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희(1898)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태희'''
'''鄭泰熙'''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8년 1월 8일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현면 저전리
(현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문성리 저전마을)
<color=#fff> '''사망'''
1952년 3월 19일
충청북도 충주군
<color=#fff> '''본관'''
온양 정씨[1]
<color=#fff> '''호'''
계운(桂雲)·백양(白洋)
<color=#fff>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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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태희는 1898년 1월 8일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현면 저전리(현 충주시 노은면 문성리 저전마을)에서 부친 정낙중(鄭樂中)과 모친 원주 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충주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여 유자명의 가르침을 받으며 민족정신을 키웠다. 1919년 3.1 운동이 충주에서 발발하자, 그는 유자명의 인솔 하에 충주간이농업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유자명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만세시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상경한 그는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호응해 10월 박인관(朴寅寬)·정덕생(鄭德生)·박승명(朴承明)·유만섭(柳萬燮)·송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대한국민총회를 조직하고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는 평양에서 기독교 장로인 박승명과 박인관·정덕생 등 기독교인들이 임정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으로 만든 단체였다.
이 단체는 기독교회를 통해 전국적인 조직을 세워 민족역량을 결집하고자 했다. 특히 청년대원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을 별도로 운영하고,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을 배포하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황해도와 충청도까지 단원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19년 11`월 말 대한국민회와 대한독립청년단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자, 정태희는 수사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이 된 그는 1921년 7월 임시정부 재무부 첨사에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9개국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가 상정되도록 대(對)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제6회 간사회를 열고 간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열강은 임시정부 인사가 태평양회의에 참석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1923년 4월 임시의정원 제1과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 헌법 개정안 수립 과정에 참여했다. 그해 12월 조동호와 함께 국내로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간 구류되었다가 1924년 2월 2일에 풀려났다. 1924년 6월에는 재차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 참사에 임명되어 재정문제 타개에 진력하였다.
1927년 1월 임시의정원 제27차 회의에서 약헌기초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그해 3월 26일 상하이한인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한국유일독립당의 성립을 지지했다. 12월엔 베이징, 상하이, 광둥, 우한, 난징의 한인청년회 연합체인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에서 상하이 지역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는 이 동맹에서 위원장 후보에까지 오르는 등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1929년 1월에는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좌우세력의 상호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양 정파의 갈등이 심각해져 통합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1929년 10월 26일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는 자진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서 좌파계열과 일부 우파인사가 포함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는 이 동맹의 선전부에서 활동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영향 아래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8월 상해교민단의 총무를 맡아 단장 김구를 보필하면서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의 운영 및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권익 옹호에 힘썼다. 1931년 12월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했지만 여전히 임시정부와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1932년 2월 난징과 상하이의 우파계열 단체인 한국혁명당의 총무를 지냈다.
1933년 8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 김단야의 의뢰를 받고 국내로 잠입한 그는 여운형에게 연락하여 조동호를 상하이로 불러들이고 조선의 청년등을 공산당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중국 유학을 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국제공산당으로부터 교통비 4백원을 받았으며, 여운형의 도움으로 조동호가 안내한 영도사의 승방에 숨었다.
그러나 1933년 11월 김단야에게 임무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상하이로 돌아가던 중 신의주에서 평안북도 경찰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조동호와 함께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34년 4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0년 출옥 후 고향으로 내려와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지내다 8.15 광복을 맞이했으나, 옥고를 치르면서 얻은 병환으로 고생하다 1953년 3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태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6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31세 희(熙) 항렬. 아버지 정낙중(鄭樂中)은 30세 낙(樂)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