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탁턴

 

'''존 스탁턴의 주요 수상 및 헌액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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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유타 재즈 영구결번'''
No. 12
'''1988 ~ 1996년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매직 존슨

'''존 스탁턴'''

마크 잭슨
'''1989년 NBA 올해의 스틸왕'''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1992년 NBA 올해의 스틸왕'''
앨빈 로버트슨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1993년 NBA 올스타 MVP'''
매직 존슨

'''존 스탁턴''' & 칼 말론

스카티 피펜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존 스탁턴'''
헌액 연도
2009년

[image]
'''유타 재즈 No.12'''
'''존 휴스턴 스톡턴
(John Houston Stockton) '''

'''생년월일'''
1962년 3월 26일
'''국적'''
미국
'''출신지'''
워싱턴 주 스포캔
'''키'''
185cm
'''체중'''
79kg
'''포지션'''
'''포인트가드'''
'''드래프트'''
'''1984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6순위
유타 재즈 지명'''
'''소속팀'''
[image]'''유타 재즈 (1984~2003)'''
'''등번호'''
'''12번'''
'''수상내역'''
NBA 올스타 10회 (1989-1997, 2000)
NBA 올스타전 MVP[1] (1993)
'''올-NBA 퍼스트팀 2회 (1994-1995)'''
올-NBA 세컨드 팀 6회 (1988-1990, 1992-1993, 1996)
올-NBA 서드 3회 (1991, 1997, 1999)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5회 (1989, 1991-1992, 1995, 1997)
'''NBA 어시스트왕 9회 (1988-1996)'''
NBA 스틸왕 2회 (1989, 1992)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9)'''
1. 개요
2. 커리어
2.1. NBA 지명 이전
2.2. NBA 시절
3. 플레이 스타일 & 꾸준함
4. 여담
5. 스탁턴의 사기성
6.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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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TOCK'''
NBA 선수. 유타 재즈의 전설이자 신화. '''NBA가 선정한 위대한 50인의 농구선수 중 한 명이며, NBA 역대 어시스트 1위. 무려 9년 동안 어시스트 부분 본좌에 군림한 레전드 오브 레전드'''. 역대 어시스트 NBA 1위 말고도 총 스틸 개수에서도 역대 1위이다.
별명은 "THE POINT GUARD." 별명이 말해주듯이 정석적인 포인트가드의 모든것을 갖춘 전설적인 선수이다.

2. 커리어




2.1. NBA 지명 이전


1962년 워싱턴주 스포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각각 아일랜드독일스위스인으로, 부친 잭 스탁턴(1927~2017)은 친구와 함께 술집 'Jack & Dan’s Bar & Grill'을 운영해왔다. 곤자가 대학 시절에도 뛰어난 농구 실력을 보여주었는데, 포인트 가드라고 하기에는 사기적인 '''야투율 57%'''를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어릴적부터 키가 작아서 고민이었던 그는 샤워실 창문을 보며 ''''저 창문까지만 키가 크면 좋을 텐데...''''라고 기도하곤 했는데 그 창문의 높이는 정확히 그의 키인 185cm(...). 대학교 4학년 내내 댄 피츠제럴드와 제이 힐콕 감독에게 농구를 배워가며 꼬박 채운 그는 1984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서를 낸다.
당시 그에 관심을 보이는 프로팀은 거의 없었지만, 4학년을 꼬박 채운 것이 프로팀에서 관심이 없었던 것 때문은 아니다. NBA급 유망주들은 대학에서 1년, 길어야 2년 뛰는 현재 트렌드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거의 모든 유망주들이 최소 2, 3년, 적지 않은 선수들이 4년을 다 뛰었다. 당장 졸업하지 않고 프로 직행해 달라고 소송을 내서 이후 모든 조기 프로직행을 가능하게 한 선수인 스펜서 헤이우드가 196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아이러니한 것은 헤이우드 본인은 이런 혜택을 못 봐서 당시 규정대로 고등학교 졸업 후 4년이 지날 때까지 ABA에서 뛰어야 했다.) 실제로 1970년대에는 규정 개정 이후에도 대부분의 선수들이 졸업하고 프로에 왔으며 1976년에 최초로 고졸직행 선수인 데릴 도킨스가 생각만큼 스타가 되지 못한 이후 20년 동안 고졸선수가 드래프트에서 뽑히지 않았다. 198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는 이런 트렌드는 남아있어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전체 1순위들을 보면, 조 베리 캐롤 4학년, 마크 어과이어 3학년, 제임스 워디 3학년, 랄프 샘슨 4학년, 하킴 올라주원 3학년, 패트릭 유잉 4학년, 브래드 도허티 4학년, 데이비드 로빈슨 4학년, 대니 매닝 4학년, 퍼비스 엘리슨 4학년, 데릭 콜먼 4학년으로 11명 중 8명이 대학 4년을 다 다니고 나머지 세 명도 3년을 다닌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1년 전 매직 존슨은 2학년만에 프로에 왔지만 그 전의 마이클 톰슨, 켄트 벤슨, 존 루카스 모두 졸업생이며 매직을 제외한 모든 1970년대 전체 1순위들이 대학에서 최소 3년을 보냈다.[2]
이후 스탁턴은 1984년 1라운드 16순위로 유타 재즈에 지명된다. 16순위는 스탁턴의 커리어에 비해 굉장히 낮은 순위이기 때문에[3][4] NBA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큼 날로 먹은 지명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이는 스탁턴이 어떤 선수가 되었는지 알고 있는 후대의 관점일 뿐이다. 당시의 스탁턴에 대한 기대치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상당히 높은 순위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타 재즈의 도박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곤자가 대학이 지금은 그래도 어느 정도 농구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당시에는 완전한 무명에 가까웠고, 스탁턴 역시 무명선수였다. 오죽하면 그가 지명되고 엄청난 야유가 쏟아지자 그와 인터뷰를 진행하던 해설자가 "관중들이 야유 (booing)를 한게 아니라 누구냐고 물은(whooing) 거에요"란 개드립으로 위로를 할 정도. 1984년 드래프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스탁턴은 애초에 자기가 지명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유럽에서 뛰려고 알아보고 있었다고 한다.[5] 참고로 스탁턴이 지명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1984년 올림픽 대표팀 트라이아웃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록 그는 최종탈락을 했지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물론 현재 수준의 스카우팅이 이뤄졌다면, 기본기가 매우 뛰어나고 전술이해도가 높으며 운동능력이 좋은 스탁턴은 상당히 부각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1984년 당시보다는 더 주목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1984년 당시의 NBA, 그리고 드래프트의 위상이 NBA가 세계적인 인기리그로 떠오른 1990년대 이후와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NBA는 어마어마한 돈이 되는 사업이기 때문에[6] 팀 전력 보강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1라운드 픽의 가치도 그만큼 크다. 이 때문에 NBA 1라운드에 지명받은 신인들은 최소 3년에 천만달러에 가까운 액수들을 보장받고, NBA 팀들은 해외의 아마추어와 프로리그, 미국내의 마이너리그와 모든 대학, 고등학교, 심지어 소문이 도는 유망주들의 경우 중학교까지 스카우터들을 보내 유망주들을 샅샅히 찾아내고 칼같이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장점과 약점이 낱낱히 파헤쳐져 성장가능성까지 고려해 그 가치를 분석한다. 올림픽에 거의 나가지도 못하는 농구 약체국인 한국하승진이 고등학교때 NBA 팀들에게 발견되어 한때 NBA 1라운드 감으로 거론되었던 이유, 그리고 만 18세에 맨발 221cm라는 엄청난 스펙에도 결국 2라운드 감으로 추락한 이유이다. 농구 변방의 고등학생임에도 NBA 팀들의 레이더망에 걸렸고, 장점과 성장 가능성에 대해 분석되었기 때문. 물론 NBA 팀들도 완벽한 건 아니라 하심 타빗 같은 삽질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저 정도로 철저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1984년 당시는 1970년대 (인기 면에서의) 암흑기를 매직 존슨/래리 버드의 라이벌 관계로 극복하고 이제 슬슬 인기를 얻어가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NBA는 지금처럼 엄청난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었고, 최초로 드래프트를 TV중계하려고 했던 데이비드 스턴이 방송국에 '''돈을 주고''' 해야했을 정도(당연히 현재는 스폰서들이 붙어서 사무국이 돈을 번다.). 이런 판이니 그만큼 스카우트도 철저하게 이뤄지는 편은 아니라 무명대학의 무명 선수인데다 키도 작고, 스탯이나 개인기가 엄청나지 않은 스탁턴까지 눈에 띌리가 없었다. 그나마 올림픽 트라이아웃 덕에 이름이 알려져서 프로에 지명될 수 있었던 것.

2.2. NBA 시절


어쨌든 스탁턴은 이렇게 유타 재즈와 계약했고, 처음 3년은 백업 멤버로 뛰었다. 팀에 리키 그린이라는 주전이 있었기 때문. 하지만 스탁턴은 예의 뛰어난 경기운영능력과 패싱능력으로 꾸준히 출전시간을 받았고, 4년차 시즌인 1987-88시즌. 드디어 주전이 된다. '''여기서부터 이사람의 9년연속 어시스트 1인 독재가 시작된다.''' 그 후로도 꾸준히 출전. 1990년대에는 주로 같은 아저씨 용모의 제프 호네섹과 함께 백코트를 담당했다. 은퇴시즌인 2002-03시즌에도 전경기 주전으로 출전하는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2003년 3월 2일. 20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칼 말론이 우승을 위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으나, 본인은 명예롭게 은퇴를 선언했다. 유타 재즈를 강팀으로 올려주었고, 구단에 공헌을 많이 한 이 전설에게 구단이 푸대접했을 리가 만무. 그의 백넘버 12번은 유타 재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고, 또한 2005년에는 2m 43cm나 되는 그의 동상을 만들어주었다. 그가 패스를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인데, 스탁턴 본인은 쑥쓰럽다고 했지만, 기쁜 건 어쩔 수 없을 듯. 참조

3. 플레이 스타일 & 꾸준함


위에서도 언급된 경기운영능력, 패싱능력, 그리고 경기를 보는 시야가 매우 넓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제리 슬로언도 스탁턴에게 일부 경기운영을 일임하게 했을정도.
그와 함께 뛰었던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의 패스는 최적의 상황에서 오기 때문에 받기가 쉽다.''' 라고 말한다. 그만큼 동료에게 쉽게 또한 원하는 때에 패스를 하는데 있어서는 도사. 사실 그의 패스는 화려한 맛은 없는 편이다. 하지만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그의 패스를 차단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이 사람의 무서움이 있다.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매직 존슨은 자신의 어깨힘과 푸시능력을 바탕으로 예측불허의 공격적인 파워패스로 상대의 혼과 받는 팀원들의 혼도 같이 빼놓는 스타일이라면, 스탁턴은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0.1초도 놓치지 않는 팀원들의 위치 파악력 및 공간감각을 바탕으로 날카롭게 그리고 최적의 상태에서 패스를 찔러넣는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7] 칼 말론의 존재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 픽앤롤은 원래 농구에서 할 수 있는 굉장히 뻔한 공격전술 중 하나이지만 이 둘이 펼치면, '''알고도 막지를 못한다.''' 그만큼 이 두 콤비의 픽앤롤은 강력했다.[8][9]
공격도 일정이상 부분에서 제 몫을 했다. 유타 재즈에서 제 1 공격옵션은 칼 말론이었지만, 언제나 외곽에서 날카로운 칼을 감추고 있었다. 사실 스탁턴의 슈팅모션은 정석에서 약간 벗어나 포구가 오른쪽 어깨에 쏠려있는 특이한 모션이었다. 초기에는 3점슛 성공률이 형편없었으나 4년차부터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는지 은퇴후의 그의 통산 3점슛 성공률은 38.4%. 자유투 성공률도 대학시절에는 가드치고는 좀 부족했으나 프로에 와서는 딱 세번 정도 70%대였고 나머지는 모두 80%를 넘겼다. 가장 자유투가 나빴던 시즌은 신인시즌에 73.8%. 이게 제일 나쁜거다. 신인시즌 빼고는 78%이하로 떨어진적도 없으니 꾸준함에 있어서도 도사급.
무엇보다 타고난 강심장이어서 중요한 순간에 슛을 성공시킨 일이 많다. 특히 플레이오프의 결정적 순간에는 칼 말론보다 더한 존재감을 보이기도 했다. 레지 밀러 못지않게 빈공간을 찾아내는 능력도 좋아서 순간 그를 놓치는 팀은... 지옥을 맛보게 된다. 1997년 서부 컨퍼런스 결승 6차전에서 찰스 바클리를 좌절시킨 통한의 3점슛 버저비터를 성공시킨것도 그였다. 이때 슛을 성공시키고 기뻐하는 스탁턴의 모습이 백미. (참고로, 막판 2분 동안 연속 9득점했다.)영상[10]
또한 득점으로만 활약한 것이 아니라 클러치 순간에 종횡무진하며 게임을 지배했다. 1997년 파이널 4차전에서 1승 2패로 뒤지고 있는 상황, 4쿼터 막판에 5점차로 뒤지고 있다가 론 하퍼가 칼 말론의 스크린에 걸리자 주저하지 않고 3점라인 두발짝 뒤에서 3점을 적중시켜 2점차로 줄였다. 이후 조던이 돌파를 시도할 때 스틸해버린 뒤 속공레이업을 시도 -> [[조던의 블락에 걸렸으나 파울이 되어 자유투를 얻어냈다. 이후엔 1점차로 지고 있는 순간에 조던이 슛을 놓친 걸 수비 리바운드 후 코트 반대쪽으로 롱패스해 말론의 레이업을 어시스트했다. 영상 당시 4쿼터 막판은 스탁턴의 강심장, 수비력, 운동능력, 어마어마한 시야, 정확한 패스 기술을 모두 응축해서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사실 플레이스타일을 떠나 스킬셋으로 보면 전성기 당시의 크리스 폴과 가장 유사했다. 낮은 득점수치에도 불구하고 스탁턴은 당시 포인트 가드에게 필요한 모든 득점기술을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겸비하고 있던 선수였다.
비슷하게 아저씨 인상인 백인 마크 프라이스처럼 그가 저질 운동능력이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는데, 슛만 좋고(슛 만큼은 당대 최고수준으로 스탁턴보다 확연히 뛰어났다.) 돌파능력이 떨어졌던 프라이스와 달리 스탁턴은 점프력만 평이할 뿐 엄청난 민첩성과 주력, 체력에 체격대비 힘도 좋아 종합적인 운동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선수였다. 프라이스와 달리 스탁턴이 수비에서도 일류인게 이 덕분.[11] 그의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돌파력, 공간이 나면 언제든 슛을 꽂아넣을 수 있는 슈팅력도 있었으며, 1980년대 최강의 공격형 포인트 가드 중 하나였던 아이재아 토마스보다 득점기술이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후술되는 아이재아 토마스의 평가대로 스탁턴은 가진 스킬셋에 비해 공격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스탁턴은 득점이 커리어하이 17.2점으로 능력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게다가 그 긴 커리어동안 6시즌을 제외하면 전부 시즌 평균 15점 이하로 득점했고, 17점대 3번, 15점대 3번이다. 그가 클러치 타임에 종횡무진하며 내외곽에서 득점을 쏟아붓던 걸 생각하면 의아할 정도인데 실제로 스탁턴은 최우선적으로 다른 동료들의 득점찬스를 노렸고, 이들이 막히거나 기습적으로 찬스가 날때만 공격을 했다.
사실 전성기 때 14~17점 넣는 선수가 우승 후보팀에서 클러치타임에서 메인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카고 불스 왕조의 쿠코치의 경우, 조던이 부진할때나 기습적으로 가끔 나올 뿐이다. 클러치타임에서 쉬운 오픈찬스는 웬만큼 운이 따르지 않으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클러치타임에서 가장 먼저 공을 쥐는 선수는 그 팀에서 1대1 공격력이 가장 뛰어난 선수가 대부분이다. 또한 빅맨의 경우 플레이스타일상 골밑과 가까운 득점이 많은데, 클러치타임에선 골밑슛도 기회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빅맨보다는 외곽에 있는 선수들에게 우선적으로 공이 간다.[12] 즉, 대부분의 경우 클러치타임에서 공을 잡는 선수는 팀 내에서 1대1 공격력이 가장 뛰어난 외곽득점원이다. 그런데 유타 재즈에서 이 역할을 맡은게 바로 스탁턴이었던 것.
즉, 스탁턴이 결코 그 정도 낮은 득점스탯을 낼 선수가 아니고 오히려 뛰어난 득점기술을 지녔지만 의도적으로 슛을 자제했기 때문에 나오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커리어 하이 득점이 34점에 불과한데, 이때 그는 34점 16어시스트를 기록할 정도로 득점만 노린게 아니었다는 것, 커리어하이 28어시스트를 올릴때 곁들인 득점이 20점이나 된다는 점, 스탁턴보다 득점 스킬셋이 훨씬 딸리는 스카티 피펜만 해도 마이클 조던과 같이 뛰면서 동반 40점을 여러번 기록하고 커리어하이 47점인 것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스탁턴이 득점을 자제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엔 포인트 가드가 득점하는 것에 대한 편견이 지금과 비교도 안되게 심했으며 "득점형 가드"의 기준이 20점일 정도였다.[13] 스탁턴은 어찌보면 공격형 포인트 가드로 활용될 능력이 충분함에도 본인의 선호도 + 꽉 짜여진 전술을 선호하는 감독 + 듀얼 가드에 대한 시대적 선입견 때문에 능력을 활용못한 케이스라고 볼수도 있다. 만약 그가 공격형 포인트 가드로 나섰다면, 지금의 사기적인 어시스트 기록은 없었겠지만 대신 개인평가로나, 후술되는 아이재아 토마스 말대로 팀 자체로도 훨씬 무서운 팀이 됐을 수도 있다.
그의 강심장과 관련하여 그를 자주 상대하였던 아이재아 토마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가 가능하면 슛을 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패스하기를 바랐다.) 그는 평균적으로 필드에서 50%, 3점슛 라인에서 35% 이상, 자유투에서 80% 이상을 찍던 사람이다. 당연히 그 대신 다른사람이 슛을 쏘면 더 좋았지 않았겠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패스하도록 유도하였다" 라고 회상하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후에 이렇게 끝을 맺었다. "스탁턴은 패스를 우선으로 하는 전형적인 패스 중심의 포인트 가드였고, 그 선입견에 스스로 사로잡혀 슛을 쏘기보다는 패스를 많이 하였다. 아마 그가 그 강박관념을 버리고 슛을 더 많이 쏘았더라면 그가 우승을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아이재아 토마스는 선수 출신답게 해설할 때도 다른 캐스터들이 짚지 못하는 점을 날카롭게 짚기로 유명했다. 마이클 조던의 경기를 해설할 때도 상대 캐스터인 밥 코스타(이 분은 그 유명한 1998년 결승을 해설한 인물로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가 조던의 예술적 움직임을 지적할 때 토마스는 "That's the strength of Michael Jordan"이라고 조던이 공수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해주는 그의 상체힘을 지적했다. 정작 코스타의 멘트가 더 인상적이었던 지라 조던을 주인공으로 한 영상에서 훨씬 많이 언급되지만. 또한 아이재아 토마스는 클러치 순간에 에이스 칼 말론이 "구멍(weak link)"이였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는 "생각해보라. (상대 입장에서) 스탁턴이 슛을 쏘게 하는 건 큰일 날 일이다. 제프 호너섹이 슛을 쏘게 해도 안된다. 그러나 말론이 슛을 쏘게 할 수는 있다"라고 지적했는데, 당시 패널들은 평득 30에 달했던 말론이 구멍이라는 말에 말도 안된다고 했지만 말론이 클러치 순간에 별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1997년 파이널에서 마지막 순간에 게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자유투 두개를 놓치거나 1998년 파이널 막판에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걸 보면 의미심장한 말이다. 실제로 아이재아 토마스가 한 말은 말론의 경기력이 구멍이란게 아니라 클러치 순간에는 다소 약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토마스는 "만약 이 플레이 1998 NBA 파이널 6차전 마지막에서 말론에게 스탁턴이 패스를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경기를 이겼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스탁턴은 경기 막판에 결정적인 빅샷을 잘 넣기로 유명한 만큼 이때 득점을 해 3점차로 벌렸으면 진짜로 경기가 그대로 끝났을 수도 있다.
또한 게리 페이튼은 자신의 현역 시절 상대한 선수들 중 마이클 조던보다도 존 스탁턴이 수비하기가 힘들었다며 그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했다.

그는 보통 한 시합에 12개의 슛을 던져 10개 정도를 성공시키고, 자유투도 거의 놓치지 않고 7, 8개 정도를 넣는다. 그걸로 이미 20 득점. 여기에 어시스트를 15개 정도하고서 덤으로 매번 스틸을 4개쯤 하는데다 칼 말론과의 연계에도 항상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그와 매년 7~9번 정도 맞붙어야 했다. 그건 마치 지옥과 같았다.

평범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수비는 상당히 지능적으로 거칠게 한 선수. NBA 역대 더티플레이어를 언급할때 이 사람도 종종 언급되는 편이다.
데니스 로드맨은 자서전에서 '존 스탁턴은 NBA의 어떤 포인트 가드도 막아낼 수 있다'라고 수비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선수들에게 NBA에서 가장 치사한 가드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 선수들은 스탁턴이라고 말할 것이다. 코트에서 존 스탁턴은 온갖 더러운 짓을 뻔뻔스럽게 해댄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팔꿈치 공격을 한다'라고 깐 바 있다. 스티브 커는 과거 ESPN에서 해설자를 하던 당시 NBA Open Court[14] 라는 프로그램에서 각자 현역시절 가장 힘들었던 상대선수를 꼽는 대화 중 스탁턴에 대해 '나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며,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더러운 후레자식(dirty bastard)'이라고 했다(...).[15] 영상(18분30초부터)선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수비에서는 정말이지 물불 안 가린다고.
그런 점과는 별개로 손이 빠르고 상대 패스 흐름을 읽는 눈이 아주 좋아서 스틸의 달인이기도 했다. 역대 최다 스틸기록 보유자.
이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꾸준함에 있다. 19년간 단축시즌인 1998-99시즌(50경기로 단축)과 부상을 입은 1997-98시즌을 빼고는 모두 전경기(82경기) 선발출전할 정도로 철인. 19년이라고 하면 감이 안 잡힐수도 있으니 경기수로 바꿔 말하자면 나갈 수 있는 1526경기중 딱 22경기 결장했다. 1997-98시즌에 무릎부상을 당한거 말고는 선수생명에 큰 지장을 준 부상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본인스스로 몸관리에 엄격했으니 그가 19년간 롱런할수 있었을 것.
게다가 정신력도 꽤 강한 모양으로 아이재아 토마스가 심한 반칙을 했는데도[16] 그는 도발되거나 하는 법 없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고 한다.[17]
스탁턴이 훌륭한 패스와 강심장 슈터, 강철 체력 등이 유명하지만 오른손 볼해드링이 매우 뛰어나 드리블로 굉장히 뛰어난 선수이다. 그 당시 NBA에서 가장 유명한 체인지오브페이스드리블의 달인이였다. 항상 패스할 곳을 찾는 듯 하다가 순간적으로 드라이브인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드리블할때 일반적인 스탭과 다른 엇박자로 스탭을 밝으면 드리블을 하기도 하여 스탁턴의 시선과 드리블로 다음 플레이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드라이브인 하여 레이업을 하는데 코트 안의 9명의 선수가 가만히 서서 구경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4. 여담


아쉽게도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7년 파이널1998년 파이널에 올라갔지만, 상대는 90년대 NBA 끝판왕 시카고 불스였다. 물론 그들도 선전했지만 불스를 넘기에는 역부족.
여담으로 드래프트 당시 시카고 불스에서 2라운드에 지명하려고 폼잡고 있었다. 만약에 그게 성사되었다면 '''존 스탁턴'''+'''마이클 조던 백코트진..''' 물론 스탁턴의 가능성을 알아본 유타 재즈에서 1라운드에 지명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당시 유타 팬들의 반응은 쟤 누구임? 이였다(...).(참고 자료)
은퇴 후 스포케인에서 아버지와 함께 'Jack & Dan's Bar & Grill'을 운영해 왔으며, 특히 아버지는 유타 경기 때마다 업소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하기도 했다. 슬하에 아들 넷과 딸 둘이 있다. 이중 마이클 스탁턴은 솔트레이크 시티에 위치한 웨스트마인스터대학교에서 뛰었다. 현재는 해외리그를 전전하고 있고, 데이비드 스탁턴은 아버지가 다녔던 곤자가 대학에서 뛴 이후 14-15시즌 새크라멘토 킹스에서 NBA에 데뷔했다가 NBA 디벨로프먼트 리그를 전전 중. 그러다 2018시즌 도중 아버지의 팀인 유타 재즈와 10일 계약을 맺고 3월 26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유타 소속으로 데뷔했다.[18] 하지만 워낙 아버지가 전설 중의 전설이라 언제라도 아버지와 비교대상이 될 듯.
스몰 마켓인 유타 재즈에서 뛰어서 그런지 실제로 다른 명예의 전당 후보들에 비하여 인지도가 떨어진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드림팀의 멤버로 선택된 그는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관광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가 도시를 거니는 동안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굴욕 아닌 굴욕이 있다. 심지어 한 팬은 스탁턴의 얼굴을 포함한 드림팀 전원의 얼굴이 캐리커쳐로 찍혀있는 티셔츠를 입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스탁턴이 장난스럽게 티셔츠에 찍힌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이 친구 알아요?"라고 하자 이 팬은 "그럼~ 알죠"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오죽 답답했던 그의 아들이 "우리 아빠가 이 선수에요" 라고 말해서 팬이 알아들었다고.... 정작 스탁턴 본인은 그런거 그닥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바르셀로나 관광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조
실제 성격도 수수한 편이라 다른 선수처럼 도박이나 파티에 나서는 등 화려한 NBA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 덕분인지 선수생활 내내 스캔들에 휘말렸던 적도 없다. 이 선수가 얼마나 소시민적이었는지는 스탁턴이 자서전 "Assisted"에서 공개한 칼 말론이 데뷔할 당시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 막 드래프트 되었고, 비교적 촌에 속하는 루이지애나 출신인 말론은 이제 루키시즌을 마친 스탁턴에게 어디 놀러갈 데가 있는 지 물었다.[19] 이에 스탁턴은 "산으로 드라이브 갈 수도 있고....동물원도 있지"라고 답했고, 결국 돈도 많은 두 20대 청년들이 동물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20]. 이외에도 동시대에 뛰었던 크리스 웨버가 회고하기로, 스탁턴은 경기장으로 올 때에도 미니밴에 자녀들을 다 데려와서 내려주고, 그리고 경기장에 들어와서 그런 활약을 했다고.[21]
위에 언급된 미니밴 일화는 웨버의 과장이 아닌데, 실제로 스탁턴이 97년 파이널 5차전 이후 아이들을 안고 미니밴을 타는 장면이 찍힌 적이 있으며, 같은 미니밴(색깔이 같다)에서 내리는 장면도 찍혀서 공개되었다. 아이들 장난감로 가득찬 미니밴에서 평범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애들을 내려주는 남자를 누가 게리 페이튼을 벌벌 떨게 하고, 클러치 샷 한방으로 찰스 바클리를 좌절시킨 승부사라고 생각할수 있을까.
2009년에는 한 팀에서 한솥밥을 먹던 제리 슬로언 감독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게리 페이튼은 자신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로 존 스탁턴을 꼽았다. 한국 방한 시 인터뷰 인터뷰 영상
현재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고, 농구에서는 아예 손을 떼고 있는 듯 했지만 현재 곤자가 사립고등학교 여자 농구팀에 코치로 재직 중이다.
윌트 체임벌린은 자신의 프랜차이즈를 이끌어갈 선수로 매직 존슨을 제치고 존 스탁턴을 선택한 적이 있다.[22]
칼 말론과 농구만이 아닌 인간적으로도 매우 친한 관계이다. 대부분의 듀오, 동료들이 같은 팀에서 뛸 뿐 오직 비즈니스 관계가 많은 것과 달리 말론과 스탁턴은 사적으로도 매우 친밀하다. 은퇴 후 둘은 고향으로 돌아가 [말론은 루이지애나, 스탁턴은 유타 주워싱턴 주에 거주하고 있지만 주기적으로 가족 동반 모임을 가지며 서로의 부인과 가족들끼리 친한 사이다. 서로를 잘 알기에 가족 동반 모임에서 말론의 생일에 스탁턴은 낚싯대를 선물했으며 반대로 스탁턴의 생일에 말론은 골프채를 선물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딸들에게 서로 대부를 서줄 정도.[23] 델타 센터에 세워진 서로의 동상 제막식과 명예의 전당 입회식 등에도 같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말론이 아들을 갖고 싶어했을때 아낌없는 조언을 한 이가 스탁턴이며, 말론이 아들을 얻자 가장 먼저 전화했던 상대도 스탁턴이다. 보기 드물게 공사 구분없이 최상의 인생 파트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사실 친분과 별개로 둘의 라이프스타일은 꽤 달랐다. 말론은 17세 때 동갑인 여자와 함께 첫 자식을 봤으며, 20세 때는 13세 소녀를 건드려 임신시켰을 정도로 성적으로 문란한 면이 있었다. 또한 몬스터 트럭을 몰고 거대한 바이크를 타고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등 시골 레드넥스러운 면이 강하다. 반면 스탁턴의 성격은 매우 소시민 적이고 가정적이며, 스캔들에도 휘말린 적이 전혀 없다. 97파이널 당시 경기장에 도착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칼 말론은 거대한 바이크를 타고 경찰 에스코트를 받으며 홀로 요란하게 등장했고, 마이클 조던도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홀로 등장했는데, 스탁턴은 미니밴을 타고 와서 아이들을 내려줬다.[24]

5. 스탁턴의 사기성


존 스탁턴이 한 시기를 지배한 선수가 아닌데다 화려한 선수가 아니라서 자주 간과되는 면이 있지만, 스탁턴의 어시스트 기록은 명실공히 넘사벽이라고 불릴 만한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일단 커리어 통산 15,806 어시스트란 기록은 실로 충격과 공포의 수치이다. NBA 역사상 1만 어시를 넘긴 선수는 단 다섯 명 뿐이며 2위 제이슨 키드의 기록이 12,091개인데, 키드의 기록은 스탁턴의 4분의 3(76.5%)밖에 되지 않는다. 즉, 근처에도 못왔다는 소리다. 잘 감이 오지 않는다면 득점에 비유해보자. 통산 득점 1위는 카림 압둘 자바의 38,387점 인데, 통산 득점 2위 칼 말론은 36,928점으로 1위의 96%에 달한다. 게다가 득점의 경우 이제 14년을 뛰고 아직 3~4년은 더 뛸 가능성이 있는 르브론 제임스가 30000점을 넘기며 무섭게 추격해 오고 있으며, 그 뒤로 케빈 듀란트가 있고, 큰 부상으로 기록경신은 실패하게 된 코비 브라이언트가 근접한 기록을 남기기는 했다. 하지만 어시스트는 후보조차 보이지 않는다.[25]
현역중 어시스트가 가장 뛰어난 선수중 하나로 평가받는 크리스 폴의 경우 커리어 평균 9.7개, 통산 어시스트는 9181개이다. 2019~20년 기준 15년 차이며 만 34세인 폴이 스탁턴의 기록을 깨자면 앞으로 8년동안 결장하지 않고 경기당 10개를 넘겨야 한다. 농구선수들이 20대 후반~30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리며, 커리어 후반으로 갈수록 기록이 하락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평균 10어시를 넘긴 시즌이 14년중 여섯 번에 불과한데다 앞으로 몇년 안에 기량의 하락세가 시작될 폴이 8년 연속 10개를 넘긴다는 건 현재의 기량을 41세까지 유지한다는 소리니 사실상 불가능하고, 애초에 부상이 꽤 잦은 편인 폴이 8년을 더 뛴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기적적으로 8년을 더 뛴다고 쳐도 더 큰 문제는 그 기간동안 거의 결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폴은 데뷔 후 9년간 105경기나 결장한데다 2018-19시즌에만 23경기를 부상으로 쉬었다. 농구의 신이 강림하여 이 모든 악조건을 클리어하고 81경기씩 12시즌을 더 뛰었다고 치자. NBA 역사상 21년을 뛴 선수는 로버트 패리시, 모제스 말론, 케빈 가넷 뿐인데, 이 세 선수는 레전드였지만 커리어 말년에는 평범한 벤치플레이어가 되어 한 자리수 득점을 기록한 적도 있다. 커리어 평득 20을 기록한 칼 말론이 마지막 세 시즌동안 기록한 득점은 4.5 - 5.3 - 2.9고 평득 14.5점의 패리쉬는 각각 4.8 - 3.9 - 3.7을 찍었다. 폴이 이 나이가 될때까지 계속해서 전성기급 스탯인 10어시를 기록할 확률은 까놓고 말해 없다.
선패스 후득점 마인드가 투철한 퓨어 포인트 가드가 점점 사라져가는 와중[26]에 스탁턴의 기록에 근접할 후보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27]
통산 기록의 사기성을 살펴봤으니 이제 시즌 기록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스탁턴을 논할때 "꾸준함"을 가장 크게 보지만, 그의 단기 임팩트 역시 사기급이다.
NBA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로 시즌 어시스트왕에 오른 선수들을 보면
'''순위'''
'''연도'''
'''선수'''
'''개수'''
1
1990년
존 스탁턴
14.5
2
1991년
존 스탁턴
14.2
3
1985년
아이재아 토마스
13.86
4
1988년
존 스탁턴
13.76
5
1992년
존 스탁턴
13.73
6
1989년
존 스탁턴
13.63
7
1979년
케빈 포터
13.4
8
1984년
매직 존슨
13.06
9
1986년
매직 존슨
12.6
10
1994년
존 스탁턴
12.57
추가로 다른 선수들의 시즌 기록과 비교해보면

1. NBA 역사상 단일 시즌 1천 어시스트[28]

를 돌파한 선수는 단 세 명 뿐이며 스탁턴은 당연히 그 중 한 명이다.

2. 단일 시즌 1천 어시스트를 두 번 이상 기록한 선수는 스탁턴 뿐인데, 그는 무려 7번이나 1천 어시스트를 돌파했다.

3. 단일 시즌 1천1백 어시스트를 돌파한 선수는 스탁턴 뿐인데, 그는 무려 5번이나 1천1백 어시스트를 돌파했다.

스탁턴의 통산 평균 어시스트 10.5개도 사실 따지고 보면 충격과 공포의 수치인데, NBA 역사상 통산 평균 10어시스트를 넘긴 선수는 존 스탁턴과 매직 존슨(11.19)뿐이다. 게다가 스탁턴은 경기수가 매직의 1.5배가 넘을 정도로 오래 뛰면서 평균을 많이 깎아먹었는데도 이정도다. 실제로 매직과 동일한 경기수를 뛴 시점에서 보면 스탁턴의 평균 수치가 더 높다. 이는 매직이 1991년 은퇴할 당시를 기준으로 잡아도, 1996년 은퇴할 당시를 기준으로 잡아도 마찬가지. 또한 1998시즌 종료 기준으로 스탁턴의 어시스트 수치는 매직보다 2000개 넘게 많았는데, 이때만 해도 스탁턴의 평균이 매직보다 0.1 정도 높았다.
물론 두 선수의 업적이나 선수로서 종합적인 기량을 비교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매직의 압승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시스트를 만들어내는 능력"만큼은 매직도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스탁턴이 페이스가 빠른 1980년대에도 뛰었기에 이득을 봤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동일한 페이스에서 뛴 동시대 다른 선수들을 압도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29] 일례로 스탁턴의 커리어 초창기는 무려 매직 존슨의 전성기와 겹친다. 매직은 1984년부터 1991년까지 꾸준히 12~13개 사이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1988년부터 스탁턴의 존재로 인해 콩라인이 되어야 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매직은 역대 가장 높은 평균 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란 점에서 스탁턴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30] 게다가 존 스탁턴은 무려 역대 최다인 9회나 어시스트 1위에 올랐다. 역대 2위는 5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밥 쿠지의 8회이고 그 외에는 스티브 내쉬 & 제이슨 키드 & 오스카 로버트슨이 공동 3위로 5회씩이다. 게다가 스탁턴의 유타 재즈는 내쉬, 키드, 쿠지, 매직과는 달리 페이스가 빠른 "달리는 농구"를 한게 아니라 철저히 짜여진 지공 위주의 "하프코트 오펜스" 위주의 운영을 했다.
스틸 같은 경우 단기 임팩트는 어시스트만큼 사기적이지는 않다. 2번 스틸왕을 차지했다지만 크리스 폴은 무려 6회 스틸왕을 기록했고, 이외에도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을 포함한 총 8명이 2번 이상 스틸왕을 차지했다. 커리어 평균 스틸 역시 2.17개로 역대 8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최대 장점인 꾸준함이 빛을 발한다. 그의 통산 스틸 3,265개는 2위 제이슨 키드를 무려 580개 차이로 여유있게 제치고 있는데, 이 격차는 2위 키드와 8위 하킴 올라주원과의 격차와 비슷하다. 즉, 여기서도 압승.
현역중 평균 스틸 수치가 가장 높은 크리스 폴로 비교해보자. 폴은 6번 스틸왕을 차지하고 커리어 평균이 역대 6위라는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 만약 폴이 현재 평균인 2.23을 유지한다면 513경기 후에 스탁턴을 따라잡게 된다. 단,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는다면 7시즌 후, 즉 만 40세 생일 이전에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부상이 잦기로 유명한 크리스 폴이 7년간 풀로 출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폴은 커리어 첫 9년간 100경기를 넘게 부상으로 쉬었다. 몸이 쌩쌩한 20대에 105경기를 넘게 쉰 선수는 30대에 더 많은 경기를 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걸 감안하면 실제로는 40세 이상은 되어야 기록 경신을 노릴 수 있다는 것.[31]
더 큰 문제는 2.23개란 높은 수치를 커리어 내내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기량이 하락하는 것은 인간이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고 따라서 7년 뒤 크리스 폴의 스틸 수치는 현재보다 훨씬 낮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스탁턴의 커리어 하이는 3.21개로 폴의 커리어 하이 2.77보다 훨씬 높지만 커리어 평균은 2.17개에 불과하다.[32]
만약 크리스 폴이 스탁턴의 통산 스틸 기록을 노릴 정도로 오래 뛴다면 평균 기록 역시 쭉 내려갈 것이다.
만약 매우 후하게 잡아 40세 정도까지 뛴 크리스 폴의 최종 평균 스틸 수치가 2.2개 정도이고, 매 시즌 71경기씩 출장한다고 치면[33], 스탁턴의 기록을 따라잡는데는 8시즌 정도가 필요하다. 즉, 30대 중반인 크리스 폴이 20대의 실력을 거의 유지하면서 20대 시절만큼 많은 경기에 나가면서 22번째 시즌을 마쳐야 달성할 수 있다는 점.
크리스 폴 외에도 스탁턴의 출장 경기 수를 따라잡을 가능성도 있는 괴물 르브론은 평균이 1.6개로 너무 낮아 힘들고, 그 외에는 도전가능한 후보군조차 보이지 않는다.
통산 953승으로, 2015년 11월 3일 팀 던컨에게 경신되기 전까지 NBA 통산 개인이 한 팀에서 쌓은 승수 1위에 올라있었다.

6. 참고자료


[1] 칼 말론과 공동수상[2] 1993년 드래프트 1순위인 크리스 웨버가 화제가 된 것도 매직 존슨 이후 최초의 저학년(underclassman) 1순위였기 때문.[3] 만약 1984년 NBA 드래프트에서 선수의 미래를 미리 알고 지명한다면,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당연히 조던 1픽에 올라주원, 바클리, 스탁턴이 2~4픽을 차지할 것이다. 물론 올라주원을 지명한 휴스턴 로키츠는 미래를 알아도 올라주원을 또 1픽으로 지명할 거라고 단언했지만, 그렇다 해도 순번이 좀 달라질 뿐 1~4픽이 올라주원, 조던, 바클리, 스탁턴 4명일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4] 사실 스탁턴 말고도 커리어 대비 지명순번이 낮았던 슈퍼스타들은 많이 있다. 당장 비슷한 시기의 선수만 따져봐도 클라이드 드렉슬러(14순위)와 칼 말론(13순위)도 이 분야에서 꽤 유명인사들. 다만, 랄프 샘슨 말고는 동기 중 명전 멤버가 없는 드렉슬러, 명전 자체는 동기 중 4명이 올라갔으나 나머지 셋 중 더 낮은 순번도 있었던(조 듀마스, 18순위) 칼 말론과 달리 스탁턴은 동기 중 3명이 같이 들어갔는데 나머지 셋과 달리 혼자 16픽이라서(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는 각각 1, 3, 5픽)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더 강한 면이 있다.[5] 여담으로 드래프트 당시 스탁턴이 야유받았다는 사실은 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타팀 팬들이 유타 재즈 팬들을 알못이라 놀리는 용도로(...) 애용하고 있다. 링크된 영상의 댓글들만 봐도...[6] 2018년 포브스 기사에 따르면 현재 모든 팀이 10억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으며, 평균 16.5억달러이다. 5년 전(2013년)과 비교해도 평균 팀 가치가 3배 이상 차이.[7] 받기 쉬운 패스를 찔러주는 것 역시 중요한 능력인데, 매직의 패스는 종종 팀원들의 허를 찔러 실책이 나는 경우도 잦아 매직은 포인트 가드 기준으로도 실책이 역대 가장 많은 선수 중 하나이다. 또한 비슷하게 파워패스를 찔러주던 마이클 조던의 경우, 너무 빠르고 강하게 패스를 해줘 리액션이 늦은 빌 카트라이트는 이걸 못 받곤 했다. 이 때문에 초반에 갈등도 있었지만, 둘이 화해한 이후 받기 쉽게 조던이 주기 시작했다고. 어쨌든 누구든 받기 쉽게 패스를 주는 건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8] 말론과 스탁턴 모두 골밑마무리/중거리슛이 모두 뛰어난 선수들이라 말론의 스크린 이후 발생되는 스탁턴이 말론에게 패스를 주나? - 주면 말론은 중거리를 쏘나 골밑으로 들어오나? - 아니면 스탁턴이 직접 슛을 쏘나 돌파를 하나? - 이도저도 아니면 외곽에 있는 호너섹이나 브라이언 러셀에게 빼줘서 그쪽에서 슛이 나오나? 등등 수많은 선택지가 발생하는데 수비하는 입장에서 저 선택지들을 모두 예측하는건 불가능에 가깝다.[9] 바로 이 요인이 게리 페이튼이 스탁턴을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으로 고르는데 한 몫했다. 다른 선수들은 그냥 쳐막거나 도발하면 되지만 스탁턴은 무반응으로 임한뒤 저런식으로 상대방을 헷갈리게해 예측이 힘들게 했기 때문에. 아이재아 토마스처럼 아예 폭력에 가까운 파울로 스탁턴의 기를 꺾어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때는 몸 전체가 인간흉기 수준인 파트너 칼 말론이 확실하게 보복을 해주어서 그것도 무소용....[10] 주득점원인 말론이야 클러치에 약하니 그렇다고 쳐도, 마찬가지로 한 클러치하고 유타 재즈 최고의 슈터였던 제프 호너섹이 있음에도 중요한 슛은 당연한 듯 스탁턴의 몫이었다. 또한 1998년 파이널 6차전에 마이클 조던이 역전슛을 성공시키고 난 뒤 이에 반격하는 유타의 마지막 전술이 스탁턴의 3점슛이었다. 그를 마크하던 론 하퍼가 스크린에 완전히 걸리지 않아 그 긴 팔로 견제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지만.[11] 스탁턴이 백인이란 것 때문에 스티브 내시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스티브 내시는 스탁턴 수준의 돌파력,수비력이 없었고 대신 슈팅력이 더 좋았다. 차라리 마크 프라이스에 가까운 선수. 물론 스티브 내시는 마크 프라이스에 비해 리딩능력과 종합적인 실력이 월등하다.[12] 샤킬 오닐의 경우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는 골대에서 멀어지면 거의 득점을 못하는 선수였고, 시간이 촉박한 클러치타임에서는 골밑까지 가기 매우 어려운데다가 자유투란 폭탄이 있기 때문에 원샷 플레이를 노리는 클러치라인업에서는 오히려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비슷한 케이스가 2013년 NBA 파이널 6차전에서 팀내 최고의 빅맨인 팀 던컨을 빼고 기동력을 강화한 그렉 포포비치의 결정인데, 높이 부족으로 상대팀의 크리스 보쉬에게 공격 리바운드를 허용하는 바람에 패배하고 말았다. 물론 애초에 공격리바운드는 잡기 매우 어렵고 크리스 보시를 포함해 마이애미 선수들 중 딱히 리바운드 스페셜리스트도 없었기 때문에 포포비치의 결정은 상당히 타당했다. 운이 안 따랐을 뿐.[13] 현재는 아예 포인트 가드 득점왕이 나오는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며 위에 언급된 크리스 폴은 리딩 위주 가드임에도 평균 20점을 몇번 넘겼다.[14] 시즌제 프로그램으로 찰스 바클리, 크리스 웨버, 레지 밀러, 샤킬 오닐, 케니 스미스, 스티브 커 등 NBA의 레전드들이 등장해서 다양한 주제에서 대화를 나누는 예능 겸 토크쇼.[15] 스티브 커는 항상 이 토크쇼에서 진중하면서도 객관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편이었는데, 저 욕설 한방에 다른 패널들은 다 뒤집어졌다.[16] 그 유명한 배드 보이즈의 리더이니...[17] 그 대신 칼 말론이 그 악명높은 팔꿈치 어택으로 말 그대로 보내버렸다.# [18] 여담으로, 이 경기는 SPOTV에서 중계하여, 한국 NBA 팬들이 손쉽게 레전드 아버지의 팀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데이비드를 손쉽게 볼 수 있었다.[19] 모르몬 교도의 비율이 많은 솔트레이크 시티는 놀 곳이 없는 곳으로도 유명하다.[20] http://nesn.com/2013/11/john-stockton-karl-malone-went-to-zoo-together-first-time-they-hung-out-as-utah-jazz-teammates/[21] 한국에서는 많지 않지만, 미국에서의 미니밴에 대한 인식은 아저씨 아줌마가 애들 데리고 다니기에 최적인 차로 인식되어 있다. 오죽하면 미니밴의 이명은 Mom Car. 그만큼 스탁턴의 코트 밖에서의 모습은 그냥 아저씨.[22] https://www.youtube.com/watch?v=0QqLxebQgMU[23] 대부는 가장 가까운 친구여야 부탁하고 세울 수 있는 관계이다.[24] 사실 절친들끼리 라이프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도 종종 보이는데, 스카티 피펜은 조던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하느라 젊은 시절엔 여자도 많이 만나고 거액이 걸린 도박도 즐겼지만 그의 절친인 호레이스 그랜트는 아내를 꼭 원정경기에 동반하고 조용하게 살았다. 다만 이와 별개로 서로의 들러리를 서며 비슷한 시기에 결한 둘은 젊은 나이에 이혼하는 아픔을 둘 다 겪었다.[25] 참고로 키드의 기록이 스탁턴의 76.5%인 것을 압둘자바의 득점으로 환산하면 29,367점에 불과하다. NBA에서 통산 3만점을 넘은 선수는 총 7명으로, 8위 샤킬 오닐이 28,596점이다.[26] 현재 NBA 탑을 달리는 러셀 웨스트브룩, 스테판 커리, 카이리 어빙 등은 모두 소위 말하는 '공격형' 포인트 가드다.[27] 패스 능력을 인정받는 젊은 포인트 가드 존 월도 데뷔 후 4년간 어시가 7~8개대에 그치며, 3년 연속 11어시 이상을 찍으며 최근 몇년간 가장 높은 어시수치를 기록한 라존 론도는 최근 2년간 결장한 경기수만 50경기에 가까울 정도로 인저리프론이다.[28] 시즌 82경기를 전부 다 뛴다고 해도 경기당 12~13 어시스트를 기록해야만 가능한 기록이다.[29] 수치상으로는 물론 득을 본게 있다. 시대에 따라 특정 스탯이 더 잘나오는 시기가 분명 있기 때문. 예를 들어 80년대에는 시즌 4블럭을 기록하는 선수들이 한 시즌에 두명 이상 나온 적도 있는데, 3블럭 하는 선수들조차 거의 안 나오는 현대 선수들의 수비력이 이들보다 현저히 못하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위에 언급된 폴의 예시도 있다. 반대로 득점가문이던 98년에 28점을 기록한 마이클 조던이 현대에 38분씩 뛰며 28점을 올리는 선수 수준과 같다고 볼 수도 없다. 즉, 13,14개씩 해대던 배경에는 그가 어시스트 갯수가 상대적으로 많던 시기에 뛰었다는 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포인트는 9년 연속 어시스트 왕이란 것. 게다가 무려 12개씩 어시스트를 뽑아내던 매직을 제치고 어시스트왕이었다는 점이다. 즉, 상대적으로 어시스트가 적은 현대에 뛰면 12~14개가 아닌 11~13개 정도로 어시왕에 오를지언정, 그가 어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역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즉, 다른 시대에 뛰었어도 수치가 좀 적을 지언정 압도적인 어시스트 능력을 보였을 것이다.[30] 매직이 5년동안 4번 어시스트왕을 차지했던 기간의 평균 어시스트는 12.1개였는데, 존 스탁턴에게 매년 밀렸던 4년간(1988년부터 은퇴했던 1991년까지)의 평균 어시스트 기록은 오히려 소폭 올라서 12.2개였다. 즉, 매직 본인은 가장 활발하게 어시스트를 뿌리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스탁턴에게 밀렸던 것.[31] 참고로 크리스 폴은 지금까지 2014-15시즌을 제외하고는 전경기 출장이 없다. 반면 스탁턴은 19년동안 단축시즌인 1998-99시즌(50경기로 단축)과 부상을 입은 1997-98시즌을 빼고는 모두 전경기 출장했다.[32] 물론 그렇다고 스탁턴의 스틸능력이 크리스 폴보다 월등하단 말은 아니다. 1980년대나 1990년대 초중반은 지금보다 훨씬 피지컬한 수비가 가능했고, 공격자를 보호하는 성향이 강한 현재는 그때보다 전반적으로 스틸 갯수가 낮다. 그러나 숫자만 보면 폴의 커리어 하이 2.77개보다 높은 평균스틸을 기록한 시즌이 네번이나 되는 스탁턴이 크게 앞선다.[33] 데뷔 후 현대까지 평균 출장경기수보다 오히려 약간 많은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