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식
1. 개요
전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당시 연장 15회 제한이 없었으면 난 20회, 30회까지도 던졌을 거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던지겠느냐고? 물론이다. 그게 내가 아는 야구다.'''
-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회상하며
한희민, 이강철, 정대현과 함께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언더핸드 투수 중 한명이다. 이승엽이 만개하기 전, 원조 '''라이언 킹'''으로도 불린다.
2. 아마추어 시절
원래는 광주 출신으로 광주상고에서 뛰었다. 1988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광주상고가 우승[3] 했으나 당시에는 큰 활약은 없었다.[4] 경희대학교 졸업 당시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에 갈 줄 알았으나 해태 타이거즈는 이종범을 1차 지명했고, 박충식은 삼성 라이온즈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5] 대학 시절 당시 고려대의 이상훈(LG 트윈스)과 친분이 있었는데, 야구부 선배들을 무서워해서[6] 이상훈은 경희대학교로, 박충식은 고려대학교로 도망다니다가 자주 마주쳤다고 한다.
3. 프로 선수 시절
[image]
[image]
[image]
삼성 라이온즈 시절.
[image]
이강철의 보상으로 온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 시절.
[image]
말년을 보냈던 고향 팀 KIA 타이거즈 시절.
1993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신인으로 14승(팀 내 최다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를 거두면서 언더스로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등번호는 17번(삼성)-19번-15번(이상 KIA).
그 당시에는 사이드암 투수임에도 불구하고[7] 최고 구속이 140km/h가 넘는 희소성 있는 투수[8] 였으며, 거기에 엄청난 각도의 슬라이더와 강력한 싱커로 1990년대를 풍미했다.
박충식 하면 대부분의 팬들은 문희수-선동열-송유석 3명의 해태 에이스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피칭을 하며 '''15이닝 181구''' 2실점 무승부를 거둔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떠올리지만(당시 그의 활약상) 그의 진가는 1994년 14승,(김태한과 함께 팀 내 최다승), 1995년과 1996년에는 방위병 복무로 홈경기에만 출장하면서도 각각 9승과 8승 12세이브, 1997년과 1998년에는 각각 13승과 11승을 거두는 등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매해 150이닝 이상을 던지는 꾸준한 활약을 펼쳐 김태한, 김상엽과 함께 삼성 마운드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으며, 1990년대 중반 삼성의 암흑기 동안 마운드를 지탱해 1990년대 후반 이후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 중요하진 않지만, 1997년 5월 4일 삼성이 한 경기 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우던 경기의 승리투수였다.
그러나 1999년 부상으로 수술을 받아 재활했던 그는 2000년 이강철의 보상 선수로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에 이적하게 되었다. 당시 삼성 구단에선 '설마 부상 중인 선수를 데려가겠어?'라는 생각에 보호선수 명단에 묶지 않았는데, 그 설마가 사실이 되고 말았다.[9]
이후 선수협 파동과 열악한 해태의 재활 시스템으로 제대로 된 재활을 하지 못했음에도 중간계투로 나서서 2001년에는 3승 2패 3세이브 2홀드를, 2002년에는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를 기록하는 등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나름대로 한몫했다. 그러나 부상이 재발해 2003년은 재활로 보내며 결국 시즌 종료 뒤 은퇴하고 가족들이 있던 호주로 건너갔다.
훗날 은퇴한 뒤 박동희와의 인터뷰를 통해 고향 팀으로 이적한 후 없다시피한 재활 시스템과 열악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개판 5분 전이었던 해태의 시설, 그리고 쌍팔년도 수준의 구타, 폭력에 황당했다고 한다.[10]
4. 은퇴 이후
호주에서 한인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유소년 야구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가 2011년 10월에 귀국했고, 11월에 양준혁이 이사장으로 있는 양준혁 야구재단에서 창단한 '멘토리 야구단[11] '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18년 호주 프로야구 리그에 창단하는 한국 선수팀 질롱 코리아에 초대 단장으로 취임했다.
2019년에 새롭게 창단되는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의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이 없어서인지 실제 감독은 전 삼성, KIA 선수 출신인 유용목으로 나와 있다.
4.1. 선수협 사무총장
2012년 1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신임 회장인 박재홍의 말에 따르면 이 당시에 아무런 연줄이 없던 그였기에 오히려 사무총장으로 적당하다는 판단 하에 그를 밀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비리 의혹을 받고 있던 권시형 전 사무총장이 측근을 통해 '박충식이 거액의 도박빚이 있다'는 루머를 퍼트리기 시작했다.[12] 또한 권시형 파에 속했던 현재윤, 이혜천, 박명환, 김상현 등이 이사회에 참여도 하지 않고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사회가 진행되었다는 주장과 긴급이사회에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적힌 반대성명을 내 음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재홍이 인터뷰를 통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언론에 퍼졌던 박충식과 관련된 안좋은 소문들은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2016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진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6년 8월 11일에 사임했다.
[image]
현역 선수 시절. 가운데가 박충식이다.
[image]
2015년 10월 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 이만수와 양준혁과 함께 초청되어 시구를 맡았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1] 1989학번[2] 아마추어야구지도자 자격증이 없어 정식으로 등록되지 못했다.[3] 여담으로 광주일고가 청룡기 출전 前, 광주상고가 대통령배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광주일고는 선수들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기 위해 얼차려를 실시했고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관련기사[4] 그 때 광주상고의 에이스는 우수 투수상을 받았던 고천주였으나, 원광대학교 진학 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004년에 새로 창단한 송원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계속 팀을 이끌고 있다.[5] 이 부분은 알려진 것과 다른데, 해태가 이종범과 함께 1993년 1차 지명 때 저울질했던 선수는 박충식이 아니라 또 다른 언더스로 투수 성영재였다. 성영재는 1993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다. 물론 성영재는 해태 - KIA에서도 뛰었다. 둘다 말년을 고향팀에서 보냈지만 박충식이 부상을 자주 당한 관계로 비율스텟은 박충식이, 공헌도는 성영재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누가 성영재의 타이거즈시절을 흑역사라고 써놨는데 당장 2001년까지는 vs 이호준에서 성영재의 압승이었다. 선발로 연속 4연승을 했고 2001년에도 꾸준히 선발로 뛰면서 잘은 못했지만 4선발 수준에서는 괜찮은 역할을 했다. 2003년부터 이호준이 각성하면서 트레이드의 손익관계는 역전이 되었다.[6] 군대보다도 구타가 더 심했다고..[7] 초창기엔 투구각도가 딱 사이드암이었다. 언더핸드 투구폼으로 바뀐건 프로 2년째이자 최고 성적을 기록한 1994년부터.[8] 최근에는 임창용, 심창민 등 사이드암이라도 150km/h를 넘나드는 속구를 가진 투수가 꽤 있지만, 1980-1990년대만 해도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는 직구의 구속은 120-130km/h대에 불과 하였고, 슬라이더나 싱커 등 변화구 위주의 투수가 대부분이었다.[9] 비슷한 시기에 김동수의 보상 선수로 LG로 이적하게 된 김상엽도 같은 케이스다.[10] 삼성에서는 부상 선수가 재활할 때 트레이너가 1:1로 붙어 직접 재활 프로그램을 짜 주고 관리해 줬는데 이에 반해 해태는 선수 스스로 정보를 얻어 직접 재활을 해야 했다고 한다. 무등구장 내 웨이트 트레이닝장이 있었는데 역기에 무게추 대신 돌멩이가 올려져 있었다고...거기에 200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던 상명하복식 문화와 집합, 코칭스태프의 구타가 잦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해태로 트레이드된 손혁도 해태 합류를 거부하고 돌연 은퇴한 뒤 잠적해버렸을 정도였다.[11] 저소득층 자녀나 다문화 가정 자녀로 이뤄진 유소년 야구단[12] 박충식은 도박은 일절 인한 사람이다. 완전히 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