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1. 개요
2. 종류
2.1. 인공 미라
2.2. 건조 미라
2.3. 냉동 미라
2.4. 공기차단 미라
3. 실제 사례
4. 유명 미라
4.1. 외치(Oetzi)
4.2. 얼음 소녀(라 돈셀라/La Doncella)
4.3. 람세스 2세
4.4. 로잘리아 롬바르도
4.5. 이외 나무위키에 항목이 존재하는 유명 미라들
5. 기타
6. 미라를 모티프로 한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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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후처리를 통해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된 시신을 지칭한다. 엄밀히 따져 인간의 시신뿐 아니라 이집트고양이 미라처럼 다른 동물의 시체도 포함된다. 식물의 경우 죽은 후 부패하지 않고 건조되어도 미라라고 칭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건어물 역시 미라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 시신의 경우만을 미라라고 칭하는게 흔하다.
아무래도 시신이다 보니 많은 일반인들이 미라에 관해 접하는 것을 꺼리지만, 미라를 통해 고대인들의 생활을 직접 분석하고 그 시절의 영양 상태나 문화, 의복, 역사적 사실 등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래된, 그리고 잘 보존된 미라일수록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각 언어별 표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포르투갈어 mirra가 일본어 ミイラ를 거쳐 들어온 '미라', '미이라'로 알려져 있다. mirra는 '몰약'을 뜻하는 단어인데, 어쩌다가 일본에 미라로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미라를 만들 때 쓰는 방부제가 몰약으로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한자어 '목내이(木乃伊)'라고 쓰기도 한다.[1] 한편 대다수의 유럽어에서는 라틴어 mumia에서 유래한 단어들을 쓰고 있는데, 이 mumia는 '밀랍'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mūm에서 유래한 아랍어 ‎ مومياء (mūmiya')를 어원으로 한다.
국내에서는 미라에 관해 다큐멘터리 세계의 눈(해당 회차 링크), 원더풀 사이언스(해당 회차 링크 2)에서 심도있게 다루었었다. '미라' 하면 붕대를 감은 이집트 미라의 막연한 이미지밖에 없던 국내에서 큰 희소식.

2. 종류



2.1. 인공 미라


의도적으로 미라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 시신 건조 또는 냉동, 방부제 등을 이용해 부패가 일어나지 않도록 처리된 미라. 일반인들이 미라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고대 이집트의 미라가 대표적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는 언젠가는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해서 시신을 온존하기 위해 시신의 심장을 제외한 내장을 제거한 후 미라를 만들었다고 한다[2]. 이런 인공 미라 제작은 고대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행해졌지만 이집트보다 기술력이 떨어졌기에 이쪽은 발견되는 대부분의 미라가 백골을 겨우 면하는 수준이다.
인공 미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내장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자연 미라들과 달리 연구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은 편이다.

2.2. 건조 미라


극도로 건조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자연 미라. 사막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2.3. 냉동 미라


미생물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저온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자연 미라. 극지방 혹은 고산지대에서 발견된다. 아래의 아이스맨 외치도 냉동 미라의 일종. 보통 미라라고는 하지 않지만 에베레스트 등반 중 사망하여 썩지 않고 등산로에 방치된 시신들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4. 공기차단 미라


완전히 밀봉되어 공기가 차단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자연 미라. 늪지대에서 주로 발견된다.
의외로 한국에서도 발견되며, 한국에서 발견되는 미라는 모두 공기차단 미라이다. '회묘(灰墓)'(회격묘) 제작 방식으로 묻힌 사람들 수가 많기 때문. 조선시대에는 무덤 안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과 해충이 시신을 손상시키는 것을 막고자 관의 사방에 두껍게 석회를 칠하는 회묘(灰墓)가 크게 성행했고, 거기에 을 넣기도 했는데 석회는 강력한 방수작용을, 숯은 자동 방습작용을 하면서 전혀 뜻하지 않게 미라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 문서의 '실제사례/한국' 문단에서 후술한다.여전히 유교적 가치관이 짙은 대한민국에서는 이렇게 생성된 미라를 발견하더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여, 시신을 다시 묻거나 화장(火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실제로 발견된 미라 수와 연구된 미라 수는 많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3]. 굳이 유교적 인식을 공고히 하지 않더라도, 고인의 신체를 다루는 것이므로 관련 연구자들은 미라 연구에 앞서 미라에 예를 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해부실습 같은 의료 교육 등에 관해 시신 기증자의 시신에 동서를 불문하고 예(禮)를 표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 미라의 경우 생전 당사자의 의사를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더더욱 그렇다.

3. 실제 사례



3.1. 이집트


미라의 대중적 이미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이다. 붕대(아마포)를 몸에 감은 미라가 바로 이집트 미라의 특징.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후세계부활에 대한 믿음을 이유로 다수의 인공 미라를 제작, 관리했으며, 미라 제조 전문가들도 있었다.
미라를 제작한 이유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관(死後觀)때문으로,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인 '카(Ka)'는 사후세계로 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시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와 되살아난다고 믿었으며, 그럴려면 그때에 돌아올 육신인 '하(Ha)'가 온전해야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다고 믿어 시체 보존에 대한 경험과 약학지식 등을 동원하여 시신을 방부 처리를 한 것이었다. 복잡한 미라 제조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이집트 기후가 워낙 건조하다보니 바깥에 놔둬도 저절로 자연 미라가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4],피라미드 등의 폐쇄적인 무덤 안에 시신이 안치되면서 시신이 부패할 가능성이 생겨나 결국 저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한다.
미라 제작 시 심장을 제외한 내장을 빼낸 후 시신 안에 다른 물질을 채웠는데, 사회 상류층은 송진과 향료를 섞어 넣었고, 하층민의 경우 톱밥이나 돌덩이를 넣은 경우도 있었다고한다. 이후 몸을 탄산나트륨을 이용해 건조시키고 붕대(아마포)를 감은 후 관에 넣으면 끝. 이집트 미라의 역사를 기준으로 먼 훗날에는 미라 제조 문화가 고대 로마 문명권으로 확산되었는데, 로마 문명권에서는 주로 관을 쓰지 않고 시신을 아마포를 감은 뒤 석고 또는 회반죽을 칠해 시신의 윤곽을 드러내도록 굳히고[5] 채색해 관을 대신하거나, 석고를 칠한 뒤 그 위에 일상복이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아마포를 더 감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생각을 로 하는게 아니라 심장으로 한다고 생각했고, 사후 지하에서 오시리스가 저울에 심장을 달아 선악을 판별하고 저승 또는 천국으로 보내는 증거로 삼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심장은 가장 중요한 장기여서 꺼낸 다음 따로 붕대로 싸서 다시 넣거나 실로 꿰맸다고 한다. 한편 심장과 달리 뇌를 그다지 중요한 기관인 줄 몰랐고, (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미라 제작시 시신의 를 제거했다. 제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콧구멍을 통해 갈고리랑 주걱을 쑤셔넣어 사골(篩骨. 벌집뼈)이라 불리는 코와 머리가 연결된 곳의 뼈를 부순 다음 뇌를 뽑아내는 방법이고 하나는 드물긴 하지만 머리 뒤에 구멍을 내어 그 구멍으로 를 꺼내는 방법이 있다(일설에 의하면 투탕카멘의 미라가 이 시술을 거쳤다는 설이 있다.). 뇌를 꺼낸 자리에는 송진[6]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뇌를 제거하는 건 후대의 일로, 예전에는 그냥 뒀다고 한다. 뇌가 남은 미라는 흔들면 말라붙은 뇌가 두개골 안에서 움직여서 딸깍딸깍 소리(...)가 난다고 한다.
파라오의 일족이나 귀족의 경우는 제거한 장기(간, 폐, 위, 소장/대장만)를 따로 방부처리하여 카노푸스 단지라고 부르는 다른 용기에 담았고, 중산층의 경우는 특수한 약물[7]을 시신의 항문에 주입해 내장을 다 녹여서 겉만 남은 시신을 미라로, 형편이 안 되는 서민들은 그냥 건조한 토굴에 안치하여 자연적으로 건조되는 방식을 택했다.
미라로 만들 대상이 젊은 귀부인일 경우에는 시간(屍姦)을 방지하기 위해 며칠 방치하였다가 미라 제작자들에게 건네주어 미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고양이같은 친숙한 동물뿐만 아니라 거의 웬만한 동물도 미라로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신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특수한 동물들은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별도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모셔지던 , 따오기, 악어, 하마, 의 미라는 살고 있던 신전의 묘지에 안치되었고, 신성시되었을 뿐 아니라 애완용으로도 키워지던 고양이 미라[8] 같은 것은 한번에 수십 씩 발굴되기도 했다. 19세기에 베니하산에서는 20톤의 고양이 미라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는데, 몽땅 갈아서 비료로 써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많이 만들었던 탓에 꾸준히 발견되고 있고, 루브르대영박물관 등에 여러 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이집트 북부에서 한번에 800만 마리의 개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다. 성스럽다고 여긴 물고기들도 미라로 만들었기에 물고기 미라도 많이 발견되었을 뿐더러 원숭이, , , 당나귀 등등 이집트 박물관에 가면 진짜 여러가지의 미라가 놓여 있다. 참고로 대부분의 미라로 만든 동물들은 '의식용'으로 키워진 동물들이다. 이 동물들은 신전에서 미라와 함께 묻기 위해 키우는 동물들인데, 신전에서 떠받들다시피 키우다가 이들을 껴묻거리용으로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고가에 팔았다. 주로 재생의 상징인 개구리, 바스테트의 표상인 고양이, 호루스의 상징인 , 크눔의 상징인 악어등을 많이 묻었다. 이외에도 죽은 이가 부활했을 때 먹기 위해 미라처리해 둔 동물들도 있다.
2017년 영국에서 전국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 동물 미라들을 X선 등으로 조사했더니, 사체가 실제로는 없는 '가짜 동물 미라'가 적지 않다는 게 밝혀졌다. 현대에 모조품을 만든게 아니라, 고대 이집트인들이 처음부터 가짜 동물 미라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를 연구한 리디야 맥나이트 박사는 두가지 이유를 추측했는데, 하나는 동물의 사체 자체는 주인과 함께 매장하고 이후 기념품의 용도로 '모의 미라'를 제작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미라 제작자들이 사기를 쳤을 가능성이다. 후자의 경우, 당대 이집트에선 위에 언급한 것처럼 동물 미라 제작이 대단히 활발해서 '산업'으로 봐도 될 정도였으므로 이를 악용해서 가짜 미라를 만드는 사기꾼도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게 그 근거이다.
미라 풍습은 로마 점령 시대 이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미라제작은 이집트 방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매장방식엔 차이가 생겼는데, 붕대를 감은 뒤 로마식 유화/모자이크화 방식으로 망자의 얼굴이 그려진 마스크를 씌우거나, 미라를 안치할 관에 망자의 생전 얼굴을 그려넣는 등이었다. 아예 생전에 영정사진처럼 그려둔 초상화를 붕대에 부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초상화에 보정(...)을 과하게 넣은 것이 현대에 밝혀져 호사가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기도 했다.
이후 이집트 전통 신앙의 쇠퇴와 기독교/이슬람교의 박해로 미라 제작은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유럽르네상스시대에 접어든 이후 해부학의 발전에 따라 고대 이집트의 시신 방부 처리법을 재조명하기 시작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부활하여 오늘날의 엠버밍으로 그 명맥이 이어진다.
람세스 2세의 미라와 투탕카멘의 미라가 매우 유명하다.이집트 관광산업의 돈줄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
게티 박물관(Getty Museum)에서 제공한, 미라 제작 내용을 담은 3D 애니메이션이 있다(#). 영어로 되어 있으며 영어를 못하더라도 직관적인 영상으로 절차가 재생되니 이해하기 편한 좋은 자료다. Herakleides라는 인물의 미라로, 기원후(AD) 1세기의 고대 이집트 미라로 전체로 놓고 보면 비교적 최근의 미라다. 이름 역시 그리스 문자로 적혀있었다고 한다. 구글 검색을하면 인물의 이름이 섞여 나오는데,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철학자인 'Heraclides Ponticus'와는 다른 인물이므로 혼동하지 말 것. 한글로 '헤라클레이데스'라고 적으면 거의 모두 고대 그리스 철학자 얘기만 나오므로 이 미라에 관한 내용은 로마자로 적거나 뒤에 Mummy 등을 꼭 붙여야한다.
19세기 말에 왕가의 계곡 일대가 발굴되고, 20세기투탕카멘 왕의 무덤 발굴과 관련된 이야기가 널리퍼져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도시전설로 발전하면서 공포물의 소재가 되어 종종 공포 영화액션 영화의 주연으로서 등장한다. 이는 고대 문화에 대한 후대의 몰이해와 당시 서구 열강에 신비스럽고 기괴하게 받아들여진 이집트 미라의 인식과도 관련깊다.

3.2. 한국



조선시대 성행한 회곽묘는 그 환경으로 인래 우연한 미라 생성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생성된 미라와 달리 신체적 특징은 물론 착용하고 있던 의복과 장신구, 심지어 체내의 기생충, 배설물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비록 겉은 완전건조된 미라여도 체내 수분이 남아있어 인위적으로 생성된 미라와 달리 CT, MRI 등 영상촬영도 가능하다고 한다. 원래 회곽묘는 미라를 만들려고 조성한 게 결코 아니다. 유교에서는 시체가 자연스럽게 썩어야 한다고 여겼고 단지 썩기 전까지만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 석회로 곽을 감싼 것이다. 그런데 석회는 물과 반응해서 열을 방출하는 특성이 있어서, 주변 수분을 흡수한 회곽묘의 석회에서 섭씨 200도 가량의 열을 방출해 곽과 관 내부를 살균하고 건조시켜 자연 미라를 만드는 일이 었었다.
1965년에는 의병장 김덕령의 무덤을 선산으로 이장할 때 시신이 미라 상태인 채로 발견되었는데, 문중 사람들은 이를 보고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려 있다고 생각해 사진기를 가지고 와서 촬영하려고 했지만, 사진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지라 사진기를 구했을 때는 이미 공기 중 세균과 접촉하여 부패가 진행되어 별 수 없이 화장처리해서 묻어버렸다고 한다. 다만 의복 등은 보존처리가 되어서 충장사에 전시되어 있다.
2001년에는 해평 윤씨 무덤을 이장하던 중 약 400년전 조선시대 소년의 미라를 발견했다. 땋은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까지 시신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약 6살 정도의 소년으로, 옷이 함께 발견되어 문헌으로만 남아있던 아동 복식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연구진들의 분석 결과 사망 원인은 결핵이라고 한다. 정확한 인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보통 '단웅이 미라'로 불린다고 한다.영상
2002년에는 파평 윤씨 여성의 미라가 발견된 적이 있다. 친정에서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임신한 채로 발견된 미라라고 한다. 사망 원인은 정확히 자궁파열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조부가 거물이라[9] 제대로 관을 쓴 결과 의도치 않게 미라가 되었다. 이 여성의 미라는 피부에 수분이 남아있었고, 살아있는 사람의 CT나 MRI 사진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대단히 좋았으며, 그런 탓에 보통 난산으로 인한 사망 후 뱃속에 차는 부패가스로 인해 복중의 태아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움[10]에도 불구하고, 출생 직전의 태아도 아무런 손상없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2007년에는 강원도 강릉시에서 임진왜란시기 왜군과 싸웠던 최씨 장군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생전 폐가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폐에 좋다고 약으로 쓰이는 포황(蒲黃, 부들의 꽃가루)이 장기에서 많이 검출되었다. 사망 당시 60대였다.
2012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에서 260여년 전[11] 사망한 팔회당 이시항 선생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영조 때 벼슬을 지낸 이시항 선생은 발견 당시 계급에 맞는 관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 수염을 비롯한 머리카락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 안동은 오래 전부터 세가 좋은 가문이 많아 이렇게 보존이 잘 된 미라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시항 선생의 미라 사진이 담긴 관련 기사.
2014년 11월 3일에는 대전광역시 서구 갈마동에 위치한 도솔산[12]에서 단양 우씨의 묘를 이장하던 중 조선시대 중종 때 궁중 음식을 담당하던 사옹원에서 봉사직 등을 지낸 우백기의 미라와 습의 등이 발견되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막 발굴된 참이라 박물관에서 바로 보존처리를 하고 향후 연구자료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379년 이상[13]광주 이씨 문경공지파 덕열의 부인인 청풍 김씨의 미라가 발견됐다. 사망 당시 70대였다. 청풍 김씨 미라 사진이 담긴 관련 기사.
2017년의 뉴스 기사에 따르면, 그냥 연구실 냉동고에 방치되는 미라가 있어 문제가 된다고 한다.관련 뉴스.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발견된 조선 전기 여인의 미라를 통해 사서의 기록을 검증한 사례가 있다. 미라의 장 속 소화물을 분석한 결과 굴을 통해 감염되는 참굴큰입흡충의 알이 발견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하동일대에서 신선한 이 많이 생산되어 중앙으로 상납했다고한다. 참굴큰입흡충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에 기생했는지도 확인한 셈이다.
과거에는 미라가 발견되어도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발견 자체가 후손들이 산소를 이장하느라 파묘했을 때 이루어지는게 대부분이고, 연구자들에게 알릴 경우 시신의 뼈와 살을 분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후손들로서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자 불효라고 여겨 미라가 나와도 미라 발굴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그냥 다른 곳에 재 매장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으면 운이 좋은 편. 다만 2000년대 이후에는 CT나 MRI 등 시신을 분해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술이 나와 있고, 사람들 인식도 달라져서 시신을 기증하는 후손도 종종 있다.
한편 이러한 특성 때문에 조선왕릉 가운데 세조 이후의 왕들과 왕비들의 시신이 미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반 사대부의 묘에서도 잘 보존된 미라가 발견되는데, 더 엄격한 격식을 갖추어 능을 만들고 관리했다면 그 가능성은 아주 높다. 어진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왕릉에 잠들어있는 왕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볼 수도 있다.[14] 하지만 조선왕릉의 발굴 조사는 왕릉 제례를 맡은 전주 이씨 종약원에서 강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15]
현대에 와선 역사적인 유물과 사례들 말고도 때론 방치되어 고독사한 사람이 미라화가 되어 발견되어 이슈가 되기도 한다. 2013년에는 부산광역시의 한 주택가에서 당시로부터 5년 전 고독사한 어느 할머니의 시신이 미라화된 채 발견되어 큰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시신은 겨울옷을 겹겹이 싸입은 채 발견되어 세간에 여러 충격을 주었다. 이웃들의 왕래가 없었던 탓에 누구도 할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급격한 발전을 이룬 탓에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 편 조선시대에서도 여진족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

3.3. 중국


중국에서도 미라는 종종 발견되는데, 한국과 마찬가지로 회격묘에서 발굴되는 빈도가 높고, 미라 생성의 원리도 비슷하다. 이외에도 타클라마칸 사막 등 중국 서부 쪽에는 사막 기후때문에 미라가 되어 발견되는 시신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
현재의 후난성에서 발견됐으며, 마왕퇴한묘(马王堆汉墓,마황퇴)에서 발굴된 여성의 미라(신추 부인)가 굉장히 유명하다.
마왕퇴한묘 미라의 생전 모습 복원 인형과 미라의 모습(열람 주의).
마왕퇴한묘의 미라는 워낙 시신이 잘 보존되어 의학자들이 해부한 뒤 보고서도 작성되었다. 습기찬 토양에서 관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는데, 이 수분이 당시 풍습대로 매장직전 관에 부어진 에탄올과 반응하면서 관 자체가 방부액체로 채워진 결과가 되었다. 상상 이상으로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우연히 형성된 방부액으로 인해, 물에 퉁퉁 불은 것처럼 미라가 부어 있어 비위가 약하면 보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
분석 결과 마왕퇴한묘의 미라는 한(漢)나라(!)시대[16] 인물의 미라로, 미라의 신원은 전한(前漢)의 공신인 대후 이창의 부인인 '신추(辛追, 한어병음:Xin Zhui)이고, 50세에 사망했고 사인이 심근경색이며, 동맥경화[17], 담결석, 당뇨, 심장병, 고혈압, 허리디스크, 비만을 앓았고 죽기 직전 참외를 먹었다는 것이 밝혀졌다.[18] 물론 이 무덤 역시 대량의 석회와 흙으로 밀봉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부패가 억제된 것도 있다. 발굴 당시 여러 서적, 의복뿐만 아니라 부장품이었던 과일류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 때문.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여성의 아들[19]이 먼저 급사하였고 아들의 죽음을 본 이 여성이 자신이 죽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무덤을 건설하였기 때문에 이런 밀봉이 가능했다고 한다. 다만 남편 이창과 아들의 유해는 모두 썩어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창의 무덤은 도굴되어 밀봉이 사라졌고 아들의 무덤은 모친의 무덤에 비해 밀봉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웨난이 쓴 《마왕퇴의 귀부인》 또는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를 참조할 것.[20] 참고로 한국의 서울어린이대공원 주변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로 미라화한 시신이 발견된 적이 있다.
아래는 신추 부인의 아들이 누구인가에 관한 위키러들의 분석이다.
[ 신추 부인의 아들은 전한의 제후 이희인가? 펼치기 • 접기 (터치 • 클릭)]
1. 신추 부인의 아들은 이희가 아니다.
신추 부인의 급사한 아들이 전한(前漢)의 제후 이희(利豨)는 아닌 게, 이희(利豨)는 기원전 165년에 죽었는데 묘의 연대가 기원전 168년이다. 이는 이승률의 '죽간 · 목간 · 백서, 중국 고대 간백자료의 세계에서 인용했다. 본 문서의 옛 버전에서는 신추 부인의 아들이 이희라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책 <마왕퇴의 귀부인>이나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에 실제로 신추 부인의 아들이 이희라고 서술되어 있는지, 혹은 왜 신추 부인의 아들이 이희라고 추정했는지 근거가 필요하다.
2.신추 부인의 아들은 이희가 맞다.
<마왕퇴의 귀부인>에서는 부거유의 설을 근거로 하여 이희의 무덤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부거유가 발표한 이래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설이다. 무덤주인의 사망년도와 사서에 기록된 사망연도의 차이에 대해서 당시에도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부거유의 답변과 추론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3호묘 주인에 대해 나를 비롯해 모두가 '이희가 아니라 당연히 이희의 형제'라고 생각했다. (중략) 7~8년에 걸친 혼신의 연구 끝에 우리가 3호묘의 주인에 대해 내린 원래의 결론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했다. (중략) 논문은 주로 3호묘의 관제, 명정, 견책에 기록된 미인과 재인, 견책에 기록된 알자, 목간의 낭중, '대후가'라는 붉은 글씨와 '대후가승'이라는 봉니, 견책의 '가리', 견책의 '환자','수중', 거기제도, 종졸병마제도 등의 분야에서 무덤 주인의 신분이 열후인 것을 증명했다. <사기>와 <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제2대 대후 이희가 한나라 문제 15년(기원전 165년)에 죽었다는 기록과 3호묘 목간에 기록되어 있는 문제 12(기원전 168년)년의 기록 사이에 3년의 차이가 나는 일은 당연히 사기와 한서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즉, 이희 모친이 문제 15년에 죽었는데 이를 이희의 사망 연대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중략) "제후는 2중이다"라는 것은 제후는 3개의 관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3호묘는 바로 3중의 관으로 제후의 관제에 정확히 부합한다. 장사에서 이미 발굴된 서한 초기 제후의 무덤을 보면 모두 관이 3중이다. 따라서 3호묘의 주인은 당연히 제후여야 한다. (중략) 3호묘의 명정 윗부분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고 아랫부분에는 교룡이 그려져 있다. (중략) 한나라 때의 장례 제도에 의거하면 3호묘의 주인은 당연히 제후여야 한다. 3호묘의 견책에 무덤 주인이 '가승 1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서 백관공경표>와 <후한서 백관지>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제후는 '가승 1인'을 둘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고한다. 이는 무덤 주인이 열후인 것을 말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견책에 무덤 주인이 "88명의 미인과 20인의 재인", "환관 9인"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후궁제도의 규정에 의하면 제후와 황제만이 '미인' '재인' '환관'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무덤 주인의 지위가 최소한 열후라는 것을 말한다. <사기>와 <한서> 같은 명저에도 착오가 있을 수 있기 마련이다. <한서 고혜고후문공신표>는 대후 이창을 '여주창'으로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 예이다. 이 착오는 1974년 마왕퇴 2호묘가 발굴되고 '장사승상', '대후지인', '이창'등의 인장 3점이 출토된 후에야 비로소 한서의 이 착오가 바로 잡혔다. (...) <사기 혜경간후자년표>는 '이창(利蒼)'을 '이창(利倉)'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사기>의 기록도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 경우처럼 고고학 발견은 이따금 역사 문헌 기록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양옥승은 자신이 지은 <사기지의>라는 책에서 <사기>가 연대 표기에서 100여 곳 이상의 오류를 범했는데, 그중 '표(表)'에서 연대 표기의 오류가 가장 많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사기 고조공신후자년표> 고후(高后)의 기록에 "4년에 태위를 삼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기 강후세가>에는 "혜제 6년에 태위관을설치하고 발(勃)을 태위로 삼았다. 10년만에 고후가 죽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한서 백관공경표>에 "혜제 6년 강후 주발(周勃)이 다시 태위가 되었고 10년에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혜제 6년부터 여후 8년까지는 딱 10년인데, 만일 여후 4년에 태위를 설치했으면 단지 5년 있었던 것이다.이로부터 <사기 고조공신후자년표>의 연대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두 열후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경우는 그 서열이 반드시 이웃한 경우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상황이 2가지 있었는데,하나는 서열 66위인 양평후의 공이 서열 54위인 평정후와 비교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열 99위인 송자후의 공이 서열 92위인 역후와 비교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예외는 <사기>와 <한서>의 기록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런 연대 표기상의 착오와 오기는 <사기>와 <한서>의 표에 매우 많다. 1호묘는 2,3호묘와는 별도로 발굴됐기 때문에 지층 관계에서 볼 때 이 두 무덤보다 늦다. (...) 1호묘에서 출토된 니반냥전(泥半兩錢)과 3호묘 전토에서 출토된 반냥전은 문제 시기의 사수반냥전(四銖半兩錢)과 같다. 이 때문에 두 무덤의 연대는 마땅히 매우 근접하며, 그 차이가 불과 몇 년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3호묘는 무덤에서 출토된 연대가 적힌 목간을 근거로 문제 12년에 매장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호묘는 문제 15년 전후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호묘의 주인은 제2대 대후 이희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사망 연도는 바로 <사기>와 <한서>에 기록된 이희의 사망 연도, 즉 문제 15년이다. 그리고 3호묘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장 방식을 근거로 3호묘의 주인은 바로 제2대 대후 이희이며, 한나라 문제 12년[45]에 장사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기>와 <한서>에서 이희 모친의 사망 연도인 문제 15년을 이희의 사망 연도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처럼 고고학 발견은 이따금 역사 문헌 기록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양옥승은 자신이 지은 <사기지의>라는 책에서 <사기>가 연대 표기에서 100여 곳 이상의 오류를 범했는데, 그중 '표(表)'에서 연대 표기의 오류가 가장 많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사기 고조공신후자년표> 고후(高后)의 기록에 "4년에 태위를 삼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기 강후세가>에는 "혜제 6년에 태위관을설치하고 발(勃)을 태위로 삼았다. 10년만에 고후가 죽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한서 백관공경표>에 "혜제 6년 강후 주발(周勃)이 다시 태위가 되었고 10년에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혜제 6년부터 여후 8년까지는 딱 10년인데, 만일 여후 4년에 태위를 설치했으면 단지 5년 있었던 것이다.이로부터 <사기 고조공신후자년표>의 연대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두 열후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경우는 그 서열이 반드시 이웃한 경우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상황이 2가지 있었는데,하나는 서열 66위인 양평후의 공이 서열 54위인 평정후와 비교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열 99위인 송자후의 공이 서열 92위인 역후와 비교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예외는 <사기>와 <한서>의 기록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런 연대 표기상의 착오와 오기는 <사기>와 <한서>의 표에 매우 많다. 1호묘는 2,3호묘와는 별도로 발굴됐기 때문에 지층 관계에서 볼 때 이 두 무덤보다 늦다. (...) 1호묘에서 출토된 니반냥전(泥半兩錢)과 3호묘 전토에서 출토된 반냥전은 문제 시기의 사수반냥전(四銖半兩錢)과 같다. 이 때문에 두 무덤의 연대는 마땅히 매우 근접하며, 그 차이가 불과 몇 년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3호묘는 무덤에서 출토된 연대가 적힌 목간을 근거로 문제 12년에 매장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호묘는 문제 15년 전후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호묘의 주인은 제2대 대후 이희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사망 연도는 바로 <사기>와 <한서>에 기록된 이희의 사망 연도, 즉 문제 15년이다. 그리고 3호묘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장 방식을 근거로 3호묘의 주인은 바로 제2대 대후 이희이며, 한나라 문제 12년[21]에 장사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기>와 <한서>에서 이희 모친의 사망 연도인 문제 15년을 이희의 사망 연도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 확인할 수 있다.}}}
2011년에 명(明)나라 시대의 인물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다. 상류층 여성으로, 약 700년 전의 미라[22]. 키는 150cm대라고 한다. 관 안에 물이 차 있었으며, 학자들은 관 안의 산소 농도가 낮아져 생성된 자연 미라로 추정했다. 손가락에 착용한 녹색 옥반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눈썹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당시의 복식과 생활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물게 위의 신추부인과 혼동되는데, 이 미라는 영어권에서 보통 'Ming dynasty mummy(명 왕조 미라)', 'Wet mummy of Ming dynasty(명 왕조의 젖은 미라)'로 불린다.미라 사진이 포함된 관련 영문 글.
중국 내몽골자치구 등에서는 요나라 시기의 거란족 미라가 발견되기도 한다. 실제로 요나라 2대 황제였던 야율덕광이 사망한 이후부터 거란족들은 미라화하는 "건시(시신을 말려 장례식하는 것)"라는 풍습을 했었다. 야율덕광(요 태종)은 후진을 멸망시켰으나 하필 여름인데다가 폭염으로 인해 기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거란군들은 나중에 철수했고, 이 때 야율덕광은 열병을 앓고 있었다가 나중에 죽게 되어 이후 요나라에서는 왕의 장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는데, 당시 요나라의 태후였던 술진태후는 죽은 사람이어도 시신은 한 번이라도 봐야한다며 시신을 수도인 상경임황부에
운반하라고 하였으나 덥고 습한 기후여서 운반 중 장례를 치루기도 전에 시신이 썩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이 때 어느 한 요리사가 방법을 제시했는데 유목민들은 소나 양의 고기를 저장할 때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을 사용해서 저장하니 그 방법을 사용해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왕의 시신을 해부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보니 결국 이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는 훗날 요나라 거란족들의 장례 풍습으로 유지되었다. 물론 아무나 했던 건 아니었고, 귀족이나 황족들 한정이었다. 그래서 귀금속으로 만든 가면을 비롯한 수많은 부장품들을 남겼다. 또한 거란족들의 미라에서 채취한 DNA로 사라진 줄 알았던 거란족들의 후손을 찾아내기도 하여 다우르족들이 거란의 후예라는 입증을 하게 된다.

3.4. 북유럽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산소와 부패균이 희박한 에 빠져 미라화된 시신이 발견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추운 기후 등 천혜의 조건에 의해 이런 늪지대 미라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수백년전의 시체가 살아생전 모습처럼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살인 사건으로 오인당하기도 한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늪지대에서 미라가 많이 나오기로 유명하다. 여기서 발견된 미라 중에는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 동성애자 커플[23], 몇백년 전에 실종처리 된 소녀, 특정 종교의식의 희생양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있다고 한다.
1950년에 발견된 4세기 고대 로마 이전 철기시대 사람의 유명 미라인 톨룬드 맨(Tollund man)도 덴마크의 늪지대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의 사진은 본 문서 아래의 이외 나무위키에 항목이 존재하는 유명 미라들 문단에 첨부되어있다.

3.5. 남아메리카


지금의 칠레 북부지역에 거주했던 고대 친초로인들이 만든,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인공 미라인 친초로 미라(Chinchorro mummies)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미라는 약 7000년을 넘긴 것으로, 발견된 고대 이집트 미라들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제작할 때 시신의 양쪽 팔을 제거하고 독특한 형태의 가면을 씌워 놓았다. 사회 지배층만이 아닌 일반 구성원들도 미라로 만든 것이 특징적이다.
제작 연도와 그 정교함에 비해 현대에 늦게 발견된 탓인지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집트 미라의 유명성 앞에 명함도 못 내민다. 21세기에 들어 기후변화 때문에 일부 미라가 손상되고 있다고 한다.
친초로 미라와는 연관 없으며, 하술된 잉카 제국시기에 인신공양된 아이들의 미라, 그중에서도 하술된 잉카 '얼음 소녀(La doncella)'라 불리는 미라가 굉장히 유명하다.

3.6. 기독교 문화권


가톨릭정교회에서도 몇몇 성인들의 시체가 썩지 않고 보존된 경우가 있다. 부패를 막기 위해 엠버밍을 했거나, 엠버밍을 하지 않았는데도 시체가 미라화/비누화해 썩지 않은 경우로 나뉜다. 특히 기적으로 여겨져 공경받은 경우는 엠버밍을 하지 않았는데도 부패하지 않거나, 유해에서 자연적이지 않은 향기가 나거나, 사후경직이 발생하지 않거나, 사망 후 오랜 시간이 경과했는데도 유해에서 피가 흐르거나, 유해에 체온이 남아 있는 경우 등이다. 한때는 유해가 썩지 않은 것이 시복시성의 요건인 기적[24] 중 하나로 인정된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기적 심사 항목에서 제외되었다. 유해의 미라화가 기적이라기보다는 그늘지고 서늘하며 온도 변화가 적은 교회 지하무덤의 환경적 특성 때문일 가능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유해가 온전한 경우 유리관 안에 넣어서 순례자들이 기도와 경배를 올리거나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한다. 유리관 안에 넣어져 공개되는 유해들 가운데 몇몇은 부패가 더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밀랍이나 실리콘 등으로 얼굴, 손 등을 덮는다. 교황들 중에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성 비오 10세, 성 요한 23세가 있다. 이름 앞에 덧붙여진 복자나 성인의 칭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시복이나 시성 절차를 위해 관을 열었을 때 시체가 썩지 않은 채 온전하게 보존된 게 발견된 경우이다.
관련 영상 아래의 표는 선종일을 기준으로 정리.
[목록(펼치기/접기)]
복자·성인
출생
사망
축일
신분
매장지
사진
성녀 체칠리아
2세기 경
2세기 경
11월 22일
동정 순교자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로마)

성 쿠르베르토
634.
687.03.20.
3월 20일
주교·수도자
던햄 대성당(던햄)

성 구틀락
673.
714.
4월 11일
수도자
크로일랜드 수도원(크로일랜드)

성 콜만노
10세기
1012.08.13.
8월 13일
순교자
멜크 수도원(멜크)

성 이시도로
1070.
1130.05.15.
5월 15일
농부
산 이시도로 성당(마드리드)
#
성 베네딕토 베네젯
1163.
1184.
4월 14일
평신도
성 디디에 성당(아비뇽)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1195.
1231.06.13.
6월 13일
신부·설교가·교회학자
:성 안토니오 대성당(파도바)
#
성 에드문도 리치
1175.11.20.
1240.11.16.
11월 16일
대주교·증거자
팔:성모승천 성당(코네티컷)
#
포르투갈의 복녀 마팔다
1197.경
1256.05.01.
5월 2일
공주·수녀
아로카 수녀원(아로카)
#
성녀 지타
1212.
1272.04.27.
4월 27일
동정녀·하녀
산 프레디아노 대성당(루카)
#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1247.
1297.02.22.
2월 22일
3회원
프란치스코 성당(코르토나)
#
몬테팔코의 성녀 클라라
1268.
1308.08.18.
8월 17일
동정녀·수녀원장
산타 클라라 대성당(몬테팔코)

몬테풀치아노의 성녀 아녜스
1268.01.28.
1317.04.20.
4월 20일
수녀원장
오르비에토의 도미니코회 성당
#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1347.03.17.
1380.04.29.
4월 29일
수녀·신비가·교회학자
몸: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로마)
머리:산 도메니코 성당(시에나)

#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1384.
1440.03.09.
3월 9일
설립자
산타 마리아 노바 성당(로마)
#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1380.09.08.
1444.05.20.
5월 20일
신학자·설교가
산 베르나르디노 성당(라퀼라)
#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
1389.03.01.
1459.02.05.
5월 10일
대주교
산 마르코 성당(피렌체)
#
볼로냐의 성녀 카타리나
1413.09.08.
1463.03.09.
3월 9일
수녀원장
클라라 수녀회 경당(볼로냐)
#
성 디다코
1400.
1463.11.12.
11월 12일
수사·증거자
에르미타 데 산 디에고(세비야)

성녀 에우스토키아 스메랄도 칼라파토
1434.03.25.
1485.01.20.
1월 20일
수녀·설립자
몬테베르지네 수도원(메시나)
#
파울라의 성 프란치스코
1416.03.27.
1507.04.02.
4월 2일
은수자·설립자
[46]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
1447.
1510.09.15.
9월 15일
과부·신비가
성 안눈치아타 디 포르토리아 성당(제노바)
#
성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
1502.
1539.07.05.
7월 5일
신부·설립자
성 바르나바 성당(밀라노)
#
성녀 안젤라 메리치
1474.03.21.
1540.01.27.
1월 27일
동정녀·3회원·설립자
산타 아프라 성당(브레시아)
#
천주의 성 요한
1495.03.08.
1550.03.08.
3월 8일
설립자
승리의 성모 마리아 성당(그라나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506.04.07.
1552.12.03.
12월 3일
신부·선교사
봉 제수스 대성당(고아)
#
성 가롤로 보로메오
1538.10.02.
1584.11.03.
11월 4일
추기경
밀라노 대성당(밀라노)
#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
1522.04.23.
1590.02.01.
2월 13일
수녀
성 빈첸시오와 성녀 가타리나 대성당(프라토)
#
십자가의 성 요한
1542.
1591.12.14.
12월 14일
신비가·교회학자
머리,몸:가르멜회 수도원(세고비아)
손,발:산 후안 데 라 크루스 수도원(우베다)

#
#
성 필립보 네리
1515.07.22.
1595.05.25.
5월 26일
신부·설립자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로마)
#
성녀 제르마나 쿠쟁
1579.
1601.
6월 15일
동정녀·목동
피브락 성당(피브락)
#
파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1566.04.02.
1607.05.25.
5월 25일
수녀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데이 파치 수도원(피렌체)
#
성 가밀로 데 렐리스
1550.05.25.
1614.07.14.
7월 14일
신부·설립자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로마)

성 프란치스코 드 살
1567.08.21.
1622.12.28.
1월 24일
주교·설립자·교회학자
성모 마리아의 방문 대성당(안시)
#
성 요사팟 쿤체빅
1580.경
1623.11.12.
11월 12일
대주교·순교자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1572.01.28.
1641.12.13.
8월 12일
설립자·수녀
성모 마리아의 방문 대성당(안시)
#
성 요한 사우스워스
1592.
1654.06.28.
6월 27일
신부·순교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런던)
#
성 안드레아 보볼라
1591.
1657.05.16.
5월 16일
순교자
성 안드레아 보볼라 성당(바르샤바)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
1591.08.12.
1660.03.15.
3월 15일
과부·설립자
뤼뒤박 대성당(파리)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1581.04.24.
1660.09.27.
9월 27일
신부·설립자
라자로 성당(파리)
#
아그레다의 가경자 마리아 데 헤수스
1602.04.02.
1665.05.24.
-
동정녀·수녀
콘셉시온 수도원(아그레다)
#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1611.05.19.
1689.08.12.
8월 12일
교황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
레온 이 델가도의 하느님의 종
예수의 마리아

1643.03.23.
1731.02.15.
-
동정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

#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
1672.01.16.
1732.03.25.
3월 25일
동정녀·설립자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1696.09.27.
1787.08.01.
8월 1일
설립자·주교·교회학자
성 알폰소 데 리구오리 대성당(파가니)
#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
1783.04.16.
1854.08.28.
5월 19일
설립자
애덕의 카르멜회 본원(비크)
#
성 도미니코 사비오
1842.04.02.
1857.03.09.
5월 6일
증거자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토리노)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1786.05.08.
1859.08.04.
8월 4일
신부
아르스 대성당(아르스)
#
성 요한 노이만
1811.03.28.
1860.01.05.
1월 5일
주교
성 요한 노이만 성당(필라델피아)
#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1779.12.12.
1865.05.25.
5월 25일
설립자[47]·수녀원장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파리)
#
성녀 나르시사 데 헤수스
1832.10.29.
1869.12.08.
8월 30일
동정녀
산타 나르시사 데 헤수스 성당(노볼)
#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1806.05.02.
1876.12.31.
11월 28일
수녀·환시자
뤼뒤박 대성당(파리)
#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48]
1844.01.07.
1879.04.16.
4월 16일
수녀·환시자
생질다르 수도원(느베르)
#
성녀 바울라 프라시네티
1809.03.03.
1882.06.11.
6월 11일
설립자
산타 도로테아 수녀원(로마)
#
성 요한 보스코
1815.08.16.
1888.01.31.
1월 31일
신부·증거자·설립자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토리노)
#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푸
1828.05.08.
1898.12.24.
7월 24일
은수자
성 마로 수도원(안나야)
#
예수 성심의 복녀 마리아
1863.09.08.
1899.06.08.
6월 8일
수녀
예수 성심 성당(Ermesinde)
#
성 비오 10세
1835.06.02.
1914.08.20.
8월 21일
교황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
성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1850.07.15.
1917.12.22.
11월 13일
설립자
성녀 프란치스카 카브리니 성당(뉴욕)
#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1851.07.05.
1927.06.01.
6월 1일
신부·설립자
예수 성심의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메시나)
#
성 루이지 오리오네
1872.06.23.
1940.03.12.
3월 12일
신부·설립자
안전한 보호자이신 성모 성당(토르토나)
#
성 제오르지오 프레카
1880.02.12.
1962.07.26.
5월 9일
신부·설립자
기적의 패 성모 성당(함룬)
#
성 요한 23세
1881.11.25.
1963.06.03.
6월 3일
교황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1887.05.25.
1968.09.23.
9월 23일
신부
산 조반니 로톤도 성당(산 조반니 로톤도)
#

대체로 오래된 미라일수록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반대로 최근에 만들어진 미라는 잠든 사람과 비슷해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수준의 착각에 빠질 정도로 부패되지 않은 게 특징. 예를 들어 성녀 지타의 시신을 비롯하여 수백년 전 사망한 사람의 미라는 검게 변색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수분이 빠져나가고 어느 정도 사후 변화가 진행되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무덤 속 시신과 거의 비슷한 형태인 반면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시신은 한 마디로 살아서 잠든 사람과 거의 비슷한 인상을 준다. 물론 이는 엠버밍 기술이 시신을 좀 더 온전하게 보전하는 쪽으로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세워지는 혼란기에 소련 공산당은 정교회의 권위를 깨부수기 위해서 정교회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정교회에선 일부 성인들의 유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썩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데, 썩은 성인들의 시체를 보여 주어 대중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 전에 죽은 시신들을 파냈는데도 일부 시신들은 위의 이유로 미라가 되어 전혀 썩지 않아 있었고, 공산당원들은 이를 보고 하얗게 질리고 흥분한 군중들이 공산당원들을 공격하는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

3.7. 남태평양 제도들


멜라네시아에 해당되는 뉴기니 섬의 경우 일부 지역에서 부족들이 죽은 족장을 미라화시키기도 하는데 훈제처럼 불로 태운 물질 및 재에서 나오는 연기로 미라화한다고 한다.

3.8. 불교 문화권


불교에는 부패하지 않고 살아 생전처럼 남아 있는 승려의 시신을 전신사리, 육신보살, 혹은 등신불이라고 부른다.일본에서는 즉신불이라고 하여 일부러 토굴 등에 들어가 미라화되는 것을 기다리는 수행도 존재한다. 열심히 등신불이 되는 수행을 해도 사망 후 시신이 부패하면 실패다. 당연하지만 현대에 등신불이 되기 위해 고행을 하는데 안 말리면 자살방조죄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무위키의 등신불 항목에서 등신불에 관한 내용을 더 자세히 읽을 수 있다.
중요한 요점이 있는데, 정통 불교적 관점으로는 등신불을 모시거나 사망 후 등신불이 되기 위해 생전에 수행하는 것은 육신이나 현세에 집착하지 않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본질에서 멀어진 행위다. 보통 이렇게 미라가 된 승려를 부처처럼 모시는 것은, (특히 대승 불교의 경우) 속세에 남아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강한 법력(法力) 덕분에 입적한 승려의 육신이 부패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는 등신불에 을 입혀 소중하게 모셔왔는데 문화대혁명 때 다른 문화재와 함께 죄다 파괴되어, 현재 남은 것은 적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고승(高僧)의 시신을 미라화 하여 전각에 모시기도 한다. 러시아 부랴티야 공화국 울란우데 근교의 이볼긴스키 다찬에 모셔진 승려 이티겔로프의 미라가 나름 유명한데, 인근 몽골에서 이를 보려고 오는 티베트 불교신자들도 많을 정도다. 촬영 통제가 굉장히 심하다고한다.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옻나무를 달인 물을 계속 마시면 몸 속이 옻칠되어서 썩지 않으며 옛 고승들이 이렇게 등신불이 되는 수행을 했다'와 같은 괴담이 도는데, 당연히 유언비어다. 옻칠은 옻물이 아니라 옻나무의 수액을 이용해 10번 이상의 공정을 거치는 일이다. 옻물 마신다고 몸속에 옻칠이 되면 옻물을 마시자마자 앓다 사망할 것이다.

3.9. 현대


현대는 옛날보다 고고학해부학, 역사학, 의학[25]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옛 미라가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시대이다. 미라 연구처럼 많은 간학문적(間學文的) 연구가 요구되는 것은 흔치않다.
안타깝게도 현대에는 고독사한 시신이 미라화된 채 발견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뉴스에 많이 보도된다. 국내 뉴스에서도 볼 수 있다. 자살한 사람이 뒤늦게 발견 됐는데 습기가 없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위치해 자연 미라가 되어버린 사건도 있다.
사이비 종교에서 미라화된 시신의 부활을 기다리며 계속 물수건으로 미라를 닦아주었는데, 그 물과 시신의 지방이 비누화 반응을 일으켜 미라 비누가 되어버린 사례가 있다.
공산권에서 소위 '인민영웅'으로 여겨져 방부 처리된 블라디미르 레닌, 호찌민[26],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의 시체도 미라의 범주에 든다. 이쪽은 정확히 말하자면 약품 처리한 시체를 일반 공기 대신 질소 가스, 아르곤 가스를 주입한 밀봉 유리관 안에 안치한다. 산화를 막기 위한 의도가 크다. 시신이 부패되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산소에 노출되거나 조금만 습한 환경에 있으면 미라가 손상되기 쉽기 때문에 미라가 안치된 곳은 철저히 내부 기체와 습도, 온도 등을 조절한다고 한다.
레닌 미라의 경우 최초엔 기술이 완벽치 않아 유리관 속에서 얼굴 등에 부패 얼룩이 생기는 등 난리가 나서 다시 꺼내 재처리했다고 한다. 관련 책임자, 기술자들은 시베리아에 위치한 '겨울 별장' 여행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죽은 뒤 마찬가지 방법으로 미라가 되었지만, 이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독재자로 규정된 이후 매장되었다.
2014년 한국에서 놀랍게도 일반인이 시신을 미라로 보존해서 함께 살아온 믿기지 않는 사건이 드러났다. 죽은 남편을 미라처리한 채로 7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의 이야기. 자세한 것은 방배동 미라 남편 사건 문서 참조.
현대에 들어 고대 이집트의 전통 방식을 사용해 실험적으로 제작된 미라가 있다. 'MUMAB' 이라는 이름으로, 1994년에 메릴랜드 대학교 연구팀이 시신을 최대한 고대 이집트 시기에 사용된 방식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이 미라는 만들어진 후 30년이나 지났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은 후 미라가 되기를 원하는 어느 프랑스인은 자기가 묻힐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을 공동묘지에 미리 건설해두고 전통 방식으로 자신을 미라로 만들어 줄 기술자와 시술 재료를 미리 확보해 둔 경우도 있었다. MUMAB이 만들어진 지 2년 후에 촬영된 다큐멘터리에서 등장한 인물이었으니, 28년이나 지난 지금은 그의 바람대로 미라가 되어 미니 피라미드 속에 잠들었을 것이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인체의 신비전(展)의 방부 처리된 신체 기증자분들의 몸은 미라의 범주에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에 제작된, 생전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방부 처리를 해 놓은 것은 보통 엠버밍이라 부르는 경우가 더 흔하다.
생태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 조류, 포유류, 파충류 등의 박제는 생물의 사체를 통째로 건조 및 약물 처리해 일종의 미라를 만드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변형, 내구도 등의 문제 때문에 인위적으로 만든 물질(발포 우레탄 등)을 뼈대로 동물의 가죽만 씌우는 경우가 많다. 눈동자나 연약한 조직 등은 방부 처리하지 않고 모형 제작된 일종의 플라스틱으로 대체한다. 이런 박제의 경우 미라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할 수 있다.
엄밀히 따져 현대인들이 풍뎅이류, 사슴벌레류, 나비류 등의 절지동물표본으로 만드는 것도 미라의 범주에 들 수 있다. 특히 딱정벌레류는 유난히 단단한 외피를 지니고 있어 잘 건조, 고정하면 수분이 줄어 크기가 조금 줄어드는 것 외에는 외형 변화가 거의 없기에 미라화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없다.

3.10. 고생물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진 매머드, 동굴사자의 자연 미라가 발견되어 고생물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나무위키의 해당 항목에서 이와 관련된 정보들을 더 읽을 수 있다.
생명과학계에서는 이 미라를 바탕으로 고생물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까지하고있다. 영화 쥬라기 공원이 생각나는 충격적인 시도[27].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나 생태학적인 이유로, 윤리학적인 이유로 고생물 복원에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4. 유명 미라


인공 미라(인공적인 약품, 인위적 부패 방지를 통해 미라화)의 경우에만 인공 미라라고 적어놓았으며, 별도의 표기가 없거나 자연 미라라고 표기한 경우는 자연 미라이므로 참고바람.

4.1. 외치(Oetzi)


이집트 미라를 제칠 만큼 매우 유명한 미라일 것이다. 인공 미라가 아닌 자연 미라다.


4.2. 얼음 소녀(라 돈셀라/La Doncella)


라 돈셀라(La Doncella)는 스페인어로 '처녀' 또는 '아가씨'라는 뜻이다. 'La'는 관사이다. 이하 '얼음 소녀'로 호칭 통일.
1999년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고지대인 유예예야코(Llullaillaco) 산의 분화구에서 발견된 500여 년 전 잉카 제국시기의 원주민 자연 미라이다. 발견 당시 5~6세 가량의 소년, 소녀 미라도 있었지만 얼음 소녀 미라의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기 때문에 얼음 소녀라는 이름이 붙어 유명해졌다. 전 세계의 사례를 보아도 500여 년이 지난 미라가 얼음 소녀만큼 상태가 좋은 경우는 드물다.
얼음 소녀의 사망 당시 나이는 15세 정도로 추정되며, 잉카 제국 시기에 인신공양되었다. 위에 적었듯이 그녀의 근처에서 두 어린이 미라도 함께 발견 되었는데, 모두 인신공양된 아이들로, 얼음 소녀보다도 나이가 더 적었다. 사망 원인은 동사로 추정된다고 한다. 잉카에서는 인신공양을 하기 전에 제물에게 '신에게 보낼 사자(使者)'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잠시 시켜주었기 때문에, 제물이 될 어린아이들은 제물로 발탁된 이후 잠시 상류층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알코올마약[28]등에 취한채 지내다가, 추운 고지대에 제물로서 바쳐져 얼어 죽었다고 보고 있다. 잉카 제국의 인신공양 연구에 크게 기여한 미라이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얼음 소녀는 함께 공양된 두 어린이들보다 더 많은 양의 알콜과 마약 성분이 검출되었다고 하는데, 관련 연구자는 나이가 많았던 소녀가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알았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더욱 약물에 의존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오래 된 미라인데도 드물게 일반에도 전시 형태로 공개되었는데, 아무래도 취해서 잠든 상태로 죽은 데다가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 보기에 끔찍한 모습이 아니라서인 듯하다. 미라 사진을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도 이 얼음 소녀의 모습은 비교적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얼음 소녀 미라의 모습

4.3. 람세스 2세


고대 이집트의 인공 미라로, 이집트 제 19왕조의 제 3대 파라오이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이집트 당국은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반출하려 했는데, 적당한 관세 품목이 없어 건어물(...)로 처리했었다. 인류 최고(最古)의 군주 중 하나인 파라오의 미라에...
1974년 람세스 2세의 미라에 모종의 미생물이 잠식해 미라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보고에 이집트 당국은 프랑스에 람세스 2세 미라의 '치료'를 의뢰한다. 프랑스 당국은 즉시 의학, 이집트학[29], 고고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그의 미라를 치료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국제법에는 미라를 옮길 때 적용되는 법이 없었고, 결국 이집트 당국은 람세스 2세 미라에게 여권을 발급해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국경을 넘어가게 했다(...). 람세스 2세 미라의 여권. 생년이 기원전 1303년으로 등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등록된 여권 중 최고령으로 기록된다. 프랑스 당국은 람세스 2세의 미라에게 국가 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하기 위해 람세스 2세의 미라가 도착한 날 의장대를 동원해 그를 환영했다.
검사 결과 람세스 2세의 미라는 곰팡이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방사선 치료를 행했다. 처음에는 "냉온요법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람세스의 두개골을 채우고 있는 향료섞인 송진이 온도변화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실치 않아 방사선 치료(?)를 채택했다고 한다. 치료 후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루브르 박물관 측에서 제공해 준 고대 이집트 아마포 붕대로 고대 이집트식 의식에 맞춰 미라에 붕대를 감아주었고,[30] 다시 관에 넣어 돌려보냈다.
나무위키내 람세스 2세 문서의 '기타' 항목에서 그의 생전 모습 복원과 다른 자세한 이야기를 읽어 볼 수 있다.

4.4. 로잘리아 롬바르도


그녀의 사진
본명 로잘리아 롬바르도(Rosalia Lombardo). 1918년생의 유아로, 이탈리아 여자아이이다. 자연 미라가 아닌 인공 미라.
사랑하는 딸을 떠나보내지 않고 그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던 그녀의 아버지의 의뢰로 박제사인 알프레도 살라피아에 의해 미라화 되었다. 약물 주사를 통해 미라화하였다고 하는데, 조금 야윈 것을 빼면 별도의 처리도 없이 갓 세상을 뜬, 혹은 잠든 아이처럼 완벽하게 미라화 되었다. 이후 수십년이 지나 화제가 되었는데 미라가 화제가 되었을때 알프레도 살라피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약물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후 2009년에 메모가 발견되면서 비밀이 풀렸는데 포르말린, 알콜, 글리세린, 초산, 아연염을 혼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밀랍인형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지만 CT촬영 결과 실제 시신으로 드러났으며, 미라화되어 크기는 줄었지만 소화기관과 뇌를 비롯한 장기가 굉장히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눈을 아주 살짝 뜨고 있는데, 위에 링크된 사진에서는 각도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 유튜브 등지에서 이 로잘리아의 미라가 연도에 따라 시간이 지나며 점점 눈을 뜨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사진들과 관련 영상이 돌아 괴담이 퍼졌는데, 진실은 조명의 각도등에 의해 눈꺼풀의 그림자가 달라져 눈을 점점 뜨는 것처럼 연출된 사진이라고 알려져 일축되었다. 미라가 시간이 지나 건조되면서 눈꺼풀이 실제로 더 눈을 뜬 것처럼 올라간 것일 수도 있다.

4.5. 이외 나무위키에 항목이 존재하는 유명 미라들


사실 진짜가 아닌 위작이었으며, 고인은 살인 피해자였다.
이외에도 독특한 문신이 발견된 "시베리아 우코크 얼음 미라(Princess of Ukok / Принце́сса Уко́ка)"(링크),
기원전 4세기에 사형당한 후 늪지에서 발견된 사람으로, 놀라운 보존 상태 덕분에 해외에서 더욱 유명한 "톨룬드맨(Tollund Man)"(링크) 등이 유명하다.

5. 기타


한때 서양에서는 미라 가루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이름으로 팔렸다[31]. 미라 가루가 인기를 끌자 시신을 파헤쳐 미라처리해 판매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그냥 시체를 가루내서 미라 가루라고 속이고 파는 일도 있었다고. 좀더 후대에는 미라를 가루내어 물감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때로는 미라는 갈아서 비료로 쓰고 겉을 싼 붕대는 벗겨내서 종이 만드는 원료로 쓰기도 했다[32]. 어떤 경우에는 미라를 장식용품이나 장작 대신으로도 사용했다고[33]. 참고로, 놀랍게도 파우더를 바른 미라는 실제로 의약용품으로 쓸 수 있다. 파우더를 바른 미라에는 역청 성분이 있는데, 역청은 약으로 쓰고 있는 원료 중 하나이다. 과거에는 역청을 구하기 힘들었고, 또한 미라 속 역청이 약효를 내는 지 몰랐기 때문에 역청이 많은 파우더 바른 미라를 가루내어 사용한 것이다. 현대에는 인공적인 방법으로 역청을 만드므로 안심하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약용(?) 미라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영상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미라와의 대담〉이 되살아난[34] '알라미스타케오 백작'이란 이름과 직함을 가진 이집트 미라 얘기를 다루는데, 대단히 지적이고 품격 있는 캐릭터로 나온다. 주인공들에게 과거 이집트의 문화와 종교[35] 및 기술[36]을 얘기해주며[37] 이집트의 미라들은 사실 전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미래에 깨어날 수 있도록 기능이 정지되어 있을 뿐이라고 한다.[38] 그 이유는 사람들이 썼던 책이 몇백년이 지나면 알지도 못하는 후대 좆문가들의 제멋대로 넣은 주석들이 더해져 엉망진창으로 오역되는 경우가 허다해서, 이를 저술가 본인들이 직접 해결하기 위해 몇백년 동안 미라가 되어 '동면'에 빠진 다음 깨어나서 자기 책의 저술 의도를 직접 밝히기 위해서였다나...상당히 풍자적인 성향이 돋보이는 단편소설이다. 여담으로 알라미스타케오 백작은 이후 앨런 무어의 젠틀맨 리그에서도 출연하게 된다.
영화 미이라 시리즈를 필두로 한 왜곡으로 인해 고대 이집트에는 대죄인을 산 채로 붕대 둘둘 감고 묻어버리는 등 생미라로 만들어버리는 끔찍한 극형이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허나 실상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 처리란 것은 돈도 꽤 드는, 죽은 이의 시신에 대한 최고 최상의 처리 방법이었다고 한다. 부활을 기원하는 의식이기도 했고. 대죄인이나 범죄자들은 평범하게 참형 등으로 처형한 후 시신을 그대로 썩게(부활을 못 하도록) 내버려뒀다 한다. 이때는 사후의 눈/귀를 열어주는 종교적 의식도 취하지 않았고, 매장 직전 를 잘라버렸다고 한다. 이집트의 사후 세계관에서 절대 부활할 수 없도록. 죽으면 영혼이 신들과 지옥의 관문들에서 심판을 받는데, 이 때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혀를 잘라버리면 말을 할 수 없다. 눈과 귀를 열어주지 않으면 재판장까지 가는 저승길에서 길을 잃고 괴물들에게 잡아먹힌다. 그들의 종교관을 생각할 때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으로 던져버리는 방법.[39] 돈없는 서민들은 자연 미라가 되길 바라며 건조한 모래사막이나 동굴에 안치했다.[40]
한 마디로 아무나 못하는 고급 장례방법이었지 끔찍한 처형법은 절대 아니란 소리. 굳이 저렇게 하려고 한다면 부활 이후에 다시 한번 고통을 가해 죽이려고...정도겠지만 솔직히 언제 부활할지도 모르는 일에, 처형인에게 막대한 돈을 들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과 좀 비슷하게 처리된 미라가 발견된 적이 있기는 하다. DB320[41]에서 무더기로 나온 미라중에서 Unknown Man E 라는 미라는 양가죽에 싸인 채로, 고통에 차 비명을 지르는 듯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 관 같은 것도 없이 고대 이집트에서 부정한 것을 쌀 때 사용된 양가죽에 싸여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미라였던 것. 이 미라는 같은 곳에서 발견된 람세스 3세하고 유전자가 비슷해서 람세스 3세 암살 음모에 연루된 왕자 Pentawer(#)로 추정되었다 - 람세스 3세는 목욕 도중 목구멍이 칼에 찔려 살해당했는데, 조사 결과 둘째 왕비가 태자를 제치고 자신의 아들 Pentawer를 옥좌에 올리기 위해 벌인 짓이라는 게 발각되어 관련자 전원이 사형당했다. (내서널 지오그래픽 기사) 그리고 2017년 말, 연구진이 람세스 3세 미라의 목을 감은 붕대 안쪽에서 찢어진 부분을 확인했으며 # 2018년 2월에는 유전자 정밀 감식을 통해 Pentawer가 맞다는 점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 연구진에 따르면, 역적인 동시에 왕족이라는 특징 때문인지 미라 처리 과정에서 이런저런 옥신각신이 있었던 것 같다고. 정식으로 미라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잘 말리기는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미라가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Pentawer의 경우는 자살할 것을 강요받은 뒤 시신이라도 남은 케이스고, 나머지 관련자들은 전원 화형당해서 시신 자체가 남지를 않았다.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잉카의 마지막 황제인 아타우알파에게 "기독교개종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라고 협박했는데 아타우알파는 끝까지 거부해서 처형하게 되었다. 이때 미라 관습을 악용하여 화형에 처한다고 했고, 이에 시체 훼손을 걱정한 황제 아타우알파는 어쩔 수 없이 기독교로 개종한뒤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그리고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시신을 참수하여 훼손하는 비열한 짓을 저지른다.

6. 미라를 모티프로 한 캐릭터


[image]
미라(Mummy)의 정확한 뜻은 1의 부패되지 않은 보존된 시체이지만, 어째서인지 보통 '미라'라고 하면 저 시체가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는 언데드 캐릭터를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언데드로서의 미라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1. 온 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다. 이집트 인공 미라만의 특징인데 보편적으로 묘사됨. 붕대를 뻗어서 목표를 구속하거나 끌어당기는 묘사도 보인다.
  2. 어째서인지 은 멀쩡하며, 그 부분만을 드러내 놓고 있다.
  3. 또는 태양 에 약하다.
  4. 파라오 같은 높으신 분들인 경우엔 이렇다할 약점이 없으며 마술에 능하다. 이런 경우 스피릿 오브 파라오처럼 악역이 아닌 캐릭터도 다수 존재한다.
이외에도 등장하는 매체에 따라 세부사항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표적인 특징인 붕대를 두르고 있으면 보통 미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미라의 경우 제일 먼저 썩는 눈과 뇌를 빠르게 제거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다(...).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강시, 유럽과 아메리카 문화권의 좀비, 이슬람 문화권의 구울이라는 특징적인 언데드와 비교하여[42] 고대 이집트가 배경인 매체에 등장하는 언데드로 미라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43]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인데, 정작 이집트 신화에는 이러한 언데드로서의 미라라는 크리처는 등장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만든 이유는 부활할 때를 대비할 육신이 필요해서였지 절대 저런 언데드 캐릭터를 상정한 것이 아니었다.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는 미라라는 언데드 캐릭터는 사실상 서구에서의 왜곡된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꾸로 툼 킹처럼 제대로 된 세력으로 대우해주는 사례도 있다.
아래의 예시 역시 사전적인 미라의 의미보다는 이 캐릭터로서의 특징을 따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마법전대 마지레인저의 중반부 악역이자 중간보스인【전】('천공성자 라이젤')=마도신관 메미가 여기의 캐릭터 모티브다. 잘 보면 미이라+신관의 이미지 바탕이 섞인 모습이다.

6.1. 디아블로 시리즈언데드 몬스터


디아블로 2편에서도 등장.
디아블로 3의 경우, 자세한 내용은 디아블로 3/괴물#s-5.2문서 참조. 주로 칼데움처럼 건조한 지역에서 무리를 지어 출몰하며, 칼데움 하수도나 막다른 음지, 시체 더미에서 무더기로 출몰한다. 통념과는 달리 꽤 빠르므로 주의. 죽으면 몸이 뒤틀려 터지며 범위가 작은, 독(毒) 피해를 주는 녹색 기운을 내뿜는다. 높은 고행 난이도의 경우 다 잡아놓고 이 독 피해에 죽을 수 있을만큼 위험하므로 주의해야한다.

6.2.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머미(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항목 참조.

6.3. 겁스


겁스 마법에서는 좀비, 스켈레톤, 미라 등등 각종의 시체 언데드들이 좀비라는 하나의 주문에 의해서, 그 주문이 걸릴 당시 시체의 상태에 의해서 각각 다르게 발생되는 것으로 처리한다. 겁스 마법의 사령 계열 마법 챕터에 미라의 캐릭터 시트가 수록되어 있다.

6.4. 메탈슬러그 시리즈의 적


메탈슬러그 시리즈/적 #s-4.1 참조.

6.5. 유희왕에 등장하는 미라들


미라(유희왕) 항목 참조.

6.6. 두치와 뿌꾸의 등장 캐릭터


미라(두치와 뿌꾸) 항목 참조.

6.7. 드래곤볼의 등장 캐릭터


미이라(드래곤볼) 또는 미라(드래곤볼) 항목 참조.
참고로 둘의 행보는 아예 다르다.

6.8. 액션 어드벤쳐 영화 미이라 시리즈


미이라(영화) 항목 참조.

6.9.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이집트의 최종테크중 오시리스 숭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화 유닛으로 나온다. 특수기술은 적의 인간 보병을 한방에 죽이고 아군 언데드로 되살리기. 자세한 내용은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신화유닛#s-2.4.1 문서 참조.

[1] 木乃伊, 영어발음을 한자로 음차한 표기. 중국의 철경록(輟耕録) 3권에 처음 나오고 북경어로 무나이이(mùnǎiyī)라고 하는데, 이것을 일본에서 인용하고 한국에도 인용해서 목내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 1922년 시인 김형원이 발표한 <숨쉬는 목내이>란 시가 있다.[2] 관 옆 항아리에 장기들을 나누어 각각 보관하였다고 한다. 장기를 내버려두면 미라를 못만들기 때문에 빼내는 이유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장기까지 온전히 보존하는 방부 기술은 현대에도 어렵다.[3] 실제로 조선시대 미라 대부분이 공사 중 발견해 나온 것이라서, 학술적 연구 이후엔 대부분 적절한 곳에 재매장/화장을 한다고 한다.[4] 사실 이 현상 때문에 미라제작 문화가 생겼다고해야 정확할 것이다. 시체가 좀처럼 썩지 않는 것을 보고 '일부러라도 시체를 보존해야하는게 아닐까?' 라는 사후관이 형성된 것.[5] 이 방법은 얼마가지 않아 쓰이지 않게 된다.[6] 고위계층은 향료를 섞은, 두개골에 주입하자마자 굳어버리는 (지금까지도 명확히 판명되지 않은)물질로, 평민들은 톱밥, 돌 등으로 채웠다.[7]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삼나무 기름을 주입했다고 한다.[8] 여신 바스테트가 변신한 동물로 여겨져 역시 성스럽게 여겨졌다.[9] 문정왕후의 오빠이자 윤원형의 형인 윤원량이다. 동생인 윤원형에 비해서는 유명하지 않지만, 정3품 벼슬을 한데다 그의 딸은 인종후궁이 되기도 하는 등 거물이라면 거물. 출처[10] 임신한 상태로 사망하면 부패가스가 태아를 밀어낸다. (관내 출산) 그리고 조선의 예법에 따라 한 관에 두 사람을 묻지 않아서, 과거에는 뱃속에 태아가 있으면 염하는 사람이 산도(질)를 통해 꺼내어 따로 묻는 거였다. 다만 이처럼 출산 중 죽은 경우는 태아가 커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묻은 듯하다.[11] 기원후 1752년으로, 정조가 태어난 해이다.[12] 이쪽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겐 원래 평범한 동네 산책 코스다.[13] 그러니까 병자호란이 한창일 때 혹은 그 이전에 사망한 사람이다.이걸로 보아 명종 시절 태어난 사람으로 추정된다.[14] 1만원권의 세종대왕을 비롯해서 어진은 대부분 후대에 상상으로 그린 것. 특히 6.25 전쟁 당시 부산 용두산 대화재때 소실된 게 많아서 그렇다. 대부분이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어진으로 초상이 남은 조선 왕은 태조, 세조, 원종(정원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뿐이다.[15] 이집트투탕카멘 미라와 잉글랜드 리처드 3세는 그의 두골 덕분에 훗날 얼굴을 복원해 볼 수 있었다.[16] 대략 2200년 전이다.[17] 동맥을 조사했을때 동맥이 심하게 막혀있었다.[18] 위장에서 참외씨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19] 이 아들이 누군가에 대해 위키러들의 분석이 있다. 아래 단락 참고.[20] 춘추전국시대 초평왕은 사후 자신의 시체를 당시 불로장생약으로 여겨진 수은에 담가서 매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수은의 유독성이 미생물의 부패작용까지 억제하여, 이런 부드러운(…) 미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초평왕에게 원수를 진 오자서가 오나라 대군을 데리고 초를 초토화시키는 와중에 이 무덤을 파내 볼링공 잡듯이 눈알을 파내고 구리 채찍으로 시체를 쳐서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21] 무덤에 '12년'이라고 기록된 목간이 있다.[22] 대략 태조 이성계가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23] 옛날 스웨덴에서는 동성애가 금기시 되었다. 동성애를 한 죄로 사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발견당시 두 남성이 서로를 꽉 부둥켜안은 자세로 발견되었다.[24] 가톨릭교회법상 시성을 위해서는 교회의 조사에서 둘 이상의 기적이 인정되어야 한다.[25] 당연히 미라는 이미 죽은 사람의 시신이므로, 질병의 치료 및 생명 유지를 위한 지식이 주가 되는 의학 분야가 미라 연구에 참여한다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미라를 부검하면서 발견되는 사실들을 외과적, 내과적 의학 관점으로 분석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국내 '단웅이 미라'의 경우 대학의 의학연구팀이 대거 투입되어 미라를 분석했다.[26] 본래 호찌민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할것과 무덤을 간소하게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유언과 달리 미라화되어 안치되었다.[27] 매머드와 동굴사자가 그나마, "비교적" 최근에 멸종한 동물들이기에 시베리아같은 극지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 기적이 아닌 이상 공룡의 미라 발견은 불가능할 것이다.[28] 코카나무잎인데 현대의 마약성분만 추출한 코카인과는 다르다.[29] 영의 이중슬릿실험으로 유명한 토마스 영도 공부했던, 당시 인기가 엄청났던 학문이다.[30] 고대 이집트식으로 붕대를 감는다는 것은 사실상 미친 짓이다. 기록에 따르자면 감는 부위마다 아마포의 원산지, 제조지, 너비, 길이가 다른 걸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귀는 토트의 신전에서 만든 아마포, 머리는 하토르의 신전에서 짠 부드러운 아마포,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붕대를 감을 때 마다 외우는 주문이 다 달랐으며 매우 장황했다.[31] 미라를 약으로 썼던 인물은 영국찰스 2세가 대표적. 미라의 힘을 얻기 위해 가루를 몸에 발랐다고한다.[32] 19세기에 미국에서 유행한 콜레라의 원인이 미라를 쌌던 붕대라는 소문이 돌면서 중단되었다.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고 실제 콜레라로 죽은 사람 미라는 있지만 과학적으로 볼때 발굴 이후 묻어왔을지는 몰라도 썩지 않을 정도로 건조한 미라 몸속에서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의 세균이 수천년간 번식했을 가능성은 없다.[33] 마크 트웨인의 이집트 여행기에서 기관사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있다. "영 화력이 안오르는데?" "평민 녀석들 말고 왕 좀 태워봐!" 미라는 바짝 마른데다, 제작과정에서 기름과 역청(아스팔트) 등을 다량으로 사용했으므로 잘 타긴 했을 듯.[34] 주인공들이 호기심에 전기를 가하는 실험을 했다가 덕분에 기능이 정지되어 있던 미라의 몸이 생기를 되찾은 것.[35] 예상과는 달리 일신교였다고 말한다.[36] 초고대문명 수준이다.[37] 주인공 학자들 중 2명이 이집트어를 할 수 있었다.[38] 다른 가문들은 뇌나 장기를 따로 처리하여 보존하나, 미라가 속한 풍뎅이 씨족은 장기를 몸 안에 넣어놓은 채로 미라화하는 것이 관습이었다.[39] 오늘날 잘 알려진 잔혹한 처형법은 이집트보다는 오히려 고대 로마중국, 중세 시대 유럽에서 주로 나온 것이고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40] 하층민들에게도 보편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두치 지방에서 발견된 미라들은 모두 하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는데, 가난한 외딴 마을이라 극심하게 굶은 흔적이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대다수가 깨끗이 씻어 장기를 적출해 내고 그 자리를 톱밥이나 돌로 채워져있었으며, 가발과 같은 간단한 장신구라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잖게 발견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현세보다 내세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41] 왕가의 계곡 항목에도 있듯, 다른 털린 무덤에서 수습한 미라들을 몰아넣은 무덤.[42] 다만 구울은 원래는 단순히 식인을 하는 요괴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좀비랑 이미지가 혼합되면서 언데드 크리처가 되었기에 조금 애매한 면이 있다.[43] 실제로 미라와 같이 등장하는 배경은 사막이며, 높은 확률로 고대 이집트에 자주 보이는 금색 관에서 뚜껑을 열고 등장하는 연출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