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

 


1. 개요
2. 상세
2.1. 신장
2.2. 난장
2.3. 타격의 정도
2.4. 여성에 대한 장형 집행
2.5. 대중 매체에서
2.6. 기타


1. 개요


杖刑
동아시아에서 행해지던 전근대의 형벌. 오형(五刑), 즉 -'''장'''--- 중 2번째로, 죄인을 십자 형틀에 묶어놓은 후에 나무로 만든 굵은 회초리로 볼기를 치거나 의자에 묶어놓고 정강이를 치는 형벌이다.

2. 상세


장형은 삼국사기에 '장 100번을 쳤다'는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유서깊은 형벌로, 중국에서 율령제를 도입하면서 같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도 명나라의 형법전인 '대명률'을 도입하여 장형도 계속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의 장형은 최소 60회에서 최대 100회까지 집행되며, 10단위로 등급이 나뉘었다. 중앙 관리의 경우 60번은 1등급을 강등당하며, 70번은 2등급... 하는 식으로 장형으로 처벌받으면 관직에서 큰 불이익을 받았다.
비슷한 형벌인 태형이 비교적 작은 막대기로 10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장형은 최소 처벌도 강하고, 매도 더 굵은 것을 사용하는 형벌이며, 한방 내리칠 때마다의 위력 또한 태형보다 더 세다. 그러나 장형을 집행할 때 매우 굵은 곤장이나 치도곤으로 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며, 사극 등에서 보여지는 오해에 가깝다.
곤장이나 치도곤은 군대나 기관에 관련된 죄인을 벌하는 특수한 형벌인 '곤형'을 집행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으로서, 장형에 쓰이는 장과는 다르다. 곤장을 사용하는 곤형은 태-장-도-유-사로 구분되는 오형과는 별개의 형이다. 장형에 쓰이는 '장'은 기본적으로 태형에 사용되던 '태'와 같은 회초리이되 길이와 굵기만 좀 더 커진 것이다. 곤장이 장보다도 훨씬 통증이 심했으며, 그래서 곤형은 도적을 토벌할 때나 군법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 등 일반적이지 않은 영역에서만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게 한 것이 원칙이다.
물론 지방관의 사심으로 인해 처벌이 규정보다 강해지기 일수였으며 태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장을 쓰거나 장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신장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물론 지방 수령들이 이걸 안 지켜서 문제였지만. 지방수령이 똘끼로 가득찬 인물이면 아무 때에나 치도곤으로 쳤다고 한다. 사극에서 보여지는 고증오류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는 셈. 그러나 적어도 법과 원칙이 지켜지는 자리에서 장형을 곤장으로 치는 것은 고증오류다.
도형이나 유형에도 병과되어 본 형을 집행하기 전에 장형을 집행했다. 천민과 악질 범죄자를 제외하고는 십자형틀에 묶어서 집행하기도 했다. 천민과 악질 범죄자는 그냥 바닥에 엎어놓고 벗긴 다음에 몽둥이로 친다. '그러면 귀양 가는 양반들은 전부 장을 당해서 간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 사대부들의 경우 속전이라 하여 돈으로 형벌을 대신하는게 보통이었다. 대역죄 급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죄목이 아닌 이상 사대부가 장형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 실제로 형벌은 대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어 장형이나 태형을 받는건 보통 평민과 천민들이었고 사대부나 그 아녀자들이 장형을 당하는 경우는 사화급 사건이 아닌 이상 없었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속전을 내고 면제받을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오승포[1]를 각각 18필, 21필, 24필, 27필, 30필을 냈으며, 점차 속전의 양이 줄어들어 영조 때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면포 1필 7자, 1필 14자, 1필 21자, 1필 28자, 2필 또는 돈으로 4냥 2전, 4냥 9전, 5냥 6전, 6냥 3전, 7냥을 내게 하여 그 양을 줄였다. 그러나 돈으로 대신하는 경우는 보통 일반 잡범죄를 저질렀을때(보통 태형 40 이하) 정도였고, 속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왕이 내린 형벌에서 장 70 이상을 전부 속바치게 하는 경우는 좀 드물고 보통 속바쳐서 태 40 이하로 낮췄다. 더 심할때는 속바치게 하는거 자체를 막기도 했다.
지방관아에서 잡범들 처리할 때나 쓰는 태형과는 달리 장형은 중앙에 보고가 될 정도의 중한 범죄자에게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관아에서 비공개로 처리될 때가 많은 태형과는 달리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집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왕명으로 장형이 집행될 때는 주로 종루 거리에서 시행되었다.
장형은 국가나 적어도 지방정부에서 하는 공식적 형벌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집행된 것은 장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모양만 비슷하게 흉내낸 것이지 그냥 폭행이다. 징역형 대신에 창고에 범죄자를 가두는 것을 집어넣는 꼴이다. 사사로이 매질하는 행위라 하여 사매질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꿇어앉힌 상태에서 남녀구분없이 웃통을 벗긴 후 등짝을 치는 방식과 바닥에 大자로 엎어놓고 볼기를 치는 방식으로 시행했고 치는 매는 대나무로 다발을 만든 걸 주로 사용했다.

2.1. 신장


신장(訊杖)은 주로 죄인을 심문해 자백을 받아내려 할 때 사용하였다. 신장은 당연히 위력은 장보다 강했다. 일반신장 추국신장 삼성신장으로 나뉘며, 삼성신장 정도 되면 역모 사건 등 중죄에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 처소의 나인들이 작서 사건 때문에 체포되어, 처음에 좋게 물어봤을 때 자백을 안 해서 바로 형틀에 묶여 곤장으로 정해진 수 없이 무한정 얻어터져서 엉덩이가 완전히 터지고 찢어져서 치마가 피로 적셔져 물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사용된 게 신장이다. 사극에서 넙적대한 형구로 엉덩이를 맞는 장면이 흔하게 나오게 된 것은 신장도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 생긴 모양은 곤장이랑 비슷하기 때문.
신장은 보통 중국에선 볼기를 치는게 맞으나 조선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신장으로 정강이를 치게 되어 있었다. 형벌용이 아니라 심문 중에 집행하는 고문이었기에 죄인을 엎어놓은 상태에서는 증언을 듣기 힘들었기에 죄인을 의자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진술과 고문을 함께 시행하는데 편하기 때문이었다. 본래 1차에 30까지만 치고 한 번 고문을 하면 3일 내에 다시 시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역모 사건의 경우 무한정 집행이 가능했다.[2] 다만 고문을 할 때에는 심문 담당 관원이 멋대로 하지 못하고 항상 왕에게 보고해서 허락받아야 했다. 그런데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도 모든 관리들이 FM대로 고문이나 형벌을 집행했을까 라고 묻는다면 글쎄... 그러나 역모건의 경우 한양 의금부로 압송해서 심문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당대 불법 고문 형태 중 하나로 곤장의 타격면으로 엉덩이를 마찰해 피부가 벗겨지게 만드는 고문이 있었다고 하니,# 신장이 됐든 뭐가 됐든 들고 와 죄인을 엎어놓고 엉덩이를 치는 고문은 알음알음 자행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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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기록사진 중 신장 집행모습
중국의 경우 상단 기록사진처럼 형구에 엎어놓고 치는 형태와 유튜브 링크[3] 처럼 양팔과 다리를 잡고, 주변에서 마구 후려치는 형태가 존재한다. 후자가 신장이다.


2.2. 난장


그리고 역시 도둑을 고문하는 용도로 의금부 수준에서만 진행된 형벌로 난장이라는 형벌이 존재한다. 역시 매는 신장과 같은 수준으로 보이는데, 이 형벌은 두 발을 묶은 다음에 들어올려서 고정시켜두고, '''맨 발바닥을 후려친다'''. 역시 고문용이므로 가차가 없어서, 정약용을 난장을 일컫어서 '''발가락을 자르는 형벌'''이라고 불렀다. 이걸 맞다보면 발가락 정도는 전부 떨어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2.3. 타격의 정도


태형과 다르게 장형은 목숨이 위협받는 형벌이었다. 장형 중 강한 위력의 신장은 한 번에 30번까지만 집행되고 3일을 쉰 후에나 더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루에 30번 이상 당하면 죽을 수 있기 때문...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는 '''등'''을 쳤다고 하는데, 이것을 당한 사람이 얼마 안 되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등의 경우에는 신체의 중요기관이 근처에 있는데다가 척추가 지나가니 매가 죽거나 반신불수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세종대왕엉덩이를 치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물론 엉덩이에 하는것도 등에 하는것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강도는 엄청 셌다. 가상 매체에서야 개나 소나 당하는 가장 흔한 형벌로 나오지만, 엉덩이를 치는 것도 그 아픔이 어찌나 심했던지, 사람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사… 살려 '''으악!!''' 주…줍쇼 '''끄악!!'''" '''"아이고!"'''하면서 하나같이 GG를 쳤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매가 심하게 아픈지라, 가장 낮은 60번만 당해도 초주검이 되고, 장 100번 수준까지 되면 사망까지 이를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사형같은 것을 집행하지 못할 때,''' 대신 '''합법적으로 사람을 저세상에 보내버릴 필요가 있을 경우 가장 빠르고 확실한 형벌'''로서 정치적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 말엔 '''정몽주'''가 정도전 등 역성 혁명파를 숙청하기 위해, 유배된 정도전 등을 장형으로 죽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태종)의 정몽주 살해로 실패하고, 훗날 조선이 건국된 뒤 정도전이 똑같은 방법으로 정몽주 일파의 인물들을 죽여 보복하였다. 참고로 이런 경우는 당연히 속전으로 깎는 걸 못하게 명시해놓는다. 숙종때에는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의 폐비를 반대하던 문신 박태보가 심한 장형, 압슬형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던 중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살아도 발기부전이 돼 버리는 경우도 생겼다. 여자도 이런 식으로 불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장형을 당하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는 대부분 골반 골절 등으로 인한 사망에 가깝고, 집행 후 옥이나 유배 중, 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사망한 경우는 대부분 근육 파괴로 인한 급성 신부전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횡문근융해증이라는 무서운 병이다. 장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근육세포가 파괴되면서 세포 내에 있다 터져나온 미오글로빈이 콩팥에 과다하게 축적되어 급성 신부전이 발생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사고 등으로 무거운 물체에 깔린 사람의 주된 사망원인 중 하나다.[4] 급성 신부전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장형 집행후 터진 상처부위의 2차 감염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장을 맞다가 괄약근에 힘이 풀려 대소변이 새어나와 상처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은 전근대였기에 세균의 감염이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었을 때 보통 '장독(杖毒)이 올라 죽었다'고 말했다. 민간에서는 장독을 치료할 요법으로 푸세식 변소에서 삭히고 삭힌 똥물을 생으로 먹였다고 한다. 독은 독으로 해소시켜야 한다나?
이렇게 대미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집행 중 몇 번완료했는지 까먹어서 더 많이 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 방!" "두 방!" 외치면서 거나,[5] 활줄에 산가지를 매달아 한 마다 옆에서 하나씩 셈한다거나.[6]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에 보통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장형을 치루게 되면 돈을 받고 장을 대신해주는 '매품팔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흥보가흥부 또한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것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가 이마저도 일감을 빼앗겨 실패하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직업이다. 야사에 따르면 이 매품팔이를 하면서 먹고사는 부부가 있었는데, 신나게 돈을 많이 번 어느 날 남편이 "오늘은 힘들어서(아파서) 그만 해야겠어"라고 하는 걸 아내가 "한번만 더 해요"라고 졸라댔다. 결국 남편은 관아로 가서 장을 한 번 더 당하다가 그대로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탔고 그 후 아내는 마을에서 쫓겨나 유랑하다 아사해서 남편 곁을 따라갔다고 전해진다.
장영실세종대왕이 탈 가마 제작을 감독했다가 그게 부서져서 책임을 지고 장형 80번에 처해진 후 파면되었다고 한다.[7] 이후 장영실은 알 수 없는 인생의 뒤안길로…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 장형 100번 장면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처음부터 형률에 따라서 장형 80회라고 나오고 그 형벌이 집행되었으며, 장영실 기록은 여기서 끝이다.

2.4. 여성에 대한 장형 집행


본시 중국에서 송나라 때까지는 태형과 장형을 가할 때는 남녀불문하고 타격부위를 벗겨놓고 치는게 원칙이었는데[8] 원나라에 오면서 단의결벌(單衣決罰) 이라는 원칙이 생겨 여성의 경우 간통죄가 아니면 속옷 한장 입혀놓고 집행하는 방식을 채용했고 명나라 성립 이후 대명률을 통해 완전 명문화되었다.[9] 대명률을 채택했던 조선 또한 이때부터 물볼기라는 집행 방식이 시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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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재현모형. 완성도 높은 신장이다.
하지만 태형이나 장형의 강도가 장난이 아닌데다 옷에 물을 끼얹기까지 하니 옷이 상처와 짬뽕이 되는 경우가 많기에 아예 여자에게 태형과 장형을 가할때는 신장의 방식처럼 정강이를 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춘향전에서도 춘향이 태형을 당하는 장면에서 묘사된 바 있다. 매를 칠 때는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타격 부위를 벗겨 놓고 치는게 원칙이라 신장을 칠 때는 종아리를 걷어놓고 치게 되어 있었는데 볼기를 칠 때와는 달리 여성의 맨다리를 드러내는데 대해서는 제한이 없었다.
이를 이용해 최대한 덜 아프게 하려고 편법을 쓰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연산군 때 '내한매'라는 기생이 왕이 주최한 연회에서 왕이 한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는 죄목으로 왕의 명으로 장형을 당하게 되자 형리에게 뇌물을 주고 속치마로 가려진 엉덩이에 미리 호피를 깔고 맞으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게 기록이 남았다는 건 '''현장에서 걸렸단 소리다.''' 당시 형조참의였던 민효증이란 사람이 혹시 옷에 뭐 숨겨놨나 의심하고 '''옷을 찢어서''' 딱 잡아내고 왕에게 직접 일러바쳤고,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된 내한매는 결국 안 그래도 아픈 매를 훨씬 더 가혹하게 얻어터졌다고 전해진다. 5년 후 내한매는 중종반정을 20여 일 앞두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장 100번 후 거제도로 귀양을 가며, 반정 직후 중종이 대사면령을 내렸을 때 귀양이 풀렸을 것이 원칙이었겠지만, 더 이상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장독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본시 간통죄가 최소 장형 80번 이상이었던 만큼 태형으로 여성이 엉덩이를 드러낸 상태로 집행되는 일은 없기에 엉덩이를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장형 집형시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장형은 관아에서 비공식적으로 집행하는 태형과는 달리 공개된 장소에서 집행하게 되어 있었으며 왕명으로 시행할 경우에는 종루거리 즉 현재의 종각 사거리에서 공개 집행을 하였다.
목민심서에 보면 어디까지나 규정상이었고 법을 잘 모르고 힘도 없는 평민이나 천민들의 경우 간통죄가 아닌 다른 범죄로 잡혀온 여인임에도 볼기를 내놓고 맞는 경우가 많은 폐해가 있었다고 정약용이 이를 비판하는 서술이 있다. 때문에 차라리 장형급 범죄는 정강이 치기로... 태형급 범죄는 종아리 치기로 대체하자는 주장까지 했다.
이처럼 엉덩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옷 한 장 빼고 모두 벗긴후에 물을 끼얹고 쳤다. 이를 가리켜 물볼기라 한다. 속곳(속옷) 한 겹만 남기고 쳤다고 하는데, 보통 속곳이라 하면 속바지류를 의미하기 때문에 남겨뒀다는 속옷은 가장 안에 입는 속바지인 속속곳일 확률이 높다. 다리속곳은 티팬티에 가까운 모습인지라... 자세한 것은 한복의 속옷 항목 참조. 하여튼 엉덩이가 보일 정도로 속바지를 걷어올리고 형을 집행했다. 한복의 여자 속바지는 통이 넓은데다 제작 방식에 따라 아래가 트여있기도 해서 충분히 그 정도로 걷을 수 있다. 물을 끼얹는 목적은 속옷이 날려서 '여성의 소중한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몸에 착 달라붙게 하려는 것이었을 뿐이지 엉덩이를 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물 끼얹은 속옷 위로 쳤는지도 의문이다. 드러나 있는 엉덩이 아랫부분과 넓적다리를 내려쳤을 가능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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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형벌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형정도첩에서 묘사된 여성의 태형 장면을 봐도 속속곳를 입히고 허벅지와 엉덩이의 일부가 노출될 정도로 걷어 올려진채로 태형을 받고 있다. 보통 매체에서는 제대로 고증 안 되는 편.

2.5. 대중 매체에서


사극에서 이를 연기할 때는 그나마 살살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끔찍하게 아프기 때문에 장형 부분에 책같은 걸 덧대서 충격을 줄인다고 한다. 물론 그래도 아프다.
또한 사극에서는 수위 문제상 보통 옷을 입히고 그 위에 지만 실제로는 엉덩이 맨살이 보이게 벗긴 다음 내리쳤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 곤장에 대한 고증이 왕왕 잘 된 작품도 있는 편이다. 성인 영화인 만청십대혹형의 여주인공 소백채는 간통하여 남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자백을 강요받는 과정에서 곤장 스무 대를 맞는다. 여성도 곤장을 맞을 때 탈의하는 것이 청의 규율이었는데, 영화에서 이를 착실히 따랐다. 관원들이 소백채의 상의를 걷고 하의를 벗겨 엉덩이와 허벅지를 노출시킨 후 가차없이 형벌을 가하는 광경이 여과없이 묘사된다. https://3g.163.com/v/video/VBSCDR3N8.html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되는데, 남성들로 이루어진 관아에서 하의가 벗겨진 채 볼기를 맞는 것은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고통과 수치심 속에서 형벌을 당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여성에 대한 물볼기의 경우는 수위 문제도 있지만, 제대로 된 이해의 문제도 있어서 한번도 고증에 맞게 재현된 사례가 없다. 예를 들어 영화 방자전의 묘사를 보면 치마를 모두 입은 상태에서 물을 끼얹었기에 고증을 따진다면 명백한 오류이며 속곳(속바지, 속속곳, 단속곳 등)만 입히고 집행하고 속치마 입히고 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식 속치마는 개화기 이후에 입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도 고증오류다. 원래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속옷[10]을 입었는데, 속바지도 상당히 많이 껴입은 탓에[11] 속치마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간혹 양반집에서 종종 행해지는 장형과 비슷한 사적재제들도 나오는데, 이는 '사매질'이라고 하며 형벌에 포함되지 않는다.
무한도전에서 "홍철아 장가가자'특집 이후 논란때문에 유재석김태호PD가 맞고, 스피드 레이서 특집 이후 태도 논란으로 박명수도 곤장을 당했다.
군주 온라인에서의 몬스터로 곤장차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팔쪽에 곤장이 달리고 벙거지를 쓴 로봇으로 묘사된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 에서 안여 파손 사건으로 의금부에 끌려온 선공감 관원들이 의자에 묶여 정강이에 몽둥이를 맞는 장형을 당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불멸의 이순신 50회에서는 화약 폭발사고로 인해 포수들이 집단탈영을 시도해 주모자는 목을 베고 나머지는 각각 장 80대를 쳐서 군율의 지엄함을 세웠다.

2.6. 기타


민속촌이나 관아 건물등의 문화재에는 방문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형틀과 장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형틀이 십자가와 비슷해 보여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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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이 형틀에 엎드리지 않고 십자가형 마냥 바로 '''누워서''' 형을 당하는 시늉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시늉만 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선 끔찍(?)해 보일 수 밖에 없다. 형틀 위에 십자가마냥 누운 상태라면 '''어디를 칠까?'''
장형이 사형의 한 방법으로 돌변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장살형이다. 죽을 때까지 장형을 집행하거나 사람이 장형을 받다가 중간에 사망하면 장살형으로 돌변해버린다. 이숭인, 김덕령, 임경업, 김홍욱이 장살형으로 사망했으며, 조심태는 행패가 심했던 현륭원 관리인 대장을 왕명에 의한 곤장 한 번만 쳤는데 수를 써서[12] 장형을 장살형으로 변질시켰다. 물론 이에 대한 징계는 없었다.순화군 같은 싸이코패스 살인마는 장살을 아주 즐겨썼다.
혹은 합법적인 정적 제거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높으신 분들의 눈엣가시 같은 인물을 그냥 죽이자니 이목이 신경 쓰이는 탓에 사형을 장형으로 깍아주면서 인정을 베푸는 척하는데 여기엔 이미 형벌 집행인과 말을 맞춘 상태라 그냥 '''죽여버리는''' 무지막지한 집행이 진행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보면 정도전이 정권을 잡은 후 반대파인 이숭인의 장형 집행인에게 '''일을 잘 처리하면 공신의 말석이라도 얻을 것이다'''라고 언질을 준다. 이후 이숭인은 등딱이 피걸레가 되다시피 해서 죽는다(...)[13]

[1] '승'은 베의 굵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5승이면 중등품의 베였다. 조선 시대에 일종의 공식 화폐처럼 쓰였는데 정작 베의 목적인 옷 만들기에는 부적합했다고.[2] 역모 사건의 경우에도 하루에 1차례만 하고 다음날에 다시 1차례를 하는게 상례였지만 이것 또한 왕 마음이라 인조가 궁중에서 발생한 저주 사건에 연루된 궁녀들을 추국할 때 신장을 30 치고 바로 압슬을 가하고 다시 신장 30을 치는 식으로 하루에 3차례의 고문을 가한 적도 있다.[3] <만청십대혹형>이라는 영화로서 위에서 당하는 사람은 소백채 역을 맡은 배우 옹홍이다. 청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곤장을 칠 때 탈의를 시켰는데, 성인 영화라 여성이 맨엉덩이에 장형을 받는 장면을 그대로 고증하였다.[4] Crush syndrome. 압궤 증후군이라고 불린다. 사고시에 장시간 끼어있던 다리를 빼내지 않고 절단하는 것은 이로인한 사망을 막기 위함이다. 한두시간의 경미한 경우도 만약을 대비해 링거를 통해 약액으로 유해물질을 해독하기도 한다. 태양의 후예에서 강모연이 작업반장을 구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5] 대왕세종 82회에서 장영실이 장 을 때에도 그랬다.[6] 싱가포르의 경우 오늘날까지 태형을 집행하는데 그 양상이 위의 설명 등과 유사하다. 실제로 싱가포르에서 강도살인을 한 한 인도인이 징역형과 태형 60번을 선고 받은적이 있는데 현지인들의 반응은 한결 같이 '''이건 그냥 죄인을 아예 죽이라는 얘기임ㅋ'''였다.(...) 물론 이럴 경우에 태형은 할부로 집행한다. 의사 참관하에 울며불며 이러다 죽겠다 싶으면 치료하고 몇달후 상처가 아물면 나머지를 집행한다.[7] 이 쪽관련 민담이 뻥이 엄청나다. 원래 이 혐의로 장영실이 장형 100번이 집행되게 되었을 때 세종대왕이 80번으로 삭감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형리들이 거절하자 세종대왕이 임금으로서 매우 파격적인 발언을 하는데 '''꼭 100번을 채워야만 하냐? 그럼 그 중 20번을 과인이 대신해주지 뭐!'''라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형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결국 임금을 대상으로 장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인지라 그냥 차라리 그 20번을 삭감해서 장영실이 80번 당하게 되었다. 이에 장영실이 자신을 위해 장형을 나눠주겠다는 세종대왕의 은혜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이 내용에 역사적 근거 같은건 전혀 없다.[8] 때문에 진서 형법지에는 위 명제 조예가 여성의 볼기를 노출시키는게 좀 그랬는지 당시 사회관념상 그나마 좀 노출시켜도 괜찮을 듯한 상체를 벗겨서 채찍질을 하라는 규정을 만들라는 기록도 나온다.[9] 다만 조선에서 간통죄가 아님에도 여자가 벗고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명나라에서도 이웃 간에 사소한 다툼이 벌어지면 상대방 부녀자를 간통죄로 몰아 관가에 허위 고발한 뒤, 관원을 매수하여 맨볼기를 내려치는 경우도 있었다.출처: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YY6g&articleno=382&categoryId=57&regdt=20110428220008[10] 삼국시대에도 하의를 부풀리기 위해 많은 속옷을 겹쳐 입었다. 한복의 풍성한 모습을 연출하려면 갖가지 속옷을 많이 껴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푸와 유사한 모습이 연출되어야 맞다.[11] 조선시대 기준으로 다리속곳 포함 하의 네 겹(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에서 일곱 겹(+너른바지, 무지기치마, 대슘치마), 상의 세 겹(가슴가리개, 속적삼, 속저고리)을 껴입었다.[12] 하는 시늉만 해서 안심시킨 뒤 갑자기 한 번 쳐서 죽였다.[13] 당시 기준으로 장형은 등짝에 가하는게 원칙이었다. 참고로 원래 이 방법은 정몽주가 정도전 일파를 처리하려던 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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