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빈 신씨

 


'''조선 후궁
신빈 신씨 | 信嬪 辛氏
'''
'''빈호'''
신빈(信嬪)
'''출생'''
미상
'''사망'''
1435년(세종 17년) 2월 2일
(향년 알 수 없음)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41
[ 펼치기 · 접기 ]
'''본관'''
영월(寧越)
'''부모'''
부친 신영귀(辛永貴)
모친 알 수 없음
'''부군'''
태종
'''자녀'''
2녀 7녀
(1남) 함녕군
(2남) 온녕군
(1녀) 정신옹주
(2녀) 정정옹주
(3녀) 숙정옹주
(4녀) 숙녕옹주
(5녀) 소신옹주
(6녀) 소숙옹주
(7녀) 숙경옹주

1. 개요
2. 생애
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태종후궁. 슬하에 3남 7녀를 두었고, 태종의 총애를 받아 큰 권세를 누렸다.

2. 생애


본래 신씨는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궁인으로 태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 1월 13일에 신씨는 함녕군을 낳은 덕택에 신녕옹주(信寧翁主)로 책봉되었고, 이후 1422년(세종 4)에 궁주(宮主)로 높아졌다.
신씨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하에 2남 7녀가 태어났는데, 태종의 혼담을 거절해서 집안이 패가망신을 당한 이속이 거절했던 왕녀가 신빈 신씨의 장녀이자 태종의 서차녀인 정신옹주이다. 왕권 강화를 위해 어린 이복동생들과 처가에 이어 사돈댁까지 죽인 태종이지만 자신의 친자식들에게는 비교적 다정한 아버지이기도 했다.[1][2] 특히 태종이 이속에게 불같이 화를 낸 걸 알 수 있듯이, 신씨와 신씨의 자식들을 대우했고 원경왕후의 사후에는 내명부를 총괄하며 궁 안의 일을 도맡았다.[3]
이렇게 태종의 총애를 받은 그녀의 존재로 인하여, 태종이 후궁을 여럿 들인건 외척 세력을 경계하는 뜻만은 아니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1422년(세종 4)에 태종이 승하하자, 같은 후궁인 의빈 권씨와 함께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아침 저녁으로 불법을 행했다. 숭유억불의 기조가 있었으나 당시 왕실 여성들의 불교를 향한 믿음까지 탄압할 수는 없었던 듯 하다. 또한 정업원의 존재가 말해주듯 모시던 왕이 승하하거나 나이가 들면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하거나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왕실 여성들이 많았던 분위기였다. 1423년(세종 5)에는 신씨가 태종의 복을 빌고자 하여 세종은 문소전(文昭殿)의 불당(佛堂)에 금으로 불경을 쓰게 하기도 했다.
정1품 신빈(信嬪)으로 책봉된 건 고종 때였다.
능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41번지에 있다. 2001년 9월 18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3. 여담


  • 용의 눈물에서는 상궁 신분으로 태종의 승은을 입는 것으로 나온다. 참고로 원경왕후는 태종이 신씨에게 손을 댔다는 것을 알고 당연히 노발대발 하지만, 얼마 후 태종이 노씨 성의 나인[4]과 하룻밤을 보내자, "아니 효빈이나 선빈도 아니고, 저번에 그 신상궁이란 아이도 아니고, 뭐? 나인?"이라며 아예 화를 낼 기력도 없이 기가 막혀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노나인을 문초하여 초죽음을 만들고 태종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게 깊다.
  • 새해에 세종경복궁 경회루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날 신빈의 상은 아랫사람들의 상에 놓인 것보다 고기 반찬이 소홀했다. 세종은 이를 왕실에 대한 모욕이라 여겨 의전을 담당한 사련소(司臠所)의 관리들을 문초했다.

[1] 사실 태종은 정적 관계가 되기 전만 해도 자신이 죽인 이복동생들도 끔찍이 아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위화도 회군 때 태종이 맡았던 역할이 신덕왕후랑 그 소생 왕자 2명을 피신시키는 거였다.[2] 태종은 태종 자신과 사이 나쁜(정확하게는 애증관계) 정실 원경왕후의 장남 양녕대군왕세자에서 폐위시키면서 울기도 했다.[3]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4월 4일 경인 6번째기사. # [4] 태종의 후궁 소빈 노씨. 다만 실제 소빈 노씨는 정식 간택으로 선발된 후궁이다. 배역은 신인 시절의 하지원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