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

 



1. 개요
2. 생애
4. 마의태자가 신라 왕이 되었다면?
5. 이모저모
6. 족보 관련 논란
6.1. 「김은열 묘지명」
6.2. 「신라경순왕전비」
6.3. 시조 논란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8. 같이보기

마의태자(麻衣太子)
생몰년 미상

1. 개요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제56대 경순왕 김부와 죽방부인(竹房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왕자이다. 이름은 사서에서 전하지 않으며 후대 사람들이 로 된 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불렀다. 이와 같이 마의태자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신라가 멸망하자 개골산(皆骨山. 금강산겨울 이름)에 들어가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 이외에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신문 소설을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2. 생애


후삼국시대 후기 신라는 제55대 경애왕견훤의 압박으로 자결한 후 힘을 잃고 고려후백제의 대결을 관망하는 정세가 수 년간 이어졌다. 한동안은 두 나라가 서로 이기고 지는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935년(경순왕 9년) 후백제에 정변이 일어나 신검이 즉위하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곧 탈출해 고려에 귀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후백제가 혼란스러워지자 고려의 왕건이 사실상 후삼국시대를 통일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졌다. 이에 신라의 경순왕은 대세에 따라서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935년 10월 경순왕이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 회의를 소집하여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바치는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마의태자는 동생 덕지(德摯) 왕자 및 이순유(李純由) 등과 함께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결국은 경순왕의 뜻을 막지 못했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옮겨가자 그는 동생 덕지(德摯) 왕자와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로 된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초근목피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때문에 금강산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담긴 장소가 많은데 태자성(太子城), 용마석(龍馬石), 삼억동(三億洞)이 그러한 장소이며 비로봉 정상에서 외금강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비탈길에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을 마의태자릉이라고 부른다. 이 때 그의 동생 김덕지[1] 왕자도 처자(妻子)를 버리고 마의태자와 함께 개골산에 들어갔다가 이후 화엄종에 귀의(歸依)하여 승려가 되어 법수사해인사에 거처하였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혹은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동생 덕지(德摯. 또는 덕주공주[2])와 함께 월악산덕주사를 지어 머물다가 혼자 개골산으로 갔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강원도 인제로 가서 신라의 남은 충신들과 지사들을 규합해 고려에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개골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인제를 거쳐간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도 있다.

3. 신라부흥운동설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고자 하자 이에 필사적으로 반대하며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볼 때 꽤나 강경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의태자가 결사항전을 부르짖은 이유에 대해 삼국유사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의태자는 효종랑의 손자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효종랑이 화랑을 이끌던 낭주였기 때문에 마의태자는 화랑도의 영향을 깊게 받았고 그 때문에 신라의 사직을 넘겨주자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던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사실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의태자가 혼자 금강산에 들어가서 생을 마쳤다기보단 고려에 맞서서 신라부흥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이긴 한다. 실제로도 마의태자와 같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신라, 후백제 멸망 이후 한반도의 정세가 통일 고려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저항하다가 노비천민으로 전락한 호족 세력들도 꽤나 있었고, 당장에 고구려백제, 발해도 멸망 후 각각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고안승고연무, 부여풍, 대연림 등이 과거 고구려와 백제, 발해의 왕족들이었음을 감안하면 마의태자도 이들과 비슷하게 고려에 맞서 신라부흥운동을 주도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하지만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 운동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이견도 있다. 무엇보다 본인 자신이 부흥운동을 일으켜 고려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멸망 후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고구려와 백제, 발해는 수도였던 평양성과 사비성, 상경용천부가 함락되었을 뿐 지방에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지배층과 영토, 군사력이 남아 있었고 적국을 물리치고 망한 나라/왕조를 다시 세우자는 명분도 충분했었기에 멸망 이후에도 부흥 운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다.[3] 그러나 신라는 후삼국 시대를 거치면서 개혁을 거부하며 골품제도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던 신라 중앙 정부에 반감을 지니던 지방의 귀족과 군벌 유력자들이 대거 호족화되어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를 거부하고 신라에서 이탈, 독립했다가 이들 대부분이 공산 전투와 고창 전투, 운주 전투 이후 갖고 있던 영남 지역의 영지들을 들어 후백제와 고려에게 바쳐 항복, 합병하면서 수도 경주와 약간의 경상북도 동해 해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저항할 만한 영토도, 군사력도, 인재도 남아있지 않았던 상황이 되었다. 더군다나 신라는 국왕이었던 경순왕이 평화적으로 고려에 항복하면서 왕조가 막을 내렸고, 고려 국왕의 장인이자 최고 등급의 귀족으로 우대받았고, 신라의 옛 왕실 일가인 김씨 가문과 박씨 가문도 고려 정계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던 만큼 선대의 원한을 갚아 망해 사라진 나라를 다시 세우자는 명분조차 내걸기 힘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옛 신라 왕족이나 지배층들이 고려 중앙 정계에서 후한 대접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고 낮은 향리 계급으로 강등된 다수의 신라 출신 지배 계층들도 있었는데 결국 이들의 불만이 표출되어 고려시대 초, 중기에 옛 신라 지역인 경상도 일대에서 신라부흥을 내건 몇 번의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거대한 파급력을 갖지 못했다.
참고로 마의태자가 최후까지 저항했다는 강원도 인제 지역은 바로 육군과학화훈련장이 있는 곳이다. 훈련장이 생기면서 마을은 없어졌으나 이름은 남아있는데, 김부리, 갑둔리가 있고, 김부대왕각이 존재했다. 여기서 말하는 김부대왕이 과연 누구이냐? 라는 것인데 경순왕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의태자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는 과학화훈련장이 되어 김부대왕각도 사라지고 주민들이 올리던 굿잔치도 소멸한 상태이다. 또한 접근이 쉽지 않은 상태이나 전방지역 군복무를 하게되면 한번 쯤 가볼 수 있다. 실제로 가보면 성벽터 같은 것도 있고 위치나 지형이 중소규모의 군대를 모아 훈련시키고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방어도 가능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여단급 훈련장이 될 정도로 꽤나 군사주둔지로서 가치가 있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마의태자가 열심히 신라부흥을 위해 군사훈련을 했던 곳에 천년 뒤 대규모 군사훈련장이 생겼다는 것이 꽤나 흥미있는 점이다.

4. 마의태자가 신라 왕이 되었다면?


'마의태자가 왕이 되었으면 신라가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의견도 있다. 나라를 바치려는 아버지 경순왕에 맞서 대체적으로 무너져가는 신라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신라를 유지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이미 고려와의 국력 차가 벌어진 이상 군사력으로는 고려와 직접적으로 싸우지는 못 해도 고려에 나라를 바치는 대신 고려에게 사대주의로 굴종하여 신라를 고려 초기때 고려로부터 속국의 지위를 얻어냈던 탐라국처럼 고려로부터 속국의 지위를 얻어냈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사실상 한반도 정통 왕조의 지위를 가진 신라를 과연 고려가 흡수 합병 안하고 탐라국처럼 속국으로 두었을지는 의문이다.[4] 후삼국시대 당시 고려나 후백제는 정통성 측면에서 상당히 취약하고 불안정한 나라들이었기에 한반도의 정통 왕조가 되기 위해서는 신라는 반드시 흡수해야 했다.[5] 특히 고려 태조 왕건 입장에선 신라는 후삼국시대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패자가 되려는 이상, 병합시켜서라도 반드시 없애야 할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6] 설혹 태조 왕건이 여러가지 이해관계를 고려해 신라를 없애지 않고 탐라처럼 고려의 속국으로 남겨두었다고 해도 왕건 사후 왕건의 아들인 혜종이나 정종, 광종 시기에 고려가 신라를 침공, 병합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바다를 낀 섬나라였던 탐라와 달리 신라는 육지로도 고려와 인접해있어 탐라국과 같이 속국으로 장기간 지속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실제로 마의태자가 신라의 왕이 됐다 하더라도 고려에게 친 고려 사대주의 외교로 굴종하여 신라를 보존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만은 없다. 군사력으로 결사항전을 하기에는 당시 고려와 신라의 국력 차가 너무 컸기 때문. 멀리 갈 것도 없이 이상주의 정치에서 현실주의로 방향을 바꾼 일부 정치가들의 사례를 보자.

5. 이모저모


  • 마의태자는 또 다른 떡밥을 남겼으니, 바로 금태조 완안아골타와 관련된 떡밥이다. 이른바 여진족 신라인설이다. 썩은 떡밥인 애신각라 신라사랑 떡밥과 달리 옛 기록이 근거로 뒷받침되는데 고려사나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아들인 김행, 혹은 김준이 만주 땅으로 들어가서 대를 이은 결과 나온 게 금태조 아골타라는 것이 떡밥의 핵심. 하지만 고려사를 엄밀하게 살펴볼 때 김행이나 김준이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순암 안정복은 마의태자의 세 아들 중 김준이 여진족에게 망명했고, 나머지 두 아들은 고려에 남았다고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역사에 남은 것만 세 명이니 결론적으로는 네 명이 된다.
  • 마의태자의 묘는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 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에서 비로봉까지 공개될 예정이어서 마의태자의 도 실물이 공개되나 했지만, 남북 관계 경색과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보류된 상황.
  • 석굴암의 보석과 관련된 이야기의 주 스토리로 한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는 마의 태자가 2명이었으며,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2명의 왕자중 1명은 정설대로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용문사로 들어간 왕자가 보석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을 떠날 때 같이 매장했다고 한다.

6. 족보 관련 논란



6.1. 「김은열 묘지명」


조선 후기 들어 1784년(정조 8)에 경순왕 제4자(四子)라는 『김은열 묘지석』을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이를 보고 김노규(金魯奎)가 「김은열 묘지명」을 근기(謹記) 하였는데,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 등을 배필로 맞이하여 슬하에 8남을 더 두었다고 한다. 그 이름은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 」이라 한다. 특히 2자 굉(鍠)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기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8자들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생애 및 배위(配位)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명》은 나라의 역사 기록들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을 갖게 된다.

6.2. 「신라경순왕전비」


1814년 경주 김씨 후손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은 전비(前妃) 박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며, 1녀는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또 후비(後妃) 왕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며, 2녀는 경주이씨 이금서(李金書), 장수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전비(前妃) 박씨 소생의 3자로 영분공(永芬公)을 추가하고,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은 배척하였다. 또 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고, 2녀를 추가하였다.
이후부터 경주 김씨 일문에서 마의 태자 이름을 '김일'(金鎰)이라 한며, 둘째 왕자의 이름도 '김황'(金湟) 또는 '김굉'(金鍠)이라 한다. 또 셋째왕자를 '김명종'(金鳴鍾)이라 하며 영분공(永芬公)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6.3. 시조 논란


마의태자는 어느 집안 조상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최근들어 경순왕 후손이라 주장하는 신라계 어느 김씨 문중에서는 「김은열 묘지명」 및 「신라경순왕전비」를 근거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자신들을 마의 태자의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 족보에 시조로 표시해 놓았다. 그리고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며, 자(字)가 겸용(謙用)이라 한다. 슬하에 두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김은열 묘지명이 발견된 이듬해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김은열 묘지명」을 원용하여 「보국대안군 은열공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鐘)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 아들들 이름 및 서차가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2009년 9월 '경주 김씨 대장군공파'가 대종회 명칭을 '경주 김씨 태자파'로 바꾸고, 2010년에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시조로 삼은 대동보를 만들어 문중에 배포하여 논란이 증폭됐다. '경주 김씨 태자파'는 ‘월성가승원대세계(月城家乘遠代世系)’와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를 근거로 들어 자신들의 중시조인 고려 장군 '김순웅'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월성가승원대세계'에는 순웅과 경순왕 사이에 세계(世系)의 기록을 잃었다. 그러나 '(순웅과 경순왕 사이의) 연대가 매우 가깝다.’는 문구가 나오며, '신라삼성연원보'에는 마의태자의 두 아들이 선웅과 순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해 관계 있는 여타 신라 김씨계 문중들은 반발한다. 이러한 행위는 마의태자의 장남 '김기로' 후손이라는 '부안 김씨'와 차남 '김교' 후손이라는 '통천 김씨'의 주장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부안 김씨'와 '통천 김씨' 측은 '경주 김씨 태자파'가 마의태자를 시조로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인 '신라삼성연원보'가 엉터리 족보로 이른바 위보라는 것을 들어 이를 반박했다. 신라 김알지 후손들의 연합체인 ‘신라김씨연합대종원’도 같은 주장이다. 1934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김경대'라는 사람이 발행한 것으로 돼 있는 '신라삼성연원보'는 곳곳에 사실과 다른 기술이 많고 같은 책 안에서도 내용이 모순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족보라는 것이다. '신라삼성연원보'에 따르면 태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김일이 마의태자인지 아닌지조차 불확실하며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 가계와 관련된 기록들을 반박의 중요한 근거로 들었다.
결국 이러한 논란은 소송으로 이어져 경주 김씨 계림군파에서 '신라계 김씨 일가의 족보에 대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등의 이유로 '경주 김씨 태자파'에서 제작 배포하려는 대동보에 대해 '대동보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으나 기각됐다. 법원의 기각 결정 이유는 “김순웅과 마의태자 김일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아니하였지만, 또 김순웅이 김일의 둘째 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1자라는 김일은 「징효대사탑비」에 등장하는 인물로, 왕건의 왕자들 및 공주, 장인들과 함께 적혀있다. 이 당시의 관등은 소판으로,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왕손인 무주#s-2도독 소판 김일이 등장하긴 하는데 해당 금석문이 지어진 시기는 890년이다. '''경순왕이 태어난 897년보다 7년이나 앞선다.'''
이후 1908년 칙명으로 간행된 《증보문헌비고》 및 1924년 간행된 《조선씨족통보》에도 신라 경순왕 김부의 왕자들은 태자, 별자 김덕지로 기록하고, 「김은열 묘지명」을 원용하여 김일을 비롯한 8자들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부안 김씨, 경주김씨 태자파는 자신들이 마의태자 후손이라고 주장하지만 마의태자는 처자식을 죽이고 개골산에 들어가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마의태자 후손은 대가 끊겨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경순왕 김부의 두 아들 (1)
부안 김씨, 경주김씨 태자파는 처음부터 잘못된 싸움이다.
부안 김씨는 마의태자의 없는 후손을 만들어내고
경주김씨 태자파는 신라삼성연원보 라는 위보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경순왕 김부의 두 아들(2)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사극 드라마인 태조 왕건에서는 경순왕이 즉위한 뒤에 등장하며, 경순왕이 후백제의 앞잡이인 신하들을 죽이는데 동조한다. 작중에서 나라를 고려에게 바치려는 아버지 경순왕 및 신하들과 대립을 하며 고려와 후백제를 적대하며 쇠퇴해가는 신라를 존속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일국의 태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은 완전히 무시당한다(...). 경순왕의 초청을 받고 신라를 방문한 왕건이 고려로 귀국 돌아갈 때 경순왕은 물론 신라의 모든 관료들이 보는 앞에서 검을 빼들고 "고려의 왕은 도적이다! 신료들이여, 속지 말지어다! 저기 가는 고려 왕은 도적이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기도 하고[7], 경순왕이 고창, 운주 전투에서 대세가 고려에 기울자 고려와의 병합을 논의하는 회의를 할 때도 "적어도 우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통일을 이룬 국가였소이다! 누가 승자란 말이오, 폐하 아직 신라는 일어설수 있사옵니다. 고려와 백제가 싸우는 틈을 노려 다시 일어설수 있사옵니다! 저들이 어찌 도적이 아니고서야 어찌 천년사직의 우리 신라국을 내놓으라고 한단 말입니까! 있을수 없사옵니다!"라고 크게 반발하기도 하고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비치자 "차라리 전 신료들에게 자결을 명해 주시오소서!"라고 부르짖지만 결국 실패하고 항복이 결정되자[8] 마의를 입고 개경으로 떠나는 아버지 경순왕과 전 신료들의 모습을 보며 통곡하며 산 속으로 들어간다. 배우는 이병욱이 연기했다.[9]
바람의 나라의 보스 중 하나인 청의태자의 이름의 모티브가 이 인물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천추태후(드라마)에서는 본인은 등장하지 않지만, 주요 인물인 김치양이 이 마의태자의 손자라는 설정을 덧붙였다.

8. 같이보기



[1] 역시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으나 문헌에 '김덕지'라 한다. 최근에 들어 제2자가 김굉(또는 김황)이라 하며 신라 경순왕의 둘째 왕자라 주장한다. 그러나 1784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김굉(또는 김황)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후비로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 소생의 제2자라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김굉(또는 김황)은 신라의 왕자가 아니라 고려 태조의 외손이다.[2] 전설에만 나오는 인물로 경순왕의 후손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 때문에 진짜 경순왕의 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마의태자와 혼인하여 그 후손이 금나라의 시조 완안아골타라는 말도 있다.[3] 특히 발해부흥운동은 발해가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당한 이후에도 정안국과 연파국, 오사국, 흥료국 같은 나라들이 거란으로부터 독립하여 거란에게 저항했다.[4] 게다가 탐라국이 고려 초에 고려의 속국이 될 당시 신라는 경순왕의 항복으로 고려에 흡수되어 소멸된 상황이었다.(탐라국의 고려 복속- 938년, 신라 멸망-935년.) 즉 탐라국이 고려의 속국이 될 시기에 신라가 고려 초기에 탐라국이 하듯이 고려의 속국으로 복속하는 것은 당시 시기, 연대적으로도 일치하지 않는 소리라는 것이다. [5] 물론 후백제는 고창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신라와 인접한 경상도 일대의 영토들을 모조리 고려에게 빼앗기고 신라와의 국경이 소멸되면서 신라를 합병할 수 있는 기회를 영구히 상실한다.[6] 당장에 후삼국시대 말기때 신라처럼 정통성을 가진 국가가 아니었음에도 삼국시대 초기 고구려백제에게 사대하며 속국으로 버티던 마한과 옥저, 동예 같은 한국 고대사의 소국들도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멸망, 흡수당했음을 생각해보자.[7] 안습하게도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다. 왕건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멈춰서며 복잡해하는 표정을 보였으나 유금필이 '그냥 신경쓰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라 권유하여 곧장 고려로 귀환하며 무시로 대응했다. 사실 고려 입장에서는 마의태자가 하는 도발에 굳이 반응해줄 필요가 없었다.[8] 경순왕은 왕실의 잘못으로 신라가 이리 됐는데 어째서 신하들과 백성들이 죽어야하냐며 꾸짖고 묵살했다. 작중, 실제 역사에서 고려는 신라를 유화적으로 대하며 온전히 고려로 받아들였고, 경순왕은 훗날 경주의 사심관이 되어 고향의 자치를 관리하며 경주 전체를 식읍으로 받고 높은 대우를 받으며 장수했으니 경순왕의 판단이 옳았다. 물론 아무리 고려가 유화적이라지만 조국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없기는 했다.[9] 그 전에 76화에서 모든 사실을 자백하고 살아돌아간 후백제 첩자 역으로 먼저 나왔다. 145회에서는 후백제의 전령으로 견훤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한다. 이후 이병욱은 명성황후에서는 김옥균 역을, 무인시대에서 최충헌의 생질 박진재, 대왕세종에서는 김종서, 근초고왕에서는 근초고왕(부여구)의 형 부여휘 등을 맡았다. 주로 총명하고 공명심이 강한 인물들을 열연해 왔다. 결국 정도전에서 윤소종을 맡았는데, 윤소종은 최영의 처형에 깊이 관여하고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최영 역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태조 왕건에서 견훤역을 맡았던 서인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