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슬로언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이자, 그렉 포포비치에 이은 NBA 장수 감독 2위로 손꼽힌다.
2. 일생
2.1. 데뷔 이전
[image]
제리 슬로언은 일리노이 주의 맥린스보로라는 시골 동네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4세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농장일을 마치고 아침 7시에 시작하는 농구연습에 참여하기 위해 3km나 다녀야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향수병으로 인해 5주만에 그만뒀고, 이후 잠깐동안 유전에서 일을 하다가 에반스빌 대학교에 입학하여 아라드 매커천(Arad Mccutchan)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팀을 두 차례 디비전 2 토너먼트에서 우승시켰고, 특히 대학 마지막 시즌인 1964-65 정규시즌을 29승 무패로 끝냈다고 한다.
대학 3학년 때인 1964년에 볼티모어 불리츠가 그에게 드래프트 3라운드권을 제시했지만, 그는 학교에 잔류하기로 결정했고, 이듬해에 볼티모어가 다시 드래프트 행사권(1라운드 4번)을 제시하자 그는 이에 승낙하며 볼티모어에 입단하게 되었다.
2.2. 선수 시절
[image]
볼티모어 시절에는 별 볼일 없었지만, 1966년 시카고 불스가 창단하자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시카고 불스로 편입, 밥 러브와 놈 반 리어, 쳇 워커 등의 최고의 득점가들 뒤를 묵묵히 받쳐주었고, 그의 월등한 리바운드 실력이 입증되면서 1967년과 1969년 두 차례에 걸친 NBA 올스타 선출과 All-Defensive First Team 4회, All-Defensive Second Team 2회 진출로 입지를 굳혀나갔고, 1975년에 팀을 컨퍼런스 파이널에도 진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된 무릎부상으로 스피드는 현저히 떨어졌고, 결국 슬로언은 1976년에 은퇴하게 된다.
시카고 불스는 1978년 제리 슬로언의 4번을 영구결번하면서 시카고 불스의 최초 영구결번자가 되었다. 함께 활약한 밥 러브는 1994년에 뒤늦게 영구결번되었다.
2.3. 감독 시절
2.3.1. 시카고 불스
[image]
불스 감독으로 취임할 당시의 모습.
은퇴 후인 1976년에 은사인 아라드 매커천의 제의를 받아 에반스턴 대학교 코치가 되었으나, 한 번도 연습게임을 지도하지 못한 채 5일만에 그만뒀고, 이후 2년간 친정팀인 시카고 불스의 스카우터로 활동하다가 1978년에 어시스턴트 코치에 임명되어 지도자로써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감독으로 바로 부임, 부임 첫 해인 1979년 NBA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픽인 매직 존슨을 확보하려 했지만, 결국 1픽 확보는 실패했고 대신 2번 픽으로 데이비드 그린우드를 데려가야 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그린우드와 아티스 길모어를 축으로 리빌딩하기 시작했으나, 1981년에 플레이오프에 가 본것 말고는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지 못했고, 결국 슬로언은 1981-82 시즌 도중에 경질당하고 만다.
2.3.2. 유타 재즈
[image]
유타 재즈의 어시스턴트 코치로써 레이든 감독을 보좌하는 모습.
1983년부터 한 시즌동안 유타 재즈로 가서 스카우트로 근무했고, 1984년에 잠깐동안 CBA팀인 에반스빌 썬더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다가 그 해 11월에 유타 재즈의 단장 겸 감독인 프랭크 레이든에 의해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되었고, 이곳에서 4년간 코치직을 수행하다가 1988년 12월에 감독인 프랭크 레이든이 사장으로 승진하자 감독직을 물려받게 되었다.
[image]
영원한 동반자인 필 존슨 어시스턴트 코치와 함께.
[image]
1990년대 초반 당시의 모습.
그는 레이든 시절부터 다져진 전력을 이어받아 필 존슨 코치와 스캇 레이든 코치 등의 보조를 받으며 칼 말론-존 스탁턴을 위시한 픽 앤 롤 콤비를 축으로 꾸역꾸역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켜 왔으나, 플레이오프에선 가는 데마다 번번히 헛물만 켰다. 밑에 나와있지만 오해에 가깝다. 부임 초기인 89,90시즌에는 2년 연속으로 업셋을 당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시애틀이나 휴스턴, 포틀랜드 등 우승후보급에게만 패했다. 95시즌에는 6번시드인 휴스턴 로케츠에게 1라운드 업셋을 당했지만, 이때 로케츠는 무늬만 6번 시드지 실제론 이 연도 우승팀이었으니 업셋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image]
1997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우승 당시의 모습
그러다가 새가슴 소리도 듣던 말론이 나이를 먹어가며 새삼 각성을 하고 존 스탁턴의 변함 없는 강력한 활약에 제프 호나섹, 브라이언 러셀, 그렉 오스터택 같은 선수가 이들을 떠받쳐 주면서 1996-97 시즌과 1997-98 시즌에 연속해서 N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한데 상대가 하필이면 자신이 과거에 지휘했던 팀이자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이 이끄는 트라이앵글 모션 오펜스를 지닌 시카고 불스였던 까닭에 2시즌 연속으로 박살나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특히 브라이언 러셀을 앞에 두고 던진 the shot은 조던이 회자될 때마다 보여지는 영상으로 재즈 팬을 두 번 죽인다.[1]
결국 스탁턴은 NBA 우승반지를 껴보지도 못하고 2003년 은퇴했고, 칼 말론이 우승반지 득템을 위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지만 말론도 우승반지 득템에 실패하고 은퇴하면서 유타 재즈의 화려했던 1기가 막을 내렸다.
말론-스탁턴 콤비가 떠난 이후 2003-04시즌, 많은 이들이 유타가 몰락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신예 안드레이 키릴렌코가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맹활약으로 의외로 42승으로 선전하면서 (전 시즌이 47승이었는데 에이스 콤비가 떠난 걸 생각하면 굉장한 성과다) 막판까지 플레이오프 경쟁을 했다. 그러나 그 다음 두 시즌동안 키릴렌코가 부상에 시달리고, 야심차게 영입한 부저 역시 부상에 시달리면서 26승에 그치는 등 1982시즌 이후 최악의 성적을 거둔다. 그 다음 시즌에도 41승으로 간발의 차이로 플레이오프 탈락했으나, 안드레이 키릴렌코-데런 윌리엄스-카를로스 부저-메멧 오쿠어를 축으로 2006-07시즌부터 다시 플레이오프의 단골이 되면서 서부의 강호 자리로 복귀, 2006년 12월 11일에는 댈러스 매버릭스를 107-79로 쓰러뜨리고 개인 통산 1,000승에 도달했다. 2007년에는 올해의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나 투표 결과 토론토 랩터스를 이끌던 샘 미첼 감독에게 394대 301로 지면서 수상에는 실패했다. 2008년 11월 7일에는 신생팀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104-97로 이기면서 단일팀 최초의 1,000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행운이 있으면 불행도 있는 법. 2011년 1월 12일 뉴욕 닉스를 불러들여 벌인 경기를 점수 공방전 끝에 131-125로 이겼는데 경기 후 인터뷰에서 데런 윌리엄스는 만족을 표한 반면, 제리 슬로언 감독은 '이긴 것은 좋지만 우린 하프 코트 팀이 아니었나'라는 상반된 인터뷰를 하면서 갈등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해도 팀 성적이 좋았었기에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둬주리라 생각했던 동부 원정 5연전을 전패하면서 코치진과 선수들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결국 2011년 2월 11일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를 패한 직후 라커룸에서 불만이 폭발했다. 그 후 23년만에 필 존슨 어시스턴트 코치와 함께 재즈의 지휘봉을 내놓으면서부터 그의 감독 인생은 끝을 고하게 되었다.
2.4. 은퇴 이후
2013년부터 유타 재즈로 돌아와 이곳에서 고문 겸 구단 스카우팅 컨설턴트로 재직했으나, 2016년 들어 파킨슨병과 치매를 동시에 앓고 있다고 밝혀 그를 기억하는 많은 농구팬에게 안타까움을 샀다. 관련기사 본인은 동정이 아니라 이 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길 바라는 취지에서 투병 사실을 밝혔다고.
3. 사망
2020년 5월 22일(한국시간) 파킨슨병과 치매 투병 끝에 영면에 들었다. 향년 78세. 많은 NBA 전설들과 전 레전드들 또한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으며 추모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농구전문가 손대범은 칼럼을 통해 자세하게 그의 농구인생을 다루었다. 특히 영혼의 콤비였던 칼 말론과 존 스탁턴의 아쉬움이 가장 크다.
4. 감독 스타일
엄격하게 짜여진 비교적 느린 페이스의 하프 코트 오펜스를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가 부임하기 전 80년대 프랭크 레이든 감독이 이끌던 재즈는 풀코트 속공 팀이었지만, 88-89시즌 초반에 슬로언이 부임한 이후로 하프코트 지공 위주의 팀으로 바뀌었다. 다만 스타일이 바뀌었음에도 득점효율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재즈 농구는 패스와 스크린 플레이, 볼이 없을때 선수들의 움직임을 중요시 하는 정석적 농구였는데, 대표적으로 알고도 못 막는 칼 말론과 존 스탁턴의 픽앤롤[2] , 픽앤 팝[3] 등이 잘 알려진 전술이었다. 그 외에 제프 호너섹과 같이 운동능력은 별로지만 기술이 좋은 선수들이 많은 역할을 맡았고, 이 때문인지 유타는 유독 백인 선수들의 비중이 비교적 높은 팀이기도 했다. [4] 다만, 철저하게 정해진 스타일로 농구를 하는 슬로언의 스타일상 "재미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위에 언급했듯이 철저한 전략에 따른 농구는 효율적이지만 화려함이 부족하기 때문. 또한 주득점원인 칼 말론도 마이클 조던처럼 현란한 1대1 기술을 보유하진 못했다. [5]
이런 점 때문에 슬로언의 재즈는 꾸준함은 있으나, "한 방"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재즈는 슬로언 체제로 온 89시즌에 디비전 우승을 차지하고 서부 2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7위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즈에서 0승 3패로 1라운드에서 패배했다. 그 다음 시즌에는 55승을 올렸으나 54승을 차지한 피닉스 선즈와 1라운드에서 붙어 마찬가지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패배...이로 인해 "정규시즌용 팀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슬로언의 팀이 "정규시즌용"이라는 것은 오해에 가까운데, 정규시즌 성적부터 부진했던 93시즌을 제외하면 91시즌부터 99시즌까지 유타가 패배한 팀은 포틀랜드, 휴스턴, 시애틀 슈퍼소닉스, 샌안토니오 스퍼스 등 그 해에 결승에 오르거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팀 뿐이다. 이를 보면, 89,90시즌의 부진은 슬로언 체제가 잡혀가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라고 봐야할 듯. 실제로 조던같은 사기급 1대1 무기는 없고 칼 말론이 큰 경기에서 활약이 다소 미진하긴 해도, 존 스탁턴은 클러치 능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선수라 한 방을 터뜨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다만 슬로언은 꽉 짜여진 스타일과 엄격한 지도방식 [6] 이 특징인 이른바 "old school" 감독이었기 때문에, 젊은 선수들과 마찰이 잦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데런 윌리엄스와의 파워게임이 대표적이었고, 끝내 이로 인해 20년 넘게 근무한 재즈에서 팽당하기도...[7]
실제로 존 스탁턴과 80년대에 맞대결을 펼친 레전드 가드 아이재아 토마스같은 이들은 스탁턴이 슬로언 체제가 아니라 더 자유롭게 뛰었다면 더 위력적일 수 있을 거라고 지적한 바 있다. 토마스는 스탁턴의 득점력이 훌륭했음에도 패스를 먼저 해야한다는 pure point guard 멘탈 때문에 스스로를 억제한 바 있다고 지적했으며, 그가 슛을 안 하고 패스를 할 때마다 안도했다고 밝혔다.
5. 여담
- 코트에 나설 때 입는 복장에도 그의 성격이 반영되기도 하는데, 주로 강렬한 무늬가 새겨진 넥타이를 맸다.
-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6년간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아내 바비 슬로안은 결국 2004년 6월,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였고, 첫 번째 아내를 잃은 슬로안은 2006년, 타미 제숍이란 여인과 재혼하였다. 제숍은 솔트레이크 시티의 레스토랑에 음식공급을 담당하는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 2009년에 애제자 존 스탁턴과 함께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4년 1월 31일에 통산 승수 1,223승이 적힌 유니폼이 유타 재즈에 영구결번되기도 했다.
[1] 여담으로 이 플레이를 찍은 사진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조던 뒤쪽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은 스포츠 사진 중 손꼽히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역대 최고의 농구선수가 마지막 우승을 결정짓는 극적인 순간이란 상징성도 있지만, 그 구도 때문에 정면에 찍힌 수 많은 재즈 팬들의 절망하는 표정들이 적나라하게 나와있기 때문. 클러치 플레이어로서의 조던의 명성 때문인지, 불과 1년 전에 재즈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장본인이기 때문인지, 조던이 슛을 쏘는 순간 머리를 감싸는 팬, 울부짖는 팬, 절규하는 팬,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물건을 마구 흔드는 팬 등 다양하다. 이것도 여담이지만 에어 조던 22의 광고가 이렇게, 원정선수가 영웅이 되는 순간 절망하는 팬들의 모습을 묘사했다.[2] 빅맨이 스크린을 해주고 골밑으로 쇄도(roll)하면, 수비를 떨쳐낸 포인트가드가 직접 슛을 쏘거나 패스를 찔러주는 것.[3] 픽앤롤과 스크린까지는 동일하지만, 빅맨이 골밑으로 쇄도하지 않고 중거리슛 위치로 간다.[4] 일반적으로 백인선수들은 흑인선수들에 비해 운동능력이 부족하다.[5] 말론의 경우 경기당 득점이 30점을 넘을 정도로 득점력이 뛰어났지만, 1대1로 현란하게 돌파를 하기보다는 주로 포스트업에서 점퍼로 마무리하거나, 공이 없는 상태에서 잘 움직여서 위치를 기막히게 잡은 다음 스탁턴의 킬패스를 받아 득점하곤 했다. 축구로 따지면 '받아먹기'의 달인. 물론 스타일이 다를 뿐이지 이를 두고 그가 쌓은 득점이 1대1 달인들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운동능력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으나, 달리기와 힘에 특화된 빅맨이었고 점프력은 NBA기준으로는 평범한 편.[6] 실제로 슬로언은 상당한 다혈질이라 선수와 심판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잦았다. 시카고와 결승전 도중 타임아웃을 부르라고 한 선수에게 두 손으로 T자를 만드는 타임아웃 손짓을 했는데 (경기 진행 중에는 선수만 타임아웃을 부를 수 있다) 이 선수가 이걸 못 보자 "타임아웃! 타임아우우웃!!"하고 손가락이 부러질 듯 격렬하게 손짓을 하며 거의 포효를 했다.[7]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돌아가는 NBA에서 선수와 감독이 파워게임을 하면 절대 감독이 이길수가 없다. 티켓을 파는 건 결국 선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