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옹주
貞愼翁主
조선 태종 이방원의 서차녀이자 후궁 신빈 신씨의 2남 7녀 중 장녀.
태종이 제의한 혼담을 거절해서 패가망신 당한 이속이 거절한 왕녀가 바로 정신옹주다.
그녀가 혼기가 차자 아버지 태종은 딸을 시집보내려고 지화라는 장님 점쟁이를 시켜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고 했다. 지화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주를 알아봤는데, 춘천 군수를 지냈던 이속은 지화를 쫓아내면서 "'''내 아들은 이미 죽었다. 만일 권궁주(權宮主)의 소생이라면 내 자식이 살아날 수 있다.'''" 라는 발언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속의 발언은 2가지 형태인데 저 발언은 태종이 뒤에 언급한 것이고, 이전 기록에는 "길례(吉禮)가 이미 끝났는데, 또 궁주(宮主)가 있는가? 만일 권 궁주의 딸이 결혼한다면 나의 자식이 있지마는, 만일 궁인(宮人)의 딸이라면 내 자식은 죽었다. 나는 이렇게 연혼하고 싶지는 않다." 라고 말했다. 정신옹주의 어머니는 신녕궁주 신씨(신빈 신씨)인데,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원경왕후를 모시던 몸종이었다. 반면에 정의궁주 권씨(의빈 권씨)는 명문가의 규수 출신으로 정식으로 간택받아 태종의 후궁이 되어 정혜옹주를 낳았다. 한마디로 이속은 정신옹주가 몸종의 딸이니 며느리로 맞아들이기 싫다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왕족이면 첩의 소생인 서얼이라 해도 왕족으로 대우하던 조선의 법도를 생각하면, 이속의 발언은 정신옹주뿐만 아니라 왕실 전체를 모욕한 일이었다.
당연히 태종은 자신의 후궁과 딸을 모욕하는 말에 분노했고, 이속을 장형 100대를 치고 삭탈관직 시킨다. 그러나 이속 사태는 여기서 끝이 아니였다. 평소 이속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사람들과, 철혈군주 태종에게 붙은 사람들은 점점 이속을 비난했다. 결국 이속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관노비로 전락한다.
결국 정신옹주는 1418년에 당시 유배갔던 명문가 출신 윤향(尹向)[1] 의 아들 윤계동에게 시집갔다. 태종은 당연히 옹주의 혼례 전에 은근슬쩍 예비 사돈인 윤향의 유배를 풀어줬다.
1452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이속이 거론한 이복자매 정혜옹주는 1419년에 결혼했고 1425년에 사망했다.
1. 관련 문서
[1] 윤향은 정신옹주를 자신의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다는 의미로 아들의 사주 단자를 택배로 보냈다. 태종은 이속 때문에 큰 스크래치가 난 자존심을 뼈대있는 명문가에서 살살 치료해주자, 매우 기뻐하며 윤향의 유배를 풀어주었다. 참고로 윤향은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간 상태였는데, 하루아침에 천하의 충신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