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제 사초

 

1. 개요
2. 내용
3. 기타
4. 바깥고리
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7호


1. 개요


鄭泰齊 史草. 조선 인조 때 예문관 검열(檢閱) 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사관(史官)직을 수행했던 정태제(鄭泰齊, 1612~1669)가 약 9개월간 남긴 사초. 현재 정태제의 다른 전적 38점과 함께 정태제묘 출토 전적류 일괄이란 명칭으로 서울시 시도유형문화재 제357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1987년 3월에 동래 정씨 사암공파 종친회에서 경기도 여주 능마리에 있는 선영의 이장작업을 하던 중 사암 정대년의 고손인 정태제(鄭泰齊)의 묘를 파헤치자 시신이 300년 넘게 부패되지도 않은 채 미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관 속에는 그의 시신뿐만 아니라 함께 관 속에 묻었던 사초도 썩지 않고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초는 국당(菊堂) 정태제가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으로 일할 당시 인조 15년에서 16년에 걸쳐 작성한 시정기였는데, 단순한 정무 기록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요 사건과 인물에 대한 사평(史評)이 곁들여져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더욱 컸다.
상·하 2권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권은 인조 15년인 1637년 12월 26일부터 이듬해 5월 22일까지이고, 하권은 인조 16년인 1638년 6월 13일부터 9월 17일까지이다.
정태제는 당시 붕당 정국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던 인물로, 당시의 인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도 많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정태제 사초가 다른 사초들보다 유독 특별하고 값진 이유는 바로 가장사초(家藏史草)라는 점에 있다. 조선시대 사초는 그 제작방법이나 형태에 따라 공적사초(시정기, 時政記), 입시사초(入侍史草), 사장사초(私藏史草), 가장사초(家藏史草)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중 세초의 집중적인 대상이 되었던 가장사초가 압도적으로 희귀하다. 특히 가장사초는 그 날 일어난 일을 자세히 기록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개인적인 감정을 수록하는 것은 가급적 자제하는 다른 사초들과는 달리 각 기사 마다 사관 개인의 감정과 사론을 여과없이 수록하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크다. 무엇보다 가장사초는 평소에는 집에 놔두는 거라 남들 눈치볼 것 없기 때문에 실록 등의 다른 역사책에 실리는 일반 사론들보다 훨씬 신랄하고 때론 욕설까지 섞어놓는다. [1]
현재 공식적으로 현존하는 사초는 약 27종이고, 비공식적인 사초물까지 합치면 조정 내 경연(經筵)에서 논의된 내용을 전문적으로 기록한 경연일기(經筵日記), 어전 회의를 주로 전문적으로 기록한 당후일기(堂后日記), 춘추관 소속의 기사관(記事官)이나 기주관(記注官)이 작성한 춘추관일기(春秋館日記)와 겸춘추일기(兼春秋日記), 예문관에 소속된 사관 중 그날 입시한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가 작성한 방상일기(房上日記), 조선시대 지방 관청에서 사관(史官)의 역할을 담당하던 외사(外史)가 작성한 외사일기(外史日記), 홍문관(弘文館)에서 임시 사관의 역할을 하며 작성한 옥서일기(玉署日記) 등을 모두 합쳐 약 110여종 이상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중 가장사초는 정태제 사초, 효종대의 문신인 정태화(鄭太和, 1602~1673)가 기록한 기사찬초(記事撰草), 영조대 관리인 윤동승(尹東昇, 1718∼1773)이 기록한 한간비초(汗簡秘草), 정조대의 문신인 김몽화(金夢華)가 기록한 비사(秘史) 4종류 뿐이다.## 이 중 기사찬초는 해외로 유출되어 있어 사실상 연구가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가장사초는 정태제 사초, 한간비초, 비사 단 셋 뿐이다.
2014년 7월 3일에 묘지에서 발견된 정태제 문적 39점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7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조 무인년 사초와 정태제 사초의 원문 일부를 한국사료총서 『조선시대사초 Ⅰ』(朝鮮時代史草 Ⅰ)에 수록하였다. 조선시대 사초 Ⅰ : 史草上(鄭泰齊), 史草下(鄭泰齊), 仁祖 戊寅史草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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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4일에 천상의 컬렉션에 나왔다.

4. 바깥고리



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7호


조선 인조 때 예문관 검열(檢閱) 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사관(史官)직을 수행한 정태제의 묘에서 출토된 전적류의 유물을 통칭한다. 이 유물들은 1987년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 점동면 장안리 관골의 동래정씨 사암공파(思菴公派) 선영에 있던 정태제의 묘를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사초 상·하권 2점과 중기 1점, 책력 2점, 한글 문서 12점, 한문 문서 22점 등 총 39점이 출토되었으며,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7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7호로 지정되었다.

사초(史草)

상·하권 모두 필사본이며, 판식(版式)은 각 면의 네 모서리에 2개의 선이 둘러진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상내향화문어미(上內向花紋魚尾)를 갖추고 있다. 상권은 25.6×17.5㎝ 크기에 217면, 하권은 27.8×20.8㎝ 크기에 23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은 1637년(인조 15) 12월 26일부터 1638년(인조 16) 5월 22일까지, 하권은 1638년 6월 13일부터 9월 17일까지 조정에서 일어난 시사(時事)와 인물 및 사건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사초는 사관이 개별적으로 집에서 보관하던 가장사초(家藏史草)에 해당한다. 사관은 조정에서 매일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고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날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사실과 평가를 기록하여 보관하였다. 가장사초는 후에 실록청이 설치되면 제출되어 실록을 편찬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정태제는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조정에서 일어난 시정(時政)의 득실을 정리하면서 나름의 평가를 곁들였는데, 여기에 실린 기사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 많아 당시 당파에 따른 사서 편찬의 필삭 과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태제의 사초는 사관의 직필(直筆)과 그것이 실제 실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중기(重記)

1644년(인조 22) 정월에 작성된 강원도 홍천현(현 홍천군)의 비품 출납 문서로, 크기는 38.6×22.4㎝이다. 중기란 사무를 인계할 때에 전하는 문서나 장부를 가리킨다. 이 중기에는 각종 창곡(倉穀)의 수입과 지출 및 이관, 비품의 재고와 유실 및 파손의 경위, 전곡과 무기류, 재물류 등에 대한 관청 재고와 흠결, 차액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태제가 승지직을 맡고 있을 때, 지방 관아의 재무 현황과 관련하여 보고받은 문서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사회경제사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책력(冊曆)

《계미갑신을유역일 癸未甲申乙酉曆日》과 《병정역일 丙丁曆日》 2점이 출토되었다. 《계미갑신을유역일》은 계미년(1643)·갑신년(1644)·을유년(1645) 등 3년간의 대통력 묶음으로, 크기는 37.5×19.2㎝이다. 《병정역일》은 병술년(1946)과 정해년(1647)의 대통력 묶음으로, 크기는 34.4×28.5㎝이다. 해당 연도의 대통력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로서 일력에 적힌 내용을 통하여 1643~1647년 사이 정태제의 개인사뿐 아니라 당시 양반들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한글 문서

치부책 2책과 정태제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2통, 병록(病錄)과 노비안(奴婢案) 등 기타 문서 8점이 있다. 재화와 물목 및 그 가격이 한글로 적혀 있어 17세기 경제사뿐 아니라 국어사 특히 어휘사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17세기 자료로는 드물게 양반 남성이 아내에게 쓴 편지와 한글·한문을 혼용한 병록을 통하여 국어생활사의 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한문 문서

편지 13통과 화제(和劑;처방전) 3점, 시권(試券) 1점, 시권(詩卷) 1점, 물목 1점, 사본 1점, 문기(文記) 1점, 내용 미상 1점 등 총 22점이 있다. 편지는 대부분 정태제의 아버지 정양우(鄭良佑)가 1647년(인조 25) 영변에서 유배 중인 아들에게 보낸 것이며, 동생인 양필(良弼)에게 보낸 것도 있다.


[1] 정태제 사초는 여기서 아예 한 술 더 떠서 “지금의 임금예전 임금보다 더 못하다”고까지 써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