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속(조선)
1. 개요
조선의 태종이 제의한 혼담을 거절해 패가망신당하고 왕실 혼인 간택이 생기게 된 원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강원도 춘천 군수를 지냈다.
2. 생애
2.1. 태종의 혼담을 거절하다
태종이 후궁 소생의 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기 위해, 지화라는 점쟁이를 시켜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지화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주를 알아봤는데, 이속은 지화를 쫓아내면서 '''"내 아들을 몸종의 딸에게 장가 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貞惠翁主)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 라고 발언한다.
이속이 혼담을 거부한 정신옹주는 신녕궁주 신씨(신빈 신씨)의 소생인데, 신녕궁주는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원경왕후를 모시던 몸종 출신 후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왕이라면 어머니가 아무리 천첩인 서얼이라도 당연히 왕족이었다. 즉 정신옹주는 분명한 왕족이었다.
반면 정혜옹주는 정의궁주 권씨(의빈 권씨)의 소생이었는데, 의빈 권씨는 아버지 권홍이 성균관 악정(정4품)을 지냈으며, 친척에 개국공신인 권근 등이 있는 명문가 안동 권씨 가문의 규수 출신이었다.
다만 이속의 집안인 연안 이씨도 할아버지 이원발이 고려 대에 공조전서 등을 지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가 상신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청했지만 불사이군 충절을 지킨 명신으로 남아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이귀산은 호조판서와 제조를, 큰아버지 이귀령도 좌의정을 지내는 등 당대 최고 수준의 명문가였으므로 굳이 '급이 낮은' 왕녀와 얌전히 혼례를 치러야 정도로 아쉬운 집안이 아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태종에게 감정이 좋았을 리는 없는데, 춘천의 수령으로 근무하던 도중 이방간의 재혼에 얽혀서 귀양을 갔기 때문이다. 당시 이방간은 역률을 범한 죄인이지만 형제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한 태종이 살려놓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사위인 조신언이 환관 한봉을 시켜 태종이 박인간의 조카딸을 혼자된 방간의 아내로 데려가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 방간이 혼인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사실 태종은 조신언의 청을 거절하였는데 조신언이 왕명을 사칭하여 일을 진행시킨 것이었다.''' 이에 조신언은 왕명을 사칭한 죄와 하필 어머니의 상중인 여자를 데려간 죄, 박인간은 조카딸이 형수의 상을 치르고 있는 걸 알면서 적극 응한 죄와 방간 측의 접촉에 대해 보고하지 않은 죄, 이속은 고을의 수령이 되어 왕명으로 반역자가 상중의 여인과 혼인한다는 중대한 정보를 보고받고도 조정에 알리지 않은 죄와 이후 사헌부에서 이 사건으로 죄상을 따져 묻는데도 제대로 답하지 않은 죄가 걸려 몽땅 귀양을 가게 된다. 이 경우는 이속의 죄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속은 딱히 왕실과 혼맥을 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거절을 할 때 하더라도 좋은 말로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굳이 모욕적인 말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2.2. 패가망신 당하다
정신옹주의 생모 신빈 신씨는 당시 태종의 수많은 후궁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다. 애초에 몸종 출신을 무려 '''빈'''까지 올렸다는 점에서 태종의 총애를 알만 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왕가 그것도 현직 국왕, 그것도 다름이 아니라 형제 둘을 죽이고 한 명을 귀양보내는 피의 숙청과 두번의 정사를 치루고 왕위에 오른 킬방원 태종과 그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과 그런 후궁의 딸이자 왕의 핏줄인 옹주까지 쓰리 콤보로 무시한 행동이기에, 이에 빡친 태종은 이속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서인으로 강등'''시켜버렸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하들이 죄에 비해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심지어 도승지 조말생은 "이속의 죄가 대역에 관계되니, 대역의 죄인 삼족을 멸하여야 합니다."라고 간언했다. 이에 태종이 아이들 일에 어찌 사람을 벨 수 있겠냐며 다시 사리에 합당한 처벌을 찾도록 했다. 그러자 하연이 베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다고 하자 태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 했다. 이에 다시 하연이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했으나 다시 태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은 신하들의 상소 러시에 결국 항복(?)하고 전 재산을 몰수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엔 의정부와 육조의 신하들이 저 정도도 너무 약하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첫째로 왕의 명을 거역한 죄, 둘째로 왕명을 수행 중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죄, 셋째로 왕녀에게 천한 혈통 운운한 죄까지 따져볼수록 역모니까 목을 잘라야 합니다."라고 태종을 볶아댔고, 결국 2차 항복을 하고 이속을 관노로 만들었다. 덤으로 이속의 아들에겐 평생 금혼령, 쉽게 말해 죽을 때까지 솔로부대로 살라는 처벌이 떨어졌다.
신하들은 여기까지 와서도 만족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이속의 신상을 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꼬투리 잡힌 것이 3년 전 이속의 집안에 초상이 났을 때 5촌 당숙인 김사문과 술을 마신 일이었다. 그 자리에는 이속의 매형의 딸인 하옥생과 그 남편인 유복중이 같이 있었는데, 이걸 가지고 "김사문과 하옥생이 이때 바람을 피웠다"고 덮어씌운 것.
국문 크리가 터져 김사문과 하옥생을 심문했으나 두 사람은 "술 마시고 윷놀이한 게 전부"라고 항변했고, 사헌부에선 "고문을 허락해 달라"고 태종에게 청했다. 태종은 "김사문은 상중에 술을 마셔 불효하였으니 곤장 80대, 하옥생은 남녀칠세부동석을 어겨 풍기문란하게 하였으니 곤장 80대. 이걸로 끝!"으로 마무리되는 줄 알았지만...
세종이 즉위하자 신하들이 다시 "이속이 노비로 살아있는 것도 안 될 일이니 처형까지 시켜야 한다"고 상소를 내며 추가타를 먹이려 든다.
다만 이미 본보기는 확실히 보여줬고,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인데 목숨까지 빼앗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세종이 이 청을 거절하면서 노비로나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3. 후일담
이속의 아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게도 아들에게 가해진 평생 독신 명령은 나중에나마 풀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인문(李仁文)이 허목의 《미수기언》에 "이속의 손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인문과 이인충(李仁忠) 형제는 모두 과거시험에 합격해 벼슬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속의 후손인 연평부원군 이광정(李光庭)은 예조, 이조의 판서를 지낸 후 청백리에 녹선되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인현왕후의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1] 가 되었고 후손인 이관징은 숙종 신임을 받은 남인으로서 대사헌과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니 적어도 이들의 시대가 되면 이속의 후손이라고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속과 정반대되는 사례로 윤향이라는 사람이 있다. 왕명을 거역한 죄로 귀양 가 있던 중에 사주단자를 5G급 스피드로 보냈는데, 그 덕택에 귀양에서 풀려나 형조판서로 임명되었고, 그 아들 윤계동은 부마가 되었다. 그냥 비유가 아니라, 태종이 "윤향이 나와 진짜 사돈을 맺고 싶은가본데 빨리 데려와라."하고는 즉시 귀양을 쫑냈다.# 심지어 "윤향은 왕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라며 칭찬까지 곁들였는데, 이미 왕명을 거역한 죄로 복역 중인 사람한테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2] . 물론 이속 때문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윤향이 세워준 걸 감안하면 귀양에서 풀릴만 하긴 하다. 더욱이 옹주 시아버지가 옹주의 결혼 이후에도 여전히 귀양살이 중이면 시댁식구들 앞에서 옹주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태종 본인도 사돈댁 앞에서 어딘가 민망해지는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태종은 이를 계기로 간택 제도를 만들어, 가능한 지원자 중에서 왕족의 혼사를 처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왕실의 혼담을 거절했다간 X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각인하게 되었다.
2.4. 기타
태종의 성격을 보았을 때, 이속을 정말로 적당히 처벌하려고 했는데 신하들의 강권에 못 이겨서 더 강한 처벌들을 내렸을 리는 없다. 처벌을 내릴 때 일부러 살짝 약한 처벌을 내려서 자신이 관대한 인사인 것처럼 연기하고, 여기에 신하들이 낚여서 '더 큰 벌을 내리셔야 하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면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척 자기 마음에 드는 형벌을 내리며 명분을 확보하고 신하들을 조종하는 건 태종의 특기이자 후대의 조선 국왕들도 즐겨 따라한 정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태종은 처남인 민씨 4형제를 숙청할 때도 이 방식을 사용했다.
당시의 법으로 보면, 국혼 제의를 받았는데 그냥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망언을 하는 것은 왕실을 모독한 것이니 큰 죄는 맞다. 하지만 사형이나 노비형까지 가야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어우동처럼 왕이 없는 강상죄까지 만들어붙여서 반드시 죽이겠다고 하면 사형이 내려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고, 반대로 연산군의 자식들처럼 신하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사형이 금지된 미성년자도 죽여야 한다고 악을 써서 사사시킨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법적 기준은 분명히 있었고 보통은 그 선에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이다.
실록에 따르면 이속은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 때문인지 성격이 정도 이상으로 오만해서 주변에 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 인물평 자체야 눈치 없고 싸가지 없다고 박살난 사람에게 굳이 좋은 소리를 찾아서 써줬을 리가 없기는 하지만, 태종실록이 작성될 때의 분위기는 사관 민인생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웬만한 파파라치 이상으로 진실에 집착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임금의 심부름꾼에게 하는 말이라면 임금에게도 들어갈 걸 뻔히 알면서도 저런 식으로 말을 한 것은 팩트다.'''
우스갯소리로 이속이 저렇게 간덩이가 부은 거절을 한건 이미 '''세종과 심온의 딸 소헌왕후의 결혼 이후 숙청을 보고서 자긴 안죽으려고'''라는 말도 있다. 심온이 태종의 직계인 원경왕후 소생의 세종과 딸을 결혼시켰는데도 1418년 비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고 일가가 노비 집안이 되었는데, 정신옹주가 결혼한것은 1418년... 직계 자식과 혼례를 맺은 사돈집안도 한 방에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했는데 후궁의 딸, 그것도 몸종 출신인 후궁의 딸과 결혼하면 승낙해도 파리목숨이었을 것이다. 실제 기록에서도 이속은 노비로 강등은 되도 죽진 않았고 아들 역시 태종의 아들인 세종때 독신명령을 금지시켜서 후손을 봤다는 말이 있는걸 보면 멸문지화는 피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