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

 


박철순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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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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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2
1995


1982 KBO 리그 MVP


1982 KBO 리그 다승왕


1982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1982 KBO 리그 승률왕

보유 기록
최다 연승
22연승[17]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21번
팀 창단

박철순
(1982~1996)


영구결번
OB 베어스 등번호 90번
이광환
(1984~1985)

박철순
(1997~1998)


김현수
(2006)



<colbgcolor=#131230><colcolor=#C8AB37> 두산 베어스 No.21
박철순(朴哲淳 / Cheol-Sun Park[1])
생년월일
1954년 3월 12일[2] (68세)
출신지
[image] 부산광역시 중구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82cm, 72kg
학력
부산동광초[3] - 경남중 - 배명고[4] - 연세대 (중퇴)[5]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
[image]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 (1980~1981)
[image] OB 베어스 (1982~1996)
지도자
[image] OB 베어스 플레잉코치 (1989)
[image] OB 베어스 1군 투수코치 (1997~1998)
등장곡
권인하 - 에이스를 위하여[6]
프랭크 시나트라 - My way
종교
개신교
병역
공군 병장 만기전역(병 256기) #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후
4.1. 어록
4.2. 박철순에 대한 말말말
6. 기타
7. 연도별 주요 성적

[clearfix]

1. 개요


“팬 여러분 이제 저는 떠나가지만, 영원히 여러분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팬 여러분 사랑합니다.”[7]

2017년 KBO 플레이오프 1차전 시구 中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이자, OB 베어스에서 뛰었던 투수. KBO 리그 원년부터 활약했고 OB/두산 베어스의 첫 번째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며 한국프로야구 원년을 빛낸 선수로서 22연승을 포함해 베어스의 원년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이후 찾아온 수많은 부상들을 이겨낸 끝에 베어스의 두 번째 우승까지 함께 하고 1997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현역 시절 별명은 불사조.
KBO 통산 네 번째로 영구결번된 선수이기도 하다.[8][9] 더불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부터 21번을 등번호로 사용했으니 베어스 역사상 유일하게 21번을 단 선수가 되었다.
전용 응원가는 권인하'에이스를 위하여'. 이 노래가 나오면서 노장 박철순이 마운드 위에 오르는 순간의 감동은 OB 팬들에게 추억으로 남아있다. 은퇴식에서 울려퍼진 프랭크 시내트라My Way도 그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박철순의 역동적인 투구폼[10]
데뷔 시즌의 임팩트만 놓고 보면 최동원이나 선동열의 아성에 견줄 만한 수준이었다. swar 기준 데뷔 시즌 성적 2위이자 국내 선수로는 1위이다.[11]
프로야구 초창기엔 스피드건이 드물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속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성기에는 최고 140km/h 후반의 빠른 패스트볼을 던졌다는 증언이 많다. 또한 커브, 슬라이더, 역회전 볼도 잘 던졌다고 한다.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굉장히 좋아서 당시 해설자들은 그의 몸쪽 패스트볼을 역회전 공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철순이 던졌던 구질에 관해서는 아직도 상당히 말이 많은데 너클볼을 최초로 던진 투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팜볼이었다고도 한다.[12] 박철순 이후로 KBO 리그에서 팜볼을 던진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2011년 즈음 윤석민이 한 번 강정호를 상대로 던졌는데 그 이후로는 다시 사장되었다.) 감안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 야구에서는 더더욱 생소했던 구질들을 던졌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 무브먼트와 스피드를 위해 상당한 하이키킹의 투구폼을 구사했는데 이것이 만성적인 허리 부상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은퇴할 때까지 투구폼을 거의 수정하지 않고 이 폼을 고수했다.
특이사항으로 부상이 잦았던 데 비해 신기할 정도로 선수 커리어 내내 구속은 잘 유지된 편이다. 선수 생활 내내 허리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아킬레스건 부상은 수술을 한다고 해도 고질병처럼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부상을 내내 달고 다니면서도 구속이 유지되었다는 것은[13] 이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훈련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은퇴 후


이후 OB 베어스에서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으나, 1998년 시즌 중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고 1999년 이후로는 야구계를 떠나 '알룩스포츠'라는 스포츠 용품 회사를 경영하였다. http://www.alrook.com 한때 연매출 100억 가량의 우량기업으로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잡았으나, 2007년도 대장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 암 투병이 계기가 되어 건강상의 문제로 사업가 생활도 정리하고 완전히 은퇴하여 요양과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듯.
사업가로 활동할 당시 사업을 경기도 의왕시에서 했던 인연으로 박철순을 의왕시 홍보대사로 위촉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인터넷 방송이나 olleh TV에서 야구 해설을 맡는 등의 소일거리 정도를 하며 지내고 있다. 기아자동차의 광고 나레이션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다만 예전 2군 코치 시절의 흑역사 때문인지 지도자로 나설 생각은 없다고 한다.
KBS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유소년 야구 코치도 하고 있는 듯.
2009년 시구하는 모습
2007년과 2009년 시구로 모습을 비추었으며, 2011 시즌 개막전에서는 팀의 레전드인 김우열, 김경문과 함께 시구 시타 시포를 하여 명장면을 연출했다.
그러다가 2015년 3월말에 갑자기 스리랑카 야구 코치가 되었다. 5월에 열린 동아시안컵 야구대회에서 3승 2패를 기록했다. 당초 대한야구협회에서 스리랑카 야구협회에 감독을 보내주기로 했으나 박철순의 젊은 후배 감독들이 모두 거절해서 박철순에게 까지 제의가 들어온 것이었고 협회의 제안을 박철순이 받아들여 이루어졌다. 경비나 체류비 지원이 있는게 아니라서 어려운 자리임에도 응했고 실질적으로 재능기부 형태로 스리랑카에 가는 것이었다. 코치로 부임한다고 되어 있으나 현지 일본인 코치들에 비해 경력이나 스펙으로 보나 월등하기 때문에 사실상 총감독으로 갔다. 이때 스리랑카 대표팀은 2015년 동아시안컵 야구대회를 겨냥한 것이라서 그 대회만 코치로 활동하는 한달여 정도의 단기간 지도였다.
2015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 후 축하 인사를 남겼다.
2017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시구하는 모습
2017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했다. 공교롭게도 3루 덕아웃에서 그의 시구를 지켜본 사람이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했던 동료 포수 김경문 감독. 김경문 감독이 두산 베어스 감독이던 시절인 2007년 6월 박철순이 시구, 김경문 감독이 시포를 한 뒤 마운드에서 서로 포옹한 적이 있다.시구영상 참고로 이날 경기는 두산이 패했지만 2, 3, 4차전을 전부 이겨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니퍼트의 데뷔전, 그리고 2017 플레이오프 1차전 시구자가 모두 박철순이였다.[14]
니퍼트박철순 본인이 "니퍼트라면 기꺼이 21번을 양보하겠다" 라는 말까지 꺼낸 선수다. 그런 선수의 데뷔전과 두산에서의 마지막 가을야구 무대의 시작에서 시구자가 모두 박철순이였다는 점이 뭉클함을 자아낸다.
그 후 이제 나이로 인해 건강상의 문제에 유의하며 각종 사회인야구 행사 등등에 참석하여 사인회 및 팬들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4.1. 어록


그 당시에는 그 때 그 순간이 제일 중요했었어요. OB 베어스라는 팀. 1년 동안 같이 동고동락하고 고생했던 팀. 선수 전원.. 꼭 우승해서 팀 선수들하고 기쁨을 나누고 싶었죠. 그런 욕심 밖에 없었어요.

1982 한국시리즈 허리 부상투혼 당시를 되돌아보며

그래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사랑해주시고 기억해주시는 팬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놈이죠. 행복한 야구선수였죠.

첫사랑이고 목숨 바쳐 사랑했던 여인하고의 첫 키스보다 더 진하게 했다면 상상이 가시겠어요?

1997년 본인의 은퇴식에서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입맞춤 한 당시를 회고하며


4.2. 박철순에 대한 말말말


지난 3월 12일 중앙대학과의 연습게임때 신통치 못했다고 배트로 10대나 맞았고 대통령기대회에서 동국대학에 진다음 다시 10대나 호되게 맞아 최동원의 나으려던 허리가 도졌다고 했다. [15]

-

1979년 4월 06일 동아일보 #

당시 미국 야구는 TV에서나 볼 수 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들이 야구하는 것이다. 이런것으로만 상상했을 때에요. 그런데 그 미국에 박철순 선수가 혼자, 그것도 최초로 진출해서 선수생활을 했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이병훈 해설위원.

특히 박철순 선배는 작은 것이라도 본인이 마운드에 섰을 때 야수들이 도움을 줬다면 항상 야수들한테 와서 행동이나 말로 고맙다는 표현을 했던 선수였어요.

김광수 코치

단순히 야구에 소질이 있거나, 야구의 주무기나 구질만 가지고 연승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22연승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정신력이 뒷받침이 안된다면 안 되는 것이죠.

하일성 해설위원.

철순이가 아픈데도 진통제를 맞고 나가는 것을 선수들 다 압니다. '우리 한 번 해보자! 이기자!' 이렇게 팀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철순이가 아픈데도 던져준 것에 선수들이 감동했기 때문이었고..

1982년 당시 김영덕 OB 베어스 초대 감독.

박철순 선배가 얼마나 팀에서 비중을 차지하시고, 존경받는 선배님이셨는지는 목말을 태워드린 그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죠. 누가 하랄 것도 없이 자동으로 그게 된 거에요.

1995 한국시리즈 우승 후 박철순을 목마를 태운 세리머니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냐는 질문에 당시 OB 선수 김상호

다른 선배님들이 열 마디 하는 것보다 박철순 선배님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솔선수범해주셨기 때문에 그냥 옆에 계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힘이 됐습니다. 저희 후배들한테.

95년 당시 OB 베어스 선수 이도형

박철순 선배님, 저희 선수들에게 항상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송진우 #


5. 논란 및 사건사고




6. 기타


  • 대학생 시절(호적상 나이 20세)에 결혼을 했지만 1986년 이혼한 경력이 있다. 이혼의 이유가 박철순의 잘못이 아니라 전부인의 빚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전처의 빚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통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를 보다못한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던 김성근이 어느 날 무작정 박철순을 데리고 은행으로 가서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금인 2천만원을 자신의 명의로 대출받아 빌려주고 추가로 본인 통장에서 2천만원을 인출하여 도합 4천만원을 주면서 "철순아, 이걸로 빚 갚아라" 라고 했다 한다. 참고로 그 당시 9급 공무원 초봉이 20만원 조금 넘던 시절이다. 그래서 박철순은 김성근을 인생의 큰 스승님이자 은인으로 존경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 일찍 결혼한 덕분에 50대 중반 나이에 손자를 둘이나 본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상을 극복한 사연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지금의 부인인 채수정 씨와의 만남과 그녀의 도움도 컸다.
  • 선발 22연승 기록에 대해, 박철순 본인은 자신의 기록이 아닌 팀의 기록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발경기에 야수들의 득점지원 호수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최동원이 그때 자신 대신 던졌다면 22연승보다 훨씬 높은 기록을 찍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 투수 출신임에 불구하고 야구는 타자놀음이라고 생각하는 케이스다. 전술한 22연승 기록과 맞물려 말하길, 투수가 아무리 잘해봤자 퍼펙트게임, 노히트노런에 불과하며 이걸 평생에 몇 번이나 해볼 수 있냐고 반문하며 완봉승도 야수가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한다. 박철순 본인의 생각으로는 결국 야구는 타자놀음, 야수놀음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같은 투수출신인 선동열 등의 감독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 1988년 속옷광고 빅맨의 모델로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한강 둔치에서 CF를 찍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시즌 아웃.박철순 빅맨 광고
  • 1989년 이광환 감독 재임 당시 1년동안 1군 투수코치(플레잉코치)로 활약했는데 구동우, 김동현 등의 신인투수들을 육성하고 팀 방어율 역시 중상위권을 기록하면서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97~1998년 리빌딩기에도 이혜천, 김유봉, 최용호 등의 신인투수들을 지도한 경력으로 볼 때 투수코치로는 의외로 괜찮은 능력자였을지도. 이미 야구계를 떠난 지 10년이 넘은지라 별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다.
  • 던진 구종중 무회전 체인지업때문에 유난히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는 편이다. 왜 무회전 체인지업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적냐면 박철순선수 본인이 너클볼이라고도 할때도 있고 팜볼이라고 할때도 있기 때문. # 같은 인터뷰를 하고 적은 기사들을 보면 너클볼이라고 언급되는데, 인터뷰 기사인 # 에서만 봐도 팜볼이라고 언급하시고. 두 기사를 근거로 정리하면 81년 당시 미국에서 직접 인터뷰했을 때는 너클볼이라 밝혔지만 근래엔 팜볼이라고 하시는 듯. 두 변화구 다 구질이 비슷한 무회전 계통인데 박철순 본인의 사용 방식이 체인지업과 같았기 때문에 팜볼이라 정의한 것 같다. 마구마구나 프로야구 매니저에선 박철순 카드가 팜볼과 너클볼 둘 다 가지고 있으며, 마구매니저에서는 너클볼설을 채택하였다. 나무위키에서도 근래 인터뷰를 따라 체인지업의 팜볼 문단에 박철순선수가 팜볼을 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6 넥센 히어로즈 용병인 로버트 코엘로만 봐도 포크볼을 팜볼형태로 무회전에 가깝게 던지는 등 던지는 방식이나 그립, 구질명을 떠나 무회전에 가까운 공을 던졌다 자체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 젊은 시절 굉장한 장발 미남이었다. 지금의 이대형이나 심수창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 요즘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박철순 좋아서 야구 본다는 젊은 여성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30대 들어서 조금 일찍 탈모가 찾아왔고 세월의 풍파와 암투병, 탈모의 영향으로 그 미모를 오래 유지하진 못했다.
  •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공유가 1982년 당시 박철순 역을 맡았는데, 젊은 시절 박철순과 굉장히 싱크로율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image]
  • 김용희롯데-SK 감독과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때문에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김용희가 처음으로 롯데 감독을 맡았던 1994년 4월 12일, OB 베어스와의 홈 개막전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코어 4:4로 맞선 연장 11회 말 OB의 투수 강길용이 2루타와 실책, 고의사구로 무사 만루를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OB는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팬들은 지난 해(1993년) 데뷔하자마자 평균자책점 1.11, 이는 선동열을 제외한 다른 선수가 기록한 가장 낮은 평균차책점이다. 9승에 23세이브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운 마무리 김경원이 마운드에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는 그가 아니었다. 다름아닌 박철순이 등판한 것. 당연히 조금이나마 사직 야구장에 응원을 왔던 OB 팬들은 난리가 났고, 롯데 팬들마저도 그의 등판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홈 팀의 감독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선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장면 자체부터가 너무나도 희귀한 상황이었고, 등판한 상황도 매우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운드에 올라온 박철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을 던졌고, 8번 타자 홍순기와 9번 타자 공필성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2사 만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타자였던 1번 타자 전준호에게 끝내기 중전 안타를 내주면서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image]
선수 박철순, 감독 김용희
  • 나이가 든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한창 시절 기억력, 특히 이전 경기에 대한 복기에 굉장히 능했다. 큰 게임 뿐 아니라 정규시즌 중 사소한 상황에 대해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억하여 회고할 정도였다. 현역시절 말년에 고 이종남 기자와의 인터뷰 때, 1982년 시즌 막판 롯데 자이언츠김용철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22연승 행진을 마감하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얘기한 바 있다.
> 박철순: 2루에 주자를 둔 상황에서 투수가 안타를 맞으면 보통 어디로 가죠?
> 이종남: 그야 포수 뒤쪽이지.
> 박철순: 맞아요. 저도 (김용철에게 안타를 맞고) 바로 (포수)경문이 뒤로 백업을 갔다가 "아이고 이 멍청이!"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투수가 포수 뒤를 받치는 건 공이 빠졌을 때 주자가 추가로 진루하는 걸 막는게 목적인데, 그 때는 동점에 끝내기 상황이니까 포수 뒤로 송구가 빠지던 말던 주자 한 명만 들어오면 끝이잖아요? 그건 말도 안 되는 플레이였어요. 그 때 저는 홈과 3루 사이에서 중계를 했어야 맞는 거예요.
참고로 선동열도 현역으로 뛸 때 박철순 처럼 비상한 기억력을 자랑하던 선수였다. 역시 야구도 머리 좋은 사람이 잘 하는 모양이다.[16]
  • 박명환야구TV에서 정수근이 밝힌 일화로, 츠쿠미 전지훈련 당시 의욕이 넘쳤던 신인 정수근을 상대하러 마운드에 박철순이 있었고 안타-도루-득점을 뽑아냈는데 경기 후 중간급 선배들이 정수근을 불러내어 박선배님께서 던지시는 데 감히 도루를 해?하면서 크게 혼냈다고 한다.
  • 농구선수 출신 방송인 서장훈이 어린 시절부터 박철순의 열렬한 팬이었다. 박철순의 피칭에 매료되면서 서울학동초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가 이도형과 함께 야구선수 생활까지 했다. 현재도 박철순에 대한 존경심을 피력하고 있으며 두산 베어스의 열성팬임을 자부하고 있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OB
36
224⅔
(2위)
24
(1위)
4
7
(3위)
0.857
(1위)
1.84
(1위)
151
7
73
(5위)
108
(2위)
60
46
0.97
(1위)
1983
4
10⅓
0
1
0
0.000
3.48
10
0
4
4
4
4
1.36
1984
1군 기록 없음
1985
9
50⅓
1
4
0
0.200
2.68
36
2
16
34
19
15
0.99
1986
13
53⅓
5
3
0
0.625
3.54
46
3
22
29
23
21
1.28
1987
5
24
2
0
1
1.000
2.25
17
0
9
11
7
6
1.08
1988
1군 기록 없음
1989
12
16⅓
1
1
0
0.500
4.96
17
1
9
14
11
9
1.59
1990
18
96
4
9
0
0.308
4.78
104
6
41
58
53
51
1.51
1991
18
102⅔
7
5
0
0.583
3.51
97
5
53
55
48
40
1.40
1992
30
99⅔
7
6
9
(5위)
0.538
2.80
92
5
35
68
35
31
1.26
1993
25
116⅔
7
5
2
0.583
2.08
99
3
39
90
30
27
1.18
1994
20
93
7
7
0
0.500
2.61
73
3
32
66
31
27
1.10
1995
20
94⅔
9
2
0
0.818
4.47
98
8
50
67
54
47
1.48
1996
21
68⅔
2
6
1
0.250
2.62
68
0
38
44
26
20
1.49
<rowcolor=#373A3C> KBO 통산
(15시즌)
231
1050⅓
76
53
20
0.589
2.95
908
43
421
648
401
344
1.24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2년
15완투
(1위)
2완봉
(공동 4위)
1985년
2완투
0완봉
1986년
1완투
1완봉
1987년
1완투
0완봉
1990년
2완투
1완봉
1991년
2완투
0완봉
1991년
1완투
1완봉
1994년
5완투
2완봉
통산
29완투
7완봉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OB
1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rowcolor=#373A3C> KBO 통산
(1시즌)
1
1
.000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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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진출 당시 등록명[2] 호적상 출생년도는 1956년, 똑같은 부산 출신의 장효조도 1954년 생이지만 호적상으론 1956년 생이다.[3] 현재의 부산광일초등학교. 1998년 남일초교와 동광초교가 통합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4]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대전 대성고등학교로 전학했으나, 야구부 사태로 팀이 해체된 후 상경하여 배명고등학교로 다시 전학했다.[5] 법학과(1974학번)에 재학했는데, 학점도 안 나오고 공부도 안 되어서 그만둔 후 공군에 입대하여 복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학교는 다르지만 허구연, 김병현, 최희섭 등도 모두 법학과 출신이다.[6] 박철순 헌정곡으로 구단에서 제작한 응원곡이다.[7] 이 말은 박철순이 본인의 은퇴식에서 한 말인 "팬 여러분 이제 저는 마운드를 떠나가지만 언제나 여러분 옆에 남아있을 것입니다."를 그대로 말한 시구 멘트였다.[8] KBO 리그 통산 첫 번째 영구결번은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던 김영신이다. 이전에 명시된 '두 번째 영구결번'이라는 표현보다는 두 번째로 영구결번식을 가지고 결번 처리된 선수가 맞다. 참고로 KBO 통산 첫 영구결번식 수혜자는 LG 트윈스의 김용수 선수이다.[9] 정확히는 KBO 리그 선수 중 영구결번식과 은퇴식을 모두 경험한 첫 번째 선수가 맞는 표현. 은퇴식은 1997년 4월 29일에 열렸고 영구결번식은 2002년 4월 5일에 열렸다.[10]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전 야구 선수인 모데카이 브라운의 폼과 상당히 유사하다.[11] 데뷔 시즌 성적 1위는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될 혹사를 당한 장명부. 참고로 최동원과 선동열은 데뷔 시즌에는 기대보다 조금 못한 편이다. 물론 그 성적도 swar 5~6 이상으로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훌륭했다.[12] 그래서 야구 게임마다 박철순의 구종을 팜볼로 표기한 게임도 있고, 너클볼로 표기한 게임도 있는 등 다 다르게 나온다. 근데 어떤 게임은 아예 너클볼과 팜볼을 둘 다 달아놓았고, 다른 게임은 아예 슬라이더-커브-포크볼만 달아놓았다(...).[13] 선수 생활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6년에도 당시 잠실 야구장 스피드건 기준으로 140km/h 초반대의 구속을 어렵지 않게 찍었다. 고질적인 부상에다 당시 실제 나이가 만 42세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스터프.[14] 2017시즌은 니퍼트의 두산에서의 마지막 시즌이라는 점에서 시작과 끝을 팀의 레전드와 함께하는 장면이 뭉클함을 자아낸다.[15] 최동원은 이러한 구타가 원인이 되어 프로생활 내내 허리부상에 고생했다.[16]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타자를 상대할 때 '예전에 이 타자한테 이런 공을 던졌다가 맞았지' 라고 기억을 되살려서 투구 패턴에 참고하면 도움이 안 될 리가 없다. 이것은 당장 포수부터 해당되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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