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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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3대의 국왕인 태종 이방원의 왕비로서 '''세종대왕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여흥 민씨로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둘째딸이다.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다섯째 며느리.
2. 일생
2.1. 이방원과 혼인하다
18살인 1382년에 아버지 민제의 제자였던 2살 아래의 이방원과 혼례를 치뤘고 1392년에 시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남편인 이방원이 정안군에 책봉되자 뒤이어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2] . 뒤이어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등이 남편의 심복이 되어 활약하고 뒤이어 정도전 등이 신권 강화의 일환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원경왕후는 오히려 집 으슥한 곳에 무기를 숨겨놓아 후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2.2. 남편의 정치 동지로서
이렇듯 성격이 담대해서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할 때는 이방원과 왕자들이 궁에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자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신이 배가 아프다는 핑계[3] 를 대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그 일을 빌미로 이방원은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2차 왕자의 난 때도 자신의 사가의 말이 홀로 집으로 오자,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창을 들고 나가 싸우다 죽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친 일화도 있다.
2.3. 그래서 국모가 되었지만...
뒤이어 세자빈이 되고 결국 이방원이 왕이 되자 덩달아 왕비가 되어서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았는데... 여기서부터 그녀의 인생에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2.4. 아닌 밤 중에 멸문지화
왕이 된 태종은 공신들을 매우 경계하였는데 특히 정계와 군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무구와 민무질을 심하게 경계했다. 더군다나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세자였던 양녕대군과도[4] 친했기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외척이 되어 권세를 휘두를 것이라 생각한 태종은 이들을 가차 없이 유배보내고 뒤이어 사약 까지 내렸다. 뒤이어 그들의 아랫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도 역시 세자의 외숙[5] 으로 정사를 농단할 것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가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태종 손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부모의 운명도 불행하기 그지없어서 아버지 민제는 자식들이 귀양을 가고 집안이 쇠락해가는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 송씨는 아예 아들 넷이 모두 사위 손에 결단나는 걸 보고서 세상을 떠났다.[6][7]"부부(夫婦)는 사람의 대륜(大倫)인데, '''지금 정비(靜妃)가 민무구(閔無咎) 등의 일 때문에 속으로 불평을 품고 여러 번 불손한 말을 하였다.''' 지난날에 내가 창병(瘡病)이 몹시 크게 났을 때에 민무구(閔無咎) 등이 가만히 여시(女侍)와 결탁하여 병세를 엿보고, 드디어 이무(李茂)와 더불어 불궤(不軌)를 음모(陰謀)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민무구의 죄였다. '''정비(靜妃)가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운 분한(忿恨)을 품으니, 내가 폐출(廢黜)하여서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나, 조강지처(粗糠之妻)임을 생각하여 차마 갑자기 버리지 못하겠다.'''"
<태종실록> 태종 11년(1411년) 9월 4일, 민무구, 민무질 사사 후 여러 차례 부부싸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
2.5. 투기를 하다
한편으로 태종과는 여자 문제로도 쉴 새 없이 싸웠다. 처가에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놀이와 여자를 좋아했던 태종은 원경왕후의 투기에 질색을 하며 자주 부부싸움을 벌였다. 군왕무치(君王無恥)라고 해서 국왕이 여색을 탐하는 것 자체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고 용납이 되던 시대[8] 라서 다른 내명부의 왕비라면 그냥 참고 감내했겠지만, 원경왕후는 조선의 역대 왕비 중에서도 기가 드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왕비[9] 라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임금이 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에 맞아들였다. 정비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2년(1402년) 3월 7일
다툼이 격해지자 태종은 원경왕후를 모시던 상궁들과 나인들을 모두 궁 밖으로 쫓아내고 원경왕후를 중궁전에 유폐하다시피 했다. 심지어는 그녀를 폐비 하려고까지 했으나 주위 신하들의 권고로 취소했다.[10] 태종이 간택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후궁인 숙의를 뽑으려 하자 원경왕후가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해서 이례적으로 당시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정종까지 나서서 "나는 서자밖에 없어도 아내와 하도 같이 오래 살아서 소싯적 정으로 사는데 너는 왜 그러냐?"라고 한소리 하기도 했다. 이때 이외에는 태종에게 전혀 간섭한 일이 없는 친형 정종도 이 일만큼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는 뜻. 싸한 분위기 때문에 태종은 거창한 입궐 행사는 생략하고 단순히 조용하게 후궁들을 들여보내는 정도만 행해야 했다.
다만, 계모와 이복형제들에 의해 왕위 계승 논의에 밀려나 그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지독한 아들바보였던 태종이 후계구도를 꼬아 정통성을 훼손해 자식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폐비라는 선택을 할 리가 있겠냐며 중전에 대한 일종의 강짜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11] 이복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이방석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의 자식이란 점은 왕의 혈통이라는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고 사실상 제일 중요한 정통성이 후궁이 아닌 왕후의 자식이란 점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단 것 역시 반론의 여지가 있는데 원경왕후가 나이 '''마흔을 넘긴 이후로도''' 태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셋 씩이나 더''' 낳았다. 정선공주(1404년생), 아들 성녕대군(1405년생), 요절한 왕자(1412년생)[12] 가 그 주인공들. 지금도 노산이 어렵고 힘든 일인 21세기 현대 기준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이니, 자식들 생각해서 마냥 참고 살았다고만 보기도 무리가 있을 듯 하다. 그야말로 지지고 볶으며 살긴 했어도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든 애증의 부부라고 봐야할 듯.
나아가 살펴봐야 할 부분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는 이후의 조선 왕후들과 달리 일방적인 간택을 통해 만들어진 인연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 동등한 관계''', 즉 사가(私家) 시절에 맺어진 인연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당시 민제 집안은 그야말로 짱짱한 명문가로서 이성계의 가문보다도 훨씬 고려의 중심권력에 가까웠기에 이성계의 사돈으로서, 그리고 이방원의 처가로서 가문의 운명을 모조리 걸고[13] 막대한 지원사격을 퍼부었다. 또한 익히 알려져 있듯, 조선 초기는 조선 중후기와 달리 성리학이 교조적으로 뿌리내린 시기가 아니었기에 여성들의 위상도 조선 후기보다 훨씬 높았다. 더구나 원경왕후 민씨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한 공신들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남편 이방원의 권력획득에 큰 공훈을 세운 여걸이다. 원경왕후가 대신들 앞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대드는 등의 행태도 이런 강력한 근거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처남 네 명을 모조리 도륙하는 등 인간적으로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처가를 박살내고 원경왕후를 찍어 누른 태종 이방원의 극단적인 행보도, 원경왕후의 이러한 막강한 힘이 고착화된 권력으로 뿌리내려 왕권을 깎아 먹는 것을 예견한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극약처방'''이 아니면 도저히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원경왕후 민씨였기 때문이다.
2.6. 세자가 교체되다
1418년에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망나니가 되어버린 세자 양녕대군이 폐위되고[14] 셋째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을 때는 장자 상속제를 이유로 들어 양녕대군의 아들인 원손을 후계로 책봉하라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가 극심하였고 양녕대군을 멀리 내치려 하자 원경왕후는 눈물을 흘리며 가까운 곳에 보내라 하여서 결국은 경기도 광주로 보내졌다. 사실 원경왕후는 태종만큼 맏아들 양녕[15] 을 매우 사랑했던 어머니였다. 18살에 결혼해서 10여년간 낳은 6명의 자식들(3남 3녀) 중 아들만 셋 다 죽는 고통을 겪고 30살이나 되어 낳은, 단 하나뿐이던 자기 아들이 양녕이고, 왕족이 되기 전에 낳았으니 그녀에게는 왕비가 아닌 어머니로서 그야말로 목숨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세상 전부와 같은 아들이었던 것. 그 후에 3년 내로 효령과 충녕(세종)을 낳고 역시 예뻐하며 길렀다고 하나, 왕-왕비-왕자 관계를 떠나서 낳은 순간부터 이방원 부부의 모든 것이었던 양녕과 받은 개인적 애정이 같을 수는 없었다.[16]
뒤이어 새로운 세자 이도가 즉위하여 세종이 되자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고 2년 후인 1420년에 수강궁(창경궁)에서 56세에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지금이야 주로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병이고[17] 치료제도 많지만 그 시절에는 치료제도 없었다.
당시 태종은 절차를 간소화하자며 세종에게 상복을 12일만 입으라고 권유했는데[18] 세종은 다른 건 상왕 뜻을 따라도 이건 그렇게 못하겠다며 원경왕후를 선릉에 안장할 때까지 쭉 상복을 입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원경왕후의 능이 외로워 보인다고 사찰을 놓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같이 묻힐 사람이 불교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인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그걸 모를리 없는 세종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머니에게 가혹했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나마 사찰 놓는 건 태종이 하도 난리쳐서 없던 일이 됐다.
그리고 2년 후에 남편인 태종도 죽어서[19]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헌릉에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글자 그대로 애증의 관계였을 부부였지만 결국 죽어서는 함께 묻혔다. 이는 세종대왕이 두 부부가 저승에서는 화해하여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란 효심에서 나온 의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며느리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 심온 또한 남편의 외척 숙청리스트에 올라 며느리의 친정마저 박살나면서 자신이 겪었던 비극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심지어 남편이 이복동생과의 사이에서 왕위쟁탈전을 벌인 것처럼, 둘째 손자인 세조에 의해 골육상쟁의 피바람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3. 평가
원경왕후는 조선 왕비 중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준 여장부 이자 당대의 여걸로 평가 받는다. 그 이유는 남편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했던 킹메이커였고, 무엇보다 세종대왕의 어머니란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성격또한 당대의 대여걸답게 굉장히 호쾌하고 괄괄했다.
원경왕후 집안인 여흥 민씨는 고려 중기부터 대대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자신의 아버지인 민제는 기록에 따르면 어렸을때 부터 총명하였기 때문에 원경왕후 본인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원경왕후는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 부터 총명했고, 아름답고, 인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원경왕후가 정말 똑똑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 세종대왕이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더 총명했을 가능성이 높다.(아버지는 무신 가문을 무시하는 권문세족들 틈에서 최연소로 과거를 급제한 사람이니 말해서 무엇하리)
여담으로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지만 정작 원경왕후는 태종의 왕비로만 기억될뿐 세종대왕의 어머니로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태종의 아내다운 괄괄한 성격에 남편을 옥좌에 올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가 바로 그 남편에 의해 형제들을 모두 잃고 가문이 몰락하는 장면이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가족관계는 태종(조선)/가족관계 참고.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와 함께 역대 조선 왕비 중에서도 손꼽히는 괄괄한 여장부로 꼽을 수 있다. 흔히 여장부로 평가받는 문정왕후 윤씨나 정순왕후 김씨는 적어도 개인적인 성품은 차분하고 신중한 편이었다.
여하튼 조선조에서 손꼽히게 잘난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도 상당히 많이 했지만,[20] 더 잘난 아들을 만든 최고의 내조의 왕비로 평가받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태종이 왕이 되자마자 일차적으로 원경왕후의 가족을 박살냈기에 이들 부부의 사이가 마냥 좋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조선 왕실에서 "왕과의 사이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왕비"이기도 하다. 정안군 시절 요절한 세 명의 아들과 1412년에 태어나서 요절한 아들까지 포함하면 총 12명의 자식을 두었다.[21] 왕후가 된 뒤 40세에도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낳았을 만큼 금슬이 좋았다. 불같은 성정의 태종도 아들인 양녕대군과 성녕대군을 끔찍이 아껴서 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아내 원경왕후와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볼 때 마냥 으르렁거리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
즉 이들 부부의 관계는 전형적인 '''애증'''이다.[22]
4. 대중 매체에서
사극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게 포스있고 강단있는 여인으로 나오며 초반에는 남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사풍의 이미지로 나오다가[23] 왕비가 된 이후에는 태종에게 대들다가 뒤이은 결과가 신통치 않은(...) 어찌보면 불쌍한 여인으로 나온다. 그리고 사극 속 사망씬에서는 묘하게도 원경왕후의 임종을 태종이 혼자 지키며, 태종과 원경왕후가 화해하면서 원경왕후가 사망하는 것이 특징. 상왕이 된 태종이 사돈댁(소헌왕후의 친정) 박살내는 것을 보며 또 못할 짓 한다고 하면서도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왕권을 지키려는 태종이 딱해 보인다고(...). 어쨌든 그렇게 임종 때는 대충(?) 화해하고 승하하였다.
- 박시백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익히 알려진 세종의 상상화를 닮은 용모로 그려졌다. 세종의 용모는 모계 유전이라는 설정인 듯.[24]
- 용의 눈물, 대왕 세종에선 둘 다 최명길이 맡았다. 최명길은 "자신이 원경왕후와 무슨 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여담으로 용의 눈물 촬영 후반부에 최명길은 만삭이었다.[25][26] 그 때 태종 앞에서 상을 엎고, 바닥을 기는 연기들을 했는데 나중에 유동근 씨가 당시를 회고하길 엄청나게 무서웠다고[27] . 두 작품에서의 차이는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의 며느리이자 이방원의 부인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면, 대왕 세종에서는 세종대왕의 어머니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용의 눈물에서의 원경왕후는 원경왕후(용의 눈물) 참고.
- 정도전에선 강세정[28] 이 맡았다. 원경왕후(정도전) 문서 참고. 이 드라마에서도 포스는 여전해서 '킬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사실 최명길의 포스 넘치는 원경왕후에 비하면 나긋한 편이지만, 그래도 역시나 한 성격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 활약도 많은데 이방원을 순금부로 끌고 가려는 정도전에게 직접 무릎을 꿇으며 그의 목숨을 구하고 여러번 대화를 통해 이방원을 각성시키는가 하면 무인정사가 일어나자 손수 조준을 찾아가 겁박하고(...) 이지란을 찾아가 설득하는 등 내조의 여왕 다운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이방원 부부가 왕과 왕비가 된 장면이 짧게 나오는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궁궐 주위를 둘러보는 원경왕후를 이방원이 매의 눈으로 쳐다보는 묘한 장면이 나온다. 시청자들은 이 장면을 훗날 이방원이 원경왕후의 친정을 숙청하는 걸 암시하는 거라고 이해했다.
-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민다경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배우는 공승연.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이방원의 여인 중에선 분이에 밀리는 감도 있지만 역사를 반영해서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비중이 높아진다.
[1] 고려 제 32대왕 우왕보다 나흘 늦게 태어났다.[2] 왕의 딸도 아닌데 옹주로 봉해진 것은 아직 조선이 내명부와 외명부의 등급 및 호칭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 당시는 왕의 후궁과 종친, 신하의 아내들까지 싹다 옹주 작위를 주었다. 훗날 등급 및 호칭이 제대로 정해진 후로 따지면 대군의 부인이니 부부인(府夫人)이라 불린다.[3]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4] 양녕대군은 어릴때 외가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 외가가 멸문될때 태종의 처가에 대한 의심병을 돋구어 불 속에 기름을 부어버리면서 외가의 멸문을 거들게 된다.[5] 조금 더 설명을 보태서, 세종대왕이나 양녕대군이나 정순공주 등과 같은 자식들에게는 외가가 되는 민씨 집안을 설명하자면, 위로는 조박에게 시집간 언니 1명과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그리고 여동생 1명이 더 있었다.[6] 뒷날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선위한 후 본인의 바깥사돈이자 국구인 심온도 명나라 사은사로 보냈다가 의주에서 군을 왕명 없이 함부로 움직였다는 것을 구실삼아 사약을 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왕 내외의 끈질긴 설득으로 왕비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천민으로 계급을 강등시키는 데에 그쳤고 이들은 태종 사후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숙청은 결과적으로 세종 치세 때 외척의 간섭이 없는 결과를 만들었고 세종 이후 한동안의 왕들은 수렴청정의 경우를 빼곤 비교적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왕의 친위 세력이 되어줄 외척이 없는 상태에서 세종은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는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만들어 낸다.[7] 하지만, 세종 입장에선 최선의 방법이었을수도 있다. 당장 외척이나 신하들보단 아들들이 가장 안전한데다 설마 건강한 아들 문종이 일찍 죽을걸 생각치도 못했을테고 '''아들이 조카를 때려잡고 왕될것은 더 생각도 못했을거다'''[8] 왕손 생산은 군왕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던 것도 있지만 당시에는 펑균 수명도 짧고 영아 사망률도 높았던 시기라 가능한 왕실에선 많은 자손을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9] 기가 드세기로 현종의 정실부인인 명성왕후 김씨도 있다. 때문에 헌종은 조선사에서 몇 안되는 후궁을 두지 못한 왕이였다. 이 성격은 아들인 숙종, 손자인 영조, 증손자 사도세자, 현손자 정조까지 대물림되었다.[10] 사실 태종도 진심으로 이혼할 생각은 없었을것이다. 당장 왕비를 새로 뽑으면 '''또 외척이 생길것이고 또 칼부림을 해야한다.''' 게다가 이미 원경왕후 일가를 족친것도 결과적으론 생사람들 잡은게 될것이다.[11] 비슷한 사례로 사마의 역시 역사상 기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장춘화가 아내였는데, 백부인 등 첩을 들이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가 장춘화에게 늙다리라고 욕을 하고 장춘화는 아들들과 함께 식음을 전폐하며 시위한 적이 있었다. 결국 사마의는 사과하기는 했는데 이후 무안했는지 ‘내가 뭐하러 늙다리 따위를 신경쓰겠냐. 다만 내 금쪽같은 아들들의 몸이 걱정돼서 그랬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아무리 부부간에 갈등이 있어도 적자를 잔뜩 낳은 정실부인을 내치는 일은 가주가 제정신이라면 동아시아 역사에 거의 없었다.[12] 1412년 6월 23일생으로 '''생모 만 47세 출산.''' 심지어 이 아들은 '''원경왕후의 두 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이 처형된 후'''에 태어났다. 당시 태종은 "중궁이 난산을 자주 하여 걱정했는데 의원들이 약을 잘 써 무사히 해산하여 기쁘다."라고 했다.[13]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이나 태종 이방원의 무인정사가 실패했다면, 여흥 민씨 집안이 통째로 멸문지화를 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정말 살벌한 시기가 여말선초였음을 상기하자.[14] 여담으로 양녕대군의 폐위 전 행적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보면, 아버지로서 태종 이방원이 정말 보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살 아버지와 보살 동생을 둔 덕분에 폐위 후에도 평안하게 살았지만 결국 그 동생의 손자의 죽음에 앞장서 끝까지 망나니 클라쓰를 입증했다. [15] 사실은 4남인데 3명의 형이 어릴 때 다 죽었고, 그때는 조선이 생기기 전 고려 시절이라 조선왕조실록 자체에 자식으로 기록도 되어 있지 않다. 단지 실록에는 태종이 왕이 되고 나서 양녕 이전에 죽었던 아들 3명에 대해 회고한 기록이 있을 뿐. 장자계승의 압박이 있던 태종이 양녕의 장자됨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그전에 죽은 아들들을 정식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양녕의 누나 3명은 양녕이 태어날 때도 살아 있었다.[16] 먼저 난 세 아들이 모두 죽는 바람에 다른 곳에서 키우면 낫지 않을까 하고 외가에 맡긴 적이 있었다. 당연히 외숙들과 사이가 좋았을 것이고 이는 민씨 숙청의 한 이유가 된다.[17] 1979년에 한국에서 박멸되었으나 북한에는 잔존하여, 1994년부터 경기 북부 지역에서 다시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철원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은 말라리아 예방약을 복용하는데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설사를 달고 산다고(...)[18] 아주 근거없는 건 아니고 아버지가 생존한 상황에서 모친상은 3년상을 치루지 않고 12개월 동안 입을 상복을 1달을 하루로 계산한 역월지제에 따른 논리였다.[19] 즉, 태종은 원경왕후와 같은 나이에 사망[20] 태종 입장에선 왕으로써 나중에 방해될지도 모를 외척의 견제였지만 원경왕후와 그 가족에게 있어선 그동안 겁나 도와줬더니 왕권 때문에 자기들을 토사구팽하는 것으로 여겨질 여지도 충분했다.[21] 여담으로 이 랭킹의 두번째 순위는 그녀의 며느리이자 세종의 아내인 소헌왕후. 소헌왕후가 원경왕후보다 정확히 딸 2명이 적었다.[22] 위에서 세종이 원경왕후 사후에 능 근처에 절을 짓는 문제에서 태종이 반대할 때도 "야 너가 나 거기 안 묻을거면 세워도 되지만, 너가 나 거기 묻을거면 세우면 안되지!"라면서 반대한다. 어쨌든 원경왕후와 죽어서도 같이 있기 싫을 정도로 증오하는 건 아니라는 뜻.[23] 왕자의 난 때는 남장하고 남편이 있는 곳까지 말을 타고 찾아간다.[24] 반대로 폐세자 양녕은 부왕을 그대로 닮은 용모이다.[25] 출산 경험이 있는 주부 시청자들은 최명길의 만삭을 눈치채고 너무 무리해서 연기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참고로 최명길 씨는 이때 29화 출연분량을 9일만에 찍고 한꺼번에 찍은 분량만큼 출연료를 받은 후 출산을 준비했다. 출산 예정일 일주일 전까지 촬영하는 강행군을 했다고.[26] 물론 한복의 특성상 품이 넉넉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27] 그만큼 배우 최명길씨가 혼신의 연기를 펼친 것도 있지만, 딴 사람도 아니고 만삭의 임산부가 밥상을 뒤엎고, 성인 남성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다가 내동댕이쳐지는 하드코어(...)한 액션을 찍다 보니 같이 연기하는 유동근 씨나 이를 보조 + 관리하는 스태프들 입장에서는 손에 땀을 쥐는 촬영이었을 것이다.[28] 한 때 고나은이란 예명으로 활동했으나 2017년 4월 소속사를 옮기면서 본명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