리를 이용해 공을 던지는 타입. 허리를 이용한 피칭은 선동열이 독보적 존재로 롱런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허리를 이용해 던지니 다른 투수들보다 어깨를 덜 쓰게 되고, 이에 더불어 150km대의 당대 역대급 광속구까지 뿌릴 수 있었던 것이다.[15] 선동열이 이런 피칭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체가 좋았기 때문이다.
선동열의 투구폼은 하체를 이용해 릴리즈 포인트를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오는 타입으로, 공을 끌어올려 던지기까지의 과정에서 강한 허리 힘을 이용해 공에 체중을 싣는 형태다.[16] 또한 릴리즈 포인트가 다른 투수들보다 앞에 있었던 덕분에 타자들이 체감하는 구속은 더 빨랐고, 이 때문에 선동열은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다. 하지만 허리를 많이 쓰는 투구폼으로 혹사를 당하다 보니 특이하게도 선동열은 항상 어깨부상보다는 허리부상을 달고 다니곤 했다.[17]
당대에는 피지컬, 제구력, 주자견제능력, 멘탈과 센스 등등 투수가 갖춰야 할 여러 가지를 다 갖춘 완전체 투수로 평가받았으며 이는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image]
[image]
선동열의 슬라이더[18]
선동열의 슬러브
구종 면에 있어서는 포심이 주에 슬라이더를 가미하는 전형적인 투 피치 투수로, 보통 투 피치 투수는 선발로 살아남기 힘들지만 선동열의 경우 압도적인 피지컬과 뛰어난 구종 덕분에 선발로 오랫동안 살아남은 케이스이다. 특히 슬라이더는 KBO 역대 최고의 마구로 꼽힌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기본적으로는 종슬라이더로, 여기서 선동열은 커브를 가미해 슬러브를 던지기도 했고, 커터성 슬라이더를 던지거나 하는 등 다양한 슬라이더를 구사했으며, 구사하는 슬라이더에 따라 구속이 120km에서 130km을 넘나들곤 했다. 최모 전 심판은 선동열의 슬라이더를 "컷패스트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선동열은 슬라이더 외에 다른 변화구를 던지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손가락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선동열의 컴플렉스기도 했다. 선동열은 손가락이 길었던 이강철이나 정민철을 부러워했으며, 이광우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 사이를 찢는 수술 또한 고려했을 정도로 손가락 컴플렉스가 심했다. 이외에도 릴리즈 포인트를 줄이는 특유의 투구폼 역시 변화구 구사에 독이 되었는데, 손목을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19] 선동열이 장착 시도한 변화구 중 체인지업은 딱 평균 수준이었고, 포크볼은 그 이하였다. 때문에 이들 변화구는 가끔 다른 구종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커브에 대해서는 가끔이나마 던졌으며 수준급이었다는 한대화의 증언이 있으며 NPB 시절 KBS 중계에서 커브성 공을 구사하는 장면이 나간 적이 있다. 커브를 잘 구사하지 않은 것은 폼이 달라지는 차이가 컸기 때문으로 추정.
[image]
선동열의 커브
최고 구속은 대학시절이던 1982년 9월 15일 기록한 156km/h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 존재한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최고구속은 147km/h로 알려져있으며 대학입학후 체중증가와 함께 구속이 상승하여 대학 2학년때 155km/h 구속에 도달했다고 한다. KBO에서는 1995년 7월 25일 기록한 155km/h이 최고 구속이며, 선발 경기에서는 1991년 6월 14일 기록한 154km/h이 최고 구속이다. NPB에서는 1997년 7월 6일 기록한 154km/h이 최고 구속이다. 평속의 경우 1980년대는 구속 자료가 미비하여 추정이 힘들고 마무리 시절에는 140km/h 중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구속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나 1990년대 들어서야 스피드건이 보편화된 고로 이전의 구속 자료는 찾기가 어렵다.
신기하게 특정 선수들에게 약한 편이었다. 선동열이 홈런을 맞아도 평소 잘 치는 사람에게 맞은 경우가 부지기수고... 이런 선동열 킬러로는 유승안, 김동기 등이 있었다.

5.1. 선동열 효과


최강의 투수로 군림했던 만큼, 선동열은 존재 하나만으로 타자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존재였다. 선동열이 나오는 경기는 대체로 포기하는 분위기였다고.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어도 타자들은 선동열 나오기 전에 한 점이라도 더 내기 위해 스윙을 서두르거나 도루를 일찍 시도했고, 번번히 타이밍을 놓쳐 삼진당하거나 견제사당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존재감만으로 상대 타자들을 흐트러뜨린 투수는 선동열 외에는 아직까지 전무후무하며, 그나마 근접하게는 오승환 정도가 있었다.
해태 김응용 감독은 이를 잘 이용하곤 했으며, 그게 큰 효과를 보인 것이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다. 5회초 해태가 간신히 점수를 내자 김응용 감독은 손가락 부상으로 나갈 수 없던 선동열을 불펜에서 몸을 풀게 했다. 결국 상대팀이었던 빙그레는 1점밖에 못 내고 패배.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동열 효과'는 일본 진출 첫해 선동열의 엄청난 부진에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다. 선동열이 누군지 모르는데 국내에서처럼 심리적으로 억눌릴 리가 있나. 이를 두고 당시 하일성 KBS 해설은 선동열이 안일해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선동열 효과 때문에 타자들이 알아서 아웃카운트를 적립하고 선동열을 분석할 엄두조차 못 내는 이런 환경 속에서 항상 최고일 수밖에 없는 선동열은 자연스레 나태해졌고, 이 때문에 일본에 진출해서 그렇게 털렸다는 것. 또 FA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아무리 잘해도 구단이 놓아주지 않으니 해외진출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선동열은 1996시즌이 끝나고 3천 구 투구와 폼 수정 등의 강훈련을 통해 리그 탑급 마무리로 도약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일본진출 첫해 부진했던 기본적인 결정적인 이유는 달라진 스트라이크존에 적응을 못한 것이었다. 당시 프로야구의 스트라이크 존은 일본의 스트라이크 존보다 양옆으로 볼 하나씩 더 들어가는 크기였던 데다 선동열이 던지는 슬라이더가 기본적으로 그런 형태의 스트라이크존에 유리한 변화구이기도 하고... 때문에 1996시즌 이후 실시한 강훈련은 스트라이크존 적응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6. 최동원과 선동열


[image]
전성기 때의 선동열과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단 한명 '''최동원'''을 제외한다면. 선동렬은 최동원을 라이벌이자 존경하는 선배로 인식하였고 최동원 또한 선동렬을 라이벌이자 인정하고 존중하는 후배로 인식했다고.
대결과 관련된 내용은 최동원 VS 선동열 문서 참조.
덧붙여 이선희, 장효조와 더불어 '''프로야구가 5년만 일찍 생겼더라면'''의 단골 떡밥 중 하나.

7. 각종 기록들


[image]
2012년 7월 20일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매치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이 때 TV에 소개된 투수 선동열의 통산기록이 화제가 되었다. .
367경기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162경기 10승 4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70
  • 한국프로야구 입상내역
    • 평균자책점 1위 8번 85~91년 7년 연속 포함
    • 다승 1위 4번 89~91 3년연속 포함
    • 승률 1위 4번 89~91 3년연속 포함
    • 삼진 1위 5번 88~91 4년연속 포함
    • 구원 1위 2회 (93, 95)
    • 골든글러브 6회 수상 (86, 88~91, 93 투수부분 최다 수상자)
    • MVP 3회 수상 (86, 89~90)
    • 투수 트리플 크라운 3회 달성(89~91 방어율, 다승, 삼진, 승률 모두 1위, 86년의 경우 다승, 방어율, 삼진은 1위였으나 승률이 2위였고 당시의 트리플 크라운은 삼진이 아닌 승률이 포함된 의미였다. 오늘날의 의미로 보자면 트리플 크라운을 4회 달성하였다. 참고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은 선동열을 제외하면 류현진윤석민이 단 1회 달성했을 뿐이다.) 승률 2위가 된 이유는 이 시즌 승률 1위는 최일언. 김형석이 최동원을 상대로 마지막 경기에서 3루타를 쳐내며 최일언이 패전을 면했고, 승률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다만 이때는 탈삼진 부문이 없었다.
    • 노히트 노런 1989년 7월 6일 대 삼성전에 달성
    • 2005, 2006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2회 달성.
  • 보유 기록들(역대 10위 내 기록만 기록)
    • 역대 단일 시즌 평균 자책점 1, 2, 3, 5, 6, 7, 9위
    • 역대 단일 시즌 R/9(9이닝당 실점) 1, 2, 4, 5, 6, 7, 8위
    • 역대 단일 시즌 WHIP(이닝당 출루 허용) 1, 3, 4, 5, 6, 7, 8위
    • 역대 단일 시즌 K/9(9이닝당 탈삼진) 2, 3, 4, 9위
    • 역대 단일 시즌 K/BB(볼넷 대 삼진 비율) 1, 2, 5, 6위
    • 역대 단일 시즌 OAVG(피안타율) 1, 2, 5, 6, 9위
    • 역대 단일 시즌 이닝 5위
    • 역대 단일 시즌 탈삼진 5, 6위
    • 역대 단일 시즌 다승 6, 9, 10위
10위권내의 기록이다. 50위 권으로 확대되면 더 많은 선동열의 이름을 볼 수 있다.

8. 시대 논란


간단하게 말해 선동열이 활약한 시대는 야구 수준이 매우 뒤떨어졌기에 그의 기록에는 거품이 끼었다는 주장이다. 사실 '''그 시절에 태어나 자신의 시대에 전설이 된 선동열의 기록을 이런식으로 평가절하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이런 좀 억지스런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전형적인 빠가 까를 낳은 케이스이다.''' 열성적인 팬들이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최동원, 김시진 등과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대 최고의 한국인 투수'''로 꼽히는 박찬호[20]와 '''현재 한국인 최고 투수'''인 류현진과 비교하며 그들이 선동열만 못하다는 주장을 해대는 탓에 이런 논쟁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여기서도 박찬호와 류현진은 비교하는 방식이 달리지는 데 KBO에서 오랜기간 뛰지 않은 박찬호와 달리 류현진은 KBO에서 7년이나 뛴 탓에 국내야구팬들은 기록상으로 비교해도 조정방어율을 감안하면 선의 근소우세, 미국 진출하기 전엔 엠팍을 비롯한 야구 커뮤니티에서 팬들이 류현진 포스팅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고 트리플A 수준급으로 쳐주는 NPB[21]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찍어준 선동열을 좀더 높이 평가하면서 선과 류를 비교하면 선의 약간 우세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진출 후에 류현진이 첫해부터 '''NL 신인왕급 성적'''을 기록하고 역대급 타고투저로 평가받는 2019년에 '''MLB 평균자책점 전체 1위, NL 사이 영 상 2위'''를 기록하며 오히려 선동열을 높게 쳐주던 논거가 류현진이 상위리그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면서 평가가 완전히 '''뒤집혔다.''' 현재는 사실상 대다수의 전문가나 팬들도 '''한국야구사 최고의 투수는 박찬호류현진으로 인정'''하고 있고, 선동열은 저 둘보다는 위치가 낮지만 KBO리그로 한정한다면 '''최동원'''과 더불어'''KBO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사실 선동열이 KBO 역사에 남을 방어율을 기록했던 시절, 그에 가려 방어율 타이틀을 따지는 못했지만 방어율 순위 수위권을 기록했던 다른 투수들의 성적도 2000년대 중후반의 방어율 1위 투수들보다 훨씬 뛰어났던 점을 생각하면 선동열의 전설적인 0.대 방어율이 이제와서 조금은 현실감 있어 보이는게 사실이긴 하다. 1986년 방어율 순위는1위 선동열: 0.99 2위 최동원: 1.55 3위 최일언: 1.58 4위 김용수: 1.60 5위 김건우: 1.80 6위 장호연: 1.90 이었다. 그러나 스탯티즈 기준 1986 선동열 시즌은 1983 장명부 1986 최동원 1994 이종범 2003 심정수 2015 테임즈를 제치고 역대 WAR 최고 시즌을 찍었기에 압도적이었다는걸 부인하기 어렵다. 108경기 체제에서 262이닝을 던지고 0.99의 방어율은 찍은 것은 투고타저를 감안하더라도 압도적인 것은 맞다.
선동열이 외국인 타자를 접해보지 않았다고 폄하 받는데 선동열은 '''국내에서 외국인 타자들을 상대한 적은 없지만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외국인 영입이 무제한[22]인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그냥 맹목적인 까에 가깝다. 1998년 첫 KBO 외국인 선수가 한국에 왔을 때 NPB에서 1996년엔 털렸지만 1997~1999년에는 양호한 활약을 했고 양리그의 용병 수준차이는 말하면 입아픈 정도.[23][24]
역사가 유구한 메이저리그에서도 19세기 스핏볼 시절 스탯까지 인정하고 2차대전 이전 투수 월터 존슨을 역대 최고 투수로 뽑는데 그 시절 수준드립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사이 영의 100년 전의 511승도 현대 야구에선 나오기 불가능하지만 '''기록은 기록으로 존중해 준다.''' 따라서 선동열은 KBO 리그에서는 시대 차이를 감안해도 가장 압도적인 투수임은 분명하다.

9. 대중문화


한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로 알려져서 대중문화의 등장인물로 나오는 일이 좀 있다.
  • 2012년 영화 퍼펙트 게임에는 양동근이 선동열 역을 맡았다.
  • 2005년 영화 스카우트에서는 선동열이 사건의 주된 모티브가 되며, 등장신은 거의 없다. 거의 유일한 등장신으로는 마지막에 갈비 15인분을 먹는 장면 뿐...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 역의 아역배우 출신 이건주가 선동열 역을 맡았다.

10. 여담



10.1. 가족 관련


  • 흔히 외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2남 2녀 중 차남으로, 5살 연상 형(선형주)이 있었다고 한다. 선형주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 외아들로 알려지게 된 것. 한 인터뷰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것도 또 지금껏 좌절하지 않고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형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아내인 김현미는 광주 태생으로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로 근무하다 선동열과의 연애를 거쳐 1990년 1월 14일 광주 신양파크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첫 만남은 1989년 11월 팀이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 직후였다고 한다. 즉, 만나고 두 달 만에 초고속으로 결혼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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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임관식 때 계급장을 달아주는 장면.

10.2. 야구 관련


  • 2006년 올스타전 식전 행사로 열린 25년 올스타 vs 연예인야구단과의 경기에서 1회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하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던지면서도 130km/h가 넘는 공을 던졌다. 결과는 1이닝동안 이휘재, 윤종신, 허준호를 상대로 각각 삼진, 파울플라이, 삼진을 얻어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최고구속은 134km/h. 허준호 삼진잡는 장면. 이 2006년 경기는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던져서 저런 공이 나온 것이다. 몇 주간 준비를 하고 나왔던 2005년 올드스타전에서는 경기 전 구속 측정 이벤트에서 138km/h로 2위를,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와서는 무려 140km/h를 던졌는데, 다음날 올스타전 방송인터뷰에서 손민한권오준은 전날 경기를 보고 자신들에게 한숨이 나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때 김태원(야구선수)도 140km/h를 찍었지만 선동열 때문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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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도에 2년차인 오승환은 아직 자신과 비교하려면 멀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자기는 16m 지점에서 공을 뿌렸는데 오승환은 18.44m 지점에서 공을 놓으니까. 선동열 감독, "오승환 나보다 못해!" 실제로 오승환이 18.44에서 놓는건 아니고 더 배워야 한다는 말. 공 끝이 좋다는 칭찬도 같이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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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유명한 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꼴찌(?)를 기록해서 감독직에서 잘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돌곤 했었으니...
  • 1993년 시즌을 앞두고 스포츠서울의 제의로 선동열의 실전강의 라는 타이틀의 특집 시리즈를 지면에 게재했는데 당대의 최고 투수인 선동열이 장종훈, 김기태, 이정훈, 장효조 등등 당시 국내의 유명 타자들을 어떻게 공략하는 지 집중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선동열 자신의 영업 비밀이나 다름없는 타자 별 볼배합 등 피칭요령을 만 천하에 까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기사였지만 선동열은 의외로 흔쾌히 취재에 응하여 20회 분을 연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0회 쯤 기사가 나왔을 무렵 신문을 본 김응용 감독이 노발대발 하며 선동열을 부르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짐작하면서 김응용에게 갔다.
> 김응용: 야 이 멍청한 녀석아, 너 야구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 선동열: (모르는 척 능청떨며)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김응용: 여기 신문에 나온 기사 말이야! 타자를 상대하면서 네 비밀을 몽땅 털어놓는다는게 말이 되냐? 그러고도 네가 앞으로 계속 투수로 뛰겠다고? 앙? 지금까지 누구누구 했어?
> 선동열: 아 네, 김재박하고 이해창, 박종훈, 장효조... 아무튼 은퇴한 타자들만 했습니다.[25] 미쳤다고 현역 선수들 공략법을 말하겠습니까?
> 김응용: 그래? 그나마 좀 낫군. 아무튼 더 이상은 안돼. 절대로 하지 마.
> 선동열: 네 알겠습니다.
사실 김응용이 화를 낸 이유는 선동열이 지난 해인 1992년 어깨 부상으로 시즌을 말아먹었는 지라 1993년 시즌 부활이 가능할 지 미지수인 상황에서 본인의 무기를 공개하겠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내가 직구를 던진다고 하고 던져도 못치는데 어느 정도 피칭 노하우를 공개해도 지장은 없지 않겠는가?" 라는 자신감으로 거리낌 없이 기사를 연재한 것이었다. 아무튼 해당 특집은 김응용의 제지가 들어왔지만 그나마 모양 사납지 않게 자연스레 끝낼 수 있었고, 선동열은 그 해 마무리 투수로 전업하여 평균자책 0.78에 42세이브포인트를 거두는 맹 활약을 보이며 이 특집기사가 자신에게 절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10.3. 개인사


  • 선동열은 아버지 선판규 씨[26]의 열성적인 지원으로 학창시절 부터 몸을 관리해왔다. 선동열이 어릴 때부터 몸에 좋다는 것은 천리 밖에서라도 구해 와서 먹였는데 이나 개구리 정도는 양반이었고, 심지어 오소리생피까지 들이킬 정도였다.[27] 덕분에 선동열은 대단한 강골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걸 먹는다고 몸이 좋아지는지는 의문이겠지만, 지금도 선지가 영양식으로 취급될 정도로 동물의 혈액은 단백질, 비타민, 철분이 풍부하여 사람에게 종합영양제 내지는 보충제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지금 같다면야 이런 보양식보다 훨씬 저렴하고 효과도 좋은 영양제를 먹는 것이 좋겠지만 그런 영양제가 없던 당시로서는 오소리나 사슴 피 정도면 나름 최고의 영양공급원이었다. 게다가 개구리, 뱀 고기도 다 단백질인 만큼 일반인들은 고기맛조차 보기 힘든 시절 개구리, 등의 고단백 식단을 자주 먹었으니 몸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 덧붙이자면 선판규씨는 염증 회복에 좋다는 말고기를 가격 불문하고 사들여서 선동열에게 보내 주었는데, 선동열은 그 말고기를 먹은 것이 아니라 어깨에 붙여 통증을 달랬다고 한다(...).
  • 5.18 민주화운동 당시 선동열의 아버지인 선판규 씨가 운영하는 광주 송정리 소재 여관에 잠시 기거하던 방수원[28]이 계엄군에게 변을 당하기 직전에 선판규 씨 덕분에 살아남은 적이 있다. 계엄군을 싣고 달리던 군용 트럭을 향해 그 동네의 신원불명 청년이 주먹감자를 날린 것을 본 계엄군이 트럭에서 내려 청년을 뒤쫓다가 여관으로 쳐들어왔고, 마당에 있던 방수원의 가슴팍에 다짜고짜 대검을 꽂은 총을 들이대며 "아까 그 새끼 어디갔냐?!" 고 을러댄 것이다. 영문을 모르던 방수원은 그저 양 손을 올린 채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마침 볼 일을 보고 돌아온 선판규 씨가 이를 보고 놀라면서 계엄군 장교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나는 선동열의 애비요. 얘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운동만 하는 녀석들이라 아무것도 모르니 제발 한번만 봐주시오" 라며 통 사정했다. 다행히 장교 한 명이 선동열을 잘 아는 야구팬이라 이번 일은 없던걸로 하자며 병력을 철수 시키면서 방수원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후일 방수원은 손가락이 짧아 포크볼을 잘 못던지던 선동열에게 슬라이더를 던져 보라고 권유하여 그립을 가르쳐 주었는데, 선동열은 이 슬라이더를 자신만의 무기로 갈고 닦아 오랫동안 잘 써먹었다.[29]
  • 일본 시절 굉장히 많이 노력했던 걸로 유명한데 일본어 공부 역시 열심히 했던 걸로 유명하다. 그 결과 일본어 실력이 상당히 출중해졌다. 그리고 2017 WBC 대회 때 일본 기자들과 인터뷰했는데 20년이 지나도 여전한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보여준다. #
  • 흑역사 혹은 웃긴 추억이 있다. 이종범, 양수경Two&One 이라는 그룹을 결성한 적이 있었다.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해태가 하도 연봉을 짜게 줘서 이거라도 해본거다. 결과는 처참. 앨범이 거의 안팔렸다.

  • 패션센스가 촌스러운 편인데 위 사진들에서도 보이듯 바지를 최대한 끌어올려 입는, 소위 말하는 배바지 스타일을 좋아한다. 알다시피 다리 길어 보이라고 바지를 끌어올려 입는 것인데, 어째 나이가 들수록 더 끌어올려 입는다. 사실 선동열 젊은 시절이던 80년대만 해도 바지 안에 옷 집어넣고 바지 끌어올려 입는 건 매우 흔한 패션이었지만 유행이 바뀌어 자연스러운 신체라인을 추구하게 된 2010년대 들어서는 매우 촌스러운 패션이 되어버린 것. 더군다나 얼굴이 큰 편이라 작은 상체가 도드라져 보여 더 부자연스럽다. 여튼 야구팬들 사이에선 바지 팽팽하게 끌어올려 입는 80년대 배바지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성 감독 시절 안지만이 선동열 배바지를 흉내내는 사진이 있을 정도. 패션감각은 공 던지는 솜씨와는 다르게 별로 좋지 않은 듯.

10.4. 술꾼


  • 소싯적에 말술을 자랑하는 굉장한 술꾼이었다. 특히 프로에 들어와서는, 예컨대 상대 선발이던 MBC 청룡정삼흠(고대 시절 둘도 없는 절친)이 경기 전날 선동열을 저녁에 불러내서 다음 날 새벽까지 부어라 마셔라 해놓고, 그 날 저녁 그 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운드에 올라 정삼흠은 7이닝 5실점, 선동열은 완봉승(…)을 거두었다고 한다.(1987년 9월 2일 잠실 MBC전)
  • 그리고 학창시절 태릉선수촌에서 친분을 쌓은 농구계의 대표 말술 농구선수 허재농구대잔치 일정 차 광주로 내려왔을 때, 경기를 마친 허재를 불러내어 밤새도록 술을 펐다고 한다. 물론 계산은 선동열이 했고... 술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허재도 3차, 4차까지 가는 강행군에 기진맥진 하며 선동열에게 끌려다녀야 했고, 후에 허재는 처음으로 '술 먹다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아득해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차에 야밤이 되어 광주시내에 문을 연 술집이 눈에 띄지않게 되자, 허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선동열이 어떤 주점 앞에서 내려진 셔터를 두들기며 "나 선동열이요. 문좀 열어 주소" 하자, 주인이 셔터를 벌컥 올리고 반색을 하며 선동열과 허재를 안으로 들였다고(...). 결국 견디지 못한 허재는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바로 숙소로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이렇게 실력과 주량으로 리그를 평정했던 두 종목의 대표가 붙은 전설의 매치업은 선동열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그렇게까지 마신 선동열이 걱정이 되어 신문을 확인해보니 "해태 선동열, 오늘도 완봉승!" 이란 기사가 떡 하고 올라왔다고 한다. 다만 완봉승에 대해선 허재가 무릎팍도사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말이 안되는게, 농구대잔치는 겨울에 하는데 프로야구 시즌과 겹칠 리가 없지 않은가.
  • 그러나 당시 호흡을 맞춘 배터리 장채근의 증언에 의하면, 일기예보를 믿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날이 개서(...) 출전한 적이 종종 있다고 한다. 질문 자체가 선동열이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완봉한 적 있냐는 질문이었던 것을 보아서는 출전했을뿐만 아니라 완봉한 것도 사실인듯 하다(...)# 당장 위에 있는 정삼흠과의 음주 맞대결 일화에서도 완봉승을 거두었고, 선동열의 커리어 마지막 완봉승 또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술 마셨다가 경기 당일에 비가 잦아들어서 등판, 완봉승을 따낸 것이었으니.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건초염에 걸려 마무리로 전향했다.
  • 이런 천하의 주당[30]인 선동열이었지만, 마실 술 다 마시고도 몸 관리만큼은 철저했고 시합에서도 꾸준히 제 실력을 보여주었기에, 철권통치의 아이콘 김응용 감독도 선동열에겐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김응용은 야구만 잘 한다면 그 선수의 사생활에 관해선 절대로 터치하지 않았다. 반면 실력은 그저 그런 선수가 일탈을 저지르면 말 그대로 헬게이트를 여는 권능을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양승호.[31][32]
  • 다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 간이 나빠졌다는 진단을 받았고, 이후 그동안 즐겼던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건강에 신경쓰면서 개인운동도 많이 하고 있다고.

10.5. 그 외


  • 이름을 표기할 때 선동렬(宣銅烈)과 선동열 양쪽을 왔다갔다하지만, 한국어 문법상 사람이름에서는 두음법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고 본인의 습관에 따라 결정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문법적 원칙은 선동렬이 맞지만 선동열이라고 해도 문법상 전혀 하자가 없다. 따라서 본인이 어릴 때부터 선동열로 사용해오고 KBO에서도 '선동열'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있으므로 선동열이라고 적어야 될 것이다. 이는 김응용도 마찬가지. 과거에는 렬과 열을 매체따라 사람따라 왔다갔다하는 경향이 짙었지만 21세기 현재는 위의 KBO 등록명 존중 차원에서 선동열로 표기가 거의 굳어진 상태.
  • 1980년대 전성기 시절 광고를 찍었는데, 선동열은 당시 안국약품[33]이 생산하고 판매한 '투수코친'이라는 감기약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선동열이 약품에 효능에 대해서 말하는데, 선동열의 목소리가 아니라[34] 성우 한상덕이 더빙한 목소리다.[35] 이 더빙은 디시인사이드에서 합성으로 가끔 사용되기도 했다.
  • 한국프로야구에서 굵직한 기록과 사건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름이 유명하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성씨( 씨)이기 때문에 선동열과 관련된 기사에서 헤드라인을 뽑을 때 그의 이름 대신 성씨를 영어로 바꾼 'SUN'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프로야구 등록 선수 중 유일한 선씨이기 때문에 선이라고 하면 선동열일 수밖에 없다. 야구 아는 사람은 SUN만 봐도 다 선동열로 알아 듣는다.
  • 선동열이라는 이름은 대학교에서도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선동열 학점. 선동열 학점이라 함은 바로 선동열의 최전성기 시절의 방어율이 학점으로 나오는 현상이다. 0점대면 선동열 학점 확정. 2019년 현재는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커쇼, 혹은 류현진 학점이라고 하는듯.
  •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많은 경기에서 오심이 많이 나와 선동열의 항의가 빈번했다. 그때 당시엔 비디오판독제도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선동열의 항의부분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카메라로 애매한 판정을 확인할 때 덕아웃에서 본 선동열의 눈이 경기를 바로 앞에서 판단하는 심판보다 정확한 판단을 했다.
  • 세가의 다이너마이트 베이스볼 '97 오프닝에서 타자 배트를 몇 개나 파괴하는 것(…)으로 나온다. 끝에는 홈런을 맞지만. 해당 게임 오프닝 영상에서는 12구단의 간판 마무리 투수가 타자 배트 파괴하는 기믹을 얻었다. 즉, 주니치의 간판 마무리로 인정받았다는 뜻.

11. 관련 문서



[1] 발음상 선동렬이라고 잘 못 아는사람이 많은데 선동열이 맞다. 참고로 이문서는 선동렬로도 다이렉트된다.[2] 보성 선씨 참판공파 집성촌으로, 선거이 장군의 정려도 이 마을에 있다.선거이 지려[3] 22세손 동(銅)자 항렬[4] You are my sunshine! 광주의 태양! 기아의 선동열! 워어어어~ You are my sunshine! 광주의 태양! 기아의 선동열 감독님~[5] 승장 감독 인터뷰 시에 관중석에서 응원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곡은 오정복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 잠시 쓴 적이 있었으며,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에서 공격시 응원가로도 쓴다.[6]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7] 모태신앙으로 어머니가 매우 독실한 신자였다. 덧붙여, 아내(헬레나), 아들(안드레아), 딸(크리스티나) 모두 천주교 신자다. 대구 대교구 100주년 기념 성당의 건립에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참고로 이 성당은 범어대성당으로 불리며, 대구대교구의 공동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8] '나고야의 태양'은 국내 시절 별명 중 하나이던 '광주의 태양'을 국내 언론들이 임의로 연장한 국내한정 별명에 가깝고 일본에서의 주 별명은 앙팡만이었다.[9] 11시즌 중 그가 규정이닝을 채운 8시즌 모두 방어율 1위였다. 그야말로 마운드의 지배자.[10] 연장 기록까지 포함이며 한 경기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은 류현진이 2010시즌에 17개의 삼진을 잡으면서 가지고 있다.[11] 사실상 투수진 운영 전권은 선동열이 하게 되었다.[12] 선동열의 감독 실적을 저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때 우승은 삼성이라 가능했다고 한다.[13] 대표적으로 이 시기 삼성의 주축 투수진이었던 배영수, 권오준, 권혁 등은 선동열 감독 시절 한 번씩 수술대에 올랐다.[14] 양준혁, 김한수의 은퇴종용과 이승엽 복귀 거부 등. 이외에도 박한이, 임창용을 대놓고 홀대하는 등의 행동을 저질렀다.[15] 실제 선동열은 이런 투구폼을 바탕으로 하루 3천 구 투구 등의 무지막지한 훈련을 했음에도 말년까지 140~150킬로대의 강속구를 던졌다. 만약 선동열이 다른 투수들처럼 어깨로 던졌다면, 선동열은 10년여를 장기집권하고 일본까지 진출해 최강 마무리로 군림한 올타임 레전드가 아닌, 고작 몇 년 에이스로 군림하다 일찍 쇠락해 30대 초반 은퇴하는 당대 에이스의 전형적인 테크트리를 탔을 것이다.[16] 선동열이 감독 시절 오승환이 자기보다 멀었다고 말한 것이나, 박찬호에게 팔각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의 행동은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서 기인한 게 크다.[17] 물론 어깨부상도 당한 적은 있다. 1992년 시즌 걸렸던 건초염이라던가.[18] 한일 슈퍼게임에서 찍힌 것이다. 상대 타자는 타이호 야스아키다.[19] 때문에 선동열은 슬라이더를 손목을 비틀지 않고 던졌다.[20] 아시아 투수 전체로 확대해도 박찬호보다 커리어에서 우위에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투수들은 노모 히데오구로다 히로키, 다르빗슈 유 뿐이다.[21] 선동열이 활약한 1990년대 NPB는 메이저 진출이 본격화 되기전 노모 히데오,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사사키 가즈히로 같은 수퍼스타들이 많았고 그 선수들은 이후 MLB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때문에 지금의 NPB보다 수준 높다는 평이 있다.[22] 1군 엔트리는 4명 등록에 3명 출전 제한이다. 투수만 4명, 타자만 4명 등록은 안 된다.[23] 이거에도 반론은 있을 수 있는데 선동열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본 시절 성적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있다. 일본에서 성공적인 마무리였고 사사키와 비교해볼 때 '''구원투수로는''' 메이저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고 보지만 메이저가서 선발로도 10승이니 15승이니 하는 것은 건초염 이후 국내에서도 선발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것. 결국 선발로 성공여부를 논하려면 용병 타자와도 상대하지 않았고,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시속 150km 넘는 공이 찍히는 일 자체가 드물었던 1986~91년 시대의 선동열로 비교를 해야된다는 논리이다.[24] 무엇보다도 선동열은 로저 클레멘스보다 1살 아래에 랜디 존슨과는 동갑이었으며, 애틀란타 3인방 및 커트 실링, 케빈 브라운과도 나이차가 거의 나지 않는, 같은 시대의 선수였다.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힐만큼의 대투수들이 즐비했고, 역대 최악의 약물러들도 모여 있었던 시기에 당시 열악했던 한국 야구계에서 메이저리그의 선발투수가 나온다는 것부터 꿈과 같은 일이었다. 때문에 KBO에서의 선발 커리어로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25] 사실 대부분 현역 타자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었지만 머리 좋은 선동열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은퇴 선수들만 주워섬긴 것이었다.[26] 宣判奎. 1921~2006, 당시 광주 송정동에서 송정여관과 목욕탕을 운영하며 그 지역 유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27] 이 오소리를 먹는 방법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먼저 살아있는 오소리의 목을 따면 냉면대접으로 두 그릇 정도를 채우는 피가 나오는데 그걸 바로 한번에 들이킨다. 그리고 생간과 쓸개를 기름소금에 찍어 먹고 남은 고기와 뼈는 한약재를 넣고 푹 고아서 그 국물을 마시는 것인데, 선동열이 밝히길 "몸에 좋다고 이런저런 음식을 많이 먹었지만 오소리만큼 역겨운 것도 없더라. 하지만 아버지의 정성을 생각해서 꾹 참고 전부 목구멍으로 넘겼다"(...)[28] 당시 영남대 2학년이던 방수원은 학교가 있는 대구로 올라갈 수 없게 되어 갈 곳 없이 헤메다가 선판규 씨가 그를 거두어 주면서 여관에 묵고 있었다.[29] 나중에 해태에서 선수 말년을 보내던 방수원이 거꾸로 선동열에게 그 슬라이더 어떻게 던지는 거냐며 물어봤다고(...).[30] 오죽이나 말술로 당대에 유명했던지 스카우트라는 영화의 OST에는 선동열배 술먹기 대회라는 노래까지 실려있다.[31] 어느날 양승호가 훈련 시간보다 일찍 야구장에 들어왔는데 그 이유가 낮잠 좀 자려고였다고 한다.(...)[32] '낮잠을 집에서도 자면 되지, 왜 집에서 안 자고 거기서 자?'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잘 생각해보자. 야구 시즌은 여름이 주가 된다. 요즘이야 에어컨과 선풍기가 있지만 양승호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에어컨과 선풍기가 보편화가 되어있지 않던 시절이다. 양승호가 말하길 무등구장엔 바람이 솔솔 잘 통하는 정자 하나가 있었다고. 거기가 시원해서 잠이 잘 왔다고 한다.[33] 토비콤을 만드는 그 회사 맞다.[34] 그가 본인 목소리로 녹음한 광고는 1992년 대우전자 수퍼 디지탈 셔틀 VTR 광고와 2001년 삼성증권 fn 아너스클럽 광고 두 편이다. 참고로 인터뷰 등을 보면 실제 선동열의 목소리는 의외로 괜찮은 편이다. 전라도 억양이나 사투리가 있어서 그렇지.[35] 그리고 광고 끝날 때의 멘트가 '잘 생긴 제 코를 기억해주세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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