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로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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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 didn't play the game for the money, I didn't play the game to be famous. What you see here is just more the illusion that I love to just be an individual that is very colorful."
저는 돈 때문에, 유명해지려고 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시는 이 사람은 단지 컬러풀하고 싶었던 한 개인의 환영일 뿐입니다.'''
2011년 8월 13일 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 中
미국의 전직 농구 선수. 그리고 '' '''[4] . 챔피언 반지가 무려 5개.'''내가 누구냐고? 무명 대학 나온 무명 선수다.'''
1986년 드래프트. 소개를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201cm 라는 왜소한(?) 체구의 파워 포워드. 그런데 이런 작은 키로 210cm가 넘는 거구들이 판치는 NBA의 골밑에서 리바운드를 장악했던 선수다.[5] 91-92시즌부터 97-98시즌까지 '''7년 연속 리바운드왕'''을 차지했고, 시즌 평균 리바운드수가 18.7[6] 을 찍은 적이 있다는 걸로 이미 설명 끝.
시즌 평균 리바운드 15이상인 시즌만 6번이다. 거기에 수비도 매우 강해서 올해의 수비선수상 2회(90, 91), 디펜시브 퍼스트 팀 7회(89~93, 95~96), 세컨드 팀 1회(94)에 선정될 정도였다. 파워 포워드 사상 역대 최고의 수비수, NBA 역사상 최강의 리바운더였던 남자라고 할 수 있다. 출처[7] 참고로 슬램덩크의 강백호의 캐릭터 모티브가 되었던 선수[8] 이며 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허슬, 악착같은 리바운드, 지렁이처럼 달라붙는 끈적한 수비로 스코어러나 하이플라이어가 농구의 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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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한장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선수. 경기 기록을 보라. 리바운드 20개 중 9개가 공격 리바운드...
조던의 눈빛을 봐라.
2. 커리어
2.1. 데뷔 이전
데니스 로드맨이 5살 때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다. 댈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로드맨은 덩치들에게 두들겨 맞기 일쑤인 약하고 왜소한 아이였다고 한다. 본인 말에 따르면 어머니한테 집에서 쫒겨난 적이 많다고. 어머니는 버릇을 고치려고 자물쇠까지 바꿔버려 어쩔 수 없이 친구집 뒷마당에 있는 쇼파 위에서 몇 밤을 보냈다. 지기 싫었던 어린 로드맨은 세차 알바를 하거나 빈병을 주워 버텼다. 그렇다고 로드맨 말처럼 풍찬노숙 어머니가 버린 건 결코 아니었다. 고등학교까지 학비 제대로 대고 학교도 계속 다녔다. 이혼도 안해주는 남편한테 제대로 양육비도 못받고 외벌이로 고생한 어머니가 많이 억울했을 듯.
ESPN 다큐멘터리 30 for 30에서 로드맨은 어린 시절 허구헌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들겨팼기 때문에 이것에 무감각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어머니를 패다가 마당 위로 질질 끌고 갈 때도 있었다고. 이 때문에 어머니가 로드맨과 남매들을 열심히 키운 것과 별개로 잘못하면 때리면서 훈육을 했다고 한다. 로드맨은 자라면서부터 애정결핍 증세를 보였는데 4살 때 보육원에 맡길 때 엄마 곁을 떠나길 거부할 정도였으며, 여자들이 많은 가정 환경에서 자신보다 농구를 잘하던 여동생들에게 위축되어 살았다고 한다.
로드맨은 사우스 오크 클리프 고등학교로 입학할 때만해도 키가 겨우 168cm였다.[9] 길거리 농구를 하는게 그의 낙이었고 매일 10시간 가까이 농구장에서 살았다. 고교 입학 뒤에도 농구를 좀하는 평범한 일반인 학생일 뿐이었다. 졸업 후 잡다한 알바를 전전했으며 공항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도중에 기프트숍에서 시계를 50개 슬쩍한 게 걸려 유치장 신세를 진 적이 있긴 해도, 불우한 흑인 소년들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강력 범죄는 절대 손대지 않았다. 친구들한테 나눠줬던 시계를 모두 회수해서 풀려난다.(NBA.com의 로드맨 바이오 페이지)
고등학교 졸업 후 로드맨은 갈 곳이 없었고, 댈러스의 공항에서 야간 청소부로 일해야만 했다. 그러나 반전이 찾아왔으니 졸업 이후 키가 201cm까지 자란 것. 게인스빌에 있는 쿠크 카운티 칼리지(현 노스 센트럴 텍사스 칼리지)의 스카우터가 집에 방문했고 로드맨에게 '전액 장학금+기숙사+식비'까지 제공하는 조건을 준다. 여기까진 흔히 있는 NBA 스타의 불행한 인생사.(관련 비화)
쿠크 카운티 칼리지에 입학한 후 14경기 평균 17.3득점, 13.3 리바운드라는 괴물같은 활약이었지만 학업성적도 따라줘야 하는 미국 학원 스포츠 풍토 때문에 성적 불량으로 팀에서 잘린다.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한테 용돈을 타서 밤새 놀고 늦게까지 자는 백수가 됐다. 속이 시커멓게 된 모친은 출근을 하면서 '직장을 구해. 못구할 거 같으면 다시 나가.'라고 모질게 말했다고.
다행히 2개월 만에 사우스웨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에서 쿠크 카운티 칼리지와 같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한다. 미국 대학 농구의 주류인 NCAA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위 NAIA리그에서 잭 헤든 감독에게 가르침을 더 받으며 리바운드 1위와 .637의 필드골 성공률로 올 아메리칸 팀에 연속으로 뽑힐 정도로 눈에 띄는 활약이었다. 덕분에 비 NCAA 출신으로 NBA 드래프트에 성공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청소부로 일해야 했던 탓에 그는 1학년 시즌 당시 이미 웬만한 대학 졸업생들 나이인 22세였고, 3년 후 86년 드래프트에 나설 당시 25세였다. 이는 그보다 5년 먼저 NBA에 뛰어든 아이재아 토마스와 같은 나이였다. 굉장히 늦은 나이에 농구를 시작하고, 평생 화려함과 거리가 있었던 만큼 젊은 로드맨은 자신의 능력에 비해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더 몸이 부서져라 뛰었다.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의 한 기자는 이를 두고 로드맨이 마치 "무언가에서 탈출하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농구를 했다"고 표현할 정도.
2.2.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시절
1986년 드래프트 2차 27순위라는 낮은 픽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뽑혔다. 이때 이미 25세였다.[10]
당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배드 보이즈로 유명했다. 늘 보스턴 셀틱스의 그늘에 가려 있긴 했지만, PG 아이재아 토마스, SG 조 듀마스, SF 에이드리언 댄틀리, PF 시드니 그린, C 빌 레임비어, 키 식스맨 SG 비니 존슨, PF 릭 마혼 등 충분히 우승 가능권이었다. 로드맨은 2년차 때 댄틀리가 부상으로 빠질 때까진 보결 신세였다. 로드맨이 스타팅으로 나온 첫 24경기에서 20승을 하면서 피스톤스의 주전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식스맨 정도였다.
로드맨은 수비와 리바운드에 집중했고 몸을 던지는 허슬 플레이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피스톤스 감독 척 데일리가 그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야생마에는 안장을 채우는 게 아니다 (You don't put a saddle on a mustang)'라며 로드맨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밀어 주기도 했다.[11] 로드맨 또한 데일리를 '신(GOD)'이라고 부르며 절대적인 존경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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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투페이스로 로드맨을 격려하는 릭 마혼(44번)
이 시기 로드맨은 주전 PF였던 릭 마혼에게 배드 보이즈가 만든 모든 어둠의 기술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릭 마혼은 그야말로 70~80년대에 있던 전형적인 싸움대장형 파워 포워드로, 빌 레임비어와 함께 온갖 어둠의 기술들의 장인이었다. 스크린 장인에 여차하면 드잡이를 시전하는 Goon 역할에 충실한 선수였다. 릭 마혼은 89년 세븐티식서스로 떠났지만 배드보이즈들을 얼마나 잘 가르쳤던지, 자신조차 친정팀 피스톤스를 만나면 크게 혼이 났을 정도. 90년 시즌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 피스톤스와 세븐티식서스가 만났을 때였다. 마혼이 토마스한테 주먹으로 머리통을 얻어맞고 허탈하게 웃는 모습이 백미.
조폭두목같은 릭 마혼을 필두로 한 무슨일을 벌일지 모르는 미치광이 같은 빌 레임비어[12] , 재빠르고 약삭빠르며 트래쉬 토크의 달인인 아이재아 토마스에게 은퇴 후에도 이를 가는 NBA 스타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게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 특히 칼을 갈던 칼 말론은 91년 12월 4일 경기에서 골밑으로 파고들던 토마스를 오른쪽 팔꿈치로 가격해 40바늘을 꼬매게 만들었다. 말론은 벌금 만 달러에 한 게임 출전 정지를 받았다. 어쨌든 다른 스타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아이재아 토마스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드림팀에서 배제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13]
어쨌든 로드맨이 가세한 피스톤즈는 승승장구하며 89년 90년 동부 컨퍼런스 1위를 달성하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아직은 원맨팀 같던 시카고를 무자비하게 조지며 2년 연속으로 NBA 우승을 달성한다.
당시 피스톤즈의 성공 스토리 중심에는 로드맨의 성장과 더불어 마크 어과이어란 남자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88-89시즌 당시 피스톤즈는 전 시즌에 레이커스와 파이널에서 명승부, 토마스의 어마어마한 활약 등으로 기대치가 커져 있었고, 2월까지 33승 12패로 괜찮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팀 케미스트리에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에이드리안 댄틀리의 존재였다. 댄틀리는 80년대 NBA최강의 득점기계 중 하나인 스몰포워드로서, 득점왕 2회 출신이었지만,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디트로이트로 오면서 공격롤과 출전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였다.[14] 노장 반열에 들었지만 여전히 위력적이던 댄틀리는 아이재아 토마스 위주로 돌아가는 공격시스템, 그리고 3년차 스몰포워드 데니스 로드맨이 자신의 출전시간을 서서히 갉아먹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롤이 줄어든 것의 배후에 토마스가 있다고 의심했다. 이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가 떨어지며 1989년 1월에 팀은 8승 6패에 그치는 부진을 겪었다. 라커룸 내 갈등과 더불어 감독 척 데일리와 GM 잭 맥클로우스키와 갈등이 점점 심해지던 댄틀리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마는데, 경기 도중 데일리가 로드맨과의 교체를 지시했으나 '''교체를 거부하고''' 감독에게 소리를 지르며 코트 위에 계속 있었던 것. 결국 로드맨이 눈치를 보다 다시 벤치로 갈 수 밖에 없었고, 데일리와 댄틀리는 한바탕 소리를 지르며 격하게 싸운 뒤 결국 댄틀리가 마크 어과이어와 트래이드되는 결말을 맞게 된다.[15]
1981년에 토마스보다 앞서 전체 1순위로 뽑힌 어과이어는 합류 당시 평판이 안 좋았다. 어과이어는 뛰어난 실력과 별개로 팀케미스트리를 망치는 이기적인 선수란 평을 듣고 있었으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던 아이재아 토마스 덕분에 팀에 잘 녹아들었다. 또한 댄틀리와 달리 줄어든 롤에 대한 불만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알토란 같은 득점지원을 해주었고, 팀은 30승 7패로 승률이 상승하며 플레이오프에서도 시카고 불스에게 당한 2패를 제외하면 전승을 하는 무서운 기세로 첫 우승을 차지한다. 로드맨은 이때 식스맨으로 평균 27분 출장했음에도 생애 처음으로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선정된다.
어과이어는 이듬해에도 큰 역할을 한다. 1989년 오프시즌에 디펜딩 피스톤즈는 큰 타격을 입는데 이때 진행된 NBA 확장팀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팀 골밑의 기둥인 릭 마혼을 선택한 것. 더욱 잔인한 것은 한창 우승 퍼레이드가 이뤄지고 있는 도중 이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 마혼은 퍼레이드 후 기념 행사에서 맥클로우스키에게 "저 분 덕분에 체중조절 성공했어요!"라면서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이 때 이미 그는 피스톤즈 선수가 아니었고, 행사 직후에 짐을 싸야했다. 자신이 즐겁게 농구하고, 동료들과 친하던 환경에서 팽당한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마혼은 위에 언급된 30 for 30 다큐멘터리에서 25년 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생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이었다"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
어쨌거나 마혼이 빠진 피스톤즈는 그 빈자리를 파워포워드 존 샐리, 센터 제임스 에드워즈 등이 메웠음에도 골밑이 크게 약화되어 초반에 헤메게 된다. 피스톤즈는 좀처럼 페이스를 찾지 못하고 창단 2년차 팀이자 18승팀인 마이애미에게 패하는가 하면, 30승팀인 클리퍼스에게 패한 걸 시작으로 3연패를 당하기까지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와중에 어과이어는 실로 대인배스러운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데일리를 찾아가 '''자신의 주전 자리를 로드맨에게 넘기라고''' 제안을 한 것. 이에 대해 로드맨은 "그가 처음 날 찾아왔을때 충격을 받았죠. 식스맨 역할에 익숙해져있었으니까요"라고 회고했다.[16]
로드맨은 1990년 1월 23일, 시카고 불스와의 원정경기부터 피스톤즈의 풀타임 주전 스몰포워드로 출전하게 된다.[17] 이 시즌에 로드맨은 평균 29분을 출전하며 8.8점 9.7리바운드 야투율 58.1%를 기록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수비력으로 올해의 수비수상을 처음으로 수상하게 된다. 로드맨이 주전으로 올라가기 전 피스톤즈는 26승 14패, 승률 65%에 그쳤으나, 로드맨이 주전으로 올라온 이후 33승 9패 78.6%을 기록한다.
디트로이트 시절 당시 로드맨은 스몰포워드로서 제임스 워디, 래리 버드 등 리그 내 내로라하는 슈퍼스타 스몰포워드들을 막았다. 이후 떠오르는 불스 왕조를 상대하며 스카티 피펜을 주로 마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피펜과는 악연이 있다.
1991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3연패를 노리는 피스톤스와 불스가 맞붙었을 때 로드맨이 피펜을 여러차례 가격한다. 슛동작 후 착지할 때 밀어 크게 다칠 뻔도 했다. 후에 로드맨이 불스에 입단하기로 결정한 뒤 들은 첫번째 말이 '저기 부엌에 가서 스코티에게 사과하게'였다나...
92년 로드맨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척 데일리가 해임되고 황금기의 멤버들이 트레이드되면서 피스톤스의 성적은 갈수록 떨어지고 93년에는 플레이오프조차 진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 시기 로드맨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곧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트레이드된다.
2.3. 샌안토니오 스퍼스 시절
당시 스퍼스는 에이버리 존슨, 숀 엘리엇, 데이비드 로빈슨 등으로 구성된 강팀이었으며 로드맨이 가세하여 정규 시즌 1위 등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1995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로키츠에게 털려서 파이널 진출은 실패한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샌안토니오에서 로드맨은 감독 및 타 선수들과의 불화로 엄청나게 잡음이 많았다. 샌안토니오에서는 데니스 로드맨이 규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고 있다고 비판했고 로드맨은 적어도 자신은 게임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구단이 별 쓰잘데기 없는 거에만 태클 걸고, 감독 밥 힐은 쪼다스러운 작전만 남발하고 있으며 데이비드 로빈슨은 팀을 이끌고 나갈 리더십이 없다고 깠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된건 95년 컨퍼런스 파이널에서의 패배 이후였다.
94년부터 단장(General Manager)으로 팀의 운영에 참여하게 된 그렉 포포비치는 팀의 문화를 쇄신하기 위해 로드맨을 헐값에 덤핑으로 팔아치운다. 당시 로드맨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어깨를 다친 것 때문에 포포비치와 충돌했으며, 이로 인해 그가 로드맨의 계약을 갱신해주길 꺼렸다고 한다.[18]
당시 로드맨의 트레이드 상대는 시카고 불스의 주전 센터인 윌 퍼듀였는데, 윌 퍼듀는 밴더빌트대 출신의 평범한 백인센터였고(득점력은 좋지 않았지만, 리바운드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이후 불스의 주전 센터였던 룩 롱리보다는 득점과 리바운드 모두 나은 선수였다.) 샌안토니오도 로드맨 트레이드를 통해 전력 강화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4. 시카고 불스 시절
디트로이트 시절 불스를 꺾기 위해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연구했던 경험 덕에 그는 불스에 쉽게 적응했고[19] , 마이클 조던, 스코티 피펜과 함께 95-96 시즌부터 NBA 3연패를 이루어내며 '역대 최강팀'중 하나를 논하는 자리에 항상 거론되는 라인업인 '슈퍼맨(조던) / 배트맨(피펜) / 로드맨'의 일원이 된다. 그 3연패 기간 파이널 상대팀인 95-96시즌 시애틀 슈퍼소닉스, 유타 재즈 모두 로드맨의 포지션인 파워포워드가 팀의 주축선수였는데 세번의 파이널에서 숀 켐프, 칼 말론을 매우 효과적으로 수비했다. 이 중 95-96 시즌은 82경기중 '''72승 10패'''를 기록하는 압도적인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2.4.1. 스퍼스와 시카고에서의 로드맨의 차이
95파이널 5차전에서 스퍼스 감독 밥 힐은 로드맨이 팀연습에 무단으로 지각한 벌로 그를 주전 출장시키지 않았다. 당시 두 팀은 시리즈 전적 2대2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는데, 스퍼스가 홈에서 열린 5차전을 20점이 넘는 점수차로 패배하면서 6차전 원정까지 패배. 시리즈를 그대로 내주게 된다. 팀 성적(플옵탈락) 때문에 로드맨과 스퍼스의 갈등이 심해진게 아니라, 그전부터 문제가 심했다는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 2011년에 로드맨이 데이빗 알드리지와 한 인터뷰에서는 로빈슨과 자신이 "자주 충돌했다(bumped heads a lot)"고 말하면서, 사이가 최악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로빈슨이 "하킴 올라주원이나 샤킬 오닐처럼 더 공격적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던 로빈슨은 로드맨에게 종종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자"면서 "이 도시(샌안토니오)는 교회 가길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이야"라고 언급했는데, 로드맨은 "난 그딴 식으로 살 순 없어. 난 농구하러 왔지, 사람들이 날 좋아하게 만들려고 온 게 아니라고"라고 답했다.
그에 비해 시카고에서는 팬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로드맨은 '생각보다는' 팀내에서 사고를 치지 않았다. 물론 연습에 지각하는 등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당시 불스는 조던의 보스 기질이 대단했기 때문에 로드맨은 아예 처음부터 조던에게 대들 생각 자체가 없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아래와 같다.
조던/피펜/로드맨과 필 잭슨은 코트 바깥의 사생활은 터치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불스 분위기를 설명해야 하는데, 당시 NBA에서 평균 나이가 가장 많은 팀중 하나이던 불스는 베테랑들이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각자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으며, 성격이 좋기로 유명한 존 샐리[21] 나 조던과 예전부터 친했단 론 하퍼 정도를 제외하면 서로간의 친목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 심지어 조던과 피펜도 서로를 굉장히 존중하는 사이었지만, 르브론과 웨이드처럼 사적으로 크게 친밀한 친구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친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들간의 갈등이 심했다고 볼 근거나 보도내용은 없다. 이는 당시 불스의 팀 캐미 자체가 조던의 강력한 리더쉽아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팀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던은 같은 팀의 빌 카트라이트와 호레이스 그랜트, 피펜은 훗날 로켓츠에서 찰스 바클리, 로드맨은 스퍼스/댈러스/레이커스의 동료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보도되었으나 불스 시절에는 조던/피펜/로드맨간 마찰이 생겼다는 보도는 없었다. 또한 구단에서도 로드맨의 머리 색으로 빌딩을 치장하는 등, 여러모로 보호 및 지지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로드맨은 당시 조던, 피펜과 진솔한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트 위에서는 세 선수가 그야말로 환상의 팀웍을 보여주는 걸 볼 수 있다. 슛 욕심이 전혀 없던 로드맨은 몸을 던져가며 살린 공을 조던/피펜에게 패스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때 세 사람의 관계는 "너가 할 거 알아서 하면 나는 상관 안한다"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조던은 열심히 안 하는 선수나 수준이하의 선수는 개갈궜지만, 로드맨은 밤새 클럽에서 술퍼마시고 놀고 여장을 하고 별 미친짓을 하더라도 '''코트 위에서는 몸을 날려가며 동료들을 살려주는 팀플레이어'''였으므로 조던이 터치할 이유도 없었다.
로드맨의 싸움을 조던과 피펜이 말린 적도 있다. 대표적으로 샤크와 한판 붙으려는 로드맨을 조던/피펜이 태클걸어서 넘어뜨린 다음 셋이서 웃으면서 일어선 장면이 있다. 경기 연장전 종료 직전에 나온 것. 1996-97시즌 초반에 12월 17일 경기인데, 왜 이렇게 피펜과 조던이 과격하게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직전 오프시즌에 샤킬 오닐을 영입한 레이커스는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젊은 스타들 닉 반 엑셀, 에디 존스와 함께 본격적으로 우승후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고졸 신인인 코비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의미있는 전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비록 오닐의 부상(51경기 출전)으로 56승에 그쳤지만 그가 건강했다면 충분히 60승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레이커스는 불스의 가장 큰 약점인 작고 재빠르며 득점력이 좋은 가드(반 엑셀)과 강력한 센터(오닐)을 둘 다 보유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팀이었다.[22]
이날 경기에서 오닐은 매치업인 롱리를 박살냈지만 시카고의 팀수비 때문에 맹활약까진 아닌 27점 13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반 엑셀은 그야말로 불이 붙어 야투 21개중 14개나 넣으며 36점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조던은 30점을 넣긴 했지만 야투 32개 중 10개만 적중시키는 슈팅부진에 시달렸고, 그나마 피펜이 35점(야투 13/26)을 해줬으나, 경기내내 질질 끌려가고 있었고 4쿼터를 10점 이상 뒤진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벤치에서 출장한 쿠코치는 4쿼터와 연장에 신들린 듯 3점슛 소나기를 퍼부어 불스가 연장전에서 겨우 역전, 23초를 앞두고 2점차로 간신히 앞서는 상황에서 로드맨이 수비리바운드를 잡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고 있는 레이커스 입장에선 자유투가 약한 로드맨이 잡고 있을때 재빨리 파울작전을 해야했고, 로드맨이 재빨리 작전타임을 부른 것 까진 좋았는데, 제롬 커시가 파울하러 그를 가격한 것을 두고 로드맨이 신경질을 냈는데 여기에 오닐까지 가세해 싸움이 일어나게 된 판이었다. 즉, 여기서 로드맨이 괜히 주먹을 날리는 등 뻘짓을 해 테크니컬 파울을 받게 되면 자유투1개+공격권을 잃게 되고 상대편에는 불붙은 반 엑셀이 있기 때문에 기껏 얻은 리드를 날릴 가능성이 높은 것. 이 때문에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다급하게 말린 것이다. 근데 너무 급한 나머지 로드맨을 동료 둘이 태클하는 꼴이 되자 다같이 웃으면서 넘어졌다가 일어난 것.
여담이지만 이 플레이 이후에 종료 직전에 결국 로드맨이 파울작전의 희생자가 되는데, 집중력을 발휘해 두개 모두 성공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로 로드맨이 은퇴 후 로빈슨과 조던을 평가한 글을 보면, 조던을 훨씬 더 존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로드맨은 조던과 피펜이 최고의 원투펀치 중 하나라면서, 르브론보다 조던이 비교도 안되게 뛰어났다는 걸 여러 번 강조했다. 참고로 이 인터뷰는 조던 찬양보다는 르브론 까는 게 주된 내용이다.
또한 자신을 억누르려고만 하는 밥 힐에 비해 척 데일리나 필 잭슨을 높이 평가한 면도 있었다. 예전에 로드맨은 척 데일리 외에는 자신을 통제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했다. 데일리는 로드맨에게는 사실상 은사였으며 단순히 감독-선수 간의 관계 이상이었다. 실제로 데일리의 딸의 회상에 의하면 데일리에게 로드맨은 마치 자식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다큐멘터리 "배드 보이즈"의 영상에서 척 데일리 앞에서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구는 로드맨을 볼 수가 있다. 데일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로드맨과 필 잭슨과의 관계 역시 단순히 비지니스적인 관계가 아니라 은사에 가까웠다. 로드맨은 2011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자기를 소개할 인물[23] 로 필 잭슨을 선택했다. 이 때 로드맨은 잭슨을 "나를 위해 울어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잭슨이 그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father figure) 중 하나라며 "존경할 수 있고, 언제든지 전화해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somebody you can look up to and call any time of day)"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기가 무슨 얼간이 같은 짓을 하더라도 항상 곁에 있어주는 인물 중 하나라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24]
로드맨의 멘탈을 매번 흔들리게 만든것 중 하나가 NBA에서 유독 심한 트래쉬 토크였다. 로드맨이 성질 더러우니 트래쉬 토크에도 강했을거 같지만 사실은 이런 트래쉬 토크에 아주 약해서 희생양이었다는 후일담도 많다. 미국 흑인 중에도 과묵하고 이런 잡소리 싫어하는 흑인들도 아주 많다. 로드맨은 그닥 떠벌이과는 아니었고 예상외로 성격이 많이 여려서 남에게 근거없는 욕은 안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경기중에 뭐라고 떠들지 않고 경기에만 집중하려 했으나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욕하거나 하면 진심으로 못견뎌하고 참고 참다가 폭발했다.[25] 이렇게 심리적으로 흔들어서 파울누적으로 경기 후반에 뛰지 못하는 약점을 발견한 상대팀들은 로드맨을 경기 후반에 피하려고 엄청난 트래쉬 토크를 날렸고 이 트래쉬 토크의 수준은 저 NBA에서도 참지 못할 수준이어서 옆에서 뛰던 동료인 조던, 피펜, 론 하퍼 등이 참다 못해 로드맨 대신 싸우고 응수하던 일도 자주 있었다. 한번도 제대로 된 팀웍을 가지지 못했던 로드맨에게는 여러모로 고마웠을 일.[26]
2.5. 황혼기 그리고 은퇴
1998년 조던의 2차 은퇴와 피펜의 이적으로 리빌딩을 시작한 시카고는 데니스 로드맨을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렇게 시카고를 떠나 LA 레이커스에 합류했지만 몇 경기 뛰지 못한채 레이커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 자신의 고향인 댈러스에 연고지를 삼는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했고 38세의 나이에 평균 32분 출장에 14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나쁘진 않은 모습이였지만 팀 케미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결국 그대로 은퇴한다. 전체적으로 LA에서도 댈러스에서도 데니스 로드맨은 심하게 겉돌면서 베테랑의 리더쉽은 커녕 팀 멤버의 한 축으로도 있기 버거워 했다. 이에 관해 스티브 내쉬는 "그는 매버릭스에서 뛰었지만 매버릭스가 되길 거부했다"로 로드맨을 평가했다. 결국 더이상 그를 불러주는 NBA 구단은 없었고, 그렇게 로드맨은 코트를 떠난다.
2.6. 영구결번과 명예의 전당 헌액
2011년 4월 2일(한국시간), 디트로이트와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 하프타임때 영구결번식이 치러졌다. 로드맨은 "내 번호 10번이 영구결번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면 팬들이 원하는 플레이를 보여줬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감격해했다.
2011년 2월 19일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으며 2011년 4월 4일(미국시간). 드디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물론, 여기서도 기행은 멈추지 않아 청바지에 풀어헤친 흰색 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입성 소감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행보를 돌이켜 봤을 때, 명전 입성은 힘들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미국의 농구역사가, 세이버 전문가들, 바스켓볼 레퍼런스의 누적기록을 통해 평가하는 명예의 전당 입성지표에 로드맨의 명전 가능성을 정말로 반반, 50%로 잡았을 정도. 야구 명전에 비해 허들이 낮은 농구 명전임에도 이정도로 로드맨의 명전입성이 아슬아슬했던 건, 눈에 보이는 득점,어시 기록이 없다시피한 수비전문 선수인데다 팀의 리더나 에이스, 득점원과는 거리가 멀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벅 윌리엄스, 오티스 소프[27] 같은 비슷한 시대 수비로 명성을 날린 수비전문 파워포워드들이 바늘구멍만한 명전 입상 기회를 가진 반면, 로드맨은 개인 수상경력(올해의 수비수 2회)와 5번의 파이널 우승반지같은 화려한 상장과 임팩트가 입성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자신의 입성 이유에 대해, "선정 위원들이 나의 과거 부정적인 면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오, 그래도 꽤 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자신을 "좋은 득점 능력도 없었고, 훌륭한 운동선수도 아니었지만, 팀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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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을 하는 눈시울이 붉어진 데니스 로드맨. 옆에 있는 사람은 필 잭슨.
그리고 같은 달 4월 14일. 명예의 전당 입성 행사에 참여해 연설을 했다. 이때 로드맨의 헌액 연설은 횡설수설도 많았지만, 여러번이나 눈물을 쏟고 감정에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본인의 솔직한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어서 감동적이라는 평을 많이 받는다. 온갖 미사여구를 전부 빼고 허심탄회하고 소탈하게 중얼대듯 필 잭슨 감독 등의 인생의 은사를 언급할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내가 본 농구 선수중 역대 최강의 원투펀치는 조던과 피펜이다 라는 발언을 할때 관중석에 있던 피펜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수여자로 참여했던 필 잭슨 감독도 마치 막내동생을 보는 듯한 애정의 눈빛을 보내고 자신의 이름이 언급될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필 잭슨 감독을 비롯한 척 데일리 등의 은사를 언급하며 이분들을 한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 사람은 완벽한 인간일 것이라는 진심이 담긴 명언을 남겼다. 이때도 그 뛰어난 패션센스는 여전했다.(...)[28] . 로드맨은 이날 연설에서 '''"나는 돈이나 유명세를 위해 뛰지 않았다. 죽을 뻔한적도 많았고 마약 거래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 노숙 생활도 해봤고, 노숙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랜 기간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라고 했다.
2.7. 가정사
그는 자서전 'Bad as I wanna be'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아버지인 필랜더(Philander Rodman Jr.)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우리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어머니를 미워했고 나도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아들로 자랐지만,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서 웃으면서 얘기할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부친 필랜더(41년 생)는 베트남 참전 용사로 미 공군 소속이었다. 부친은 1970년이 되자마자 미국의 가족을 버리고 필리핀에서 애들을 자꾸 만들었다(...) 로드맨은 졸지에 무려 47명의 배다른 자식들 중 장남[29] 이 됐고(...) 필리핀에서 버거 체인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번 아버지는 여러 집 살림을 하는 주제에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니 부부 싸움이 당연했다. 로드맨이 NBA에서 성공하면서 부친도 몇 번 경기장을 들르긴 했는데 살갑게 굴진 않았다. 2006년 로드맨이 마닐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만나자는 걸 거절한 적도 있다. 명예 전당 헌액 이듬해인 2012년, 이벤트로 마닐라에 올스타 레전드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짧게 말을 나눈 게 전부. 필랜더 로드맨 주니어는 2020년 7월 17일 필리핀 팜팡가에서 전립선 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0세.
모친 셜리 로드맨(Shirley Rodman)은 어린 나이에 아이들 셋[30] 을 낳고 남편에게 버려진다. 이혼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양육비를 따질 계재도 아니었다. 남편은 필리핀으로 가버리고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그녀는 재혼도 안하고 외벌이로 긴 세월 아이들을 길렀다. 하루에 4탕을 뛰기도 했을 정도로 대단한 여걸이었다. 데니스도 외벌이 엄마 때문에 외롭고 힘들었겠지만 아버지 없이 아이들을 키운다는 건 여기나 저기나 어렵긴 매한가지...데니스가 노숙 얘기를 너무 떠들어 어린애를 학대한 것처럼 만들었지만 단순한 가출이었고, 외벌이 때문에 애들을 방임해서 키우긴 했어도 애 셋을 어엿하게 학교 다 보내고 먹여 살린다는 건 외벌이 엄마로서 대단한 일이었다. 여동생 둘도 대학교 다 다니면서 농구 선수가 됐다. 엄마랑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사실이라 그가 손주들을 처음 보여준 건 은퇴 후도 7년이 지난 2008년 다큐 <Sober house>를 찍으면서 가족이 모였을 때였다.
로드맨은 1987년부터 만난 모델 애니 베이크스(Annie Bakes)와 사이에서 88년 생 딸 알렉시스 케이틀린(Alexis Caitlyn Rodman)을 얻었다. 92년 정식 결혼을 했지만 겨우 82일 만에 이혼 조정에 들어갔다. 그래도 로드맨은 종종 알렉시스와 함께 패션쇼나 각종 행사에 나타나는 등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
다큐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데니스 로드맨의 여자친구로 사는 건 직업상 위험한 일'[31] 이란 명언을 남긴 모델 출신 배우 카르멘 일렉트라(Carmen Electra)와 뜨거운 스캔들 끝에 98년 결혼했지만 결국 결혼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한다.
99년 캘리포니아에서 가수 미셸 모이어(Michelle Moyer)를 사귀면서 아들 데니스 주니어와 딸 트리니티 쌍둥이('01)를 얻는다. 2003년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지만 결국 또 이혼 절차에 들어가 조정 기간을 거치다가 2012년 최종 이혼했다. 데니스 주니어는 2019년 NCAA 워싱턴 주립대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있으며, 딸 트리니티 역시 워싱턴 주립대에 입학해 미국 여자 축구 대표팀 선수가 됐다. (트리니티의 트위터) 아들인 주니어는 198cm의 키에 86kg이란 스몰 포워드로서도 좀 애매한 피지컬이고, 스탯이 26게임 평균 1.7 포인트에 1.9 리바운드 0.3 어시스트로 NBA에 갈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다. 이제 2학년이니까 성장 가능성은 아직 모른다.
어쨌든 로드맨은 2011년 명예 전당 헌액 연설 마지막에 '현역시절 가장 후회되는게 뭐냐고 남들이 물어본다면 난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한것을 가장 후회한다라고 대답하겠다. 지금이라도 좋은 아빠가 되겠다'라고 했다. 하지만 은퇴 후 긴 시간 알콜의존증에 시달렸고 약물 문제도 있어서인지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 양육비도 모이어와 쌍둥이 둘에게 9억원이 밀려 20일 간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부인 세 명 모두 백인이며 모델이었거나 모델을 방불케 하는 외모다. 그의 취향이나 미의식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부분. 결혼만 그렇다는 거지 로드맨의 화려한 여성 편력에 백인만 있었을 리는 없긴 하다. 흑인 미녀 배우 클라우디아 조던, 비비카 폭스, 가수 토니 브랙스턴 등과 염문을 뿌린 적이 있다.
2001년생 딸 트리니티 로드맨은 축구선수로 2021년 미국 1부 리그에 데뷔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수비와 리바운드에 극단적으로 치우쳐진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두 카테고리에 한해선 NBA 역사에서 손꼽히는 선수였다. 디트로이트 시절엔 3번과 4번을 오가며 디포이를 두번이나 수상했고[32] 4번에 정착한 이후 리바운드의 제왕으로 더더욱 이름을 날렸다.
로드맨의 리바운드 스타일을 간접적으로 보려면, 슬램덩크 산왕공고전 후반전 [33] 강백호의 각성모드를 보면 된다. 빠르고 짧은 점프와 끈질긴 몸싸움을 통해 짧게짧게 공을 쳐올려서 잡아내는 스타일.
위 장면은 움짤로 유명하지만 후속 플레이를 보면 더욱 압권인데, 저렇게 리바운드를 따낸 다음에 레이업을 시도하다가 수비하던 핸더슨이란 선수에게 공을 뺏긴다. 이후 핸더슨은 앞장서서 달리던 찰스 바클리에게 패스해주고 바클리가 골밑슛을 하는데 뒤처져 있던 로드맨이 어느 순간 날아와서 블럭해버린다. 반복해서 점프를 해 리바운드를 따낸다음 바로 풀점프로 레이업 시도, 직후에 순식간에 반대쪽 골대까지 달려가 풀점프로 블럭을 해버리는, 그야말로 야생마 같은 활동량을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sHOYs-CFX8U
이것은 로드맨 자신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특기인데,1
라고 한 바 있다.누구도 흉내내지 못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리바운드 하나를 위해 세 번, 네 번 점프한다는 것이다. 나는 볼에 손을 밀착시킨다. 그러면 손가락으로 건드릴 때마다 볼이 내 손 쪽으로 당겨와 결국 확실히 두 손으로 붙잡을 수 있게 된다. 내 점프는 NBA에서도 가장 빠르다. 신속히 점프한 후에 일단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 스카이콩콩에 올라탄 것보다 더 재빠르고 탄력 있게 다시 공중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대개의 선수들은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서 무조건 높이 점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재빨리 여러 번 점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점프하여 볼을 가볍게 치고, 점프하여 치고, 또 점프하여 가볍게 친다. 이렇게 다른 선수들이 한 번 뛰어오르는 동안 나는 세 번이나 뛰어오를 수 있다. 내가 세 번, 네 번 점프를 하는 동안 다른 녀석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정신을 못차린다.
게다가 의외로 연구파라서 어떤 선수의 슛이 어느 방향으로 많이 튄다거나 하는 연구도 많이 했다고. 상대팀은 물론이고 같은 팀 선수들의 슛패턴 또한 비디오로 연구했다고 한다.[34] 덕분에 공격 리바운드를 많이 잡아준 선수. 결승전에서 11개의 공격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공격 리바운드만의 숫자다.).
대신 공격은 빈약하다(통산 평균 득점 7.3점). '한때는' 필드골 성공률 시즌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35][36] , 90년대 초반 이후 공격은 포기하고 골밑 노마크 찬스가 아닌 이상에는 거의 팀원에게 돌렸다. 실제로 그의 시합을 보면 드리블이나 슛은 프로의 그것이라고 봐주기 매우 힘들다. 그런데 역으로 이 점이 마이클 조던과 불스에는 매우 플러스로 작용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 슛시도 자체를 아예 하지 않고, 올리는 득점은 골밑에서의 이지 찬스 또는 풋백 덩크, 팁인 정도가 전부이다. 단 이런 슛은 거의 놓치지 않았다. 다만 한 번은 전반에 3점을 던졌다가 어쩌다 들어갔는데 그걸 기억하고 후반에 다시 시도했다가 에어볼이 된 일이 있다. 그 슛 후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기억하는 팬도 있을 듯. 어쨌건 트리플 더블의 가장 큰 장벽이 득점인 대단히 특이한 선수. 트리플 더블을 딱 한 번[37] 기록했다. 시야가 넓고 게임 흐름을 읽는 능력도 좋아서 공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 매우 짧음에도 시즌 평균 3어시스트 정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보기하고 다르게 BQ(농구 IQ)가 좋았던 선수로 정평이 나있다. 실제로 그가 시카고로 이적한 후 첫 연습에서 그 어렵다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하루만에 마스터했다는 얘기는 이미 정설. 잭슨의 인터뷰를 봐도 '매우 영리하고 팀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선수'라고 평가받고 있다. 사실은 잭슨이 그를 데려온 이유가 상기한 대로 그가 배드 보이스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드 보이스 출신들은 자신들의 우승에 큰 걸림돌이었던 조던의 시카고와 피터지게 싸웠기에 박살내기 위해서라도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니, 수행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중에서도 머리가 좋았던 로드맨은 아니나 다를까 오자마자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쉽게 녹아들어갔다. 당시 배드 보이스 출신인 존 샐리도 비슷한 맥락에서 영입된 선수였다.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이기도 하다. 힘과 근력, 스피드와 퀵니스, 강철체력까지 갖췄기 때문에 거의 전방위 수비수로 가드부터 센터까지 마크할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파워포워드가 아닌 스몰포워드 위치에서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등을 전담으로 마크하던 에이스 스타퍼였고, 시카고 시절에는 빅맨 롤을 맡아 칼 말론, 샤킬 오닐과 같은 선수들까지 막아냈다.
말론이나 오닐과 같이 자신보다 크고 무거운 선수들을 막을 때는 상대와 몸을 최대한 밀착하여 편한 자세로 공을 받지 못하게 했으며, 공이 투입된 뒤에도 세컨드 무브를 가져가기 힘들도록 압박했고, 슈팅 후에는 곧바로 박스아웃에 돌입해 상대를 리바운드에 가담하지 못하게 했다. 높이 자체는 상대적으로 낮았으나, 본인의 순발력과 바디밸런스를 최대한 활용하여 필요한 순간에 짧게 여러 번 뛰어오를 수 있는 감각이 있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The Worm"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상대의 리듬에 따라 몸을 밀착시켰다 떨어졌다 하면서 오펜스 파울을 유도하거나 불안정한 자세로 동작을 이어나가도록 유도했다. 빌 레임비어나 릭 마혼 등에게 배운 교묘한 반칙성 플레이를 중간중간 섞고, 심판의 눈을 피해 팔을 잘 이용한 것은 덤.
특히 오닐은 로드맨이 수비하기 전에는 시카고의(그외 모든 구단도) 페인트존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는데, 로드맨이 수비하자마자 득점이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당시 샤킬 오닐을 막던 센터 룩 롱리(218cm, 120kg)에 비해 좀 더 잘 막고 공격도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 마치 슬램덩크에서 신현필을 수비하던 강백호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다만 룩 롱리는 기본적으로 수비가 좋은 센터가 '''절대 아니었다.''' Defensive win share가 offensive win share에 비해 높게 나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착각할 수 있는데, 롱리의 수비 윈셰어는 불스 3연패 시절 급격히 올랐다가 나머지 시즌에 급격히 떨어진다. 이 때 불스를 상대하던 빅맨들은 롱리의 수비보다는 론 하퍼-마이클 조던-스카티 피펜-데니스 로드맨의 지옥같은 헬프 수비에 애를 먹었다. 롱리의 수비적 성과는 수비 최강팀 불스의 일원이었기에 높은 수치를 기록한 것. 그나마도 엘리트급 센터들은 불스를 상대할 때 평상시보다 뛰어난 활약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롱리는 거대한 덩치로 인한 블록슛(그나마 경기당 1.5개를 넘긴 적이 없다.)과 강한 힘을 제외하면, 여전히 지역방어가 금지되는 상황에서 타 팀의 일류 센터와의 1대1 수비를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선수였다. 그나마 버티는 힘도 덩치에 비해 그리 센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너무 둔했다. 반대로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높은 BQ, 평균 이상의 중거리슛과 패스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덕분에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핵심인 빅맨으로써, 포스트업 능력이 매우 떨어짐에도 공격 공헌도가 적지 않은 수준. 농구에서 통계로 뽑는 2차스탯은 부정확한 경우가 많으며 신빙성에도 의문부호가 붙는 편이다. 이는 농구가 "기록되지 않는 공헌도"가 굉장히 많은 스포츠기 때문.
시카고에서 뛰던 시기, 파이널에서 만난 상대팀인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유타 재즈는 숀 켐프와 칼 말론이라는 걸출한 파워포워드들이 팀의 핵심이던 팀이었는데 이 팀들을 세번이나 꺾을 수 있었던데에는 로드맨의 공도 결코 적지 않다.
특히 마이클 조던이 시애틀 백코트에 막힌[38] 96년 파이널의 진짜 MVP라는 얘기도 들었다. 시리즈 내내 숀 켐프를 효과적으로 막았고, 2차전에서는 3점차로 쫓기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투를 성공시켜 게임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39]
한편 1차전에서 로드맨은 테크니컬 파울을 선언당했는데, 이 때 시애틀에서 로드맨을 자극시켜서 테크니컬 파울 1개를 더 끌어내어 퇴장시키기 위해 브릭코우스키라는 선수를 투입시켰다.
로드맨은 조금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브릭코우스키에게서 테크니컬 파울 2개와 플래그런트 파울을 끌어내 퇴장시켰다. 퇴장당하는 브릭코우스키 등 뒤에 대고 "Bang!" 하는 마무리까지.[40]
실제 로드맨은 심리전에서도 강한 선수였다고 평가 받는다. 로드맨과 상대해야 했던 레이커스의 제임스 워디는 회상하기를 "데니스는 내가 상대한 선수중에 최고의 운동신경을 가진 선수였다. 하지만 데니스가 더 무서웠던 이유는 사람들의 심리를 흐트러뜨리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한 일화로 로드맨이 자신의 엉덩이를 꼬집는 바람에 "얘 대체 뭐하는 애야?"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정신을 흩트려놨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걸 들은 로드맨이 "다 릭 마혼한테 배운거다"라고 받아치는 것이 일품.
기록 측면에서는 92년부터 98년까지 7년 연속 NBA 리바운드 1위를 기록했고 커리어 하이는 92년의 평균 18.7개. 90년, 91년 DPOY(Defensive Player Of the Year, 올해의 수비 선수상)를 차지하였으며, 89년부터 96년까지 10년 연속 NBA All-Defensive Team에 뽑힌 바 있다(1st 7회, 2nd 1회, 3rd 2회).
윌트 체임벌린이나 빌 러셀이 시즌 평균 리바운드 20개를 밥먹듯이 했기 때문에 로드맨의 리바운드 능력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될 수도 있지만, 60-70년대 NBA는 오늘날과는 룰이나 코트 규격 등이 판이하게 달라서 당시의 스탯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늘날의 룰과 코트 규격이 보편화된 7-80년대 이후 뛴 선수들 중에 한 시즌 평균 리바운드 18개를 넘게 한 선수는 로드맨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의 신체조건은 포스트업 플레이어로서는 기준미달에 가깝다. 특히 득점이 아닌 수비와 리바운드로서는 더욱더 그러하다.[41]
경기 중 깽판을 자주 치고 테크니컬 파울을 밥먹듯이 받을 듯한 이미지이나, 오히려 상대방을 자극하여 스스로 플레이를 망치게 하는 스타일이다.96년 파이널에서 켐프가 덩크 후 바로 내려오지 않고 로드맨에게 다리를 걸쳐서 일부러 약을 올리는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오히려 켐프의 등을 살짝 두들겨 주는 대인배스런 모습을 보일 정도. 이 선수가 얼마나 팀을 생각하고 승리를 열망하는지 알 수 있다. 괴팍한 행동들은, 당시 우승권팀 피스톤즈를 떠나 경쟁력 있게 살아남기 위해서 외형적으로 과도한 염색과 문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력이야 이미 유명했고 본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어느정도 의도된 쇼맨쉽이라고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행동들이다.
다만 로드맨이 빌 레임비어처럼 여우같이 상대만 잔뜩 약올리고 자기 자신은 적정선만 지켜서 퇴장을 피하는 스타일이란 건 96년 파이널에서 프랭크 브리카우스키나 98년 플레이오프에서 블라디 디박을 약올리는 이미지가 강해 생긴 오해다. 로드맨 역시 자주 테크니컬 파울을 받고 감정조절을 못해 싸우다가 경기를 망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위에 언급된 96파이널에서도 장난을 치다가 테크니컬 파울을 받은 뒤 갑자기 빡쳐서 심판에게 대들다가 추가 테크니컬을 받고 퇴장당한 적이 있다. 97년에 애틀란타 호크스를 상대로 한 동부 준결승 2차전 홈경기에서 불스가 패했을때, 당시 로드맨은 플레이오프 첫 5경기에서 벌써 총 7개의 테크니컬을 받은 것에 빡친 스카티 피펜이 공개적으로 비난을 하기도 했다.[42]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와 정규시즌 경기에서 혈전 끝에 막판 리드를 잡은 상태에서 수비 리바운드를 잡는 훌륭한 플레이를 해놓고 제롬 커시가 공을 거칠게 뺏으려고 하자 흥분해 커시에게 욕을 하며 싸우러 달려드는 걸 조던과 피펜이 거의 태클을 하다시피 과격하게 막은 장면도 유명하다. 실제로 로드맨은 통산 테크니컬 파울 212개로 역대 순위 5위이고, 4.3경기에 하나씩 한 수준. 위에 언급된 레임비어는 통산 121개에 8.8경기에 하나씩 한 수준이라 훨씬 빈도수가 적다. 퇴장만 하더라도 레임비어는 연속 685경기를 징계없이 뛸 정도라 징계결장이 꽤 되던 로드맨과 다르다.
포인트는 로드맨이 위대한 선수긴 하지만 감정조절을 잘하거나, 기존에 쓰인 것처럼 "플레이오프만 되면 절대 싸우지도 않고 퇴장도 안 당하던"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 오히려 찰스 바클리처럼 감정표현이 격렬하고 항의도 꽤 하던 선수였다. 위에 언급된대로 심리전이 강한 선수긴 하지만, 성격 자체가 예민하고 섬세하다보니 욱할 때도 많았다. 굳이 따지면 레임비어와 바클리와 중간에 가까웠는데, 레임비어는 실제로 심리전을 걸어놓고 상대를 대놓고 때리기보단 맞는 스타일이었는데(물론 심판 몰래는 엄청 때렸다), 로드맨은 심리전이나 쇼맨쉽용 도발에도 능하긴 하지만 성격이 불같다보니 대놓고 싸울때도 종종 있었다.
4. 전술적 가치
레전드로서 로드맨의 평균 이하의 낮은 득점력을 가지고 로드맨의 가치를 폄하하는 일부 의견이 있지만, 로드맨이 지닌 리바운더로서의 능력과 수비력은 부족한 득점력을 메꾸고도 남았다.
사실 조던이 첫 번째 은퇴에서 복귀한 후에 시카고 불스가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로드맨의 강력한 인사이드 플레이와 수비력 덕분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91~93년까지 첫 번째 파이널 3연패를 했던 시카고 불스보다 95-98 당시의 불스를 역대 최강의 끝판왕으로 꼽는 이들도 있는데 이를 보더라도 로드맨의 전술적 가치는 농구팬들의 생각보다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43]
한 팀에 강력한 리바운더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공격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고 이는 전체적인 팀의 득점력을 엄청나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위대한 슈터라도 필드골 성공률이 60퍼센트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은 10번 던지면 4번은 실패하고 2번 던지면 1번은 실패한다는 소리이다. 이때 만약 그 팀에 로드맨 같은 강력한 리바운더가 있다면 4번 중 2번은 다시 공격 기회로 돌릴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팀 전체의 득점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사실 마이클 조던이 신체적 전성기인 30대 초·중반을 지나고서도 압도적인 득점력으로 리그를 학살할 수 있었던 것에는 로드맨의 역할도 컸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실제로 97-98시즌 시카고 불스의 시즌 리바운드수는 전체 2위(1위는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인 3681개였는데 이중에 로드맨이 잡은 리바운드는 무려 1201개로, 이는 다른 주전 4명(조던, 롱리, 하퍼, 피펜)이 잡은 리바운드 수를 모두 합친 것(1333개)과 거의 비슷할 정도다.[44][45]
로드맨의 전술적 가치는 리바운드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상기에 서술된 것처럼 80년대 후반부터 리그 정상급 수비로 이름을 떨치는 로드맨이 있었기 때문에 시카고 불스의 파이널 상대인 시애틀이나 유타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46] . 실제도 97년도 파이널 경기를 보면 로드맨의 악착같은 수비에 페이스가 흐트러지는 칼 말론을 볼 수 있다. 사실 아무리 강팀이라도 팀의 주 득점원이 2명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시카고만 하더라도 팀의 주 득점원은 조던이었고 조던이 막히는 날엔 시카고도 답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47] . 따라서 로드맨같이 수비 스페셜리스트가 존재한다면 상대팀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경기가 힘들어진다.[48]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사실 자신의 득점이나 어시스트 같은 눈에 잘 띄는 지표를 포기하고 수비에만 매달리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그러나 로드맨은 데뷔할 때부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리바운드와 수비를 특화하다 못해 그 방면만 갈고닦은 선수이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로드맨만큼 디펜스에서 매력적인 선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실제로 2015년 파이널의 경우, 무명에 가까운 매튜 델라베도바가 MVP 스테판 커리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면서 밀착 마크한 덕분에 전력이 불리하다고 평가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골든 스테이트를 상대로 한때 시리즈 전적 2승1패로 앞선 적이 있었다. 비록 전력의 차이, 그리고 델라베도바가 커리의 운동량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며 한계를 보이는 바람에 3연패를 당하고 우승을 내주고 말지만.
결국 시카고 불스 왕조의 건설에는 로드맨의 공도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한 경기에 리바운드를 15개씩 잡아내고 오펜스 리바운드를 5~6개 넘게 잡아내며 상대팀 인사이드를 초토화시키고 에이스의 득점력을 반 이하로 무력화시키는 선수는 지금에선 찾을 수도 없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80~90년대 NBA 팬들은 로드맨이라는 전무후무한 스타일의 선수를 볼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4.1. '시카고 왕조'에서의 로드맨
우선 불스에서의 첫시즌 만큼은 '전성기의 마지막 연장선' 정도로는 볼 수 있는 기량이었다.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리바운드왕을 차지했고, 출장경기수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충분히 올스타나 All-NBA 서드팀에 뽑힐 가능성도 있었다(64경기 출장). 리바운드 측면에서도 그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파울트러블로 많이 뛰지 못했던 1라운드를 제외하면 2라운드부터 전경기 두자리수 리바운드를 올려줬으며, 골밑이 강한 닉스 시리즈에서 15.6개, 올랜도전에서 15.8개, 시애틀 시리즈에서 14.7개를 기록했다. 공격리바운드 10개를 넘긴 경기만 세번(10개, 11개, 11개)이었으며 20+리바운드도 두번(20, 21개), 19개 경기도 세번 있었다. 또한 숀 켐프를 파이널 6경기 23득점 .553 야투로 제어하며 우승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 해의 파이널 MVP 투표만 보아도 숀켐프가 3표 로드맨이 2표로 숀켐프를 막아낸 로드맨의 공로를 인정받을 만 했다.
다만 첫시즌 이후의 불스 로드맨은 전성기 기량에서 '''상당히 내려온''' 편이었다. 로드맨하면 떠오르는게 최정상급의 수비력이지만, 그의 all-defense team 선정은 1995-96시즌이 마지막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세컨팀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즉, 불스 시절의 로드맨은 첫 우승 당시를 빼면 리그에서 아주 손꼽히는 수비수라 보기 어려웠다는 것.[49]
또한 리바운드 장악력 측면에서도 이전과 차이가 제법 나는데, 정규시즌에서 리바운드왕 3연패를 하긴 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96시즌에 13.7개를 기록한 이후 97플옵에선 '''8.4개''', 98플옵에선 11.9개에 그쳤으며, 97 및 98 플옵을 자세히 들어다보면 당시 그의 리바운드 장악력이 들쭉날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7년의 경우 특급 리바운더로 올라온 이후의 플옵 활약 중 가장 미진한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워싱턴을 맞아 1라운드에서 평균 9개를 기록했다.[50]
(2) 애틀랜타를 맞아 2라운드에서 평균 5개(...)를 기록했다.[51]
(3) 알론조 모닝과 PJ 브라운이 버티는 마이애미를 상대로는 그나마 35.2분동안 평균 12.4개를 잡아주며 제몫을 했다.
(4) 유타와의 파이널에선 7.7개를 기록하며, 매치업 상대이자 로드맨과 같은 블루워커가 아닌 '''에이스''' 말론에게 리바운드마저 밀렸다.
98플옵은 그나마 상황이 좀 낫다.
(1) 뉴저지를 상대로 1라운드에서 13.7개를 기록.[52]
(2) 샬럿 호네츠를 상대로 41.6분을 뛰며 17.6개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53]
(3) 그러나 인디애나를 상대론 비교적 아쉬운 9.9개로 하향.[54]
(4) 유타와의 재전에선 8.3개로 또다시 말론에게 밀렸다.
정리하자면 시카고 로드맨의 전술적 가치는 '''전성기 로드맨'''에 비해서는 꽤나 떨어진다는 것. 그러나 시카고 불스에 합류할 당시 로드맨은 이미 30대 중반에 접어들던 나이였고, 노장인 로드맨은 전성기에 비해 현저히 낮은 능력치와 공헌도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98플레이오프에선 노화가 눈에 띄게 보이는 로드맨, 등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피펜 때문에 조던이 거의 하드캐리를 해야했다. 위의 서술은 시카고 불스 왕조에 있어 로드맨이 큰 공헌을 했다는 걸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전성기 로드맨을 기준으로 삼아 불스시절 로드맨의 공헌도를 재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는 걸 지적하는 것이다. 불스 시절 로드맨은 1급 수비수였지만 리그 최고의 수비수는 아니었고, 이때 로드맨을 상대로 한 에이스는 득점 반토막은 커녕 거의 자기 몫을 해줬다.[55][56] 정규시즌에는 극강이었던 리바운드 능력 역시 플옵에서는 기복이 심했던 만큼 더더욱 디트&샌안시절의 로드맨과 동격으로 두기 어려운 것.
또한 디트 로드맨과 불스 로드맨은 스타일 측면에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원래 로드맨은 20분대의 출장시간에도 10개 가까운 리바운드를 잡을 정도로 리바운드가 강한 선수였지만, 아예 파워포워드로 정착하면서 연속으로 평균 18개라는 상식 밖의 수치를 잡아내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행동반경이 골밑으로 제한되었기에 이전처럼 상대 에이스를 봉쇄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골밑수비수 역할을 주로 맡는다. 게다가 키가 작았고, 나이가 들면서 운동능력이 떨어진 것 때문에 골밑 수비력이 훌륭하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훌륭한 수비수긴 했지만 97, 98 시즌에는 전성기에는 확연히 못미치기는 했다는 것.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로드맨의 플레이스타일과 전술적 가치는 디트로이트 시절과 스퍼스 시절, 시카고 시절을 따로 볼 필요가 있다.
1.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경우, 그는 리그 최강의 에이스 스토퍼였으며 역대 최강의 수비수 중 하나였다. 또한 출장시간 대비 뛰어난 리바운더였다.
2. 90시즌 초반부터 팀은 원래 주전 SF인 에이드리언 댄틀리를 트레이드하고, 종합적으로는 댄틀리보다 못한 선수였지만 수비와 리바운드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로드맨을 주전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센터-파워포워드 주전은 빌 레임비어-제임스 에드워즈로 로드맨은 주로 SF로 출장했으며, 3번 자리에서도 12개 가량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팀을 떠나고 레임비어가 노화하면서 로드맨은 골밑에서 더 큰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이떄부터 주로 파워포워드로 출장하며 두 시즌 연속 경기당 '''18개'''의 리바운드를 잡기 시작한다. → 흔히 말하는 로드맨의 최전성기는 이때였다. 수비력 자체는 약간 더 기동력이 좋고 젊었던 1번 시기가 조금 더 앞섰지만 기존의 기동력과 수비력이 크게 저하되지 않으면서 여전히 수비왕에 준하는 수비력을 뽐냈으며 리바운드는 단연 리그 최강이었다.
3. 스퍼스 시기는 망아지같던 로드맨이 운동량이 점점 줄어들던 시기이다. 로드맨은 여전히 리그에서 가장 왕성히 움직이는 선수 중 하나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발도 조금 늦어지고 체력도 예전만큼은 아니게 되면서 활동반경이 골밑 위주로 좁아졌다. 그러나 All-NBA 서드팀에 선정되었을 정도의 저력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하다.
4. 시카고 시절 로드맨은 완연히 행동반경이 골밑이 되었다. 이 시기 그의 수비력은 여전히 준수했지만, 운동능력의 저하로 이전만큼 외곽까지 수비커버를 나가는 빈도수가 줄고 압박 능력이 예전에 비해 떨어졌다.[57] 물론 찰거머리 수비와 교묘한 플레이로 상대의 신경을 긁는 건 도가 텄고, 빈약한 시카고 골밑에서 보드장악력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선수였기에 공헌도 자체는 확실한 선수였다.
4.1.1. '불스 로드맨'에 대한 보강
http://www.chicagotribune.com/news/ct-xpm-1997-06-10-9706100072-story.html 96-97시즌 당시 시카고 지역의 가장 유명하고 주요 신문인 시카고 트리뷴, 그것도 조던과 불스에 대해 최고 전문가 중 하나로 인정받는 샘 스미스가 쓴 기사인데, "NBA 파이널이건 아니건, 로드맨을 버릴 때가 왔다"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때 스미스는 파이널 4차전까지 로드맨이 필드골 성공률 38.2%, 8.4리바운드에 그치면서 당시 NBA기록이던 17개의 테크니컬 파울을 적립했고, 재즈를 상대로 고작 7개의 리바운드와 야투성공률 27%에 그쳤음에도 불스가 그 없이 승승장구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4차전 직후에 라스베가스에 갔다왔으며 월요일의 미디어 세션 이후 다시 갈 예정이라면서 경기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 (유타 주민들 대다수가 믿는) 모르몬교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지적했다. 심지어 로드맨은 4차전 1쿼터 당시 택도 없는 슛 네개를 쏴서 다 놓치는 과정에서 필 잭슨이 타임아웃 도중 "슛 좀 그만 쏘라"고 하자 바로 라커룸으로 직행해 2쿼터까지 돌아오지 않는 항명 행위까지 했다.[58][59]
물론 이와같은 부진에는 이유가 있었다. 1996-97 시즌 막판에 로드맨은 무릎부상을 당해 마지막 13경기를 결장했다. 워싱턴 시리즈와 호크스 시리즈에서 극악의 부진은 이 여파도 있었을 것이며, 실제로 매치업 상대 레이트너는 "토니도 부상이 있고, 데니스도 약간 다쳤다"면서 자신감을 표했을 정도. 하지만 실제로 그는 호크스 시리즈에서 출장시간 관리를 많이 받았으며(대승한 3차전에선 파울트러블도 없었는데 7분밖에 안 뛰었다.) 마이애미 시리즈를 기점으로 제 컨디션에 가깝게 돌아왔다. 게다가 97, 98파이널에 연속으로 말론에게 압도당한 것은 그냥 실력이다. 물론 말론은 로드맨보다 두살이나 어리고 훨씬 더 좋은 선수니 압도당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유일한 장점인 리바운드에서조차 밀리는게 문제인 것. 종합하자면 당시 노장이던 로드맨은 운동능력 저하, 피지컬의 한계,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실력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이 때문에 마지막 두 시즌에서 그는 전성기는 물론이고 1995-96시즌과 비교해도 눈에 띌 정도로 기량이 떨어졌다.
거듭 얘기하지만 말년의 로드맨 한정이다. 물론 만 34~37세의 포워드가 실력 떨어지는 건 전혀 이상한게 아니다. 당연하지만 위의 서술은 로드맨의 전술적 가치에 대해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는 거지 레전드였던 그의 가치를 폄훼하자는게 아니다. 이 당시 만 36~37세였던 로드맨이 전성기에 비해 기량이 떨어졌다고 해도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농구선수로서는 할아버지에 가까운 나이에도 리그 최강의 리바운더이자 좋은 수비수로 활약한 로드맨이 얼마나 훌륭한 선수였는지 보여준다.
불스 로드맨이 이전에는 탑급 블루워커에 대한 로망으로 과대평가를 다소 받았다면, 그 반대급부로 되려 지나치게 퇴물 취급을 하며 과소평가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만약 로드맨이 "리바운드 수치만 높을 뿐 과거의 이름값만 높은 퇴물"이라고 하면 과소평가겠지만, 로드맨은 위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리그최강급 리바운더이자 (리그 탑급은 아니라도) 좋은 수비수였다.
불스 시절 로드맨의 실력을 종합하면 정규시즌에는 올스타급엔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의 활약, 플레이오프에서는 96시즌을 제외하곤 이보다 못한 활약을 보였다.
객관적인 지표라고 할 수 있는 Award Voting을 살펴볼 경우 첫 시즌인 96은 아슬아슬하게 서드팀에 못들었을 정도로 All-NBA Team에 가까운 레벨이었고, 세번째 시즌인 98 역시 올 NBA서드팀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즉, 객관적으로 불스 시절 로드맨은 올NBA서드팀이나 올스타 바로 밑 레벨의 선수라고 볼 수 있다.
5. 말말말
'''내가 막는 상대가 에이즈에 걸렸던 말던 상관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그를 내던져버릴 것이다.'''
6. 기행
기행으로도 굉장히 유명했다.
일단 머리카락을 가만 놔두지를 않았고 계속 희한한 빛깔이나 문양으로 염색을 하기도.[60] 어느 정도였냐면 현역시절에 시카고에는 큰 건물 벽면에 로드맨의 사진을 붙이고 머리카락 모양의 구조물을 단 다음, '''그날 로드맨의 헤어스타일에 맞춰 바꾼다'''라고 했는데, 거의 매일 바꾸는 색깔을 보려고 교통정체가 일어나서 시에서 폐기하게끔 했다고...
또 마돈나와 염문을 뿌리거나,[61] 장 클로드 반담과 영화에 출연하는가 하면[62] , 헐크 호건과 팀을 짜 WCW 배쉬 앳 더 비치(1997)에 출전하는 등 많은 기행을 벌였다. 그래서 기행에 비례해서 팬과 안티팬이 비슷하게 존재하기도.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젊은 시절 첫번째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 충격으로 이렇게 됐다는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문신도 없고, 머리염색도 하지 않은 그야말로 깨끗한 몸(??)이었는데, 은사인 척 데일리의 사임으로 변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로드맨은 다큐멘터리 "Bad Boys"에서 회상하며 "배드 보이즈의 몰락을 보면서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모든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난 반항적이 되었다"라고 회상을 하였다. 실제 배드 보이즈 영상을 보면 로드맨 만큼 천진난만하고 순진해 보이는 선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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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 증거사진.
기행이 여러가지 있는데, 샌안토니오 시절 경기 도중에 없어져버린 일도 있었다(...).
1996년에 토크쇼 출연해 '나 내일 결혼함 ㅇㅇ'이라고 떡밥을 던져 언론과 팬들을 흥분케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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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가서 보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본인이 떡 하니 있었다.'''(...) 알고보니 자신의 자서전 홍보를 위한 낚시였던 것. 웨딩드레스 복장 덕분에 그는 한 패션잡지가 선정한 '가장 옷 못입는 '''여성''''에 뽑히기도 했다(...).
장 클로드 반담과 함께 출연한 영화 《더블팀》 출연 이유가 걸작인데, 카지노에서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카더라(...).[63] 그리고 영화 《사이먼 세즈》에도 출연, 두 영화 다 Nostalgia Critic한테 잘근잘근 씹혔다(...). 연기 실력을 논하기 전에 스토리부터 개판...까지는 아니고 그냥 시간 죽이기용 양산형 액션영화인지라...
그래도 딸을 위해 불스와 연봉계약을 맺을 때 '''혹시 자기가 파산할 경우를 대비해서 10년 후에 일정부분을 분할해서 받는다'''는 계약을 맺는 등 나름대로 개념인. 팀메이트였던 피펜이 비행기 사업으로 재산을 홀랑 말아먹은 걸 생각한다면 정말이지 현명한 선택.[64]
별명은 '벌레(Worm)'. 어렸을 때 핀볼을 할 때 지렁이처럼 꿈틀댔대서 붙은 별명. 나중에 상대와 같은 편 동시에 환장하게 하는 플레이를 생각하면 나름대로 어울리는 별명?
성우 경력도 있는데, Dead or Alive 익스트림 비치발리볼에서 잭의 성우를 맡기도 했다. 출연 자체는 오프닝이랑 엔딩 뿐이지만.
마카오에서 열린 '미국 프로농구(NBA) 레전드 아시아 투어 2011'에서도 얼굴에 독특한 분장을 하고 나와서 여전한 끼를 발산했다. 50살 영감님의 재롱
1997년, 2003년, 2018년에 음주운전에 걸렸으며, 그때마다 알콜 중독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혼 3개월만에 이혼한 첫 번째 부인인 애니 베이크스가 우리 나라에 '전당포 사나이'로 알려진 Pawn Stars에 출연해서 미국에 작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때 그녀가 내놓은 물건이 로드맨이 불스와 피스톤스 시절 입었던 저지였고 피스톤스 시절 입었던 저지에는 그의 사인이 적혀있었다. 그녀는 딸의 수업료 부족을 이유로 전당포를 찾아왔는데 로드맨과 그녀 사이의 딸은 이미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상태여서 다른 사람과의 자식을 위한 수업료인 것으로 추측된다.[65] 더군다나 출연 당시 그녀의 손목에 명품 시계가 차여져 있어 정말 딸 수업료를 위한 것이 맞냐는 논란도 있었다. 거기에 '세상에 날 행복하게 만드는 건 딸뿐이다.'라고 했던 로드맨이 친딸의 교육비용을 안 내줬을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단, 로드맨은 2010년대부터 거액의 빚에 시달려 왔으며 이로 인해 실제로 돈을 못 줬을 수도 있다.
두 번째 부인은 카르멘 일렉트라와는 결혼 9일만에 결혼 당시 불안정한 정신 상태였다며 혼인무효소송을 하기도 하였으며, 카르멘 일렉트라 또한 당시 가족을 잃고 정신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며 그와의 결혼을 후회하기도 했다.
마지막 부인인 미셸은 술집에서 만났다고 하며, 역시 이혼 후 보험 사기와 연루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약혼자, 부인, 그냥 여성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러 숱한 구설수에 올랐으니, 알론조 모닝의 젖꼭지를 깨문 일이나 카메라맨을 발로 걷어찬 일은 애교 수준으로 보일 정도다.
2012년에는 명품 매장에 들러 '파산한 거 아니냐'라는 직원의 질문에 발끈하여 매장에서 현금을 뿌려댔는데 위에 언급했다시피 로드맨은 2010년대부터 빚에 시달리며 자녀 양육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2018년에는 NBA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핫클립들마다 내용이 없는 빈 댓글[66] 을 달면서 어그로를 끌고 있다...가 2019년 2월부터는 빈 댓글 대신 'I'm. Leaving. Instagram. Soon.'이라는 댓글을 달며 계속 어그로를 끌고 있다(...).
희한한 일인데, 데니스 로드맨이 거쳐간 팀은 우승을 하게 된다. 그가 속해 있던 시절에 한 적도 있지만 그가 잠시 거쳐간 팀들도 훗날 꼭 우승을 했는데 한팀 한팀이 굉장히 임팩트가 강하고 명예롭다[67] .
6.1. 친북 행위
미국인답지 않게 적극적인 친북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여론에게도 골칫덩이로 취급받는 중이다. 이러한 로드맨의 친북 행위는 그의 수많은 기행들 중에서도 '''끝판왕'''으로 취급받았다. 방북 이슈가 없었다면 한국에서는 그저 농구팬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기억될 법했으나, 로드맨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농구에 별 관심 없는 일반인에게도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한국 시각으로 2013년 2월 26일,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미국의 묘기 농구단인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선수들과 함께 왔는데 농구 클리닉을 위해 방북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데니스 로드맨의 팬이여서 그를 초청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농구광으로 유명한 김정은이 데니스 로드맨의 광팬이다. 그래서 데니스 로드맨의 방북은 북한 강석주 내각 부총리가 계획했다고 한다. 방북 이후 북한 측의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로드맨이 밝히길 자신이 첫번째 초대선수가 아니라 2013년에 김정은이 마이클 조던에게 오라고 초대했지만 조던은 거절했고 자신은 Yes라고 대답하여 간것이라고 밝혔다. 기사
북한 측도 로드맨과 김정은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장면을 지속적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그래서 로드맨은 '인간 김정은'에게 감화되었는지 귀국 후 "김정은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다"며, "'''김정은은 독재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Good Man)'''"이라고 주장하고 돌아다니고 있다.
사실 로드맨의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와 이로 인한 어린애같은 성격, 한 번 믿음을 주기 시작한 상대는 끝없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그의 성향을 보면 이런 태도는 당연하다. 로드맨 본인이 국제 정세에 그리 밝은 편이 아니라 북한정권의 해악에 대해 잘 모를 가능성이 높은데, 어딜가나 또라이 취급받는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정은 본인이 NBA광팬인데다 시카고 불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로드맨에게 더욱 호의적으로 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로드맨의 그간 행보는 전혀 계산적이지 않고 자기가 싫어하는 대상(ex:밥힐 감독, 데이빗 로빈슨)은 무조건 까고, 자기가 인정한 대상(필 잭슨, 척 데일리, 마이클 조던 등)은 무조건적으로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로드맨은 LA레이커스 입단 인터뷰 당시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거나, 명예의 헌액 당시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 연설을 하다가 감정에 북받혀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할 만큼[68] 감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로드맨이 "친구"로 받아들인 김정은이라면, 아무리 김정은이 쓰레기라도 그걸 생각하기보다는 덮어놓고 옹호를 할 것이 명확했다.
한번은 호텔에서도 김정은을 찬양하는 목소리를 높이다가 호텔바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물론 쫓겨난 것은 김정은을 찬양해서가 아니고 그냥 단지 시끄러워서. 여하튼 원래도 각종 기행 때문에 로드맨을 향한 언론이 그렇게 좋다고 보긴 힘든 상황이였으나, 김정은 찬양질(...)을 시작한 이후로는 더더욱 로드맨을 향한 언론의 태도가 냉소적으로 변했다.
게다가 2013년 4월 북한이 북한에서 반북 운동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북한 관광사에서 일하던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배준호)[69] 를 구금한 뒤 15년의 노동형을 선고했는데, 로드맨은 트위터를 통해 버락 오바마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나서면서 '친구' 김정은에게 자신을 돕는 셈 치고 그를 석방하라는 트윗을 날려서 언론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2013년 9월에 북한을 또 방문했다. 이번에는 친구인 김정은을 만나러 간 것이며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케네스 배 석방 문제를 협의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정계에서는 심각하게 불편한 기색인데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의 방북이 좌절된 이래 민간인인 로드맨이 북한을 가서 김정은을 만나면 사적으로라도 배의 이야기를 꺼낼 가능성이 높고, 북한이 이를 수락해 배를 석방한다면 외교적 웃음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로드맨이 방문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미 정치권의 우려와는 달리 케네스 배가 석방되지는 않았다. 자신이 김정은과 리설주의 딸인 김주애를 안아보았다고 한다. 로드맨은 자신은 북한 사람과 미국 사람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10월 17일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김정은에게서 초대받았을 당시 경험을 말하면서 "김정은은 세계의 어느 갑부들도 놀랄 만큼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증언은 로드맨의 의도와는 반대로 "아, 그래? 역시 김정은은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면서 핵개발과 사치에만 열을 올리 놈이었군!!"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강화시킬 소지가 더 크다.
2013년 12월 19일 북한을 3번째로 방문했다. 장성택이 숙청된 이후 첫 방문이라 누가 누굴 숙청하느니 하며 인터넷상에 드립이 넘쳐나고, 3번째 방문이면 "정말 북한에 뭔가 좋은 거라도 있나보다"[70] 라는 드립이 나왔다. [71]
2014년 김정은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다시 농구팀과 방문했다.
현재 미국인 중에선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인 CIA, NSA 등을 제치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며 유일하게 북한의 통수권자인 김정은을 4번이나 만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미 행정부는 현재 미국에서 로드맨보다 못한 정보기관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미 행정부는 로드맨의 앞으로 예정된 북한행에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적으로 감시 및 제재를 할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이유는 HBO가 로드맨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을 방문한 NBA 농구스타라는 이슈만으로도 엄청난 시청률을 예고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첫 번째 방북 분량은 이미 지난 6월에 방영되었다.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끌기는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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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엔 친선 농구경기를 하기 위한 방북 후 CNN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인 ''New Day''에 출연했다가 김정은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며 포로인 케네스 배 씨에게 잘못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욕설을 퍼붓는 등 앵커와 설전을 벌였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그간의 비판이 본인은 상당히 억울(?)했던지 "나의 방북은 세계를 위한 위대한 생각인데 사람들은 항상 내가 하는 것을 무시한다. 마이클 조던과 르브론 제임스 같은 이들도 세계를 위해 멋진 일을 하는데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며 징징거렸다(…). 문제의 CNN 인터뷰 영상 아무튼 이때 말한 김정은이 오바마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고 하는 말은 북미회담이 오고 재평가를 받는 중[72] (...).
앵커가 케네스 배의 석방에 대해 말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자 로드맨은 화를 내고 욕설을 섞어가며 "케네스 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73] 마이크 뒤에 숨어 있는 당신과 달리 우리야말로 평양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라고 밝혔고 더불어 김정은에 대해 로드맨은 '''"그는 나의 친구이며, 나는 그를 사랑한다(I love my friend)"'''고 밝혔고, 마침내 앵커 역시 빡돌아서 "지금 고모부를 죽이고 미국인을 인질로 삼은 패륜아를 사랑한다는 거냐?"며 화를 내어 양측간에 고성이 오갔다.
결국 같이 딸려간 선수 찰스 스미스가 이 정도로 세계 여론이 우릴 비판할 줄은 몰랐다고 하며, 자신들은 평화를 바랄 뿐이고 로드맨이 김정은을 친구라 부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며 쉴드를 시도해봤지만, 로드맨이 말을 자르고 끼어들어서는 "앵커 당신은 지금 마이크 뒤에 앉아있지만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 직접 북한에 왔고, 언젠가는 우리 덕분에 북한의 문이 열릴 것"이라며 근자감을 표출하여 폭풍 욕설 세례를 당하는 중이다. 이후 로드맨은 이 건에 대해 자신이 술에 취해 있었다며 사과했다.
2014년 1월 8일에는 김정은의 앞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국내 네티즌들에게는 폭풍으로 까이고 있다.
여러모로 장성택 처형 사건 이후 김정은에 대해 악화된 국제 여론덕분에 로드맨의 방북 기행 역시 더더욱 안좋은 평판을 얻고 있음은 분명하다. 정작 본인은 장성택 처형건과 자신과 김정은의 친분은 무관하며 관심없다는 반응(…). 미국의 모 하원의원은 로드맨을 일컫어 "히틀러와 점심식사 같이할 양반"이라고 비판했고,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로도 출마했던 거물급 상원의원 존 매케인도 로드맨을 '백치'(idiot)라고 부르며 비판에 합세했다.
한편 로드맨의 방북을 지원하던 도박업체가 인권단체들의 압박에 지원을 끊겠다고 하며, 앞으로 로드맨 일행의 방북 비용은 북한이 부담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폭풍같이 까이고는 방북을 중단한다며 눈물까지 흘리며 밝혔다.
그런데 2014년 5월 5일, 한 패션문화잡지에서 지난 1월 방북 때 장성택을 봤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한 글이 실렸다. 그러나 장성택의 숙청은 일개 언론이나 정부 기관의 카더라 수준이 아닌, 아예 북한 정부 자체가 숙청을 대놓고 공표하는 상황인지라 데니스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북한에서 장성택의 목숨만 붙여놓고 어딘가에 감금했을 가능성은 아주 작게나마 있을 수 있지만, 이 가정으로도 로드맨이 멀쩡한 장성택을 보았을 리는 없다. 로드맨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게 아니라면 단순히 장성택과 외모나 이름이 조금 비슷한 인사를 착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11월 8일 케네스 배가 석방됐다. 데니스 로드맨은 자신이 선처를 호소해 석방됐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이런 로드맨의 방북이 모티브가 되어 디 인터뷰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토크쇼 진행자가 김정은을 암살한다는 내용인데 영화 중간에 농구하는 장면만 봐도 누구를 모티브로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예기치 않는 엄청난 폭풍을 몰고온다. 자세한건 디 인터뷰 문서 참조.
2017년 6월 13일 5번째 방북한다고 미 CNN이 북한 내 복수의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기사 이번 2017년 6월에 북한을 방문하는 것에 대한 인터뷰에서 북한의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말을 하였으며, 이 시점에 맞추어서 북한에 수감된 오토 웜비어가 석방되었다. 오토 웜비어는 혼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석방이 된 것으로 북한에서는 발표하였다. 또한 이 때쯤에 도널드 트럼프의 저서 중 하나인 협상의 기술을 건네주었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로드맨의 기행은 북한 내에서도 충격을 주고 있다고 한다.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의 유니폼을 선물해 김정은이 이를 들고 흔들며 자랑하는 모습이나, "베스트 프렌드"인 김정은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거나 맞담배를 피는 모습이 김정은을 신적 존재로 믿게 교육하는 북한 사회에서는 낯선 풍경이라고.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이 다가오자, 로드맨도 트위터로 싱가포르로 가서 가능한한 모든 지원을 하겠단 트윗을 남겼다. 그리고 회담 당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정부가 자신의 요청을 묵살하고 오히려 자신을 24시간을 감시했다는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데니스 로드맨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는 TV 조선에서 데니스 로드맨의 평양 방문기라는 방송을 번역하여, 2017년 6월 18일 방영하였으며, 북한의 실상과 데니스 로드맨의 방북에 대한 여러가지 뒷이야기를 방영하였다.
6.1.1. 북미정상회담 관련 인터뷰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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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이루어짐에 따라 회담 이후 데니스 로드맨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로드맨은 김정은에 대한 얘기와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날 것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비웃었다고 말하며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렸다. 이에 CNN 크리스 쿠오모 앵커는 매우 당황한 모습을 보였고,[74] 로드맨은 북미정상회담이 잘 성사되어서 매우 기쁘다고 얘기하며 오바마한테도 이야기했지만 무시당했다라고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싱가포르에 직접 가기는 하였지만, 김정은을 만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상황상 다시 방북의 가능성은 있다.
7. 정치 성향
도널드 트럼프의 팬이며 그의 몇 안되는 흑인 지지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75] 트윗으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고 찬양하는 트윗을 여러번 날린 적이 있다. 실제로 트럼프와 친분이 있는 사이기도 하다. 상술했듯 실제로 로드맨이 김정은에게 트럼프의 책을 선물한 적 있다고 한다. 이는 북한에게 우호적이던 그의 행보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트럼프가 취임한 직후만 해도 이런 로드맨의 모습은 상당히 모순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2018년 이후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급속도로 북한과 접촉하는 모습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8.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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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녀석: NBA 이단아 데니스 로드맨 자서전 (Bad As I Wanna Be, 1996, 국내 정발:1997, 하늘출판사)[76]